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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108화 (108/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08화

    샐쭉한 대답에 희나는 오래간만에 울화가 확 치미는 기분을 느꼈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게 어디서 초면에 찍찍 반말이야? 직급도 어지간하면 내가 더 높을 텐데!’

    마음속의 유교 꼰대가 날뛰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희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상냥하게 대꾸했다.

    “같이 일할 사인데 성함이랑 직급은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귀찮은데…… 까다롭기까지 하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희나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저기요! 나이가 몇 살이길래 초면에 찍찍 반말이예욧?”

    예전이었다면 꾹 눌러 참았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나도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여기에서 이러면서 일 안 해도 먹고살 만한 돈도 있거든!’

    어떻게 해서든 먹고살아야 했던 옛날과는 달랐다. 납작하던 자존심은 잦은 금융 치료로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하지만 상대의 싸가지는 녹록치 않았다.

    “나? 스물다섯. 너도 스물다섯 아냐? 꼬우면 너도 반말해.”

    “뭐…… 뭐라고요?”

    “내가 반말하는 게 싫으면 너도 반말하라고. 나는 신경 안 써.”

    “뭐? 내가 반말 못 할 줄 알고? 한다, 해!”

    희나가 빽 소리 지르자 연금술사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진작 하면 될 걸, 뭐 그렇게 흥분해서는.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하는데 너무 다혈질인 것 아냐?”

    그는 자기가 먼저 도발해 놓고 희나를 다혈질이라며 매도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순하디 순한 희나를 빡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초면에, 대단한 능력이었다.

    “너, 너, 너! 거기 딱 있어!”

    희나는 연금술사를 삿대질하며 사무실 개인 데스크로 우당탕 뛰어갔다. 그리고 전화기를 부술 듯 두들겨 인사팀에 내선으로 연락했다.

    - 인사팀 강목현 팀장입니다.

    강목현의 목소리는 몹시 침착했지만, 희나의 흥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사팀장님! 저 각성자 상태 관리팀 이희난데요!”

    - 예. 듣고 있습니다. 어디 문제라도?

    “지금 제 사무실에 연금술사라고 누가 와 있거든요? 비쩍 말라 가지고 시체처럼 창백한 재수 없는 스물다섯 살짜리 남자요! 이 사람 좀 끌고 가 주세요!”

    전화통에 대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니 태연한 대꾸가 돌아왔다.

    - 아. 유한이 씨 말씀이시군요. 앞으로 특별 작물 관련하여 이 팀장님과 함께 일하게 될 연금술사입니다. 시약 제조 관련해서는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입니다. 성격이 다소 자유분방……하기는 하나, 일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언제부터 자유분방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싸가지가 바가지라는 뜻으로 바뀌었던가?

    희나는 이 ‘유한이’라는 재수 없는 연금술사와 계속 일하라고 권하는 인사팀장의 제안에 질겁했다.

    “이 사람이랑 진짜로 같이 일해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으로 바꿔 주세요! 이 사람 너무 재수 없어요!”

    - 음……. 그건 좀 곤란합니다.

    희나는 따발총처럼 쏘아붙였다. 싸가지 없는 놈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예의 없이 소리치기 쉬웠다.

    “왜요! 어제 뭐든 다 지원해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사람 하나 바꾸는 게 그렇게 힘든가요? 청룡 길드에 인재가 그렇게 없어요?”

    - 네. 그렇습니다.

    덤덤한 인정에 희나는 어라, 하고 되물었다.

    “……예?”

    - 재능 있는 고랭크 비전투계 각성자들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지금 당장 시간이 비는 인원은 유한이 씨밖에 없습니다. 압니다, 유한이 씨 성격이 둥그스름하지는 않다는 거. 하지만 성격을 제외하면 함께 일하기에 나쁜 파트너는 아닙니다.

    “성격이 저따위인데도요?”

    끝까지 항의하자, 강목현 인사팀장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당장은 안 됩니다. 정말로 인원이 없습니다. 몇 주 정도만 버텨 주시면, 다른 사람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동안만, 정말 잠시 동안이라도 이 팀장이 조금만 양해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희나 팀장.

    이렇게까지 간곡히 말하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 정말 몇 주만이에요.”

    - 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유한이 씨는 따로 불러서 태도 관련하여 면담 한번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부탁드려요.”

    통화를 마친 희나는 탁,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결과가 아주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인사팀장과의 대화로 화는 당장 좀 누그러진 상태였다.

    “이렇게 성격 나쁜 각성자는 처음 봤네. 별꼴이야.”

    희나는 잔뜩 꿍얼거리며 유한이가 있는 주방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리고 주방 안의 광경을 확인하곤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건 또 뭐야?”

    인사팀장과 통화를 나누던 그 몇 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희나의 안락한 주방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주방과 식사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하는 커다란 아일랜드 위에 흉측한 기계들이 잔뜩 늘어 놓여 있었다.

    희나가 깨끗하게 닦아 놓은 싱크대 위에는 너저분한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꼬질꼬질한 물건들이었다.

    유한이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실험대 두 개 정도만 더 들이면 좀 쓸 만해지겠네.”

    희나의 우아하고 안락한 공간을 망쳐 놓고는 ‘좀 쓸 만해지겠네’라니!

    “그나저나 연구 표본은 어디 있어? 일, 안 해?”

    그러면서 희나에게 연구 표본, 시금치를 내놓으라 손바닥까지 내밀었다. 순 마이 페이스였다.

    ‘와, 나. 이러다 혈압 올라 죽겠네!’

    희나의 미간에 팍 주름이 갔다.

    동시에 주먹이 부르르 울었다. 희나는 성질을 이겨 내지 못하고 사무실용 슬리퍼를 벗어 한 손에 쥐었다.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려 유한이의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야! 너랑은 일 안 해! 빨리 내 주방이나 원상복구 해 놔!”

    철썩!

    의도했던 ‘찰싹’보다 찰진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저도 모르게 시전한 ‘해충 박멸’ 스킬 덕이었다.

    “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유한이는 맞은 팔뚝을 움켜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꼬리를 밟히고 잔뜩 놀라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보였다.

    “엄살 부리지 마. 겨우 한 대 맞은 게 뭐가 대수라고.”

    슬리퍼를 움켜쥐고 유한이의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아무리 랜덤한 강도로 힘이 출력된다지만, 강진현과의 수련으로 인해 ‘해충 박멸’ 스킬의 기본 세기는 이전보다 강력해졌다.

    이 한 방도 상당히 아팠을 게 분명했다.

    ‘근데 그건 내 알 바는 아니지.’

    희나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유한이는 얼마 전에 본 토끼처럼 곤죽이 되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야 했다.

    유한이가 고개를 홱 들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좀 맺혀 있었다.

    “엄살이라니! 진짜 아프단 말이야!”

    하지만 그 모습은 안타깝기보다는 통쾌하게 느껴졌다.

    “그만 징징거려. 네가 어지럽힌 내 주방은…… 조금 있다 얘기하고, 일단 사무실로 와서 좀 앉자.”

    희나는 슬리퍼를 매섭게 휘두르며 사무실을 가리켰다.

    유한이는 조금 욱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매서운 한 방으로 얻은 교훈이 크긴 컸는지 순순히 이동했다.

    희나는 손님 대접에 신경 쓰는 편이었지만, 불청객에게 줄 다과는 없었다.

    ‘물 한 잔 내줄 생각 없고말고. 흥!’

    팔짱을 딱 끼고 눈에 팍 힘을 줬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유한이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희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또 맞을까 봐 옴짝달싹 못 하는 듯했다.

    아직 희나의 한쪽 손에는 슬리퍼 한 짝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한이는 우물쭈물하다 말을 툭 내뱉었다.

    “사…… 사람을 앉혀 놨으면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냐?”

    ‘어쩜 꺼내는 말마다 이렇게 아니꼽게 들릴 수가 있지?’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누구에게나 상냥한 편인 희나를 이렇게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나 그쪽이랑 일 안 해. 아니, 못 해. 인사팀장님이랑도 유선상으로 얘기 끝났어. 몇 주 안에 너 말고 다른 사람 데려다준다고 했으니까 어지른 거 치우고, 짐 빼.”

    희나의 말에 유한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뭐? 이번 프로젝트는 내가 적임자라고! 내가 맡을 연구에 이래라저래라 말 얹지 마!”

    이에 희나는 택도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뭐래? 협업할 상대를 구하는 건 나고, 선택권은 나한테 있거든! 너야말로 막무가내로 굴어 놓고서 우리 오빠 시금치 만질 생각 하는 거야? 꿈도 꾸지 마.”

    “길드장이 나한테 직접 잘 부탁한다고까지 말했다고!”

    “이젠 아닐걸. 나는 너처럼 예의 없는 사람이랑 일 안 할 거니까.”

    희나는 어제 길드장과 체결한 계약을 돌이켜 보았다.

    제안에 따라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고는 했지만, 필수 이행 항목은 아니었다. 희나가 싫다고 무르면 끝인 부분이었다.

    이 상황에서 멋대로 굴며 갑질을 할 수 있는 쪽은 희나란 뜻이었다. 저 연금술사가 아니라!

    “괜히 마음 상해 가면서까지 억지로 일하고 싶지는 않아.”

    예전처럼 돈이 급한 상황도 아닌데, 괜히 안 맞는 사람과 맘고생 몸고생 하며 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의 희나는 소위 말하는 ‘건강한 자아 실현을 위해’ 일하고 있는 편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반쯤은 취미라는 의미다.

    희나의 설명에 울긋불긋 총천연색으로 바뀌던 유한이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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