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독배
피.
에카도르 셰론은 처음 그 검붉은 액체를 보았을 때, 아랫배가 빠듯하게 차오르던 감각을 잊지 못했다.
자주 보다 보니 맨 처음 보았을 때보다야 그 뿌듯함이 덜하다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그를 흥분하게 만들지 못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왔는지 모르겠군. 내 자식이 맞긴 한 건가?’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가문에 저런 게 나올 리 없지 않나!’
그가 피에 홀리기 시작하고서부터 그의 부모는 매일같이 싸웠다. 싸움의 끝은 한숨이었다.
셰론 가문의 유일한 후계를 죽이지도, 그렇다고 이대로 두지도 못했다.
그 잔혹한 성정이 밖으로 흘렀다간 가문의 위상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셰론은 좀처럼 자신의 성미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이러는 것이냐!’
먼 친척이라는 남작가의 후계자를 가지고 놀려다 걸렸을 때, 에카도르는 인생 처음으로 곤란해졌다.
사용인을 가지고 놀았을 때보다 뒤처리할 것이 훨씬 많았다.
아버지가 재물과 권력으로 막지 않았다면 에카도르는 정신병원이나 감옥에 갇혔을 터였다.
에카도르는 그제야 자신의 신분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해서 레버리 영지인지 쓰레기 영지인지 하는 곳으로 순순히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여러 가지를 터득했다.
자신의 신분과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는 놀잇감을 고르는 법, 가지고 논 놀잇감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법 등을.
‘오늘 일을 그만둔다지?’
그리고 또한 자신의 비밀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예? 예, 도련님. 저희 애가 엄마를 자꾸 찾아서요.’
‘그렇구나. 딸이라고 했었지? 딸이 어려?’
‘아, 아직 엄마, 품이 필요한 나이죠, 예.’
‘딸이 어리느냐고 물어보는데 왜 이렇게 떨어? 별로 떨 만한 질문도 아니지 않아?’
아니면 떨어야만 할 무언가가 있나?
간혹 시중을 드는 이들 중에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이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이렇게 멍청한 이들은 온갖 티를 다 내며 황급히 일을 그만두려고 했다.
묵묵히 자기 일을 이어서 했으면, 곁에 두고 예뻐해 줬을 텐데.
‘사, 살려 주세요, 도련님. 제발, 어디 가서도 말하지 않을게요, 약속 드…….’
‘말이 많네. 난 말 많은 건 좋아하지 않는데.’
재갈을 물리지 않은 놀잇감은 시끄러웠다.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을 치고.
하지만 에카도르는 비명이 멎으며 주위가 적막으로 가득 차는 그 찰나의 순간을 사랑했다. 그때만큼은 피비린내도 향긋하게 느껴졌다.
‘늑대 밥으로 줘 버려.’
그렇게 한바탕 지루함을 떨쳐내고 나면, 한동안은 점잖은 도련님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다 지루해질 즈음이 되면,
‘일 오늘까지만 한다며, 마코?’
또 티를 내면서 일을 그만두려는 이들이 생겼다. 이건 뭐 놀잇감이 스스로 생겨나는 수준이었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다고 했나?’
‘예, 예, 도련님. 제, 제가 없으면, 안 되세요.’
‘어머니가 아프냐고 물어본 게 그렇게 무서워? 왜 그렇게 떨어, 마코. 그러니까 내가 꼭 너를 죽이려는 거 같잖아.’
* * *
“앞에 놓인 술잔 중 하나에만 독이 들어 있네. 이 둘 중에서 운이 좋은 하나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단 뜻이지.”
피가 아닌 다른 건 셰론 후작을 딱히 흥분시키지 못했다. 명예도 돈도, 이성에도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그는 청렴한 기사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런 이미지는 유용했다.
신분이 높아질수록 더 재미있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들키더라도, 그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왕자가 왕위에 오르고 나면 그는 더욱 거칠 것이 없고, 그러면 귀족을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에드윈 자네도 알겠지만, 피라는 것이 처음에는 섬뜩하지만 보면 볼수록 무뎌지지 않겠나.”
그는 이제 순순히 흘러내리는 피에는 예전처럼 흥분하지 못했다. 다른 것이 필요했다.
“천한 피는 지겹도록 많이 봤네. 이제 좀 다른 피를 보고 싶단 말이지.”
고귀한 피, 예컨대 이혼을 당하고 인생의 밑바닥을 치면서도 예전 상사를 위해 달려오는 기사의 피 같은 것 말이다.
“전 귀족이 아닌데요.”
르니예가 말했다.
“그건 내가 잘 알지.”
귀족은 아니지만, 곧 귀족이 될 피는 어떨까. 저건 천한 피일까, 고귀한 피일까.
그 어디쯤 어중간한 피이려나? 오히려 여자 쪽의 피가 더 희귀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후작은 입맛을 다셨다.
“왜 둘 다 죽이지 않는 겁니까?”
에드윈은 눈빛으로 컵을 깨트릴 듯 노려보았다.
“두 잔에 전부 독이 들어 있는 겁니까?”
“아니, 그렇지 않네. 작은 게임에도 규칙이 있어야 재미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난 검에 맹세한 기사야. 약속을 쉽게 저버리지 않지.”
한 명은 살려 준단 뜻이었다. 이건 최근 에카도르가 생각해낸 놀이였다.
십년지기 친구 둘, 부부, 전투 속에서 함께 살아남은 전우 등등을 데려다 놓고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한 명은 살아남는다. 대신 남은 한 명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목격해야 한다.
행운에도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죽은 사람이 억울하지 않을 테니까.
새로운 놀이의 시작이 이혼한 부부일 줄은 몰랐지만 신선한 맛은 있었다.
“자, 이제 골라 보게. 시간을 더 지체하면 둘 다 살아 나가지 못할 테니.”
싸워서 여길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서 가장 유리한 전술은 시간을 끄는 것뿐이었다.
조금만 시간을 끌면 벨데메르가 올 테고 그러면 르니예는 안전하게 나갈 수 있었다.
“고르면 됩니까?”
“자네가 먼저 고르겠나?”
에드윈은 르니예를 돌아보았다. 르니예는 설마 하는 얼굴로 에드윈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고르라고 대뜸 고르는 건 아니지? 저 수작에 넘어가는 건 아니지?
동그란 눈이 소리 없이 묻고 있었다.
“부인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먼저 고르고 싶습니다.”
에드윈의 말에 르니예의 얼굴이 배신감으로 일그러졌다. 설마가 역시로 변하는 이 순간에, 기가 차 흘러나오는 실소를 르니예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요, 에드윈, 원하는 잔을 골라 보도록 해요. 후작님, 제 전남편이 원하는 만큼 마음껏 잔을 고를 수 있도록 시간을 넉넉히 주시겠어요?”
르니예는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자네 전 부인은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로군. 대체 왜 저런 여인과 이혼을 하려 하나.”
후작은 언뜻 진심인 것 같은 목소리로 혀를 찼지만, 실은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내 특별히 자네에게는 시간을 더 주지. 신중하게 골라 봐.”
에드윈은 테이블 앞에 섰다. 둘 중 한 명은 죽는다.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벨데메르라면 그 안에 여길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데도 충분할 것이다. 에드윈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러 사건이 있고서, 이혼을 할 즈음에서야 그는 깨달았다. 르니예가 준 애정은 진심이었으며, 자신이 그 애정을 대한 태도는 상당히 위선적이었고 또 못났다는 것을 말이다.
에드윈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을 르니예의 탓으로 돌렸고 모질게 대했다. 일부러 상처를 준 날도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굉장히 큰 잘못을 했다.
르니예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불륜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데, 자신이 불륜을 했다기에는 또 상대방이 떠오르지 않고 이상하게 기억이 흐릿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3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에드윈은 르니예에게 충실하지 못했고 모진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다는 것이다.
에드윈은 르니예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소용이 없을 테고, 이건 그녀에게 충분한 사과가 될까.
“이제 고르겠습니다.”
에드윈은 두 잔을 동시에 들었다. 자기가 고르고 나머지 하나는 르니예에게 줄 것처럼, 르니예 쪽으로 살짝 돌아섰다.
르니예는 차오르는 배신감에 두려움도 잊고, 아무거나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르니예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잠깐만, 지금 뭐 하는……!”
에드윈은 그대로 연달아 두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르니예는 그의 입가에 흐르는 붉은 액체를 황망하게 쳐다보다가 에드윈에게로 달려갔다.
“에드윈!”
“……부인.”
에드윈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르니예는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라포어 경, 이거 세상에, 내가 자네를 잘못 보고 있었군. 자네의 희생정신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야.”
그러나 후작이 웃고 있다는 사실은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게임을 하다니, 내 상상을 뛰어넘었어. 자네를 부르길 잘했다니까.”
후작은 손뼉을 치며 어둠 속에서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에드윈은 그런 그를 보다가 옅은 신음을 흘리고는, 기운이 빠진 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에드윈, 정신을, 정신을 좀 차려 봐요.”
정신을 차리고 싶어 한다고 정신을 차릴 수 있으면 그게 독이겠나.
르니예는 알면서도 그 소리밖에 할 수가 없었다.
젠장! 문 따는 기술이 아니라 검술을 배워 놓을걸!
르니예는 후작과 에드윈 사이를 몸으로 막아섰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 어머니의 원수이자 전남편의 원수, 그리고 제가 제 손으로 공작에 올려놓은 자.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두려웠다. 그래도 르니예는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 주시죠, 레이디.”
“그건 안 되겠는데요, 후작님.”
신사적인 발언과 달리 그의 손아귀는 무자비했다. 그는 르니예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내동댕이치려고 했다.
쓰러져 있던 에드윈이 일어나 그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 들기 전에는.
* * *
‘도련님, 저희 어머니는, 제가 없으면, 큭!’
마코야데스에게 돌봐야 할 노모가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퇴근하기만 기다리는 병든 어머니가 있었다.
마코야데스의 실수라고는, 시신을 버리는 일을 더는 하기 싫어 일을 그만둔다고 한 것뿐이었다.
‘살려 주세요, 도련님, 제발.’
그는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의 도련님은 안타깝게도 자비라는 것을 몰랐다.
마코야데스는 도망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윽, 이 천한 것이!’
그는 도련님의 상처 하나 없는 종아리를 물어뜯었다. 그러나 그건 에카도르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에카도르의 단검이 마코야데스의 등허리에 박혔다.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번 박히면 비틀어야만 빠지도록 제작한 검이었다.
커다란 고통에 마코야데스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비명은 새된 숨이 되어 흩어질 뿐이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에카도르는 마코야데스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가, 그대로 그를 벽난로 안에 처넣었다.
마코야데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불이야, 불!’
이라고 외치는 소리 또한 들었다. 불 속에서 불이 났다는 외침을 듣는 것이 퍽 웃긴다고 생각하며 마코야데스는 기절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정신이 좀 드냐?’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