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모순
몇 분 전. 르니예는 꿀벌을 데리고 무역선에 탔다.
에니는 배 밖에서 벨데메르를 기다렸다가 소식을 전해 주기로 했다.
“저기요.”
르니예는 제 앞을 지나가는 선원을 붙잡고 물었다.
“괜찮은 상품이 하나 들어가는 걸 봤는데, 다른 데 팔기 전에 내가 한번 살펴보고 싶어요. 될까요?”
당연히 안 된다고 대답하려던 선원은 르니예의 손가락 사이에서 반짝이는 은화를 보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떤 상품을 살펴보고 싶으실까, 우리 고객님께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상품.”
“그거라면 저쪽입니다.”
르니예는 은화 하나로 쉽게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이 갇혀 있는 짐칸까지 왔다.
“천천히 구경해도 되겠죠?”
르니예의 주머니에서 은화가 하나 더 나왔다.
“나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천천히 구경하십시오. 그런데 아마,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간도 조금 주면서 돈은 되게 많이 받아 가네. 좀 아니꼬웠지만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르니예는 순순히 은화를 건네주었다.
남자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간 르니예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거 너무 짐짝 취급하네.”
짐칸이라고 하더니, 정말 짐칸이었다. 다음 목적지까지 최소 일주일은 항해할 텐데,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화장실은커녕 바닥이 축축해 몸을 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속으로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하는 르니예의 귀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르니예는 높게 쌓여있는 상자 더미 사이로 소리를 따라 들어갔다.
“……너, 지금 뭐 해?”
르니예는 프리야의 이름도 부르기 전에 그녀에게 무얼 하냐고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밧줄이 천장에 대롱대롱 걸려 있고, 프리야는 비틀거리면서 작은 나무 상자를 딛고 있었다.
이거 누가 봐도…….
“……작은 마님?”
놀란 건 프리야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끝내려는 찰나에 나타난 사람이 르니예라니.
프리야는 놀라서 상자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너 구해 주러 왔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르니예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보다 프리야를 미워한 사람이 저 자신이었다. 그런데 프리야를 구하러 오다니.
그래도 구하긴 구해야지. 쟤가 노예로 팔려 가서 뭔 짓을 당할 줄 알고.
몰랐다면 몰랐지,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저를요? 왜요?”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의문이 들었다. 르니예는 가끔 프리야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런 사람이 여기 와서 저를 구해 주겠다고 하다니 이렇게 모순적인 일이 있을까.
“이럴 땐 고맙다고 해야지. 너는 참 애가.”
한결같이 버릇이 없어. 그래, 그거 하나는 일관적이다, 일관적이야.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넌 안 변한 걸 보니 오늘이 죽을 때는 아닌가 보다.”
“진짜 저 구해 주실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일단 내려와.”
프리야는 얼른 상자 아래로 내려왔다. 르니예가 저를 괴롭히려고 데려가는 것이어도 르니예를 따라가야 했다.
그래도 어디 늙은 놈에게 팔려 가는 것보다야 르니예 밑에서 고초를 당하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너 비싸게 받으려나?”
“돈 많으시잖아요.”
“너한테 쓸 돈은 별로 없거든?”
르니예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뭐.
“있어 봐, 불러서 족쇄 풀라고 할 테니까.”
프리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저렇게 말을 잘 들은 적이 있었나?
르니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람을 부르러 나가려 했다.
“저, 저기요.”
그때 짐칸 저 안쪽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리야와 르니예의 고개가 동시에 그쪽으로 돌아갔다.
“누구 있어요?”
유령은 말을 못 하니 유령은 아니겠지. 르니예는 약간 긴장한 채 살금살금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시야를 가리던 상자 더미를 지나자, 큰 짐승을 옮길 때 쓸 법한 우리가 나타났다.
물론 그 우리에 갇힌 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지만.
“저기,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아니, 전 괜찮으니 우리 딸만이라도요.”
르니예가 보이자마자 우리 안에서 바짝 마른 손이 쑥 튀어나왔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사람은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운 우리 안에서 여자가 무릎을 꿇은 채로 싹싹 빌었다.
여자 뒤로 잔뜩 겁먹은 눈망울이 빼꼼 나와 르니예를 쳐다보았다.
“이대로 팔려 가면 우리 에니 어떻게 될지 몰라요.”
“딸 이름이 에니예요?”
하필이면 이름도 에니야. 르니예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르니예가 아무리 부자라도 노예를 셋이나 살 만큼의 큰돈은 들고 다니지 않았다.
노예상은 돈을 받기 전에는 이들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배는 곧 떠날 거고, 그 안에 상단에서 돈을 가져오는 건 불가능하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죽어서도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작은 마님! 이제 배 떠난다고요, 작은 마님!”
저쪽에서는 프리야가 절박한 목소리로 르니예를 불렀다.
혹시나 그 모녀를 데려가느라 저를 포기할까 봐 프리야는 애가 탔다.
르니예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팠다.
“이건, 따지자면 도둑질인데.”
도둑질이라도, 이건 선행의 범주에 들어가겠지. 아주 끄트머리에 간당간당하게 들어가겠지만.
르니예는 머리핀을 뺐다. 단정하게 고정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걸을 수 있겠어요?”
“네네, 걸을 수 있어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르니예는 우리에 달린 자물쇠를 들어, 그 안으로 머리핀을 꽂아 넣었다.
“아, 작은 마님!”
“기다려, 좀! 너 안 버리고 가, 그러니까 기다려.”
르니예는 프리야를 조용히 시키고, 자물쇠 따는 데 집중했다. 무식하게 큰 것치고, 쉽게 따졌다.
“나오세요.”
문을 열어 주고 르니예는 바로 프리야에게 향했다.
“발 이리 줘 봐.”
“돈, 많이 가져오셨어요?”
“아니.”
프리야의 족쇄를 푸는 동안에도, 르니예는 생각이 많았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말랐어?”
“배신자로 찍혔는데 밥을 주겠어요? 오늘 아침에 빵 한 쪽 얻어먹은 게 다예요.”
프리야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지면 정말 끝이라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르니예는 쓰러진 저를 업고 나가진 못할 테니까.
“야, 됐다.”
“이런 것도 할 줄 아세요?”
“카밀 숙부가 빈집 터는 방법 가르쳐 줄 때, 자물쇠 따는 것도 알려 줬어.”
그 기술로 우리 상단도 털었지만, 아무튼.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한다면서 가르쳐 주더라. 일어서. 가자.”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가 가르쳐 준 기술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르니예는 어느새 우리에서 나와 저를 따라온 모녀와 프리야를 보며 말했다.
“조금만 더 힘내요. 지금부터 무작정 밀고 나갈 작정이니까, 내가 신호하면 무조건 배 밖으로 뛰는 거예요.”
“호위라도 데리고 오셨어요?”
“응, 저기.”
르니예가 손가락을 튕기자 천장 한구석에 숨어 있던 꿀벌이 나타나 그들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작다고 무시하지 마라.”
“너무 커서 놀란 건데요.”
무슨 벌이 저렇게 커? 저런 벌을 보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놈들이라도 일단 놀라긴 하겠지.
“그럼 갑시다.”
르니예는 짐칸 문을 열었다. 아까 르니예를 안내해 준 남자가 르니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품은 잘 보셨나?”
“상품이 다 좋네. 그래서 다 살까 하는데.”
남자가 문 안을 슬쩍 보더니, 엄지와 검지를 이어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이게 많이 들 텐데.”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르니예는 주머니를 짤랑짤랑하며 남자 너머 갑판 쪽을 흘긋거렸다.
“근데 저기 내 몸종이 돈을 다 들고 있거든. 배 아래로 내려가서 잔금 치르지.”
“그럽시다. 그럼 이것들은 여기 두고, 아가씨만 가시지.”
르니예가 무슨 말이냐는 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돈만 들고 튀려고? 이게 날 물로 보네.”
르니예는 삐딱하게 서서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최소한 상품이 내 눈에 보이는 데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르니예의 눈앞으로 꿀벌이 8자를 그리며 돌았다. 벨데메르가 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승산이 있다.
“뭐, 좋습니다. 그래도 배에서 내리는 건 안 됩니다.”
“알겠으니까, 얼른 갑시다. 이러다 배 떠나겠어.”
르니예는 남자에게 앞장서라 손짓했다. 그를 따라 갑판까지는 수월하게 올라갔다. 이제 항구가 코앞이었다.
“이봐, 상품을 왜 가지고 나와?”
“여기 이 아가씨께서 구매하시겠단다.”
밧줄을 정리하던 선원이 이상하다는 듯 손을 털고서 다가왔다.
“사장님이 자물쇠 열쇠를 너한테 줬어?”
아, 걸렸구나. 르니예는 프리야와 모녀에게 조용히 신호했다.
“어?”
남자가 드디어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자물쇠 어떻게 딴 거요?”
“열려 있던데?”
르니예는 씩 웃고, 살짝 뒷걸음질 치다가,
“꿀벌!”
이제는 엄연히 호위무사가 된 꿀벌을 우렁차게 부르고 튀었다.
“잡아, 저것들 잡아!”
“이건 또 뭐야? 무슨 벌이 이렇게 커!”
갑판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항구에서도 저 배에 무슨 일이 있나 봐, 하며 수군거릴 정도였다.
“오, 주인님, 저 배인가 봅니다.”
샤피로는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는 갑판을 손으로 가리켰다.
“르니예 님이 보이는 것도 같군요.”
“하, 르니예.”
위험한 일을 절대 하지 않겠다더니, 패싸움을 해? 패싸움은 위험한 일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건가?
“아가씨!”
에니는 르니예를 구하겠다며 각목을 들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저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충심은 봐줄 만하군요.”
샤피로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어째서 르니예 님은 평범하게 지내질 못하시는 걸까? 주인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걸까?
주인님은 르니예 님이 아니어도 행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자.”
“예, 주인님.”
벨데메르와 샤피로는 복잡한 심경으로 갑판을 향해 올라갔다.
당연한 결과로 르니예 일행은 배 한구석에 몰려 있었다.
“가까이 오기만 해. 다 저 꼴 난다.”
르니예는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꿀벌을 잡으려다가 쏘인 남자는 꺽꺽거리며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르니예의 뒤로는 사색이 된 프리야와 두 모녀가 바들바들 떨며 서 있었다.
“다 저 꼴로 만들어 줄까, 르니예?”
소란을 뚫고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르니예의 얼굴로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벨데메르!”
르니예는 저쪽에서 저를 쳐다보는 벨데메르가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손을 붕붕 흔들기까지 했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대가 원한다면.”
벨데메르는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마력을 온전히 느끼며 주문을 읊었다.
그의 입 밖으로 나가는 단어 하나하나에 말 그 이상의 힘이 실렸다.
그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을 때, 갑판 위의 모든 것도 움직임을 멈췄다.
모든 것, 거기에는 르니예도 포함이었다.
해서 르니예는 머릿속으로 말했다.
……벨데메르, 왜 나까지 마법에 걸린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