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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67화 (67/120)

67화. 두 발로 선다는 것

“후작으로 하지. 펙 라인허트, 들었지? 후작이다.”

“예? 후작이요? 저는 남작 작위만 받아도 감지덕지라니까요.”

“르니예 님의 욕심이란 정말 끝이 없으십니다. 이 샤피로는 매번 감탄한다니까요.”

또 골치가 아팠다. 백작이 너무 낮아서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샤피로 쟤는 나를 얼마나 욕심쟁이로 보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르니예가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르니예. 고생은 어차피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이 할 거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주인님.”

무슨 말을 할 틈을 안 준다. 르니예는 졸지에 후작 작위를 원하는 욕심쟁이가 되어 버렸다.

펙의 원망스러운 눈동자는 덤이었다. 할머님은 믿었는데, 펙은 그렇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제가 어디 가서 무슨 수로 후작 작위를 받아 옵니까.”

기준이 벌써 높아져 버렸다. 못 한다고 말하면서도 펙은 또 금방 그걸 받아들였다.

“후작 작위를 달라고 하면 누가 주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수도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단 말입니다.”

“거기까지는 도와주지.”

벨데메르는 세사르 패러히트가 르니예에게 결투 신청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패러히트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놓겠다.”

“패러히트 공작께서 저한테 후작 작위를 주시겠다고 한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거저먹으려고 하는 저 버릇을 어떻게 고치지? 벨데메르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패러히트 공작께서 말단 관리직이라도 하나 내어 주시면, 거기서 열심히 일하시면서 공을 세우면 됩니다, 펙 님.”

“그러니까 무슨 공을 어떻게 세우냐고요.”

벨데메르는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되냐는 듯 대답했다.

“왕이 암살당하는 것을 막든지, 아니면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든지 하면 되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게 어려운 일이거든요. 펙은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벨데메르가 르니예에게 뭐라도 먹여야 한다고 식당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

“자, 아 해.”

“내가 먹을게요, 벨데메르.”

르니예는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그는 어미 새라도 된 것처럼 르니예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려고 했다.

르니예는 그가 먹여 줄 틈이 없도록 열심히 포크를 놀렸다. 잘 먹는 모습이 좋긴 한데…….

어쩐지 르니예가 억지로 먹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혼자 씻을 수 있겠어?”

“네? 그럼요.”

사실 혼자 들어가는 욕실은 좀 무서웠다.

비누칠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찰박찰박 물 밟는 소리가 들린다면, 르니예는 기절을 하고 말 것이다.

“무서우면 내가 문 앞에 서 있겠다.”

“아니에요, 이제 안 무서워요.”

명백히 거짓말이었다. 너무나 티 나는 거짓말에 벨데메르는 속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목욕하는 그 앞에 서 있으면 부끄럽겠지. 부끄러워 그러는 것이라 넘겼다.

그러나 씻고 나와서도, 르니예는 내내 저와 거리를 두었다.

묘하게 르니예와 저 사이에 얇은 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모를 정도로 미세한 차이였다.

“데리러 올 필요가 없다?”

“네. 오는 길은 무섭지도 않고, 괜히 사람들 눈에 보여서 좋을 게 없거든요. 미안해요.”

르니예는 미안하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피곤하다며 눈을 감았다. 벨데메르는 눈 감은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금방 뜨여질 것 같은 눈꺼풀은 단단하게 닫혀 떠지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지났다.

* * *

“후작이 될 때까지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라.”

“너무하십니다, 끝까지.”

펙은 등 떠밀려 수도로 떠났다. 르니예는 그 처량한 뒷모습에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어제 못 자서 그런가?”

“아니에요, 완전 푹 잤는데.”

벨데메르의 서늘한 시선이 르니예에게 내려앉았다.

“그래?”

그다지 수긍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늘도 데리러 갈까?”

“아니요. 오늘은 일찍 올 거라서 괜찮아요.”

그러면서 르니예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주변을 훑었다. 유령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금방 들킬 거짓말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나.”

“네?”

흔들리는 동공이 벨데메르를 향했다. 얼굴에 불안과 두려움이 잔뜩이었다.

어젯밤에도 르니예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옆에서 자꾸 뒤척이고 나중에는 기도까지 웅얼웅얼했다.

그걸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랬으니 푹 잤다고 말했겠지.

“왜 무서운데 무섭다고 하지 않지?”

이유가 궁금했다. 무서워 잠이 안 온다고 하면 얼마든지 안아 줬을 텐데, 르니예는 혼자서 꾹 참았다.

바로 손 뻗으면 닿는 자리에 벨데메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귀찮아할까 봐 그런 건가?”

“그런 것도 있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르니예. 그대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야.”

르니예가 치댄다면 얼마든지 그의 품이고 등이고 내어 줄 수 있었다. 벨데메르도 알고 샤피로도 아는 것을 르니예만 모른다는 게 벨데메르는 애석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오늘도 데리러 가지.”

“아니요.”

르니예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데리러 오지 마세요.”

“이유는?”

“혼자 다니기 무서우니까.”

혼자 다니기 무서운데, 데리러 오지 말라고?

“지금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맞나?”

“혼자 다니기 무서우니까 데리러 오지 말라고 한 거 맞아요.”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언제까지고 벨데메르가 데리러 올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극복해야죠.”

계속 두려워하면서 살 수는 없다. 혼자 걷는 밤길이 무섭지 않으면, 그땐 벨데메르가 데리러 와도 좋았다.

하지만 혼자 걷지 못해서 그가 데리러 오는 건 사양이다. 그러면 언제까지고 르니예는 어둠을 두려워하게 될 테니까.

“내가 언제는 그대를 데리러 가지 못할까 봐?”

“소원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벨데메르에게 기댄 채로는 그를 보낼 수 없다. 르니예는 되새겼다.

“그러니까 나랑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거군.”

“그런 게 아니에요. 벨데메르가 간다고 하면 놓아줄 준비를 하는 거지.”

르니예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만큼 벨데메르를 좋아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만큼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잘도 그런 말을.”

벽을 치고, 헤어질 준비를 하면서, 잘도 그런 달콤한 말을 지껄인다.

벨데메르의 손안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내가 놓아달라고 하면 놓아준다?”

놓아주는 주체가 틀렸다. 그는 르니예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르니예가 가고 싶다면 그에게 놓아달라 애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들어줄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르니예는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주인님.”

샤피로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 새 잉크와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빈 병은 치우겠습니다.”

샤피로는 빈 잉크 병을 들고 나가려고 했다.

“샤피로.”

“예, 주인님.”

“잠깐 앉아 보아라.”

샤피로는 벨데메르 앞에 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네게 물어볼 것이 있어.”

벨데메르는 테메르의 일기 중에서 샤피로가 등장한 부분을 펼쳐 내밀었다.

“여기에 관해 기억나는 게 있나?”

고민하는 샤피로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런 일이 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인님의 조각상 앞이었어요.”

진심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다.

“내가 그 조각상에 갇혔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주인님이 계시던 신전에 남아 있던 신관이 말해 줬습니다. 블러디 사파이어도 그자가…….”

말을 하면서 샤피로는 처음으로 의아해했다.

“그러고 보니, 그자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치 아는 사람인 척 인사했고요.”

벨데메르가 봉인된 슬픔에 샤피로는 신관을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그자는 일부러 샤피로를 벨데메르 곁으로 데려온 듯했다.

“왜 그랬을까요?”

“네가 없으면 내가 천 년이 지나도 소원을 다 들어주지 못했을 테니까.”

“신의 금기를 어겨 조각상에 봉인된 주인님을 신관이 도와주려고 했단 겁니까?”

어이가 없어 벨데메르는 웃었다. 봉인에 관해 파면 팔수록 완벽하게 그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저는 영원히 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이러는 것만 같았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군.”

* * *

“아저씨, 이걸로 병원비도 보태고 하세요.”

르니예는 전혀 몰랐다. 피터의 손가락이 잘린 이유가 치료비가 없어서였다는 것을.

일찍 치료했다면 잘라내지 않아도 될 손가락이었지만, 이자를 제하고 받는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는 약을 살 수 없었다.

마차를 고치다가 검지 하나를 잃었음에도 피터는 르니예의 마차를 매번 손보고, 말을 먹여 키웠다.

“작은 마님, 이, 이런 큰돈을.”

“그동안 아저씨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돈이에요.”

피터의 주름진 얼굴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저 돈을 받아도 그의 손가락은 돌아오지 않겠지.

“감사합니다, 작은 마님.”

“아니에요, 내가 미안하죠.”

르니예는 편하게 살았다. 그 안락함이 무엇을 갈아 만들어졌는지 알아 버린 지금은, 더 이상 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일은 비밀이에요, 아저씨.”

“물론이죠, 절대 입 밖으로 내지도 않겠습니다.”

르니예는 그를 먼저 마구간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르니예도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르니예의 발끝에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이 차였다.

“뭐야, 저거?”

르니예는 제 발에 차여 날아간 것을 주워 들었다.

“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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