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안의 살림꾼-45화 (4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45화

    마침 던전 텃밭 한구석에 심어 둔 이름 없는 씨앗이 떠올랐다.

    희원이 열심히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하고 있건만, 아직 싹이 돋았다는 소식이 없었다.

    “모르겠다. 오빠는 농사꾼이 적성에 안 맞는 걸지도 모르지.”

    작게 중얼거리며 여전히 꿈나라에 있는 강진현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긴장이 쪽 풀린 다리는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후들거렸다.

    “아이고, 이 사람아. 좀 일어나 봐요.”

    희나는 침낭에 감싸져 도롱이 벌레가 되어 있는 S급 헌터를 바닥에 데굴데굴 굴렸다. 강진현은 어지럽지도 않은지 잘도 잤다.

    하긴, 대장 버섯과 희나가 그 난리를 벌이는 동안 눈꺼풀 하나 꿈쩍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에 깰 리가 없었다.

    “아, 게이트 찾으러 가야 하는데…….”

    희나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강진현 옆에 드러누웠다.

    회색빛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땀을 빼고 난 후라 몸이 좀 으슬으슬한 것 같아 침낭 곁에 꼭 붙었다.

    ‘춥네.’

    그래도 추위가 가시지 않아 아까 뽑은 SSS급 쓸모 있는 신문지를 펼쳐 덮었다. 기분상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신문지라도 덮으니 몸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신문지를 덮고 맨바닥에 누워 있는 이 상황은 아주 처량하기 그지없었지만…….

    ‘피곤해.’

    희나는 그런 걸 따지기에는 너무나 피곤했다. 평생 겪을 일 없다고 생각했던 보스 몬스터와의 격전이었다. 힘이 빠지기엔 충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지 아래에서 도롱도롱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희나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누가 온몸을 두들겨 패는 것 같았다.

    “으…… 으으윽.”

    희나는 끔찍한 근육통과 함께 눈을 떴다.

    “깼어?”

    눈꺼풀을 부스스 들어 올리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민아였다.

    “민아…… 언니?”

    “그래. 나야.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우민아는 성큼 다가와 희나의 안색을 살폈다.

    희나는 울상을 지으며 우민아를 올려다보았다.

    “근육통 때문에 온몸이 너무 아파요…….”

    “이런. 타박상은 포션 발라서 다 고치긴 했는데, 근육통을 생각 못 했네.”

    그러면서 재빨리 희나의 입에 작은 병 하나를 물렸다. 희나는 눈을 댕그랗게 뜨고 병에서 나온 액체를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으으읍!”

    그와 동시에 엄청난 떫은맛이 혀끝을 강타했다.

    ‘으악! 미뢰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우민아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희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삼켜, 삼켜. 뱉지 말고.”

    “우웁! 웁! 웁!”

    “그래, 장하다 희나. 꿀떡.”

    희나는 우민아의 열렬한 응원하에 정체 모를 액체를 죄 삼켜 냈다.

    “으아아…….”

    입안에 가득한 떫은맛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우민아는 혀를 베 내민 희나의 입에 막대사탕 하나를 물려 주었다.

    “사탕으로 입가심해.”

    “이게 어에여?”

    희나는 달콤한 사탕을 혀에 문지르며 ‘이게 뭐예요?’ 하고 물었다.

    세상에, 이런 끔찍한 맛이 나는 건 처음이었다.

    “이거? A급 회복 포션.”

    우민아가 뜯어낸 사탕 껍질을 바닥에 던져 버리며 말했다.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했기 때문에 희나는 처음에 ‘아. A급 회복 포션이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갈 뻔했다.

    몇 초 후, 정신을 차린 희나는 사탕을 입에서 빼낸 후 제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 잠깐! 언니! 회복 포션이라고요? A급?”

    어쩐지 끔찍한 근육통이 갑자기 사르르 사라지고, 온몸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더라니!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션이라 함은, 아무리 낮은 등급이라도 대단한 값을 했다. 마력이나 체력, 피로 등을 단박에 해결해 주기 때문이었다. 특히 포션은 휴식을 취할 수 없는 전투 시에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D등급 포션만 해도 어지간한 자동차 값은 한다고 들었는데, A급 회복 포션이라면…….

    ‘가격을 상상하기도 무서워.’

    희나는 억 소리 나는 금액을 상상하고는 손을 덜덜 떨었다.

    자기가 이미 수십, 수백억대의 마석을 발전기 대용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은 잠깐 잊어버린 채였다.

    사색이 된 희나의 얼굴을 확인한 우민아가 낄낄 웃었다.

    “야, 물어내란 소리 절대 안 하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공짜로 주는 거야.”

    상상 이상의 친절에 희나는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언니, 저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아니면 뭐 필요한 거라도? 혹시 장기 기증 필요해요?”

    우민아는 대체로 친절하긴 했지만, C급 살림꾼에게 근육통이 왔다는 이유로 A급 포션을 홀라당 먹여 버릴 호구는 아니었다.

    그리고 희나는 이유 없는 과분한 친절 따위는 없다고 믿는 편이었다.

    예로부터 닭과 돼지를 사 줄 때는 감사히 먹어야 하지만, 소고기를 사 줄 때는 의심을 품어야 한다는 금언도 있지 않은가?

    “에이. 눈치가 꽤 빠르네.”

    거기다 우민아는 무서운 소리까지 해 댔다. 간담이 쪼그라들었다.

    “무, 무슨 일이?”

    ‘설마, 마음이 바뀌어서 나를 밀수용 셔틀로 사용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상상에 다다랐을 즈음, 우민아가 입을 열었다.

    “잘못한 게 있는 게 아니고, 부탁할 게 있는 것뿐이지.”

    “부탁……이요?”

    “그래. 자세한 얘기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안 그래도 너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 우리 대화 들어 보려고 귀가 쫑긋 서 있을 게 눈에 다 훤하네.”

    대체 어떤 부탁이기에 A급 포션부터 덜컥 먹여 놓고 대화를 시작한다는 말인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 희나에게 우민아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정신없지? 던전에서 신문지 덮고 잠들었는데, 눈뜨자마자 A급 포션에, 부탁에…….”

    그제야 희나는 이상함을 깨달았다.

    “어라? 그러게요. 난 던전에 있었는데?”

    마지막 기억이 SSS급 신문지를 덮고 잠든 거였다. 희나의 의문 어린 눈빛에 우민아가 설명했다.

    “게이트가 열렸는데도 한참을 안 나오기에 혹시나 하는 걱정에 수색대를 꾸려 들어갔어.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발견한 게 뭐게?”

    “뭐, 뭔가요?”

    “속 좋게 잠들어 있는 너랑 강진현. 근데 강진현 그놈은 침낭에서 자고 있던데, 너는 신문지 덮고 자고 있더라. 매너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하……. 하하.”

    노숙자 같은 모습을 들킨 게 부끄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기들을 찾아 준 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민망함에 헛웃음만 나왔다.

    우민아가 웃고 있는 희나를 향해 무언가를 툭 하고 던졌다. 신문 뭉치였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덮고 있던 신문지는 버리고 오려고 했는데, 이것도 아이템이더라? C등급 신문지? 특이해. 네가 덮고 있었으니까 네 것 맞지?”

    “아. 맞아요.”

    희나는 얼결에 신문지를 받아 살폈다. 신문지는 더럽혀지거나 구겨진 데 하나 없이 아주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쓸모 있는 신문지(C*): 다방면에 두루두루 사용할 수 있는 몹시 쓸모 있는 신문지. 쉽게 찢어지지 않고, 구겨짐이 쉽게 회복된다. 사용자의 쓰임에 따라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가 기능: 사용자의 상황에 따라 등급 감추기가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현재 적용 중)>

    신문지도 민망함이라는 걸 아는지, 분수에 맞지 않는 SSS 타이틀은 숨기고 C등급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등급 감추기가 가능하다고 쓰여 있는데, 이게 바로 그 기능인 듯했다.

    희나는 신분 위장 중인 신문지를 후다닥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우민아가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근육통 외에는 불편한 데는 없고?”

    후다닥 상태를 살피니, 아주 멀쩡했다.

    던전 안에서 굴러서 흙투성이였던 몸은 깨끗하게 씻겨 편한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고, 넘어져서 다친 곳도 싹 나아 있었다.

    “넘어져서 까진 부분도 없어졌네?”

    보들보들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자, 답이 들려왔다.

    “아까 말했잖아. 그것도 너 자는 동안 포션 발랐지.”

    “헉.”

    “너 주부 습진도 좀 있더라. 겸사겸사 그것도 고쳤어.”

    “히익! 주부 습진을 포션으로…….”

    또 포션이라니. 희나의 소시민적 영혼이 목 뒤를 잡고 쓰러졌다.

    우민아가 낄낄 웃으며 희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물어내라고 안 한다니까. 그 표정 좀 어떻게 해 볼래? 웃겨서 보상 청구하고 싶어지거든.”

    무서운 농담에 희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강진현 목숨을 구한 사람한테 이깟 포션 몇 병이 아깝겠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던전 안에는 너희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강진현은 보스 몬스터를 잡은 기억이 없다고 하니까. 그럼 몬스터를 잡을 사람은 너밖에 없는걸.”

    우민아는 비전투계에 처참한 스탯을 가진 희나가 어떻게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렸는지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하지만 희나에겐 그 눈빛보다 다른 게 더 중요했다.

    “강진현 헌터님 깼어요?”

    아무리 굴리고, 흔들고, 심지어 때려 봐도 깨지 않던 사람이 드디어 깼다니.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간 한 고생이 떠올라 속이 부글부글 끓기도 했다.

    “그래. 너도 할 말이 많아 보이네. 궁금한 게 많은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테니까 다 같이 있는 데서 이야기하자.”

    던전 안의 살림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