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라인허트가의 후계자
“탈수 증세입니다. 며칠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모양인데요. 타박상은 최근에 입은 것 같습니다. 팔은 부러졌고요.”
아무튼 숨은 붙어 있다는 거지? 중요한 건 그 남자가 살았다는 거다. 르니예는 십년감수했다.
그러니까 왜 남의 발목을 함부로 잡고 그래?
“수프부터 천천히 먹이시면 됩니다. 잘 먹으면 금방 나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르니예는 의원에게 값을 지불했다.
“라인허트 경께서도 안개에 당하신 건지, 원.”
의원은 피골이 상접한 라인허트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라인허트 경이요? 이 사람이 라인허트 경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아, 이 사람이 라인허트의 후계자구나. 만나면 벨데메르가 죽여 버린다고 했는데. 르니예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명복을 빕니다, 라인허트 경.”
“……저기, 이분 아직 안 돌아가셨습니다만.”
르니예가 그의 명복을 빈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죽이겠다.”
“하나 남은 혈육입니다, 주인님.”
“그래요, 벨데메르. 이런 일을 한 이유가 있었겠죠.”
“아니, 저런 녀석은 우리 가문의 수치다.”
벨데메르의 검이 자신의 날을 드러냈다.
“그러는 할아버지도 가문을 버리고 가신 주제에!”
그러자 이번에 간신히 송장 신세를 면한 후손 라인허트가 반항을 시작했다.
펙 라인허트. 그는 라인허트 가문의 정식 후계자 수업을 받은 라인허트 가문의 현 주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위대한 형제였던 테메르와 벨데메르에 관해서도 들었다.
“테메르께서는 끝까지 가문을 지키셨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가문을 버리시지 않았습니까.”
펙은 억울했다. 자기도 가문을 떠난 주제에 왜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와서 저를 혼내는 건지.
“그래도 저는 가문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할아버님.”
펙의 구구절절한 한탄 중에 벨데메르의 신경을 계속 거스르는 것이 있었으니,
“할아버님?”
바로 할아버님이라는 호칭이었다.
“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할아버님이 맞긴 하잖아요.”
증조, 고조 따위의 수식어를 빼면 할아버지가 맞긴 했다. 봉인당한 시간을 제외하면 펙보다 벨데메르가 더 어려서 그렇지.
“그럼, 여기 레이디께서는, 할머님?”
“하, 할머님?”
르니예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지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 할머니라니, 내가 이 나이에 할머니라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서른입니다만.”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 나보다 나이 많은 손자라니.
르니예는 기가 찼다. 하지만 이런 기가 차고 황당한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르니예는 차분히 받아들였다.
“나보다 늙은 내 손자야. 얼른 잘못했다고 싹싹 빌거라.”
“인정이 빠르시군요, 르니예 님.”
“할머님과는 말이 통할 것 같습니다.”
셋 다 없앨까? 아니, 그냥 내가 죽는 게 빠르겠군. 벨데메르는 기운이 빠졌다.
그는 검을 던지듯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펙을 보며 물었다.
“그래, 네가 가문에 애정이 없는 것을 탓하지 않도록 하지. 하지만 그 문을 왜 열었는지 그건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으셨습니까, 펙 님?”
“마을 사람들이 괴롭혔니, 손자야? 망한 가문 후손이라고?”
펙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 문에 쓰인 나무가 필요해서요. 주목 나무 구하기가 어렵거든요.”
“주목 나무가 왜 필요했지?”
“주목 나무 태운 연기로 유령의 실체를 밝힐 수 있으니까요.”
뜬금없는 소리에 벨데메르를 포함한 나머지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유령은 주목 나무 연기를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그래서 연기가 닿으면 얼른 도망치려고 하죠.”
그러니까 펙의 말은, 유령이 지나가면서 바람 한 점 없어도 연기가 마구 흔들린다는 것이다.
“저는 반드시 이 세상에 유령의 존재를 밝힐 겁니다.”
펙이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펙의 부모가 땅속에서 듣고 있다면 무덤을 박차고 나올 일이었다.
의외로 펙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다. 라인허트 부부는 아들을 일찌감치 왕립 아카데미로 보냈다.
그게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수도로 올라간 펙은 음모론에 빠지다가 나중에는 심령술에 심취했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어요.”
그는 유령의 존재를 확신했다. 저를 무시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증명해내리라 다짐했다.
십여 년의 연구 끝에 펙은 주목 나무 연기와 유령의 관계를 알아냈다. 그런데 주목 나무는 이미 왕국에서 멸종한 뒤였다.
“신전에서도 구할 수 있었지만, 신전에서 저한테 주목 나무를 주겠습니까? 그러다가 그 건물 지하실에 주목 나무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 저택 서재에 숨겨진 책장이 있었어요. 거기서 테메르께서 쓰신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벨데메르는 의문이 생겼다. 테메르가 쓴 일기라면 그 문에 무엇을, 어떻게 봉인해 두었는지 분명 썼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군. 네 피가 아니었다면 문을 조금 부쉈다고 해서 그 봉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펙은 벨데메르의 눈치를 쓱 보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게, 일기를 제대로 안 읽어서요…….”
펙은 주목 나무가 있는 위치만 확인하고 일기를 덮었다.
“거기에 뭘 봉인해 두셨다는 것 정도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문 끄트머리 조금만 잘라 올 계획이었다.
“근데 제가 톱질이 서툴러서.”
펙이 머쓱한 듯 씩 웃었다. 그러니까 실수로 손을 다쳤고, 그 피가 문에 떨어졌고, 봉인이 풀렸다.
“갑자기 안개가 막 쏟아져 나오는데 엄청 무서웠어요.”
펙은 기절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다행히 마실 물은 들고 가서 정신이 차려지면 물을 마시곤 했다.
덕분에 이리 산송장 같은 몰골을 해서도 그는 살아 있었다.
“무서웠군.”
벨데메르가 그의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님. 정말 무서웠습니다.”
“목이 잘리면 무서움도 못 느낄 것이다. 아, 유령이 되면 유령의 존재도 알 수 있고.”
벨데메르는 떨어진 검을 주웠다.
“오늘 내 손으로 가문의 대를 끊을 것이다.”
“안 됩니다, 주인님.”
“참아요, 벨데메르.”
르니예와 샤피로가 각기 벨데메르의 팔에 매달렸다.
“뭐 하니, 손자야, 얼른 도망가지 않고.”
“네, 할머님.”
그런 말을 또 기가 막히게 잘 듣는 펙이 환자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재빨리 도망쳤다.
“이거 놔라, 내 가문의 끝을 낼 것이다.”
“기회를 한 번 더 줘 봐요.”
“예, 주인님. 잘 타이르면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타일러? 벨데메르가 팔에서 힘을 뺐다.
“그래, 잘 타일러 보지.”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르니예가 불안한 듯 물었다.
“때리지는 않을 거죠?”
“물론이다, 르니예. 네 말대로 기회를 한 번 주려고 한다.”
벨데메르는 샤피로에게 다시 펙을 데려오라 했다. 얼마 도망치지 못해 쓰러진 펙을 샤피로가 둘러업고 와 벨데메르 앞에 내려놓았다.
“할아버님, 살려 주세요.”
“그럴 것이다.”
살려 두어야 정신도 차릴 테니.
“아직도 유령의 존재를 밝히고 싶은가?”
“예.”
“유령을 실제로 본 적은 있고?”
펙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스치듯이, 딱 한 번?”
“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존재를 어떻게 남에게 증명할 수 있겠나.”
일리 있는 말에 펙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너의 눈을 뜨게 해 주지.”
“정말이십니까?”
“그래. 일단 여기 일을 먼저 해결하고 펠레포네 영지로 돌아간 다음에.”
펙이 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도 갑니까?”
“유령을 보고 싶다면, 가야 할 것이다. 내 힘이 그곳에 봉인되어 있어 여기서는 불가능하니.”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펙은 희열에 차 킬킬 웃었다. 샤피로와 르니예는 그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샤피로.”
“예, 주인님.”
“너는 이 녀석과 가서 테메르의 일기를 가져오거라.”
그때 펙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또 뭐지?”
“그 일기를 저택에 두고 나왔습니다.”
펙이 품 안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꺼냈다.
“필요한 부분만 찢고 나머지는 두고 나왔습니다.”
“그럼 가서 나머지를 가져오면 되지.”
“저택이 팔려서 이제 못 들어갑니다.”
벨데메르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이 녀석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또 있나?”
“할머님, 최고십니다.”
“효도로 갚거라.”
“예.”
펙의 목숨은 르니예가 살렸다. 그의 팔을 부러뜨렸던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도 있었다. 펙은 영원히 모르겠지만.
“저택이 아직 팔리지 않아서 다행인 줄 알아라.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다, 손자야.”
“진심으로 라인허트 가문의 대가 끊길 뻔했습니다, 펙 님.”
펙은 버릇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가문의 대 좀 끊기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물론 덕분에 제가 살아 있으니 고맙긴 하지만.
“그런데 할머님, 할아버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이 아이 낳으시면 대가 이어지는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