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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의 살림꾼-31화 (31/228)
  • 던전 안의 살림꾼 31화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희원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촉촉한 흙을 매만졌다.

    시스템 창이 무언가를 설명 중인지, 희원의 시선이 허공에 이리저리 오가는 게 보였다.

    몇 분 후, 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에 묻은 흙을 탈탈 털었다.

    “무슨 일이야? 시스템이 뭐래?”

    희나는 냉큼 궁금했던 걸 물었다. 희원이 검지로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내 직업 말이야. 던전 안에서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사꾼’이잖아. 그동안은 위험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없는데?”

    “여기에서라면 뭔가를 키울 수 있을 것 같아.”

    조금 머쓱한 듯한 대답에 희나는 반색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오빠, 괜히 위험한 헌터 일은 그만두자. 대신 오빠 ‘농사꾼’ 클래스 맞춰서 지낼 방법 알아보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희나는 오빠가 ‘농사꾼’이라는 클래스로 돈을 못 벌어 와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빤 지난 10년 동안 충분히 고생했어. 돈은 나도 버니까 오빠는 이제 쉬어도 돼. 소소한 식물 같은 거 기르면서 오순도순 살면 좋을 것 같아.’

    희나의 스킬로 집이 생겼으니 집을 살 필요도 없었고, 물세와 전기세도 낼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던전 안에 있는 집에 전기가 통하고, 깨끗한 물이 나오고, 와이파이가 연결되는지는 불가사의한 일이었지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이 모든 게 공짜였다.

    의식주 중에서 주거지 걱정을 덜었으니, 다른 건 이제 문제가 별로 안 됐다. 희나의 월급으로 알뜰살뜰하게 지내면 저금도 하면서 충분히 재미나게 살 수 있었다.

    “오빠가 상추나 당근, 파, 방울토마토 같은 거 심으면 좋겠다. 우리 먹을 만큼만 수확이 나와도 좋을 것 같아.”

    “그러게. 마당도 별로 넓지 않으니까 딱 그 정도 심으면 적당하겠다.”

    희원도 동의했다.

    이제 희나와 희원에겐 괜찮은 집과 마당이 생겼다. 비록 그 택지가 던전이고 바로 옆으로 몬스터가 꽥꽥 소리를 지르며 다니긴 하지만, 어쨌든 보통 소시민들이 바라는 꿈같은 집을 얻게 됐다.

    이제 두 남매의 앞길에는 평온한 일상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상일이 언제나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 * *

    “아차!”

    업무 복귀를 하루 앞둔 오후, 희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오빠의 귀환과 ‘홈 스위트 홈’ 스킬 랭크 업과, 새집, 그리고 집 청소 등등에 정신을 빼앗겨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일이었다.

    “왜 그래?”

    던전 토지에 방울토마토 모종을 조심스럽게 심고 있던 희원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희나는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울상을 지었다.

    “오빠, 나 회사에서 잘리면 어떻게 해?”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회사에서 왜 너를 잘라? 노동청에 신고해.”

    희원이 모종삽을 바닥에 푹, 찔러 넣으며 대답했다.

    애들 소꿉놀이 세트 같은 모종삽이었지만 클래스가 ‘농사꾼’이라 그런지 왠지 모를 카리스마가 풍겼다.

    “아냐. 이건 100% 내가 잘못해서 잘리는 거야. 어떡해! 회사에서 손해 배상 청구하면 어쩌지?”

    “그게 뭔데, 대체?”

    “내가 집 업그레이드하는 데 썼던 ‘공간의 조각’ 말이야. 그거 청룡 길드에서 던전 토벌하고 나온 부산물이거든. 근데 그게 사라졌네.”

    대신 손에 남은 건 새까만 씨앗 한 알…….

    유심히 들여다보자, 설명 창이 떴다.

    <□□□ □□: 씨앗.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일단 땅에 심어 볼까? (능력치 부족으로 정보를 완전히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공간의 조각도 그랬지만, 이 □□□ □□의 설명은 한층 더 형편없었다.

    희나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던전에서 나오는 아이템 같은 건 다 비싸다는데, 어떻게 하지?’

    아무리 희나에게 속한 귀속 아이템이 되었다고 해도, 길드에 속한 아이템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실제로 강진현이 던전 공략 보고서에 적어 넣으려던 물건이 아니던가!

    거기다 솔직하게 이 씨앗을 강진현에게 가져간다 치자.

    은색 동전이었던 게 달팽이의 손길(?)을 거쳐 새카만 씨앗으로 바뀌었다고 하면 대체 누가 믿어 주겠는가!

    ‘아니, 그 전에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하지?’

    모든 걸 설명하려면 희나의 스킬까지 다 까야 했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희나에게서 검은 씨앗을 낚아채 이리저리 관찰하던 희원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냥 없어졌다고 잡아떼면 안 돼? 거기다 이건 100% 네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어.”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희나에게는 한줄기 단비 같은 소리였다.

    “100% 내 잘못이 아니라니, 무슨 소리야 오빠?”

    희원이 태연하게 씨앗을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인 너한테 그런 물건을 건넨 건 강진현 헌터잖아. 정체가 밝혀지지도 않은 물건을 함부로 주면 어떻게 해? 어떻게 보면 이건 강진현 헌터의 섣부른 판단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듣고 보니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오빠, 그런데 그 덕분에 오빠가 노역장 노예 신세에서 벗어난 건 알고 있는 거지?”

    강진현 헌터 덕분에 노역장에서 구출된 사람이 말하기에는 조금 은혜를 모르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희원은 모르쇠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든 말하자면 난 네 편이라는 거지.”

    “그래……. 고마워.”

    이젠 백수 텃밭 농사꾼에 불과하지만, 오빠가 등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좀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이거 내가 심어 봐도 돼? 궁금한데.”

    희원이 씨앗의 처분을 물어보기에 손을 휘휘 저었다.

    “맘대로 해.”

    희나는 정체도 알 수 없는 씨앗에 신경을 할애할 기력 따위 없었으니까.

    * * *

    “……모른 척 잡아떼! 모르는 일이라는데 자기가 뭘 어쩌겠어?”

    같이 고기 먹자는 말에 부리나케 자리를 마련한 우민아도 딱 잘라 말했다.

    “언니……. 던전 공략팀 총괄팀장이 그런 말 해도 돼요?”

    우민아가 고기 세 점을 한꺼번에 입안에 욱여넣으면서 대답했다.

    “이런 답변 원하고 나 찾아온 거 아니었어?”

    “방법을 찾으려고 언니를 부른 게 맞긴 한데요…….”

    하지만 그 방법이 진상 고객처럼 모른다며 잡아떼는 것일지는 몰랐다.

    “우리 청룡 길드가 큰 회사 같아서 안 먹힐 것 같지? 의외로 대기업들도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는 거 많아. 거기다 너한테 정체도 안 밝혀진 아이템을 넘긴 건 강진현이잖아. 시말서를 써도 강진현이 써야지.”

    우민아도 오빠인 희원과 같은 말을 했다. 막무가내였다.

    “너네 집 달팽이가 먹어 버렸다고 해. 아니면 갑자기 인벤토리 창에서 스르륵 없어졌다고 하거나. 던전 관련한 물건은 워낙 특이한 게 많아서 그런가 보다, 할걸.”

    “그런 말을 제 입으로 어떻게 해요……?”

    “왜, 같이 던전 데이트도 했다면서? 걔 그렇게 성격 더러운 놈은 아니야. 좀 꽉 막힌 부분이 있어서 그렇지.”

    우민아가 젓가락을 휘두르며 강진현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

    “하지만…….”

    희나는 강진현의 무뚝뚝한 얼굴을 떠올렸다.

    직접 옆에서 겪은 그는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긴 했지만, 일에서는 가차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그런 얘기 꺼내긴 좀 무서운데. 에휴, 그래도 제 잘못도 있으니까 제 입으로 직접 이야기해야 하는 게 맞겠죠.”

    “영 무서우면 뇌물 좀 써 보든지.”

    우민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에 희나가 손을 내저었다.

    “제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S급 헌터한테 뇌물을 써요? 돈이 있나 아이템이 있나? 강진현 헌터가 부족할 게 뭐가 있겠어요?”

    “엄청 있는데.”

    “저 놀리지 마세요, 언니. 저는 정말로 진지하단 말이에요.”

    희나의 반응에 우민아가 탁, 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표정이 진지했다.

    “나도 진심이야. 걔가 뭐가 부족하냐고 물었지? 걘 입맛이 부족하고, 잠도 부족해. 그래서 싸가지가 부족해졌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S급 헌터는 다 좋을 것 같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강진현 같은 경우에는 엄청 예민해져서 가끔 일상생활이 좀 힘들다더라고. 미각이 남들보다 훨씬 발달해서 어지간한 음식에는 감흥이 없게 됐고, 소음과 기척에 예민하니 잠도 깊게 못 든다든지, 등등.”

    “헉, 안됐어.”

    생각지도 못한 S급 헌터의 고충에 희나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탄식했다.

    밥과 잠이라니. 이것처럼 한국인에게 중요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나도 그렇고 우리 청룡 길드 길드원들도 그렇고, 다들 랭크가 꽤 높다 보니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거든. 그런데 희나 너는 김밥 몇 줄로 그놈들을 완전히 평정해 버렸잖아. 다들 무슨 마약 한 것처럼 녹아내렸다고.”

    이어지는 과한 칭찬에 희나의 볼이 붉어졌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고등급 헌터 애들을 절절 매달리게 만든 그 손맛으로 S급 헌터의 입맛도 사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이 말이야.”

    그제야 희나는 우민아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제 손맛 스킬을 쓴 음식을 싸 가서 한번 빌어 보라는 말인 거죠?”

    우민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걔가 혀를 가지고 있다면 끔뻑 넘어가고도 남을걸.”

    “근데, 언니. 겨우 음식 같은 걸로 길드 아이템 잃어버린 걸 무마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고말고. 나 봐라. 네가 구워 주는 고기에 홀려 네 비밀도 다 지켜 주고, 우리 길드에 취업도 알선해 주고, 내 집 주소로 너 전입 신고도 시켜 주고……. 간이랑 쓸개만 안 떼 줬지, 이 정도면 다 해 준 것 아니냐?”

    그랬다. 우민아는 희나의 전입 신고 문제까지 걱정해서 자기 주소로 희나의 이름을 넣어 주기까지 했다.

    희나가 ‘홈 스위트 홈’ 스킬을 쓰는 장면을 남에게 들킬까 봐 무서우면, 자기 집을 통해 바깥을 오가도 된다고 허락까지 해 준 상태였다. 엄청난 호의였다.

    하지만 그 말에 희나는 조금 섭섭함을 느꼈다.

    “언니, 여태까지 저한테 잘해 주신 게 다 고기 때문이었던 거예요?”

    던전 안의 살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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