던전 안의 살림꾼 145화
* * *
희나는 정보상 원덕삼에게 받은 던전의 특징을 상상으로 구현하며 던전으로 통하는 현관문을 열었다.
참고로 던전 바깥,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는 희나가 가본 곳만 현관문을 열 수 있었지만 던전은 예외였다.
구체적인 던전 이미지와 정보를 떠올리며 문을 열기만 하면 그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칠흑같이 새카만 동굴 벽이 눈에 들어왔다.
희원이 미끈한 바닥 질감에 질겁했다.
“윽! 축축해라.”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천장이 조금씩 뚫려 있어 희미하게나 빛이 새어 들어온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 발을 헛디뎌 뒤로 자빠졌을지도 모른……
콰당!
커다란 소리와 함께 희원의 외침이 쩌렁쩌렁 동굴 안에 울렸다.
“으악! 바둑이 내 새끼! 머리통 다 깨졌겠네!”
……그랬다.
일행을 따라 나온 바둑이가 방정맞게 동굴 안을 뛰어다니다 넘어지고 만 것이다.
덕분에 바둑이의 잎사귀 위에 앉아 있던 오색이에게도 덩달아 시련이 닥쳤다.
손바닥만 한 달팽이는 동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희나는 깜짝 놀라 오색이를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오색아! 괜찮아?”
「끄흐으억!」
오색이는 때 묻은 몸통을 몇 번 푸드덕거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형 사고!」
「ㅇㅏㅇㅣ고 내 등껍데기 유리 조각 산산조각~!」
「바둑이 과실 10, 본인 과실 0!」
「법의 엄중한 철퇴 필요!」
「보험 청구!」
「삐요삐요♨☏」
그 모습에 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평소처럼 시끄러운 걸 보니 멀쩡하구나.”
「떼흐윽!」
“그래, 그래.”
바둑이도 거나하게 넘어진 것치고는 잎사귀 하나 구겨진 것 없이 멀쩡했다.
“바둑아! 왜 바닥을 기어? 너는 뱀이 아니라 식물이야! 뿌리로 걸어야지!”
……아니, 아주 약간의 문제가 있었으나 상황은 금방 진정됐다.
어느새 오색이가 불평을 그치고 바둑이가 직립 보행을 할 무렵, 희나가 눈썹을 까딱였다.
“온통 바닥에 돌뿐인데, 씨앗을 심을 수나 있을까? 아니, 심더라도 싹이 트기라도 할까?”
“이거 참, 시작부터 쉽지가 않구먼.”
희원이 쯧쯧 혀를 차며 동굴 바닥을 탐색했다.
하지만 씨앗을 심을 만한 흙도,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정공법대로 간다!”
주먹을 불끈 쥔 희원은 어디선가 삽을 꼬나 들고 다가왔다.
“정답은 삽질이다!”
그러나 평범한 삽으로 돌로 된 동굴 바닥을 깎아 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오빠, 제정신이야? 진현 씨한테 맡겨!”
희나는 희원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흐아압!”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희원이 삽을 쿡 찔러 넣었다.
그리고…….
“어어?”
눈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광경에 희나는 입을 쩍 벌렸다.
“뭐야? 찰흙이야? 돌이 왜 삽에 파여?”
“……희원 형님에게 저런 스킬이 있었습니까?”
강진현도 놀란 듯 희원의 기행을 지켜보았다.
“어휴! 다 됐다!”
마침내 희원은 적당한 구덩이를 하나 만들고는 휴, 하고 이마를 닦았다.
그리고 멀뚱멀뚱 자신을 지켜보는 두 쌍의 눈을 확인하고는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이희나! 너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스킬 있는 줄 알았냐? 그런 스킬은 나도 있지롱!”
이건 희원의 농사꾼 고유 능력 중 ‘삽질’ 스킬이었다. 뭔가를 심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파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 돌바닥도 공간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곳일 테니까, 내 스킬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지.”
희원이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구덩이 안에 씨앗을 톡 떨어뜨렸다.
그 위로 파낸 흙…… 아니, 파낸 돌무더기를 차곡차곡 쌓으니 대충 뭔가를 심은 태가 났다.
“바둑아.”
그대로 희원이 손짓하자 바둑이가 씨앗 묻은 곳 주위를 빙빙 돌며 금빛 가루를 뿌렸다.
신비한 광경이 지나가길 한차례, 돌바닥 위에 무엇인가 삐죽 비집고 나왔다.
희나는 재빨리 그 위에 작은 마석 조각 하나를 올려 두었다.
두 번의 경험을 통해 나무가 완전히 힘을 얻기 위해서는 던전과 동급인 마석 조각이 필요하단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삐죽 나온 싹이 마석을 흡수하고 빛을 발했다.
파아앗!
붉은 섬광이 터져 나오고 희나가 감은 눈을 떴을 때는 돌무더기가 있던 자리에 두툼한 이끼가 풍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이끼도 나문가?”
순간적으로 나무와 식물의 정의에 대해 잠깐 의문을 품긴 했지만, 그건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동굴에서 자라는 움직이지 않는 초록색 생물이니까 비슷한 거라고 치자.’
희원도 별생각 없이 상황을 지나쳤다.
“이끼가 크고 폭신폭신하네. 아무튼 이제 나무 심었으니까, 이제 옆집 가야지.”
“그래. 다른 나무도 쌩쌩하게 키워야지.”
이 공간에 나무를 심었으니, 거울상 던전에도 비실비실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나 있을 게 분명했다.
「궈궈싱~」
오색이가 거울상 던전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고, 희나와 강진현은 새카만 구멍 안으로 지체 없이 뛰어들었다.
“웨엑! 우에에에엑! 이놈의 멀미!”
“으, 더러워! 헛구역질하려면 저기 가서 해!”
희나는 끄윽거리는 오빠를 저 멀리 밀쳐 냈다. 희원은 힘없이 떠밀려 커다란 종유석에 머리를 콩 부딪쳤다.
그리고 뭐가 그리 서러운지 떠나간 부모님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니, 아버지. 쟤가 저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컸습니다…….”
희나는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오빤 어째 멀미가 나아지질 않네. 아니, 더 심해지는 것 같은데.”
“우에에에엑! 이렇게, 속이, 뒤집히는데, 너는, 왜, 멀쩡하냐고!”
“오빠가 허약한 거 아닐까?”
“그럴, 리…… 우웁!”
희나나 강진현의 경우 두 번째부터 어지럼증에 적응해서 별 이상을 겪지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희원의 멀미는 유난한 편이었다.
“다음부터는 오빤 그냥 저쪽에 놔두고 올까 봐요.”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아니, 누구 맘대로 사람을 빼…… 웨엑!”
희원이 반발하기에 톡 쏘아붙였다.
“멀미하다 사람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해?”
잘 따져 보면 희원은 굳이 거울 던전까지 안 넘어와도 되는 사람이었다.
원래 세계에서 나무만 키워 주면 할 일은 끝이었다.
“나야 지도 스킬로 길잡이 역할로 오는 거라고 쳐도, 오빠는 아니잖아.”
“윽…….”
“거기다 나야 여차하면 쓸 만한 호신 스킬이라도 있지, 오빠는 그런 것도 없고.”
“으윽.”
틀린 말이 없었다.
전투계 각성자가 아닌 희원은 넘어와 봐야 별 도움이 안 됐다.
강진현도 지킬 사람이 두 명인 것보다 희나 한 명인 편이 훨씬 나으리라.
“그래. 다음부터는 둘이 다녀라.”
한숨과 함께 희원이 동굴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진짜 내 역할은 나무 심는 것까지인가 봐. 몸에서 힘이 쪽 빠져서 도무지 못 움직이겠다.”
죽겠다, 죽겠다 하던 게 엄살은 아니었나 보다. 희원의 낯이 창백했다.
“오빤 안전지대 안에 들어가서 누워 있어. 홈 스위트 홈에 들어가서 반휘랑 인사라도 나누든지.”
“알았어. 반휘 달팽이와 핏물 난무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으마.”
희나는 물에 젖은 걸레 조각처럼 너덜거리는 오빠를 안전지대 안에 집어넣고, 강진현과 함께 보스 몬스터를 찾아 나섰다.
삐애애애애애액!
“악! 징그러워! 그리고 시끄러워!”
희나는 강진현의 등에 업힌 채 SSS급 신문지를 신경질적으로 휘둘렀다.
부웅!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소형견만 한 박쥐 몬스터가 뻑!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하는군요. 특히 반사 신경이…….”
강진현이 희나의 흉포하기 그지없는 신문지 놀림에 감탄했다.
희나는 상대가 징그러울수록 큰 힘을 보였다.
‘거기다 그게 날아다니기까지 하면…….’
몬스터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해충 박멸’이라는 스킬명에 걸맞은 위력이었다.
“아, 진현 씨. 이제 곧 보스 몹 있는 장소에 도착할 것 같아요.”
희나가 손가락을 뻗어 동굴 한구석을 가리켰다.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아주 어둡고 깊숙한 장소였다.
후다닥 강진현의 등에서 내리자마자 삐이이, 하는 고주파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진동이 퍼져 나갔다.
이에 강진현이 재빨리 소리쳤다.
“귀마개 착용하십시오!”
“넵!”
희나는 재빨리 귀마개를 귓구멍 안에 쑤셔 넣었다.
어느새 보스 몬스터와 마주하는 것도 이번이 네 번째.
키는 성장기가 끝나면 거의 자라지 않지만, 간덩이는 경험에 따라 얼마든지 커질 수 있나 보다.
공기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도 어느새 제법 익숙해졌다.
‘엉엉 울면서 잠든 진현 씨 끌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던전 전문가가 다 됐어, 이희나.’
희나는 빙그레 웃으며 신문지를 꽉 쥐었다.
펑! 소리와 함께 보스 몬스터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어둠을 방패 삼아 침입자를 제거하려 했으나 강진현의 예민한 기감을 피해 내는 건 역부족이었던 탓이다.
끼리리리리릭!
끼이이이이!
보스 몬스터의 머리통이 곤죽이 되자마자 조무래기들이 고약한 소리와 함께 미쳐 날뛰었다.
동굴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새카만 박쥐 떼가 날아다니는 장면은 사뭇 살벌해 보일 법도 했으나, 희나에겐 아니었다.
“진현 씨! 얘네들은 제가 정리할게요!”
‘대청소’는 좁은 공간 안에 빽빽하게 모인 몬스터를 소탕하기에는 아주 적격인 스킬이었다.
“아! 개운하다!”
순식간에 동굴을 가득 메운 몬스터들을 정리한 희나는 챙겨 온 주먹밥을 우걱우걱 먹어 치웠다.
떨어진 컨디션을 ‘밥심’ 스킬로 채우기 위해서였다.
“숙련도가 빠르게 느는 게 보입니다. 더 깔끔해졌고, 체력 관리도 전보다 잘되는 듯합니다.”
강진현은 흐뭇한 눈길로 희나가 열정적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킬을 자주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하군요. 이 정도로 깔끔한 광역 스킬은 흔치 않습니다.”
“맞아요. 이거 진짜 좋은 스킬인 것 같아요. 정말 맘에 들어요!”
희나도 맞장구쳤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호기심에 집에서 대청소 스킬을 발동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