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말하지 않으면
“이거 아버지한테 좀 미안하네.”
제 이름이 새겨진 상단주 명패를 보며 르니예는 아버지 생각을 잠깐 했다.
르니예는 상단주 자리를 욕심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제 것이라는 생각은 기저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상단주가 되면 맡아야 할 골치 아픈 일도 처리하기 싫었다.
그래, 한마디로 르니예는 아버지 돈으로 편하게 놀고먹으며 살고 싶었다.
지금도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르니예는 해 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래도 뭐, 어차피 내가 받을 자리였으니까.”
다행히 상단 내부에서는 잡음이 나오지 않았다. 메리를 비롯해 상단에서 잔뼈깨나 굵은 사용인들이 르니예가 마땅히 상단을 이어받아야 한다며 떠들고 다닌 보람이 있었다.
“조금 일찍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작은 마님. 아니 이제 다시 아가씨죠?”
혀를 쏙 빼고 킥킥 웃던 에니가 아차 싶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지, 이제는 상단주 님이시네요.”
르니예는 어깨를 으쓱했다. 콜론의 동의 없이 르니예는 상단주 자리에 앉았다.
하긴, 어차피 콜론은 앞으로 르니예가 할 일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와 다른 방식으로 상단을 운영할 예정이었다.
먼저 지난날의 과오를 씻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르니예는 올바른 방식으로 상단을 운영해 보고 싶어졌다.
“앞으로 바쁠 거야. 할 일이 많거든.”
“그렇죠. 일단 상단에 정확히 자금이 얼마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거래처에 연락도 돌려야 하고요.”
에니는 할 일을 적어 놓은 수첩을 열어 보았다. 목록이 한 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 끝나질 않았다.
“장부도 다시 작성해야 하고, 곧 조사관이 온다니까 조사에도 협조해야 하고.”
“결혼식도 해야 하고.”
“결혼식도 해야……, 결혼식이요?”
에니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르니예는 그런 에니를 보며 싱긋 웃었다.
에니는 어쩐지 이런 상황이 전에도 한 번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것은 느낌이 아니다.
“결혼식을 또요?”
“응,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하려고.”
에니는 수첩에 목록 하나를 더 추가했다.
“꼭 그날 같네요. 아가씨가 외박하고 다 찢어진 옷 입고 온 날이요. 와서 대뜸 남편이 하나 더 생겼다고 하셨죠.”
그때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꿈 같았다. 게다가 이상하게 기억이 흐릿한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뭔지 도통 생각나질 않았다.
“그다음에는 또 대뜸 결혼식을 한다고 하셨고.”
아무도 모르게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작은 주인님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하시더니, 갑자기 필요 없다고 하시고. 꼭 죽었다 깨어난 사람처럼 변하셔서 놀랐다니까요.”
그랬지, 죽었다가 깨어났지. 죽었다가 깨어나서 에드윈을 놓을 수 있었는지도 몰라.
“죽었다가 깨어나……!”
설마, 내가 소원을 빌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온 것 때문에 소원이 꼬였나?
‘내 남편이 죽어서도 저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라고 소원을 빌었고 이뤄졌었는데, 다시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고서 ‘내 남편이’까지 말한 그 소원을 이어서 빌었다.
“아니지, 이게 말이 안 되잖아.”
시간을 되돌아왔다. 그러니까 그건 아예 없었던 일인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나한테는 있었던 일이잖아.
그러니까 이 소원의 주체, 소원을 빈 당사자, 소원의 주인인 나한테는, 없었던 일이 아닌 거잖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에니는 갑자기 혼잣말하며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르니예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에니, 일이 좀 꼬인 것 같아. 조금이 아니라 많이.”
소원에는 규칙이 있다. 벨데메르나 샤피로가 귀찮은 일을 방지하고자 지은 규칙이 아니라, 신이 정해 준 규칙이 있다.
소원은 한 번만 빌 것.
그런데 르니예는, 두 번을 빌어 버렸다.
“또 멀미가 나는 건가?”
수도로 올라가는 마차 안. 르니예는 내내 표정이 좋지 못했다.
“마차가 별로 흔들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벨데메르는 르니예가 또 멀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멀미 때문이 아니었다. 르니예는 큰 고민에 빠졌다.
벨데메르에게 그 사실을 말해야 할까? 말하면 벨데메르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르니예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르니예가 세운 가설이 틀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진짜 결혼식을 하고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으면 소원이 이뤄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죄를 짓는 기분인 건지.
“저번처럼 잠들게 해 줄까?”
“네.”
그래, 차라리 자자. 르니예는 일단 그 문제를 회피하기로 했다.
아직 결혼식이 남아 있으니까,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서에 도장 찍어도 안 이뤄지면 그때 말하자.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복잡하니까 일단 자는 거야.
“그렇게나 멀미가 심해?”
“죽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빨리, 빨리 재워 줘요.”
르니예는 무작정 벨데메르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눈을 꼭 감는 르니예를 보는 벨데메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잘 자, 르니예.”
벨데메르의 커다란 손이 르니예의 눈을 가렸고, 르니예는 이내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르니예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공작저요?”
패러히트 공작저였다.
“여인숙에 가는 줄 알았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소공작이 우리 마차를 기다리고 있더군.”
세사르의 짓이었다.
“샤피로를 자주 보려고 그랬군요.”
르니예는 침대에 앉아 으리으리한 방 안을 훑어보았다.
손님에게 내어 주는 방도 이렇게 좋은데, 공작이 쓰는 방은 어떨까? 말할 것도 없이 엄청 좋겠지?
“할머님! 할아버님!”
그때 방문이 열리고, 얼굴이 반쪽이 된 펙이 울먹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손자야, 그새 폭삭 늙었구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들으셔도 못 믿으실 겁니다.”
전투에 휘말린 것도 환장하겠는데, 거기에 미친 듯한 서류 업무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약이요, 그걸 반이나 흘리는 바람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약도 하나 제대로 못 먹다니.”
벨데메르는 대놓고 혀를 찼다. 펙은 주눅이 들었고, 르니예는 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반만 먹으면 효과가 없어?”
“아니요. 그래도 효과는 있던데요, 딱 반만큼이요.”
유령도 어떤 ‘크기’라는 게 있었다. 원혼이나 집념의 크기인 듯싶은데, 그 크기가 클수록 존재가 뚜렷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요즘 미치겠습니다. 특히 후작저에 갈 때마다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요.”
르니예는 펙에게 셰론 후작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펙은 후작저에 들를 때마다 주의 깊게 살피곤 했다.
“공동묘지 위에 저택을 지었는지, 거기만 가면 그냥 유령이 바글바글해요. 갈 때마다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요.”
“유령이 바글바글해? 내일 열리는 무도회 장소가 후작저 아니야?”
르니예는 두 팔을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문득,
“거기만 유령이 많다고?”
왜 그곳에 유령이 많을까,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카밀은 말했다. 셰론 후작이 레버리 영지에 와 있는 동안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정말로 그 말이 사실일까? 후작이 레버리 영지에서, 그리고 여기 후작저에서도 사람을 죽인 걸까?
“묘지 위에 저택을 지은 경우에도 그럴 수 있어, 르니예.”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수도에 와 있으니, 그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아, 내일 샤피로를 무도회에 데리고 가면 되겠군.”
샤피로는 꽤 사교적인 사역마였다. 그는 대체로 사람들과 쉽게 친해졌다.
“후작저의 사용인들에게 샤피로가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거다. 샤피로.”
생각난 김에 명령하려고 벨데메르는 샤피로를 불렀다.
“샤피로?”
그러나 샤피로는 오지 않았다. 샤피로는 벨데메르와 르니예가 있는 방에서 꽤 멀리 떨어진 정원을, 세사르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그대와 여길 이리 걷다니, 꿈만 같습니다.”
세사르는 샤피로를 흘긋거리다가, 결심한 듯 그의 앞을 막고 섰다.
“제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세사르 님?”
“샤피로, 내일 나와 함께 무도회에 가 주지 않을래요?”
“죄송하지만 세사르 님, 저는 주인님을 모셔야 합니다.”
샤피로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나 세사르는 샤피로와 함께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같이 벨데메르 님을 모시겠습니다. 우리 가문의 은인이시니 아버지도 반대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예? 세사르 님, 저기, 그건 좀…….”
그건 좀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세사르의 굳은 의지를 패러히트 공작도 꺾을 수가 없었다.
“아주 불편하군.”
“전 그림자처럼 있겠습니다. 은인께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르니예는, 옆에 심기가 불편한 벨데메르를 끼고 그 반대편에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손자를, 뒤로는 사역마와 사역마에 푹 빠진 소공작을 대동한 채로 후작저에 들어섰다.
“벌써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르니예는 따가운 시선 속에서 후작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행히 패러히트 공작이 합류한 덕분에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은 많이 사라졌다.
“레이디께서 애써 주신 덕분에, 일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소.”
“후작님, 전 레이디가 아닌데요.”
에드윈과 이혼을 한 순간부터 르니예는 귀족 신분을 박탈당했다. 그러니 르니예는 더 이상 레이디가 아니었다.
“곧 레이디가 될 테니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게.”
“예? 레이디가 된다니요?”
“왕자 저하께서 레이디의 공을 높게 사, 작위를 내려 주시기로 했소.”
나, 나 귀족 되는 거야? 르니예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아버지, 나 귀족 됐어!
“세상에.”
르니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귀족이라니, 내가 귀족이라니! 미소 짓느라 반쯤 휘어진 르니예의 시야로, 흐릿하지만 익숙한 얼굴이 잡혔다.
“……에드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