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범죄의 동기
“지금 정말 변태 같은 거 아시죠?”
에니는 르니예의 허리를 감싸서 다시 벨데메르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기가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많이 변태 같았어?”
“매우, 엄청, 너무 많이.”
에니는 단호하게 말했고 르니예는 약간 정신을 차렸다.
“진짜를 잘라 간 것도 아니잖아요.”
“진짜를 잘라 가면 벨데메르 죽어.”
“아무튼요.”
르니예는 이를 까득 악물었다. 변태 같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조각이 다른 여자 손에 있다고 상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에드윈이 어쩌고, 영주가 어쩌고 하던 고민은 벌써 활활 타오르는 질투에 잿더미로 변했다.
“빌어먹을!”
르니예는 샤피로의 소각통을 발로 찼다. 그 안에 태우려고 모아둔 낙엽이 도로 쏟아졌다.
“그게 그렇게 화가 나세요?”
“미치겠어.”
르니예는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마구 밟았다. 낙엽이 이리저리 날렸다.
“다시 찾으면 돼요. 사람 좀 풀면 금방 찾을 거니까 진정하시고, 심호흡하세요. 자, 들이쉬고, 내쉬고.”
르니예는 에니의 말대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이 기분 아주 익숙해.”
마른세수를 하며 르니예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랑 똑같아. 아니, 그때보다 더 화가 나는 거 같아.”
프리야와 에드윈의 다정한 모습을 목격했을 때,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복잡하고 심란했다.
“이건 벨데메르 님 잘못이 아닌데도요?”
“응, 그래서 문제야.”
벨데메르의 작은 조각 하나도 다른 여자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문제였다. 그를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는 거니까. 어쩌면 에드윈보다 더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서 르니예는 중얼거렸다. 내내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자꾸만 벨데메르에게 기우는 마음을 외면하고 또 외면했다.
그에 대한 마음을 모르겠다고, 모르는 거라고 세뇌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모른 채로 소원이 끝나기를 빌었다.
“빌어먹을! 그건 왜 가지고 가서!”
또다시 범인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르니예는 정말 모르고 싶었다. 알면 다칠 줄 뻔히 아는 것을 또 알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또 알아 버리고 말았다.
“그게 그대에게 이렇게까지 중요한 것인 줄 몰랐군.”
안으로 들어와 찬물을 마시고 나서야, 르니예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냥 정신 나간 채로 있을걸.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매우 민망하고 창피했다.
“누가 조각상을 훼손한 거니까…….”
르니예는 터질 듯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내 조각상도 아닌데 너무 유난스러웠죠?”
조용히 화낼걸, 나가서 화낼걸. 창피함에 목이 멜 수도 있다는 걸 르니예는 오늘 처음 알았다.
“아니다.”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물이 든 귓바퀴가 드러났다. 벨데메르의 시선이 르니예의 귓가에 머물렀다.
두 뺨도 저 색으로 물이 들었겠지. 제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르니예 때문에 애가 타면서도 그마저도 귀여웠다.
“그대의 것이기도 하니까 화날 수 있지.”
“그, 그게 무슨, 무슨 소리예요.”
르니예는 놀란 눈으로 얼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했다. 그게 내 것이라니. 어째서 그런 아찔한 소리를 하는 걸까.
“소원이 이뤄지는 동안 난 그대의 소유나 마찬가지니까, 내 조각상도 그대의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벨데메르는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무슨 뜻으로 생각했기에 그리 놀라지?”
“무슨 뜻이라뇨, 정확히 그 뜻으로 생각했어요.”
정말 그랬다는 듯 끄덕이는 고개가 격했다. 강한 긍정이 강한 부정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럼 이제 고개 좀 들어 봐. 언제까지 땅만 보고 있을 셈이지?”
“조금만 더 볼게요.”
아직 벨데메르의 얼굴을 보기에 달아오른 얼굴이 진정되지 않았다.
“내 얼굴은 안 보고 싶나?”
“……보고 싶지만, 지금은 안 돼요. 얼굴이 너무 빨갛단 말이에요.”
“그게 왜? 귀여운데.”
귀엽다니, 미쳤나 봐.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는 말에 르니예의 얼굴은 곧 터지기 직전이었다.
결국 르니예는 얼굴을 가리고 도망쳤다. 르니예의 뒷모습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던 벨데메르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도망칠 것까지 있나.”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 보는 건지. 벨데메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저렇게 도망치는 건, 잡아 달란 뜻이겠지.”
“내가 잘라 간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하지?”
한편, 마당에서는 샤피로가 낙엽으로 엉망이 된 정원을 보며 허리에 팔을 올렸다.
“오늘 아침에 청소했는데.”
그는 여기저기 날린 낙엽과 재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샤피로에게 에니가 친절히 빗자루를 던져 주었다.
“일개 하녀께서는 본인 주인님이 저지른 사고를 보고 느끼시는 바가 없나 봅니다.”
“애초에 이 사달을 만든 사람이 누군데.”
“저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에니가 샤피로를 쳐다보았다.
“주인님 아랫도리 관리는 하인 몫인 거 몰라?”
샤피로는 기가 찼다. 그래서 지금 조각상의 일부분이 사라진 게 자기 탓이라는 건가?
“청소하기 싫어서 별 핑계를 다 대시는군요. 이래서야 충직한 하녀라고 하겠습니까?”
돌려 까는 말에 에니가 코웃음을 쳤다.
“미안한데 난 유능한 하녀 쪽이라서.”
“아, 유능하시다? 얼마나 유능한지 궁금하군요.”
샤피로는 대놓고 비웃었다. 이 샤피로 앞에서 유능을 논하다니,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두고 봐. 그쪽이 간수 못 해 잃어버린 거, 내가 찾아 줄 테니까.”
* * *
르니예의 머릿속은 흙탕물처럼 흐렸다. 이런 황당무계한 일일수록 차분하게 맑은 이성으로 접근해야 한다.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으니, 먼저 범인의 동기를 파악해 보죠.”
“동기를 어떻게?”
르니예는 에니를 따라 쭐레쭐레 광장으로 나왔다. 조각 일부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조각상 앞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주님 소유물을 재미로 부수는 사람은 없겠죠.”
에니의 시선이 자연스레 영주의 소유물을 알리는 표지판으로 향했다.
“재미가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데, 저 꽃을 좀 보세요, 작은 마님.”
“누가 꽃을 가져다 놨지?”
“하나는 마리아가 가져다 놓은 거예요. 이번에 아이 생겼다는 얘기 들으셨죠? 그거 감사하다고요.”
르니예가 팔짱을 끼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게 뭐 벨데메르 덕인가. 본인들 금실이 좋아서 그런 것을.”
어찌나 뜨거운 사랑을 하시는지, 체이스는 로이드를 볼 때마다 부러워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저건 확실히 벨데메르 님 덕이죠. 저번에 소원 빌고 간 사람들요.”
“아아, 그 부부.”
그들은 확실히 벨데메르 덕을 보았다.
“그 사람들도 고맙다고 꽃을 두고 간 거야?”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네. 그런 좋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어 르니예는 뿌듯했다.
“지금 뿌듯하게 웃고 계실 때예요? 저걸 보고도?”
에니의 손가락이 조각상의 부서진 부분을 가리켰다. 르니예는 분개했다.
“가만 안 둬!”
감정이 극과 극을 오갔다. 에니는 익숙했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제 생각에 예전 그 소문이 더 퍼진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예전 그 소문이라면, 아기를 점지해 준다는 소문?”
“네. 꽃을 두고 간 사람들 공통점이 다 ‘아기’잖아요.”
소문을 알아본 결과, 확실히 그랬다. 영지 내에 그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조각상은 왜 떼 가?”
“왜 그런 얘기 있잖아요. 남근상을 집에 놓으면 아기가 잘 생긴다는.”
아기를 점지해 준다는 조각상의 것이라면 얼마나 효과가 좋을까.
“그러니 일단 아기를 원하는 부부가 그랬다고 추측했죠.”
“아기를 원하는 부부가 이 영지 내에 한둘이겠어?”
그런 집을 일일이 다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중에서도 아기가 일정 기간 이상 생기지 않아 간절한 부부일 겁니다. 영주님 소유물에 손을 댈 정도로.”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간절한 사람.
“적어도 결혼하고 5년 이상 아기가 생기지 않은 부부로 범위를 좁혀 봤어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생각보다 많이 나오더라고요.”
아, 하고 르니예의 입에서 실망스러운 탄성이 흘렀다. 역시 쉽게 찾을 수 없는 건가.
“그런데 제가 조사를 하던 중에,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무슨 얘기?”
“클로젯 부티크 사장님요, 최근에 크게 다쳐서 상점에 못 나오셨잖아요.”
에니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실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대요.”
“아니, 왜?”
“왜겠어요, 작은 마님.”
에니의 눈동자가 범인을 발견한 탐정처럼 빛났다.
“설마 아기가 안 생겨서?”
에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 간절한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못할까. 게다가 클로젯 부티크는 조각상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르니예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눈을 찌푸릴 필요도 없이 클로젯 부티크의 간판이 보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들키지 않을 가능성도 크지.”
범인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 * *
클로젯 부티크. 그곳은 어디인가.
신사복과 숙녀복을 다 취급하며, 남들보다 빨리 원단을 수입해 와 옷을 지어 팔아 펠레포네 영지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옷 가게였다.
그리고 르니예가 같은 옷을 두 벌 샀을 때 셔츠는 셔츠끼리, 바지는 바지끼리 포장해 주었던 그곳이다.
“저기 손님, 거기는 들어가시면 안 되는데요.”
“내가 누군지 몰라요?”
“알지만, 거기는, 거기는…….”
르니예는 악덕 상단주 딸다운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점원이 망설이는 틈을 타, 그를 밀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클로젯 부티크 주인이 사는 곳이었다. 르니예는 놀란 눈을 한 하녀를 제치고 침실로 곧장 들어갔다.
“클로에, 잠깐 나 좀…….”
그리고 놀랐다.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