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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72화 (72/228)
  • 던전 안의 살림꾼 72화

    ‘진현 씨의 로브!’

    사용자의 존재감을 감추어 주는 로브가 있었다. 오빠인 희원이 노역하던 던전에 떨어졌을 때, 강진현이 희나에게 입혀 주었던 것이었다.

    희나의 팔다리 기장에 맞추어 강진현이 소맷자락을 북북 찢어 냈던 그 옷 말이다.

    그 옷을 입는다면 충분히 던전 산책을 다녀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 생각해 보니, 어제 집들이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A급 방어의 팔찌도 있었다.

    ‘혹여나 들키더라도 공격 한 번은 피해서 도망갈 수 있어.’

    ‘홈 스위트 홈’의 안전지대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고 바둑이를 산책시킨다면 도망갈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진지한 표정이 심상찮게 보이긴 했는지, 희원이 크게 걱정하며 물었다.

    “너 설마, 진짜 나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

    “생각해 봤는데, 잘하면 바둑이 데리고 꽤 안전하게 산책시킬 수 있을 것 같아.”

    희나는 자기의 계획을 오빠에게 풀어 설명했다.

    “‘홈 스위트 홈’ 안전지대 근처에서 조심히 산책하면 될 듯해. 진현 씨한테 기척을 감추는 로브 아이템이 있거든. 그걸 빌려서 입고 어제 받았던 A급 방어의 팔찌를 차면 비교적 덜 위험하게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을 거야.”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위험한 일을 어떻게 해? 너 체근민 스탯도 겨우 F급이랑 비슷한 정도잖아.”

    “한 번만 시도해 보고 결정할게. 가능성이 있는데 무섭다는 이유로 무작정 물러날 수는 없어.”

    희원은 비장한 표정을 한 동생을 몇 번이고 만류했지만, 오색이를 지키겠다는 희나의 의지를 막지 못했다.

    * * *

    희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안을 구석구석 뒤져 예전에 강진현이 찢어 놓은 옷자락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여기 있다!”

    비싼 아이템의 조각이라 생각해서 서랍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다음으로는 휴대전화를 들어 강진현에게 연락을 했다.

    [진현 씨, 예전에 저한테 입혀 주셨던 회색 로브 기억나시나요? 존재감을 흐리게 해 주는 아이템이라고 하셨는데…….]

    초조하게 화면을 보고 있는데, 금방 답변이 도착했다.

    [강진현 헌터님: 은신의 로브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억합니다. 지난번에 마트에 입고 가려고 하던 걸 희나 씨가 만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로브의 이름은 ‘은신의 로브’였나 보다. 이때다 싶어 휴대전화 화면을 토독토독 치며 변명 같은 답장을 작성하던 차였다.

    [강진현 헌터님: 필요하십니까? 드릴 수 있습니다.]

    “헉.”

    희나는 입을 쩍 벌렸다. 강진현이 희나의 속을 읽은 듯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강진현 헌터님: 당장 필요하십니까? 집이면 지금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

    덕분에 희나가 머리를 잔뜩 굴려 만들어 낸 그럴싸한 이유는 꺼낼 필요조차 없어졌다.

    ‘예전에 진현 씨가 찢어 낸 부분을 수선해 주겠다고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그런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로브를 빌려주겠다고 하니 희나로서는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희나는 강진현의 마음이 바뀔세라, 혹은 그가 이유라도 물어볼세라 재빨리 답장했다.

    [빌려주시면 저야 정말 고맙죠. 저는 지금 집이에요. 찾아오시면 곧바로 나갈게요.]

    당장 던전 산책 퀘스트를 앞둔 사람에게 겸양 따위는 사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돌아왔다.

    [강진현 헌터님: 예. 지금 제가 희나 씨 집으로 가겠습니다.]

    “야호!”

    희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작게 환호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뛸 듯이 기뻐하고 있는데, 동시에 우웅, 우웅 하고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현관문에 부착한 스마트 초인종과 연동해서 울리는 것이었다. 즉, 지금 강진현이 희나의 집 앞에서 벨을 누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헉, 엄청 빠르잖아!”

    희나는 허둥지둥 ‘홈 스위트 홈’ 문을 열어 아파트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진현 씨. 빨리 오셨네요.”

    활짝 웃으며 얼굴을 배꼼 내밀자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희나 씨,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신지요?”

    “그럼요. 진현 씨는요?”

    “희나 씨를 만난 덕분에요.”

    그는 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낯간지러운 소리를 흘렸다.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인사였다.

    희나는 이런 유의 인사말에 익숙하지 않아 얼굴을 붉히며 고개만 꾸벅 숙여 보였다. 부끄러웠다.

    “여기, 은신의 로브입니다.”

    희나가 부끄러워하는 사이, 강진현은 인벤토리에서 천 한 뭉치를 꺼내어 건넸다.

    잘 접은 로브였다. 아니,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로브처럼 보이는 거적때기였다.

    이에 잠시 몽롱해졌던 희나의 눈이 다시 반짝 빛났다.

    ‘은신의 로브!’

    “고맙습니다!”

    희나는 로브를 덥석 받아 들었다. 강진현은 몹시 기뻐하는 희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얼마든지 가지고 계셔도 됩니다.”

    “최대한 금방 쓰고 돌려드릴게요!”

    “괜찮습니다. 1년, 아니, 10년을 가지고 계셔도 됩니다. 필요하시다면 아예 드릴 수도 있습니다.”

    강진현이 또 과잉 반응을 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대꾸였으므로 희나는 활짝 웃었다.

    “주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마음만으로도 감사한걸요. 별말씀 없이 흔쾌히 빌려주시겠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희나의 미소에 강진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희나 씨인데, 무엇인들 못 해 드릴까요.”

    순간 어쩐지 그도 부끄러움을 타고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진현 씨, 마침 집이 비었는데 커피 한잔하고 가실래요?”

    희나는 저도 모르게 현관문을 열며 강진현에게 커피 타임을 제안했다. 그러자마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도 됩니까?”

    “그럼요.”

    블랙커피만 마실 것처럼 생긴 외모와 달리, 그는 희나가 타 주는 달달한 믹스 커피를 좋아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서 들어오세요. 이웃 사이에 커피 좀 나눠 마실 수 있죠.”

    희나는 흔쾌히 강진현을 집 안에 들였다.

    * * *

    짧은 티타임 후, 희나는 강진현을 배웅했다. 그리고 테이블 뒷정리를 하다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어?”

    강진현이 앉아 있던 자리에 무엇인가가 단정히 놓여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주먹 두 개를 합쳐 놓은 듯한 크기의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에는 반짝거리는 보석 조각들이 가득 차 있었다. 색깔과 크기가 제각각이라 보는 각도에 따라 빛 반사가 달라져서 아주 예뻤다.

    “이건…….”

    희나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보석들을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이건 단순한 보석이 아니었다. 마석 조각이었다.

    크기가 조그마하다고 해도, 양이 원체 많았다. 이 병 안에 들어 있는 마석을 전부 팔면 억 단위 정도는 너끈히 벌어들일 양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놓여 있지? 하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희나의 휴대전화 화면이 반짝였다.

    [강진현 헌터님: 맛있는 커피, 감사합니다. 약소하지만 커피값 대신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으악!”

    희나는 강진현의 엄청난 스케일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커피값이라니!’

    고작 몇백 원짜리 믹스 커피 한 잔 값이라기엔 금액이 너무 컸다!

    거기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은 커피를 얻어 마신 강진현이 아니라 값비싼 아이템을 빌린 희나였다. 양심이 심하게 아파 왔다.

    [이런 건 정말 괜찮아요! 내일 뵙게 되면 다시 돌려드릴게요ㅠㅠ]

    [강진현 헌터님: 괜찮습니다. 작은 마석 조각을 모아 두는 취미가 있는데, 그중 일부일 뿐입니다. 다만 보기에만 좋고 등급은 별로 높지 않습니다. 희나 씨의 새집을 장식하기에 괜찮을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영 신경 쓰이시면 주말 특별 근무 수당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강진현 헌터님: 제 성의 표현입니다. 절대 돌려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이야기하는데 무어라 더 말할 수가 없었다.

    희나는 강진현에게 선물 감사하다고 연락을 보낸 후, 마석 조각들을 담은 유리병을 형광등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유리병 속에 담긴 마석 조각들은 마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예쁘다…….’

    한없이 무뚝뚝하게만 보이는 강진현의 취미가 예쁘장한 마석 조각들을 수집하는 일이라니, 의외였다.

    마석의 실제 가치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고마운 선물이었다. 자기의 소장품을 희나에게 나누어 준 것이니까.

    희나는 강진현이 준 선물을 방 안에 고이 모셔 둔 후에야 은신의 로브를 펼쳐 살필 수 있었다.

    예전에는 확인하지 못했던 아이템 설명이 보였다.

    <은신의 로브(A): 은신 효과가 있는 로브. 큰 소란을 피우지 않는 한 높은 확률로 적의 인식 범위에서 벗어난다. 단, A급 이하에게만 적용된다.>

    강진현이 지체 없이 북북 찢어 낸 로브는 무려 A급 아이템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알게 되니 충격이 컸다.

    ‘수백만 원짜리 마석을 취미로 모으고, 취미로 선물해 주는 사람은 역시 격이 달라.’

    희나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지고 있는 천 조각을 대보니, 어찌어찌 수선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희나는 바느질 경험이 많지는 않았지만, 솜씨는 좋았다. 어릴 적 학교에 다닐 때 가사 실습 시간엔 언제나 만점을 도맡았더랬다.

    옛 기억을 되살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다 보면 은신의 로브도 처참한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은신의 로브는 깨끗하게 수선해서 돌려드려야겠다.’

    희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로브를 완벽하게 수선해 내길 다짐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푹푹 찔린 양심이 좀 덜 아플 것 같았다.

    “일단 수선 문제는 나중에 마저 생각하고. 급한 불부터 꺼야지.”

    어쨌든 열 번의 바둑이 산책을 완료하기 전까지는 옷을 수선할 수 없었다. 희나는 로브를 품에 안고 바둑이를 불렀다.

    “바둑아! 산책 가자!”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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