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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78화 (78/120)

78화. 모든 기억을 잃고도

“먹여 줘야지. 나 환자잖아.”

머리를 다쳤지 손을 다치진 않았을 텐데? 벨데메르는 저를 만질 땐 너무나도 멀쩡했던 그 손을 쳐다보았다.

“뭐 해, 나 배고파. 아.”

그러거나 말거나 르니예는 입을 벌렸다. 벨데메르는 스튜를 떠서 르니예의 입에 넣어 주었다.

“뜨거워.”

“뜨거워?”

뜨겁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스튜를 후후 불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한 벨데메르는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정부인 것도 모자라 식사 시중까지 들어야 하나?

“입에 묻었네. 잘 먹어야지.”

그러다가도 르니예 입가에 묻은 스튜를 닦아 주며, 그 통통하고 붉은 입술을 보고 있으면 회의감 같은 것은 싹 날아가 버렸다.

오물오물하는 입술이 오늘따라 유독 붉고 탐스러웠다. 아픈 사람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데도.

벨데메르는 자꾸만 드는 그릇된 생각과 싸우느라 르니예에게 스튜를 떠먹여 주는 것을 잊고 말았다.

“술이 먹고 싶은 얼굴인데.”

르니예는 스푼을 든 채 멍하니 제 입술을 쳐다보는 벨데메르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술?”

술이 아니라 찬물을 또 마셔야 할 것 같은데. 벨데메르는 찬 바람이라도 들어오게 창문이라도 활짝 열고 싶었다.

“응, 내 입술.”

“……!”

쨍그랑-. 숟가락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어디 가? 어?”

벨데메르는 그대로 일어나 방 바깥으로 도망쳤다. 르니예와 같이 있으면 안 된다. 위험하다.

르니예도 위험하고, 벨데메르 자신도 위험했다. 그는 지금 생각의 환기가 필요했다.

“농담한 건데, 농담인데! 다 먹여 주고 가야지!”

르니예는 입술을 삐죽이며 스푼을 주웠다. 냅킨으로 스푼을 쓱쓱 닦으며 르니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쳇, 야하게 생겨서는 되게 숙맥같이 구네.”

뛰쳐나온 벨데메르는 팔굽혀 펴기를 하고, 검도 휘두르고, 명상도 하고 나서야 널뛰는 육신과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서야 르니예가 있는 침실로 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그럼 우리 한 침대 써?”

르니예는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벨데메르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매우 불온해 벨데메르는 심호흡을 했다.

“한 침대 쓰냐고.”

“한 침대 쓰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주인님.”

샤피로는 진심이었다.

“야, 너, 하인.”

“예?”

그러자 르니예가 샤피로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손가락 끝이 샤피로를 향했다가 옆으로 휙 비틀어졌다.

“너 해고.”

겨우 이거에 해고? 샤피로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해고하실 거면, 아까 목욕 시중들기 전에 하시지.

“어디 하인이 주인의 잠자리를 왈가왈부하지?”

르니예가 혀를 쯧쯧 찼다. 벨데메르는 샤피로를 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가서 약을 좀 달여 오거라.”

“예.”

샤피로는 벨데메르만 두고 나가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억지로 발을 뗐다. 약을 달여 먹여야, 얼른 르니예의 기억이 돌아올 테니 말이다.

“정부야.”

이제 아주 대놓고 정부라고 하는군. 벨데메르는 헛웃음이 터졌다.

“이리 와서 다리 좀 주물러 볼래?”

르니예가 침대 위로 다리를 쭉 뻗었다. 다리를 주무르라고? 부모님 다리도 주무르지 않았던 벨데메르였다.

“다리가 너무 아파, 얼른.”

그러나 르니예는 아프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곁에 앉아 조심스레 르니예의 발목을 잡았다.

손바닥으로 아직 물기가 남은 부드러운 살이 감겼다. 잡기만 했는데, 떨어지기 싫었다.

“살살.”

“……이 정도로?”

“응.”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다리를 주물렀다.

다리가 왜 이렇게 말랑해? 근육이 있는 건가?

벨데메르는 의사처럼 근육을 따라 종아리를 꾹꾹 눌렀다.

“발이, 굉장히 작군.”

가는 발목 아래 발이 작고 앙증맞았다.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발이 왜 이렇게 귀엽게 생겼지? 뒤꿈치는 왜 이렇게 동그란 거야, 앙증맞게.

“근데 넌 빚이 얼마였어?”

르니예가 제 발을 보며 감탄하는 벨데메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닌 줄 아나 보지?

“한 오만 골드?”

벨데메르는 대충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소원이 어쩌고 저주가 어쩌고 설명하려니 내용이 너무 길었다.

“뭐 하느라 돈을 그렇게 많이 빌렸어.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가 네 빚은 책임지고 다 갚아 줄게.”

르니예가 자기 어깨를 툭툭 쳤다. 이번엔 어깨를 좀 주물러 보라는 뜻이었다.

“너무 세게 말고.”

“그래, 살살.”

벨데메르는 저항 없이 르니예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앞으로 넘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가 탐스러웠다.

확 깨물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너무 가늘다. 이렇게 가냘파서야 바람만 불어도 부러질 것 같은데.

어깨는 또 뭐야, 왜 이렇게 동그래? 어깨까지 예쁘게 태어날 필요가 있었을까.

“근데 그것 좀 벗고 해 봐.”

“지, 지금 뭐라고 했지?”

어깨를 주무르던 손이 딱 멈췄다. 벗고 하라고? 안마를, 벗고 하라고?

“옷 젖었잖아. 언제까지 입고 있을 거야?”

벨데메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욕실에서 젖은 옷을 아직도 입고 있었다.

누구 덕에 정신이 없어 샤피로도, 벨데메르도 젖은 셔츠를 신경을 쓰지 못했다.

밖에 나가서 검을 휘두르는 동안, 조금 마르기는 했다. 그렇긴 해도, 지금까지 축축한 걸 느끼지 못했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이것도 누구 덕분이었다.

“뭐 다른 이유로 벗으라고 한 줄 알았어?”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돌아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너도 사상이 썩었구나?”

‘너도’라는 건 본인 사상이 썩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단 뜻인가. 벨데메르는 갑자기 성인의 정신을 가진 르니예가 그리웠다.

그러면서도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대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응, 물어봐.”

예전에 물었었지, 마리아와 로이드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모든 기억을 잃고도 르니예 너를 위해 소원을 빌 수 있겠냐고.

그런데 그 질문을 반대로 물어볼 기회가 생겼군. 의도한 건 아니지만 기회가 왔으니 묻고 싶었다.

“만약에 내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그대는 어떤 소원을 빌 거지?”

이번에도 남편이 되어 달라고 할 건가?

“음.”

그러면서도 르니예는 16살 특유의 순진함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시작했다.

“아버지를 감옥에서 나오게 해 달라고?”

아, 그렇지. 벨데메르는 콜론이 아직도 탈세로 연금을 당하고 있단 사실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잡혀갔는데 남편이 되어 달란 소원은 빌지 않겠지.

“아버지가 자유의 몸이라면.”

“아버지가 풀려난 뒤라면?”

르니예는 또 고민했다.

“고민을 오래 하는군.”

남편이 되어 달란 소원은 애초에 왜 빈 거지? 나한테 반해서 그런 게 아니었나? 아니면 내가 조각상이 아니라?

조각상 쪽이 취향이었나? 저번에 남근이 사라졌을 때 유난히 흥분하더니, 그쪽이 취향이라서였나?

“돈도 있을 만큼 있고, 남편도 있고, 정부도 있는데 무슨 소원을 더 빌지?”

“아.”

이미 가지고 있으니 소원을 빌 필요가 없겠군. 그 생각을 못 했다.

“없다면, 남편도 없고 정부도 없다면.”

“둘 다 없으면?”

르니예는 씁, 숨을 들이켜며 또 고민에 들어갔다. 소원을 들어줄 것도 아니면서, 거 되게 집요하게 물어보네.

그렇다면 뭔가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건데.

“그러면 하렘을 만들어 달라고 할래. 너랑 에드윈 같은 애들로 섞어서. 아, 아까 하인도 좀 생겼더라. 걔도 포함.”

무슨 아이스크림 골라? 나랑 에드윈 반반 섞어서 달라고 하게?

어깨를 주무르던 벨데메르의 손이 딱 멈췄다.

기억을 잃고 났더니,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는다 이건가? 에드윈이 나나 그게 그거라는 건가?

애초에 그럼 나는 에드윈 대용품 같은 것이었나?

“왜 그래, 삐졌어?”

르니예는 돌아앉으며 벨데메르의 손등을 쿡쿡 찔렀다.

“삐지지 않았다.”

“아닌데. 지금 엄청 서운한데, 얼굴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랬다. 로이드의 소원을 들어주고 난 뒤 르니예는 어떠했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벨데메르가 사랑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인 듯 몰아가지 않았나.

그래 놓고 본인은 기억을 잃고 나서, 저에게 안마나 시키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러는 저는 또 시키는 대로 다리며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천하의 벨데메르가 안마라니. 부모의 어깨도 주무르지 않던 그가 아닌가.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발을 힐끗 쳐다보았다. 벨데메르의 눈치를 보느라 꼼지락거리는 발끝이 귀여웠다.

귀엽기는, 젠장.

문제가 있었다. 어쩌면 머리를 다친 쪽이 르니예가 아니라 제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입술 피 나겠어.”

저도 모르는 사이 벨데메르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르니예가 손을 뻗어서 벨데메르의 입술을 톡 건드렸다.

“깨물지 마.”

르니예가 그의 입술을 아래로 살짝 눌러 벌렸다. 손가락이 입술 사이로 들어올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그대로 입 안에 가져가 깨물든 뭐든 하고 싶은데,

“…….”

르니예는 지금 열여섯이다. 몸이야 성인이지만 그 안에 든 정신은,

“잠깐, 르니예.”

열여섯이 맞아? 벨데메르는 자신의 목 뒤로 팔을 감는 르니예에 화들짝 놀랐다.

“이런 짓, 이미 했을 거 아냐.”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럼 가만히 있어.”

르니예는 박력이 넘쳤다. 벨데메르는 몸을 최대한 뒤로 뺐다. 그런 벨데메르에게 몸을 밀착하며 르니예가 입술을 쭉 내미는데,

“주인님, 약을 달여…….”

샤피로가 등장했다.

“……너.”

르니예는 약이 든 쟁반을 고이 들고서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은 샤피로를 향해 말했다.

“진짜 해고야.”

“르니예 님 약을 달여 왔는데도요?”

“약 안 먹어.”

르니예는 입술을 삐죽였고 벨데메르는 그사이 르니예를 제대로 앉히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약을 먹어야지, 르니예.”

벨데메르가 손짓하자 샤피로가 약을 들고 가까이 왔다.

“뭐지, 이 상황?”

르니예는 붕대 위로 머리를 긁적였다. 굉장히 익숙했다.

벨데메르와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샤피로가 등장하는…….

그 생각이 드는 동시에 르니예는 뇌리를 스치는 강력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고는,

“아!”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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