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안의 살림꾼-15화 (15/228)
  • 던전 안의 살림꾼 15화

    * * *

    “벽지 붙이는 건 아무래도 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불가능할 것 같아.”

    희나는 화려한 벽지를 페인트로 칠해 덮길 선택했다. 그쪽이 한결 더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하자마자 다음 날 곧바로 적당한 페인트 색을 골라 칠 준비를 시작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끝내는 편이 정신 건강에 나을 것 같았다.

    희나는 결심한 일에 대해서는 일 처리가 확실하고 빠른 편이었다.

    발품 팔 만한 일은 <홈 스위트 홈> 스킬을 사용해서 이동하니 고생은 적게 들었다.

    적당한 장소를 생각하고 그곳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됐다. 자동차보다 더 편안한 능력이었다.

    결심은 빠르고 오가는 시간은 줄어드니 재료는 금방 모였다.

    희나는 던전 쪽으로 문을 열어 둔 채 페인팅을 시작했다.

    밖에서 몬스터들이 끼룩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긴 했지만, 익숙해지니 개 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우선 쓸데없이 벽에 붙어 있는 엠보싱 포인트 벽지들은 벅벅 떼어 내어 버렸다.

    그리고 페인트가 묻을 만한 곳은 전부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둔 후, 롤러로 쓱쓱 벽을 문질렀다.

    야무진 손끝 스킬에 착장 50% 버프까지 받으니 희나가 페인트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페인트가 저절로 칠해지는 수준으로 롤러가 움직였다.

    “흠, 음흠, 흠~.”

    희나는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놓고 흔들흔들 박자에 맞추어 롤러질을 했다.

    오색이도 흥이 나는지 S 자를 그리며 안테나를 삐쭉삐쭉 흔들었다.

    셀프 페인팅은 적어도 원룸 청소보다 덜 힘들었다. 체감상으로도, 시간상으로도 그랬다.

    처음 해 보는 것이라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는데, 말리고 덧칠하는 시간을 고려해도 한나절도 안 걸렸다.

    심지어 중간에 식사도 했고,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세간살이 쇼핑도 했는데 말이다.

    ‘택배를 곧바로 받을 수 없는 건 정말 불편하네.’

    희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 집은 다 좋은데, 택배와 배달 음식이 좀 아쉬웠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면 된다고, 택배는 무인 택배함으로 시키면 됐다.

    던전 게이트 때문에 이 집에 맨몸으로 들어온지라, 부족한 가재도구들이 많았다.

    거기다 스킬로 얻었지만 ‘내 집’이라고 하니, 좀 더 애정이 생겨 꾸미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젠 집주인 걱정 없이 벽에 못질해도 된다!’

    그 생각을 하니 흥겹게 콧노래까지 나왔다. 집주인의 눈치를 보며 아슬아슬하게 연명했던 나날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다 했다!”

    희나는 마지막 덧칠을 끝낸 벽을 보며 손바닥을 짝짝 맞부딪쳤다.

    방의 네 면 중 한 면은 머스터드빛이 살짝 도는 개나리색으로 칠했고, 나머지 면들은 아이보리빛이 도는 흰색 페인트를 써서 칠했다.

    “화사하고 예쁘다.”

    노란색은 희나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노란색은 따뜻하고 온화한 동시에 발랄해 보이는 색이다. 절로 지친 마음을 녹여 줄 것 같았다.

    사실 노란색 대신 녹색을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 의견은 금세 기각됐다.

    온통 녹색으로 가득했던 정글 던전의 기억이 떠올라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희나는 그렇게 좋아하는 색깔 하나를 잃었다.

    친환경 페인트니 뭐니를 사용한 보람이 있는지, 페인트 냄새는 비교적 빠르게 빠졌다.

    페인트가 번지지 않게 붙여 둔 마스킹 테이프를 떼며 뒷정리를 하는데, 시스템 창이 반짝였다.

    원룸 레벨이 올랐다는 알림 창이었다.

    그것도 레벨이 두 개나 연달아 올라서 희나의 ‘낡은 기본형 원룸’은 어느새 레벨 7이 되었다.

    덩달아 부가 효과까지 나타났다. 사르르, 별빛 같은 것이 벽면에 흡수되며 메시지가 떴다.

    “와…….”

    희나는 원룸 안을 둘러보았다. 아까 페인트칠을 끝냈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좀 더 부드럽고 아늑해진 것 같았다. 햇살에 잘 말린 이불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바삭바삭하고 따끈따끈했다.

    “집 안을 꾸미면 이런 부가 효과가 나타나는구나.”

    집을 꾸미는 건 심미적으로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심리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팍팍하게 사느라 이렇게 기분 전환하는 법도 모르고 세간살이만 적당히 모아 두고 지냈는데…….’

    희나는 꼭 퀘스트나 레벨 업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집을 꾸며 주는 게 꽤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스킬과는 별개로 진짜로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 같았다.

    잠시 집 안의 바뀐 풍경에 감탄하던 희나는 퀘스트 창을 열었다.

    <도전! 인테리어!(난이도 미정): 끔찍한 인테리어에서 벗어나고 싶으신가요? 아늑한 나만의 공간을 가꾸고 싶으신가요? 셀프 인테리어에 도전하세요.

    ▶ 필수 퀘스트 (2/3)

    - 쓸데없는 벽지 뜯어내기 (100/100%)

    - 벽 컬러 바꾸기 (100/100%)

    - 싱크대 컬러 바꾸기 (0/100%)

    ※ 시간제한: 없음

    ※ 퀘스트 불이행 시 불이익: 심미적으로 고통스러운 주거 생활이 지속됩니다.

    ※ 퀘스트 보상: ‘홈 스위트 홈’ 스킬 레벨 업!

    ▶ 부가 퀘스트 (1/n)

    - 올바른 벽 컬러 선택 (100/100%)

    ※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완료 시 추가 보상 지급>

    필수 퀘스트 두 개가 완료되어 있었고, 부가 퀘스트 하나도 생겨나 완수했다고 체크되어 있었다.

    ‘올바른 벽 컬러 선택이라니.’

    아까 떴던 부가 효과가 바로 이 퀘스트 완료 효과였나 보다.

    희나는 페인트 색깔을 적절히 골라 칠했다고 칭찬받은 듯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시스템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심미안적으로 희나와 굉장히 잘 맞는 것 같았다.

    “시스템이 뭘 좀 아네. 그치, 오색아?”

    「?」

    오색이에게 실없이 말을 거니, 작은 달팽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물음표를 띄웠다.

    퀘스트 창을 내리자마자 레벨 업을 하였으니 두 번의 보상을 뽑으라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여전히 보상은 랜덤 뽑기였다.

    “제발 고등급으로 뜨게 해 주세요!”

    희나는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예스를 외쳤다.

    지난 몇 번의 랜덤 뽑기 경험으로 머리는 이게 얼마나 짜릿한 경험을 주는지 알았다. 평온했던 마음에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대박! 대박! 인생 한 방!」

    오색이도 옆에서 희나를 응원했다.

    “……오!”

    희나는 눈앞에 뜬 보상에 손뼉을 쳤다.

    D등급짜리 욕조화가 끼어 있긴 했지만, B등급의 세탁기를 뽑았다.

    “아싸, 돈 굳었다!”

    세탁기는 아무리 싼 모델을 사더라도 수십만 원은 했다. 거기다 무거워서 희나 혼자 옮기고 설치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졸지에 손빨래나 세탁방 생활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거기다 동파되지 않는 살균 세탁 세탁기라니.

    추운 겨울날 꽁꽁 언 세탁기 수도관을 죽어라 녹였던 경험이 있는 희나에게는 만족스러워도 아주 만족스러운 기능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데, 요즘 내 인생이 진짜 그런 것 같아.”

    희나는 싱크대 옆자리에 짠 하고 설치된 작은 드럼 세탁기를 보며 오색이에게 속닥거렸다.

    “죽어라 야근하고 있는데, 각성하고. 각성해서 좋아할까 했는데, 등급은 D등급에 이상한 살림꾼 클래스가 나오고. 그런데 살림꾼 스킬 덕분에 던전에서도 무사히 살아 나오고…….”

    그 외에도 더 있었다.

    하루아침에 집과 직장을 잃었는데, 결과적으로 더 좋은 것을 얻게 됐다.

    전셋집이 아닌 ‘내 집’이 생겼고, 주야장천 야근만 시키는 소기업이 아닌 ‘청룡’이라는 대기업에 정직원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청룡은 던전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망할 일이 없는 길드였다.

    희나는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집이 던전에 이어진 것도 나중 돼서는 큰 도움이 될지도 몰라.”

    지금 당장은 어떻게 쓸지 전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대단한 운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희나는 방바닥에 철퍼덕 누워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읏챠! 싱크대에 바를 시트지는 내일 택배 온댔으니까, 오늘은 이만 쉬자!”

    희나의 배 위로 뒤뚱뒤뚱 올라온 오색이가 동감이라는 듯 머리를 까딱거렸다.

    「수고수고.」

    던전 안의 살림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