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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14화 (114/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14화

    “희나 씨.”

    잘생긴 얼굴이 불쑥, 들이 밀어졌다.

    “아이, 깜짝이야!”

    어느새 강진현이 지척에 접근해 있었다.

    희나는 깜짝 놀라 그만 손에 쥔 뚝배기를 강진현의 머리통 위에 내려칠 뻔했다.

    ‘큰일 날 뻔했네.’

    물론 한낱 뚝배기에 S급 헌터의 머리통이 박살 날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제법 위험한 순간이었다.

    “진현 씨! 요리하는 사람 깜짝 놀라게 하면 안 돼요! 주방엔 위험한 물건들이 많다고요.”

    희나는 제법 엄한 어투로 강진현을 타일렀다.

    “제 손에 칼이라도 들고 있었어 봐요, 놀라서 놓쳤으면 그대로 피 봤을지도 몰라요.”

    어쨌든 주방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강진현은 자기 몸은 S급이라 어지간한 무기에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핀트 나간 말을 늘어놓는 대신, 담백하게 사과했다.

    ‘의외네.’

    ……하지만 담백한 사과는 서론에 불과한 듯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희나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말씀대로 주방은 생각보다 위험한 곳 같아 보입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아무래도 방어구를 맞추어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요리를 자주 하시니 반지 형태는 조금 난감하겠고, 목걸이나 귀걸이 형태가 좋겠군요.”

    “그건 좀 과한 것 같은데요.”

    희나는 땀을 삐질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주방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방어 아이템을 맞춰야 한다고?’

    역시, 보통 사람은 하기 어려운 엄청난 사고방식이었다.

    이에 희나는 제법 익숙하게 말을 돌렸다.

    “아직 밥 되려면 몇 분 더 있어야 해요. 앉아 계시지…….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물 마시고 싶어요? 보리차 시원하게 끓여 둔 거 냉장고에 있는데.”

    “그리고…….”

    강진현은 말을 이으려다 말고, 물끄러미 희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희나는 한쪽 손으로 뚝배기를 들고 있었고, 나머지 한쪽 손으로는 콩나물을 무치고 있었다.

    그중 유독 콩나물을 무치고 있는 쪽 손을 집요하게 바라보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콩나물 먹기 싫어요?”

    평소에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어서 별생각 없이 무쳤는데, 오늘은 콩나물이 입에 당기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드시기 싫으면 말씀해 주세요. 다른 재료도 넣을 수 있으니까요.”

    희나의 곰살궂은 물음에 강진현이 웅얼거렸다.

    “……고 싶습니다.”

    평소 말 흐리는 법 없이 또박또박 말하던 그가 이렇게 자신 없이 이야기하다니, 이상했다.

    힐끗, 그의 안색을 살피니 평소보다 어두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네? 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어디 아프세요? 힐러 불러와야 하는 것 아니에요?”

    걱정스럽게 말을 붙이자 강진현의 귀 끝이 살풋 붉어졌다.

    “아닙니다. 어디 아픈 게 아닙니다.”

    “열도 좀 있는 것 같은데…….”

    희나는 열을 재기 위해 깨끗한 쪽 손을 들어 강진현의 이마를 짚으려 했으나, 강진현이 흠칫하며 반걸음 물러났으므로 헛손질할 수밖에 없었다.

    “앗.”

    올린 손을 머쓱하게 내리고 있는데, 강진현이 급히 변명했다.

    “저, 절대 싫어서 피한 게 아닙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찰나에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심지어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오늘 진현 씨가 정말 이상한데?’

    다녀왔다는 임무가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나 보다.

    희나가 ‘오늘 저녁은 약재를 잔뜩 넣은 삼계탕을 만들어 주어야겠다’라고 마음속으로 결심했을 무렵이었다.

    꾸역꾸역 변명을 이어 가던 강진현이 드디어 본론을 내비쳤다.

    “……그러니까 콩나물 맛을 보아도 되겠습니까?”

    “콩나물요?”

    “예.”

    “그거야 당연히 되지요. 안 될 리가요.”

    어처구니없으리만큼 별것 아닌 용건이었다. 희나는 허허 웃으며 젓가락을 찾았다.

    “어디 보자, 젓가락이 어디에 있더라……? 그나저나 정말 배가 많이 고프신가 봐요!”

    해맑게 젓가락을 건넸으나, 강진현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아니, 왠지 풀이 죽은 듯 보이기도 했다.

    그는 어쩐지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자신 없게 들리는 목소리에 희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무언가 자기가 잘못 짚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강진현이 입을 열었다.

    “희나 씨가 직접 먹여 주셨으면 해서…….”

    “예에? 먹여 달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요청에 입을 쩍 벌렸다.

    “……어렵겠습니까?”

    희나의 경악에 강진현의 고개가 안타깝게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마치 실연을 연기하는 잘생긴 남배우 같았다.

    그러니까 굉장히 안타깝고 뭐든 해 주고 싶은 모양새였다는 뜻이다.

    “아, 아뇨! 맛보기 정도야! 해 드릴 수 있고말고요!”

    희나는 허둥지둥 콩나물을 한 움큼 집어 강진현에게 내밀었다.

    그랬다가 손에 쥔 것의 양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닫고 콩나물을 다시 내려놓았다.

    “드, 드세요!”

    한입에 먹기에 좋을 만한 양으로 다시 집어 내밀자, 강진현의 입이 아 하고 열렸다.

    입술 사이로 희고 고른 치열이 보였다.

    “잘 먹겠습니다.”

    짤막한 감사 인사와 함께 강진현은 허리를 굽혀 희나의 손에 든 콩나물무침을 받아먹었다.

    “…….”

    “…….”

    아작아작, 콩나물 씹는 소리만 커다랗게 울렸다. 그 외엔 모두 조용했다.

    강진현은 콩나물무침을 씹느라 입을 열지 못했고, 희나는 그냥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이거…… 뭐야?’

    명치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낯선 감각이었다.

    심지어 강진현의 입술이 스친 손가락까지 불에 덴 듯 후끈거렸다.

    ‘방금 뭐였지? 뭐였지? 어? 뭐였어?’

    참기름 묻은 손을 앞치마에 비벼 닦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참이었다.

    칙, 칙, 치익!

    전기밥솥이 김을 치이이! 힘차게 뿜어내며 취사를 완료했음을 알렸다.

    - 취사 완료되었습니다. 맛있는 밥 드세요! 쿡구♬

    “아, 아차! 배, 고프실 테니니까, 밥, 마저 해 드릴게요!”

    희나는 헐레벌떡 뛰어가 밥솥 통을 통째로 꺼내 들고 왔다.

    강진현은 그대로 자리에 남아 희나가 무엇을 하는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빛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계속 거기 서 계실 거예요?”

    “희나 씨가 싫다면 자리에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희나 씨 요리하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아서…….”

    요리하는 희나를 보니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 남자를 쳐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뇨……. 계속 보셔도 돼요.”

    “고맙습니다.”

    희나는 멍한 상태로 손을 움직였다. 재료는 준비되었고, 방법은 알고 있으니 실수할 일은 없었다.

    커다란 뚝배기에 참기름을 쓱쓱 발랐다. 뚝배기 바닥에 밥이 눌어붙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엔 막 해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밥을 채워 넣고, 그 위로는 미리 해 둔 색색의 고명을 소담하게 담았다.

    당근, 애호박, 콩나물, 시금치, 고추장 등……. 일전에 해 둔 무생채 반찬까지 올리니 재료가 제법 두둑했다.

    희나는 뚝배기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뜨끈하게 데웠다. 자글자글 밥 눋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사이 달걀 프라이도 두 개 후딱 부쳐 올렸다. 대식가인 강진현을 위한 특별 서비스였다.

    강진현은 희나가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일이 끝날 때쯤 입을 열었다.

    “뚝배기가 뜨겁고 무거우니 제가 들어 옮기겠습니다.”

    희나는 기꺼이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 네! 그러면 감사하죠! 여기, 장갑 끼…… 으아악! 손 뜨거워요!”

    뜨겁기 그지없는 뚝배기를 맨손으로 번쩍 드는 강진현의 모습에 희나는 기겁을 했다.

    하지만 강진현은 미지근한 물 잔을 들어 옮기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화염 저항이 있어서 이 정도 온도에는 상처 입지 않습니다.”

    “그래도 뜨거울 것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뜨끈한 정도입니다.”

    하지만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는 뚝배기는 아주 위협적으로 보였다.

    “제가 보기엔 너무 뜨거워 보이니까! 빨리! 식탁 위에 내려놓으세욧!”

    희나는 식탁 위에 냄비 받침대를 거의 던지듯 올려놓았다.

    강진현은 그 위에 뚝배기를 놓았다.

    “손 정말 괜찮은 것 맞아요?”

    손을 힐끔힐끔 살피자, 강진현이 양손을 펼쳐 보여 주었다.

    “멀쩡합니다.”

    물집이나 화상은커녕 붉은 기 하나 없이 아주 깨끗한 손이었다.

    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깜짝 놀랐어요.”

    뜨거운 뚝배기 덕분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희나는 수저를 들고 와 뚝배기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배고플 텐데, 빨리 드세요.”

    “차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돌솥 비빔밥은 슥슥 먹음직스럽게 비벼졌다.

    강진현은 뜨끈한 김이 폴폴 나는 비빔밥을 크게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매끈한 밥알과 함께 아삭한 나물이 조화롭게 씹혔다. 고추장의 매콤한 맛이 입맛을 한껏 돋웠다.

    “국물 준비하는 걸 깜빡했네요. 대신 보리차라도 마셔요.”

    희나는 차갑게 식힌 보리차를 투명한 유리잔에 쪼로록 따랐다.

    강진현은 그 친절을 사양하지 않았다. 물기 맺힌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목울대가 꿀꺽꿀꺽 넘어가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희나는 텅 빈 잔에 보리차를 채워 주며 식사하는 강진현을 구경했다.

    재료를 잔뜩 눌러 담아 두었는데도 식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강진현은 밥 한 솥을 비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말끔한 낯을 하고 휴지로 입가를 훔쳤다.

    그리고 희나가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을 날렸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별말씀을요.”

    배시시 웃으며 식탁에 턱을 괬다.

    자기가 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고 감사 인사를 듣는 건 언제나 기분 좋았다.

    “그나저나…… 비빔밥에 희원 형님이 재배한 시금치가 들어갔나 봅니다. 특별한 시금치가 들어간 S급 돌솥 비빔밥이라고 뜨더군요.”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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