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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46화 (46/228)
  • 던전 안의 살림꾼 46화

    우민아가 폭신한 슬리퍼를 내주며 말했다. 희나는 얼결에 슬리퍼를 신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

    방문이 열리고, 청룡 길드의 복도가 나왔다. 석 달을 이곳에서 일했지만,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낯선 장소였다.

    “여긴 어디예요? 던전 들어간 지 며칠이나 지났어요? 집에는 연락했어요?”

    희나는 아까 진즉 떠올렸어야 할 질문들을 줄줄이 내뱉었다.

    “여긴 우리 길드 최상층. 간부 전용이라 너는 한 번도 안 와 봤을걸. 던전 게이트에 휩쓸린 지는 사흘 지났어. 그리고 네 오빠한테는 비상 연락망 통해서 길드에 급작스런 일이 있어서 너 며칠 야근하고 와야 한다고 말해 뒀어. 그랬더니 너희 오빠가 야근 특근 수당 잘 챙겨 달라고 하더라. 안 그러면 노동청에 신고할 거래. 되게 자상하더라.”

    “아이고…….”

    정작 우민아를 앞에 두고선 그런 말 못 할 거면서, 유선상이라고 방구석 여포 짓을 한 오빠의 행태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희나는 홧홧한 얼굴을 식히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왜 길드 간부층에 있는 거예요?”

    물음에 우민아가 어깨를 토닥였다.

    “아까 말했지? 다 같이 있는 데서 이야기하자고. 뭐, 큰일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우민아는 그 이상 답해 줄 생각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희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든 강진현을 지킨 것에 대한 포상이라도 주려는 걸까?

    ‘이왕 포상 줄 거면 공로패 말고 돈으로 주면 좋겠다.’

    애먼 김칫국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우민아가 어느 문 앞에 서더니 노크를 똑똑, 했다.

    “들어갑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희나는 문 옆에 붙은 명패를 보고 말았다.

    ‘청룡 길드 길드장실?’

    하지만 눈을 크게 뜰 새도 없었다. 희나는 우민아의 손에 붙잡혀 청룡 길드 길드장실로 쏙 끌려들어 가고 말았으니까.

    길드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세 명분의 시선이 한꺼번에 희나에게로 향했다.

    참고로 그중 두 명은 구면이었고, 한 명은 초면이지만 초면이 아닌 사이였다.

    전자의 두 명은 인사팀장 강목현과 S급 헌터 강진현이었다.

    그리고 후자의 한 명은 이 방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는 청룡 길드 길드장이었다.

    희나는 뉴스에서 그녀의 얼굴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 길드 중 하나인 청룡의 길드장이기도 했고,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3인의 여성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대형 기업의 수장이 여성인 경우는 흔치 않았으니까.

    ‘헉! 내 옷차림.’

    희나는 편안한 티셔츠에 부드러운 슬리퍼 차림인 제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은 꼭꼭 차려입었는데, 혼자서 홈 웨어 같은 걸 입고 있으니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강진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희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희나 씨.”

    그가 난데없이 인사를 갈겼다.

    인사에는 대답해 주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희나는 거의 척수 반사급으로 인사를 되돌려 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강진현 헌터님.”

    “좋은 하루 보내셨습니까?”

    이 기묘한 상황에서 나누기엔 너무나 평범한 대화였다. 덕분에 희나는 갈팡질팡하다 말을 좀 더듬었다.

    “그, 그게……”

    “다름이 아니라 간곡히 청할 말씀이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인사처럼, 본론도 급작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랬다. 강진현은 마치 성난 황소처럼 돌진하고 있었다.

    “간곡히 청할 말이라뇨?”

    희나가 묻자마자, 강진현이 덜컥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그냥 무릎이 닿은 것뿐인데, 바닥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박력이 대단했다.

    희나는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에 강진현이 멀어지려는 희나의 손을 잡아챘다. 그의 손은 몹시 뜨거웠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시는?”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하자, 강진현이 애원했다.

    “잠시만. 제게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희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민아와 강목현, 길드장 모두가 흥미진진하다는 눈길로 희나와 강진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진현이 비장한 표정을 했다. 긴장했는지 목울대가 꿀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안을 축이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제 생활 전반을 관리해 주십시오. 입주 가사 도우미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고선 그는 품속을 뒤졌다. 품 안에서 카드가 한 장 나왔다. 희나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카드 키였다. 그러니까 집 열쇠였다.

    “저의 미래를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카드 키를 희나에게 건네며 엄청난 이야기를 꺼냈다.

    대단한 논리의 비약에 희나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가사 도우미가 되어 달라는 말을 미래를 책임져 달라는 말로 바꿔 하다니.

    ‘세상에.’

    어린 시절 까르×에 반지를 내밀며 청혼하는 잘생긴 연인을 망상해 본 적은 있다. 망상은 망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과 비스무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잘생긴 데다 능력 좋기로는 세상에서 내로라하는 잘난 남자가 까르×에 반지의 몇백 배는 비싼 집 열쇠를 건네며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니!

    이건 어릴 적 했던 상상 이상의 잭 팟이었다. 아마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았더라면 등짝을 후드려 패서라도 당장 잡으라고 할 기회였다.

    하지만 이런 희대의 행운 앞에서, 희나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저, 강진현 헌터님.”

    “저를 포함한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전 세계 헌터 중 손꼽히는 강자로 일컬어지는 강진현이 굳건하다 못해 애절한 눈빛으로 희나를 바라보았다. 당장이고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워 보였다.

    ‘이게 바로 미인계인가?’

    무력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그는 심계도 대단했다. 희나는 잠시 제정신을 잃을 뻔한 자신을 책하며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그, 그게…….”

    “얼마든지 이야기하십시오. 희나 씨 앞에 가져다드리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결국, 희나는 반쯤 울 듯이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전속 가사 도우미로 들어와 달라는 소리를 왜 그렇게 이상하게 하세요?”

    “저의 의식주를 도맡아 주실 그 누구보다 중요한 분께 그럼 대체 어떻게 말을 해야 합니까?”

    진지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희나는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소소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런 사람이랑 엮이고 말았지?’

    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자, 인제 그만.”

    길드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 꿇은 강진현을 일으켜 세웠다. 자기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강진현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게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희나와 강진현 사이에 서서 양 손바닥을 보였다. 마치 싸움 난 어린애들 화해시키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우선 희나에게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환경 미화팀 사원 이희나 씨. 많이 당황한 표정인데, 내가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획 돌려선 강진현의 귀를 잡아 뜯었다. 마치 경극 가면을 바꿔 끼듯 순식간에 변한 표정은 덤이었다.

    “이놈 새끼! 이게 무슨 몬스터 사냥도 아니고. 상황도 제대로 설명 않고 덥석 달려들면 어떡해?”

    “…….”

    귀를 뜯기고 있는 강진현은 썩 아파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조금 뚱해 보였다.

    ‘S급 헌터를 저렇게 다룰 수 있다니. 저 정도는 되어야 청룡 길드 길드장을 하는구나.’

    희나는 길드장의 패기에 감탄했다.

    “좋은 광경은 다 구경했으니, 이제 앉아서 얘기하는 건 어떠십니까?”

    우민아가 뒤에서 손을 들고 의견을 말했다. 얼마나 숨을 죽이고 웃고 있었던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공략팀장도 얘기에 끼려고?”

    길드장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축객 명령에 가까운 소리를 들었는데도 우민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대단한 넉살이었다.

    “여기엔 얘 편들어 줄 사람이 저밖에 없어 보이는데, 옆에 있어라도 줘야죠.”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이 핑글핑글 돌아가던 희나에게는 마른하늘의 단비 같은 소리였다.

    “언니…….”

    희나는 고기로 다진 우정에 크게 감동했지만, 길드장은 그런 모습에 딱히 감흥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재미있어 보이니까 끼어드는 거겠지.”

    “에이. 말씀이 심하시네요.”

    “내가 우민아 팀장을 하루 이틀 보나?”

    “어쨌든 저는 안 갈 겁니다.”

    우민아는 허리를 탁 손을 올리고 버티고 섰다. 희나는 그런 우민아의 곁에 찰싹 붙었다.

    “저도 팀장님이 옆에 계셔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길드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우민아의 참석을 허락했다.

    “뭐, 이희나 씨가 괜찮다면 나야 이 자리에 한 명 더 느는 건 상관없지.”

    한편, 길드장에게 귀를 붙잡힌 강진현은 희나를 향해 아련한 눈길을 보냈다.

    “……언제 저를 두고 우민아 헌터와 그렇게 깊은 사이가 되었습니까?”

    그의 발언은 놀랄 정도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희나조차도 그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외면했다.

    “자. 이제 차근차근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볼까?”

    희나는 강진현, 길드장, 강목현을 차례로 앞에 두고 허리를 바짝 세워 앉았다. 어쩐지 압박 면접에 참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긴장하지 마. 지금 여기선 네가 갑이야.”

    곁에 앉은 우민아가 옆구리를 찌르며 속닥거렸다.

    “예에……. 예.”

    그녀의 조언은 놀라울 정도로 힘이 안 됐다.

    소시민에 불과한 희나가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인 청룡 길드 간부들을 앞에 두고서 어떻게 갑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어지간한 담력을 가지지 않고선 불가능했다.

    “인사가 늦어졌군요. 나는 청룡의 길드장을 맡은 김규희라고 합니다.”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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