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03. 기이할 기(奇)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함, 거친 욕, 기분 나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맥없이 뒤로 밀려나는 몸,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차가운 물, 까무룩 꺼져가는 정신.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새카만 어둠뿐. 빛 한 줌 없는 풍경을 멍하니 보는데 아래로 끊임없이 가라앉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잡을 것이 없고 또 너무 고통스러워 더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희야!』
하람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감은 눈을 번쩍 떴다.
조금 전까지 보이는 것이 없던 시야에 환한 불빛이 쏟아졌다. 눈이 따가워 고개를 돌렸다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몸의 주인이 아는 자인지 얼굴이 익숙했다. 그러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를 멀거니 보며 상체를 느릿하게 일으켜 세우는데 남자가 입에 물고 있는 장죽을 입가에서 떼어 냈다.
“내 이름이 뭔지 말해 보거라.”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틀어 묶고 새카만 슈트를 입고 있는 남자를 불안하게 보는데 두려웠다. 도망치듯 엉덩이 걸음으로 더듬더듬 물러났다. 지켜보던 이름 모를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네가 들어간 그 몸은 네가 감히 머물 곳이 아니다. 말로 할 때 곱게 나오거라.”
남자가 웃는 낯으로 음산하게 읊조리더니 장죽을 잡고 있는 손을 허공에 짧게 저었다. 장죽이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하람이 흠칫, 떠는데 바로 옆에서 무언가 훅 날아가더니 남자의 손에 턱 잡혔다.
“셋을 세지. 그 안에 나오지 않으면 너는 원한을 풀 수도, 환생을 하지도 못할 거다.”
남자가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났다. 곧장 하나, 하고 말하며 그와 같이 온통 시커먼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조명 빛에 검날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남자에게서 나오는 기세가 사나웠다. 너무 두렵고 무서워 이가 딱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둘.”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던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전신이 떨렸다.
“셋…….”
『워, 원(怨)이 있습니다! 이리 죽을 수 없습니다!』
써늘한 검날이 목에 가까이 닿는 순간 하람이 비명 지르듯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눈물을 터트렸다.
『억울합니다. 너무 억울해서, 차사를 피하며 이승을 헤매고 또 헤매며 저를 보는 자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원통함을 해결하기 전까지 죽을 수 없습니다!』
거둬지지 않는 검날과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에 눈 주변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눈물을 쏟아내며 소리친 하람이 남자를 올려다보며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억울함만 풀리면 죽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여자처럼 다소 높은 미성으로 원통함을 호소하며 눈물 흘리는 하람을 가만 내려다보던 이한이 눈매를 구겼다. 이내 혀를 차며 목에 대고 있던 검을 검집에 탁 소리 나게 넣었다.
“……운 좋은 줄 알거라.”
흉흉한 검이 거둬지고 자비가 보이지 않던 얼굴이 풀렸다. 하람이 손바닥이 아플 만큼 빌던 손을 내렸다. 감사하다고 하며 연신 허리를 깊게 숙였다가 들었다. 지켜보던 이한이 다시 한번 더 혀를 차며 바닥에 쿵쿵 소리가 날 만큼 닿는 하람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네가 들어간 몸은 귀하디귀한 몸이다. 함부로 움직이지도, 상처를 내지도 마라.”
바닥에 몇 번 닿지도 않았는데 그새 이마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멍이 들지도 모를 이마를 약하게 매만졌다.
“원을 들어줄 테니 그만 나와라.”
이한이 잡고 있는 검을 바닥에 두었다.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며 눈치를 한참 보던 하람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무릎 꿇고 앉은 몸이 옆으로 맥없이 기울어졌다.
기울어지는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이한이 두 팔로 받쳐 잡았다. 축 늘어지는 몸을 반듯하게 눕히고 그 옆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제 허벅지에 하람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
“쯧쯧, 이렇게 잘 휩쓸려서야.”
땀과 눈물에 얼굴이 푹 젖었다. 허벅지에 기대고 있는 창백하게 질린 하람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뺨에 남아 있는 눈물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닦아냈다. 그사이 하람에게서 빠져나온 원귀가 무릎 꿇고 앉았다.
“그래, 네 원은 뭐지?”
원이 얼마나 강하면 지독한 원귀(원한이 남아 저승에 들어가지 못한 귀신)가 됐을까. 이한이 물에 푹 젖은 꼴의 원귀를 보다 손짓 한 번으로 장죽을 꺼내 입에 물었다.
금세 희부연 연기에 감싸인 이한과 하람을 보던 원귀가 또다시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쌓인 원통함과 외로움, 서러움 따위가 터진 듯 원귀가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
이한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하람의 밤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데 얌전하던 가슴이 크게 들렸다. 곧 다물려 있던 입술이 크게 열리더니 시커먼 액체를 왈칵 토해냈다.
이한이 하람의 어깨를 잡아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하람이 몇 번 더 토해내다 잔뜩 찌푸리고 있는 눈을 느리게 떴다.
“……으, 속 쓰려.”
“정신 차렸나.”
왜인지 속이 뒤집힐 듯이 쓰리고, 메스껍다.
꼭 음식을 잘못 먹고 체한 것 같은 느낌에 명치 위를 두 손으로 짚고 있는데 이한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람이 놀라 옆을 보았다.
“……이, 한 님이 여기에 왜 있으세요?”
“네가 날 불렀으니까.”
“제가, 요?”
이한을 제가 불렀던가? 언제?
의아함을 담아 보자 이한이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 치더니 잡고 있는 어깨를 놓았다. 하람의 상체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어?”
바닥에 뒤통수가 부딪치겠다 싶어 눈을 질끈 감았는데 크게 아프지 않다. 뭔가 싶어 눈을 떴다가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이한의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이한의 허벅지를 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여기 왜, 누워 있죠?”
왜 쓰린지 모를 속처럼 왜 이한의 허벅지에 기대 누워 있는지 모르겠다. 바보처럼 눈을 끔뻑이다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주변을 훑었다.
“여긴 또 어디, 헉!”
분명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에게 먼저 간다고 했는데 웬 방에 있다.
두툼한 매트와 베개, 이불, 옷장만 있는 그리 넓지 않은 방을 훑던 중 울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흠칫하고 상체를 뒤로 물렸다.
“호들갑 그만 떨고 앉아라.”
“무, 무슨…….”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람이 어리둥절한 낯으로 주춤주춤 이한의 옆으로 가 앉았다. 장죽을 입에 무는 이한과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네가 날 불렀고 부름에 내가 왔고 넌 여기 누웠고. 나는 날 불러놓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 네 모습을 보다 원귀에 씐 것을 알아차리고 저 원귀를 꺼냈고, 이제는 원귀의 원을 들어주려고 하고 있다.”
이한이 여기에 왜 있고, 저 여자는 왜 울고 있었고, 여긴 어디고, 이마와 다리는 왜 아픈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 멍한데 이한이 웬일인지 알려준다. 하람이 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해했으면 가만히 있어라.”
“예? 아, 예.”
뭐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어야 할 것 같다. 하람이 눈치 보다 벌리고 있는 입을 다물고는 이한과 같이 힘겹게 입을 여는 원귀를 보았다.
『……저희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아버지 홀로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보라색으로 질린 입술에서 우는소리가 아닌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저희에게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고 또 외로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을 보았고 1년 후 재혼을 하셨습니다. 저희는…… 저희는 새어머니가 좋았습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서 남동생이 세 명이나 태어나고, 차별해도 그저 좋았습니다…….』
말을 하면서 과거가 떠올랐는지 원귀가 얼굴을 구기며 꿇고 있는 다리 위로 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새어머니가 저희를 미워하고, 때려도……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끼리 감내했는데, 친어머니가 저희 모르게 들어둔 보험을 새어머니가 발견했습니다.』
“설마…….”
보험이라는 말에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하람이 입술을 깨무는 원귀를 보며 똑같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희는, 남들 다 앓는 감기 한번 크게 앓은 적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갑자기 저희가 아프다고, 많이 아파서 요양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면서 같이 별장에서 지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원귀의 눈에서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나왔다. 원이 얼마나 강한지 피눈물을 흘렸다.
『저희는 괜찮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새어머니가 먼저 나서서 저희를 챙겨주는 모습에 의심은커녕 고맙다고 하며 허락했습니다. 저희는…… 이유도 모르고 집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별장에 가게 됐습니다.』
곧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말을 듣던 하람의 눈이 크게 뜨이고 원귀가 다시 한번 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버지가 연구를 위해 마련한 별장은 주변에 집 하나 없는 외지면서 옆에는 강이 흐르는 곳에 있는데, 그런 곳에 새어머니와 첫째 남동생과 가게 됐습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턱에서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늦은 밤, 새어머니가, 저와 남동생에게 갑자기 물을 사 오라고 했습니다. 남동생이 귀찮아하다가 차를 확인하더니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불안감에 아침에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는데, 새어머니가 당장 사 오라고 떠밀었습니다. 결국, 남동생과 같이 갔고……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원귀의 입술이 다물렸고, 하람의 입술에서 탄식이 작게 터져 나왔다.
『저는, 쌍둥이 동생과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고, 다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승사자의 부름을 버티고, 떠돌아다니며 저승에 가지 않았는데…… 제가 죽고 얼마 있지 않아, 제 쌍둥이 동생까지……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