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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56화 (56/120)

56화. 벨데메르의 가문

“여기서 뵙는군요, 에드윈 라포어 경.”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에드윈은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벨데메르는 에드윈의 인사를 눈인사로만 받았다.

거만하군.

“하인도 없이 옷을 사러 오신 겁니까?”

“옷을 사러 오는 데 하인이 꼭 필요한가?”

그렇게 말했지만 에드윈 역시 바딜 없이 옷을 사러 온 건 처음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르니예의 뒤를 밟을 계획이었다.

프리야의 말에 따르면 남몰래 상단 여기저기를 다닌다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해서 미행에 입을 만한 옷을 사러 온 것이었다.

“저 옷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미행에 쓸 옷을 벨데메르에게 들켜 봐야 좋은 것 없으니, 에드윈은 흔쾌히 양보했다.

“잘 고르셨습니다. 부인께서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시죠.”

에드윈에게서 묘한 우월감이 흘러나왔다.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남편은 나고, 너는 정부일 뿐이라는 무언의 메시지에 벨데메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내가 양보하지. 르니예는 내가 뭘 입어도 좋아하니.”

“아직은 그렇겠군요.”

아직은? 그럼 시간이 흐르면 아니게 될 거란 뜻인가? 벨데메르는 진심으로 어이없어 웃었다.

“나중에도 그럴 것이지만, 걱정은 고맙게 받지.”

벨데메르는 에드윈을 아래위로 쓱 훑었다. 그의 시선은 에드윈이 허리춤에 찬 검에서 잠시 멈췄다.

“르니예가 내게 질릴까 걱정해 줄 시간에, 이혼 서류에 서명이나 하지 그래.”

“글쎄, 그런 시간이 날지 모르겠군요. 그런데 정부가 하기에 좀 주제넘은 말 아닙니까?”

에드윈은 벨데메르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 통성명도 제대로 안 했군요. 에드윈 라포어입니다.”

에드윈이 손을 내밀었다. 벨데메르는 그 손을 흘긋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벨데메르.”

대답을 했는데도 에드윈은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라인허트다.”

벨데메르 라인허트. 오랜만에 말해 보는 성이었다.

“아아, 라인허트 가문 사람이셨군요.”

끝내 홀로 허공에 떠 있던 손을 치우면서도 에드윈은 여유로웠다. 그가 보이는 미소는 승자의 여유였다.

벨데메르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라인허트 가문은 왕국이 세워질 때 개국공신 가문이었으며, 드넓은 영지를 다스린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한데 어째서 저자는 우리 가문을 비웃는가.

“샤피로, 라인허트 가문이 현재 공작인가?”

부티크를 나와 묻는 말에 샤피로가 대답을 망설였다.

“공작이 아니면 후작?”

“주인님, 그것이…….”

“백작이로군.”

샤피로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백작도 아니야? 그럼 자작? 남작?”

“아닙니다.”

“남작도 아니면 대체 뭐지?”

“작위가, 없습니다.”

벨데메르는 귀를 의심했다.

“작위가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작위도 영지도 없이 가문의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 * *

“벨데메르가 귀족이었어요?”

르니예는 전혀 몰랐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주인님께서는 혈통까지 고귀하시지요.”

“그때는 그랬겠네요.”

‘그때’라는 명백한 과거시제에 벨데메르의 눈썹은 더 구겨질 수 없이 구겨졌다.

“그럼 지금 라인허트 가문 사람은 벨데메르의 후손인 거예요?”

설마 벨데메르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 이런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기분이 아주 이상할 것 같았다.

“내 형제의 자손인 셈이지.”

형제가 살아 있을 때의 벨데메르는 권력이나 명예에 관심이 없었다. 가문의 살림은 그의 형제 테메르가 맡아 했다.

벨데메르는 가문을 일구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반면 테메르는 가문을 일구고 가정을 꾸리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가문을 떠났다. 가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비록 테메르가 야망은 없었을지라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흔한 남작 작위 하나 없단 말인가.”

벨데메르는 분노했다. 라인허트 가문보다 늦게 작위를 받은 패러히트 가문은 여전히 공작인데, 어째서 라인허트 가문은 그저 귀족 나부랭이가 되었는가.

“테메르가 이 사실을 안다면 무덤을 박차고 나올 것이다.”

아무리 애정이 없다 하더라도, 이대로 가문이 망해가는 것을 놔둘 수 없었다.

“해서 라인허트 영지에, 아니, 이제 실버리안 영지라고 했나.”

벨데메르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가문에 방문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겠나?”

“같이 가고 싶지만, 영주가 추수절 무도회에 초대했어요.”

“그럼 끝나고서 출발하지. 이미 망했는데, 며칠 새에 더 망하기야 하겠나.”

* * *

그럴 수가 있었다. 이미 망했지만, 며칠 새에 더 망할 수가 있었다.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대대로 내려오던 저택인데.”

“어차피 우리 가문의 대는 나로 끊길 텐데 이 저택도 좋은 주인을 새로 만나는 게 좋겠지.”

펙 라인허트는 저택을 판다는 계약서에 거침없이 서명했다.

“짐이 많으실 테니, 이번 달 말까지 천천히 비워 주시면 됩니다.”

“짐 별로 없소. 이번 주까지 비워 주지. 잔금이나 얼른 주시오.”

그렇게 대대로 내려오던 라인허트의 오래된 저택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벨데메르는 추수절이 오기 전에 또 다른 소원을 하나 들어주었다. 이번에는 간절히 아기를 원하는 부부였다.

“정상적인 아기가 태어나겠죠?”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르니예는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라, 르니예. 남자 쪽이 건강하지 못해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부디 그 간절한 부부에게 좋은 소식이 들리기를 바라며, 르니예는 현관 앞에 섰다.

“오늘 무도회 날이라 늦거나 못 올지도 몰라요.”

“알고 있다.”

르니예는 그렇게 말하고 상단으로 향했다. 무도회에 갈 준비를 마친 르니예는 긴장에 어깨가 뻐근했다.

영주가 왜 부른 거지? 돈이 필요한가?

“무슨 일인지 전혀 짚이는 바가 없습니까?”

르니예가 의문을 안고 마차를 탔다면, 에드윈은 의심을 가지고 마차에 탔다. 영주는 확실히 수상했다.

그는 콜론을 상단과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르니예를 성안으로 불러들였다.

이유가 뭘까? 협박? 아니면 사기 진작?

“없어요.”

르니예야말로 영주의 의도가 궁금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영주 성으로 향했다.

뜻밖의 얼굴이라는 듯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니, 영주가 반가운 듯 그들을 맞이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영주님.”

르니예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열심히 끌어 올렸다.

“마땅히 초대해야지,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 우리 사이가 뭐지? 삥을 뜯고 뜯기는 사이? 속으로 비아냥거리면서도 르니예는 눈매가 휘어지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라포어 경.”

영주가 에드윈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드윈은 그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주님.”

“그러게 말이네, 라포어 경. 요즘 아주 바쁘다고 들어서 라포어 부인만 초대했는데, 그 소문이 틀렸나 보군.”

르니예는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영주가 나만 불렀는데, 에드윈이 따라서 온 거야?

“지난번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따라왔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영주님.”

“아니야, 결례는 무슨.”

영주가 껄껄 웃으며 에드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언뜻 친한 사이처럼 보이지만 그 손에 은근한 불쾌함이 실렸다.

“바쁜데 와 줘서 내가 고맙지. 상단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이건 그냥 같은 기사로 하는 말이니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말게, 라포어 경.”

영주가 목소리를 낮추어 읊조렸다.

“기사가 돈맛을 보면 검이 녹스는 법이야.”

영주가 르니예와 라포어를 번갈아 쳐다보며 또 허허 소리 내 웃었다.

“나처럼 후회하지 말란 뜻이네.”

“충고, 새겨듣겠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얼른 숨긴 르니예가 너무 좋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그러나 르니예의 안에서는 수많은 의혹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중이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르니예의 신경을 건드리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에드윈이 상단 운영에 참견하고 있는 것을, 영주가 어떻게 알았을까?

남들보다 먼저 나온 르니예는 마차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에드윈은 나오다가 아는 얼굴을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고 뒤따라 나오는 중이었다.

“나를 의심했다는 거지.”

에드윈이 굳이 영주 성에 따라온 이유. 영주와 제 사이를 의심해서 그런 게 분명했다.

에드윈이 의심하는 그게 뭘까? 영 관심 없던 상단 운영에 참여하게 만들고, 이혼을 거부하게 하며, 저와 영주 사이를 의심하게 만든 것이.

“우리 상단이랑 엮인 일이면서, 성공하면 수도로 올라갈 수 있을 만한 일이 대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에드윈에게 물어봤자 대답도 안 해 줄 테고.

르니예는 프리야를 더욱 쪼아야겠단 다짐을 하며 제 앞으로 와 서는 마차에 올라탔다.

“아직 출발하지 마. 에드윈 곧 나올 거야.”

타자마자 의자에 등을 파묻고 눈을 감은 르니예가 마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르니예의 명령에도 마부는 마차 문을 닫았다.

“뭐 하는 거야?”

설마 이거 또 납치? 르니예가 황급히 문 쪽으로 손을 뻗는데, 마차 맞은편 어둠 속에서 커다란 손이 나와 르니예의 손목을 붙들었다.

“뭐 하는 거긴, 그대를 마중 나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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