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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51화 (51/228)
  • 던전 안의 살림꾼 51화

    남매는 노새처럼 일했다.

    덕분에 집안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뽀송뽀송한 상태로 돌아왔다. 화장실에 낀 물때도 희게 변해서 눈이 시릴 정도였다.

    “아, 다 했다! 오색아! 앞으로 네 눈에서 눈물 뽑을 일 없게 해 줄게!”

    희나는 식탁 위의 달팽이를 향해 퍽 로맨틱한 대사를 날렸다. 옆에서 희원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희나는 진심이었다. 오색이를 손에 올리고선 둥가둥가 해 주기까지 했다.

    ‘혼자 남을까 봐 얼마나 무서웠을까?’

    가족이 자기를 버리려 한다는 생각에 오색이가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을지 가늠조차 안 됐다.

    단순한 질투라고만 생각해서 진작 대화로 풀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랬더라면 집이 이 꼴이 나지는 않았을 텐데.’

    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A급 곰팡이 박멸액이 손에 잡혔다.

    ‘이거 하나는 정말 잘 뽑았어.’

    레벨 업 랜덤 뽑기 보상으로 나온 물건들은 대부분 하찮았지만, A급 곰팡이 박멸액은 정말 두고두고 도움이 됐다.

    집 안의 곰팡이를 깨끗이 제거해 주었고, 무엇보다 희나와 강진현의 목숨까지 살려 낸 일등 공신이었다.

    ‘두고두고 가보로 물려주리.’

    희나는 마음속으로 꼭꼭 결심하며 손뼉을 짝짝 쳤다.

    “이제 곰팡이 없앨 시간이야!”

    일회용 마스크를 쓰고 오빠와 오색이를 현관 밖으로 쫓아냈다.

    희원은 품 안에 오색이를 안고 바깥으로 나갔다. 마침 해 지기 전이라 밭에 물 줘야 할 시간이라나?

    「수고수고.」

    오색이가 희원의 어깨 너머로 머리를 쏙 꺼내며 희나를 응원했다.

    비 온 뒤 땅 굳는다고, 한바탕하고 나니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희나는 방긋 웃으며 오색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쾅,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희나는 손에 든 A급 곰팡이 박멸액을 챠카챠카 흔들었다.

    대왕 버섯과 싸울 때만큼이나 비장한 태도였다. 희나의 피, 땀, 눈물이 서린 소중한 집이었다. 곰팡이 따위가 불법 점거하게 둘 수는 없었다.

    치이익! 칙!

    방 구석구석 박멸액을 뿌리자 거무스름한 곰팡이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보였다. 언제 봐도 놀라운 효과였다.

    효과가 눈에 띌 정도로 좋으니 절로 흥이 났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박멸액을 칙칙 뿌리고 있는데 눈앞에 뭔가가 떴다. 시스템 창이었다.

    *누적 1000만이 넘는 생명체를 학살하였을 때 얻는 업적입니다.

    *참고: 업적은 최초 1회에 한해 카운트됩니다.>

    “와…….”

    희나는 뺨을 긁적였다. 곰팡이를 박멸하여 1000만 학살자 업적을 달성하게 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곰팡이도 생명으로 쳐주긴 하는구나.”

    하지만 생명을 그만큼 해치웠다는 사실엔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곰팡이는 집 안의 안락함을 해치는 주범 중 하나였다. 희나 사전에 곰팡이와 모기, 바퀴벌레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희나는 ‘1000만 학살자’라는 무시무시한 업적을 달성하며 곰팡이 박멸액을 열심히 뿌렸다.

    “다 됐다. 이 정도면 완전히 사라졌겠지?”

    희나는 A급 곰팡이 박멸액을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고 손을 탈탈 털었다.

    닫혀 있는 집 안에서 스프레이를 뿌렸더니 눈이 따끔거렸다.

    “환기 좀 해야겠다.”

    희나는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내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가 있는 곳을 떠올리며 문을 열자, 무성한 정글형 던전이 현관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희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작게 감탄했다.

    “와. 오빠, 개간 많이 했구나. 힘 많이 썼겠네.”

    현관문으로부터 4m 반경, 그러니까 안전거리 안의 공간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나무나 풀들도 없었다. 그저 깨끗하게 개간한 텃밭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 끝났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마스크를 벗으며 후하후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오빠가 불쑥 나타났다. 희원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물뿌리개를 들고 있었다.

    “대단하네, 이희원. 근성 있어.”

    희나는 희원을 향해 손뼉을 짝짝 쳐 주었다. 온갖 덩굴과 나무로 뒤덮여 정신없었던 이 땅을 이렇게 일구어 내다니. 그야말로 소 같은 근성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다 끝냈어. 나도 여기 볼 때마다 뿌듯하더라.”

    희원이 하하 웃으며 반경 4m짜리 텃밭을 자랑했다.

    “거기다 여긴 흙이 보들보들하고 촉촉해서 그런지 뭐든 잘 자라는 것 같더라고.”

    남매는 열린 현관문 앞에 털썩 주저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밭에서 키우던 방울토마토는 어떻게 됐어?”

    “그건 죽었어. 던전이랑 안 맞았나 봐.”

    “또?”

    희원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민망했기 때문이다. 명색이 농사꾼인데, 여태 제대로 뭘 키운 게 없었다. 해 봤자 상추 몇 포기 정도가 다였다.

    “하하. 개간을 잘한 거에 비해서 농사를 잘 짓진 못하고 있지? 뭐가 부족한지는 모르겠지만.”

    “뭐, 초보라서 그런 거겠지. 서서히 나아질 거야.”

    희나는 오빠를 위로해 주었다.

    「방울토마토. 조의를 표함. R.I.P.」

    오색이도 옆에서 자기도 있다는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 고맙다, 얘들아.”

    희원은 씨익 웃으며 오색이를 무릎 위에 올려 주었다.

    어느새 해 질 녘이었다.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셋은 해가 져 가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구경했다. 노동 후의 휴식이란 꿀 같았다. 평화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아. 그런데 오빠.”

    침묵을 먼저 깨트린 건 희나였다. 묘목이니, 씨앗이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무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지난번에 줬던 씨앗은 어떻게 됐어?”

    “씨앗? 뭘 말하는 거야? 공간의 조각이 사라지고 남은 씨앗? 아니면 버섯 던전에서 우연히 주웠다던 그 씨?”

    “뒤의 거.”

    희나는 이미 공간의 조각에서 나온 씨앗은 발아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즉, 희나가 언급하는 건 버섯 던전에서 얻은 씨앗이었다.

    얼마 전, 강진현과 버섯 던전에 떨어졌을 때 희나는 세 가지 물건을 얻었다.

    첫 번째는 B급 보스 몬스터의 마석이었고, 두 번째는 SSS급 신문지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정체불명의 씨앗’이었다.

    <정체불명의 씨앗(?):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씨앗.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특별한 관심과 손길이 닿는다면 정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희나가 ‘정체불명의 씨앗’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다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무엇의 씨앗인지도 몰랐고, 등급도 나와 있지 않았다. 거기다 왜 버섯뿐인 던전에 씨앗이 버려져 있었는지 알 도리도 없었다.

    다만 힌트라고 있는 건 ‘특별한 관심과 손길’이라는 문구뿐이었다. 예전에 ‘더러운 □□의 조각’에 대한 정보를 보았을 때와 비슷했다.

    ‘거기에서 말하는 특별한 손길이란 살림꾼인 내 손길을 뜻하는 거였지.’

    잔뜩 슬었던 녹은 희나의 손길에 의해 깨끗하게 닦여 나갔고, 정체를 드러냈다.

    비슷한 맥락에서, 농사꾼인 희원이 ‘정체불명의 씨앗’을 다룬다면 무언가 실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이건 희나의 추측에 불과했지만, 꽤 그럴싸한 이론처럼 들렸다.

    그래서 희나는 ‘정체불명의 씨앗’을 오빠인 희원에게 넘겼다.

    희원은 한참 동안 씨앗의 상태 창과 자기의 시스템 창을 번갈아 가며 들여다보더니, 자기가 이걸 한번 키워 보겠다고 선언했다.

    놀랍게도 이 씨앗을 받는 순간, 희원에게 히든 퀘스트 창이 떴다고 했다. 퀘스트 내용은 ‘애완식물 키우기’라나?

    이 씨앗에 대한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퀘스트를 통해 어떻게 키워야 할지 개략적인 순서는 알 수 있었다.

    희원은 씨앗을 받아 던전 텃밭 한구석에 고이 심고 가꿨다. 이전에 심어 두었던 ‘□□□ □□ 씨앗’ 바로 옆에 심어 두고 매일 관심을 기울였다.

    희나는 청룡 길드로부터 받은 집 세 채에 대한 서류 작업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한동안 ‘정체불명의 씨앗’에 대해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한가하게 보내다 보니 자연히 씨앗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여기에 심어 놨는데, 가서 볼래?”

    희원이 텃밭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싹도 텄어. 얘는 물만 줘도 쑥쑥 자라더라. 퀘스트가 걸린 거라 그런가?”

    희나는 오빠를 따라가 텃밭 앞에 쪼그려 앉았다.

    며칠 사이에 씨앗은 싹을 틔워 손바닥만 한 잎사귀를 두 개나 틔웠다. 잎사귀 사이에는 튼튼해 보이는 줄기가 빳빳이 서 있었다.

    줄기 끝에는 꽃봉오리 같은 것이 잎을 오므리고 있었는데, 겉으로는 마치 작은 튤립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금 물을 먹어서 그런지 잎사귀 끝에 물방울이 아롱져 반짝였다.

    “귀엽네.”

    희나는 손가락을 내밀어 잎사귀를 톡 건드렸다. 그러자 잎사귀 끝에 맺힌 물방울이 똑 하면서 떨어졌다.

    “아마 더 커질 거야. 아직 10%도 안 키웠어. 퀘스트에 3% 성장했다고 뜨네.”

    희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 수치에 희나는 깜짝 놀랐다.

    “아직 3%만 컸는데 이 정도면, 다 크면 나무 되는 거 아니야?”

    “글쎄다. 다 키워 봐야 알겠지.”

    동생의 경악에 농사꾼 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였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휘청, 하고 줄기가 휘어졌다. 그와 동시에 두 장의 잎사귀가 날갯짓하듯 팔랑팔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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