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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2화 (42/120)

42화. 작약의 꽃말을 아시는지요?

‘아름다운 그대에게 저와 닮은 이 작약을 보냅니다. 당신께서는 작약의 꽃말을 아시는지요?’

라고, 익명의 발신자는 편지를 질문으로 아련하게 끝내고 있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군.

심사가 비틀리기 직전, 벨데메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걸 떨어뜨린 건, 내가 봐줬으면 한다는 뜻인가?”

누가 보아도 연서였다. 연서가 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연서가 르니예를 향한 것이라면 문제가 되었다.

르니예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가. 그녀는 임자가 있는 몸이었다.

“그게 뭔데요?”

“연서로군.”

임자가 둘이나 된다는 것이, 약간 특이한 점이지만. 아무튼 에드윈 하나만으로도 벨데메르는 충분히 심사가 불편했다.

거기에 하나 더 추가라니. 이번엔 어떤 놈이지? 이름도 밝히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겁쟁이가 분명했다.

‘이런 놈과는 경쟁 상대도 안 되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벨데메르는 아주 불쾌했다. 창자가 꼬이는 듯한 불쾌함.

이 불쾌함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연서요?”

“그래.”

단전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그 불쾌함이 최소한의 이성만 남기고 벨데메르를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서 떨어진 건가 봐요.”

아까 볼 때는 없었는데. 르니예가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이게 대문 앞에 놓여 있던데요.”

“대문 앞에?”

“네. 인기척이 나서 가 보니까 누가 이걸 두고 갔더라고요.”

르니예는 자연스럽게 꽃다발을 샤피로에게 넘겼다.

“누구한테 보내는 꽃인지 쓰여 있어요, 벨데메르?”

르니예가 천진하게 벨데메르 곁으로 다가와 편지를 쓱 보았다.

“누가 보냈는지, 누구한테 보낸 건지 다 안 쓰여 있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진 그대에게’라고 되어 있으니 당연히 르니예라고, 벨데메르는 확신했다.

르니예의 밤색 머릿결이 부드럽고 탐스러운 것은 어떻게 알고 이런 편지를 보낸 건지.

벨데메르는 괜히 르니예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마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저 하나뿐이라는 걸 익명의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는 듯이.

“그야 받을 사람이 단 한 명뿐이니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품에 안고 있는 화사한 꽃과 달리 샤피로의 얼굴은 우중충하게 굳었다.

“시작된 겁니다, 주인님.”

샤피로는 골칫거리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뭐가 시작됐다는 거지, 샤피로?”

“주인님께서 저를 만든 이유를 잊으신 겁니까.”

벨데메르가 샤피로를 만든 이유. 르니예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바로 그 이유. 바로 그를 향해 쏟아지던 수많은 연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벨데메르는 항상 꽁꽁 싸매고 다녔잖아.”

“항상은 아닙니다.”

“그럼 언제?”

“그날, 체이스가 도와달라고 왔던 날. 그날은 얼굴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르니예의 고운 미간에 선이 쭉 그였다. 딱 하루, 아주 잠깐이었는데 그 틈에?

그러나 그럴 수 있다. 첫눈에 반하는 데 삼 초면 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나를 향한 것이라.”

그랬던가. 르니예에게 온 연서가 아니란 말이지.

벨데메르는 끓어오르는 듯한 감정이 순식간에 식는 것을 느꼈다. 성가신 놈의 존재가 사라져 그런 것인가.

이유야 어쨌든 벨데메르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로워졌다.

“이런 거 보내지 말라고 앞에 써 붙일까?”

“제가 예전에 다 해 봤지만, 소용없습니다.”

“그럼 저 편지를 계속 두게 놔둬?”

순간 르니예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질투라도 하는 건가? 그렇겠지. 질투를 하지 않는 편이 이상하지.

힘을 주느라 바들바들 떨리던 벨데메르의 입꼬리에 힘이 풀리다 못해 이제는 미소까지 지어질 지경이었다.

“무시하다 보면 제풀에 지치기 마련이다, 르니예. 저런 사소한 것에 질투할 필요 없어.”

“질투한 거 아니에요. 그냥 벨데메르한테 성가신 일 생길까 봐 그런 건데…….”

저런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라니. 벨데메르는 속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다면 더 신경 쓸 것 없다.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니.”

벨데메르는 그 뻔한 거짓말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의 마음은 물결 하나 일지 않은 호수처럼 잔잔했으며, 너그러웠다.

그다음 날, 편지와 함께 머리핀이 선물로 오기 전까지는.

“…….”

머리핀을 보면서 르니예는 생각했다. 나한테 온 건가? 설마 나한테 온 연서인가? 나를 짝사랑하는 누군가가?

“흠.”

같은 머리핀을 노려보며 샤피로도 생각했다. 아무리 심미안이 없는 사람이라도, 주인님께 하트 모양 장식이 달린 머리핀을 선물하진 않을 테지.

“이거, 아무래도 르니예 님에게 온 선물 같습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샤피로는 머리핀 아래 놓여 있던 편지를 펼쳤다.

“뭐라고 쓰여 있지?”

“부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를 빈다고 쓰여 있습니다.”

‘당신의 그 비단 같은 머리카락에 직접 머리핀을 꽂아 줄 수 없다는 것이 슬프다’거나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숨긴다고 숨겨질지 모르겠다’라는 내용은 샤피로가 자체 생략했다.

“혼인한 것을 알면서도 연서를 보내다니. 그대가 어지간히도 좋은가 보군.”

벨데메르의 마음속은 여전히 잔잔했다. 머리핀을 본 순간 차갑게 얼어붙어 요동칠 물방울이 남아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온 선물이니, 마음에 들면 해도 좋아, 르니예.”

그는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겉으로 보기에 그는 평소처럼 차분해 보였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르니예는 머리핀을 다시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저의 아기 주먹만 한 하트 모양의 새빨간 보석이 달린 머리핀은, 그래, 비싸 보이기는 했다.

오로지 비싸 보이기만 했다.

“이런 걸 누가 사나 했는데.”

진짜 사는 사람이 있네. 르니예는 그 취향과 감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성의를 봐서 한번 해 보지 그러십니까.”

사실 샤피로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런 촌스러운 걸 주면서 마음을 얻어 볼 생각을 하다니. 어떤 인간인지 몰라도 멍청하기 짝이 없군.

“너 일부러 해 보라고 하는 거지?”

르니예가 도끼눈을 뜨고 샤피로를 노려보았다. 저거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거다.

샤피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이거 하루 종일 하고 있으면 내가 금화 한 닢 줄게.”

“저는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르니예 님. 그리고 이건 르니예 님에게 온 선물이지 않습니까.”

하트가 크군. 제 마음의 크기를 보석의 크기로 표현하려는 속셈인가?

머리핀에 붙은 보석이 빛을 받아 반짝일 때마다 벨데메르의 눈빛은 한층 더 시리게 빛났다.

“르니예, 이러다가 또 늦겠군.”

“아 맞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해서 다니도록.”

벨데메르는 여느 때와 같이 가벼운 포옹으로 르니예를 배웅했다. 하지만 그는 묘하고 불쾌한 감정과 싸우는 중이었다.

르니예에게 보냈단 말이지. 결혼한 몸인 것을 알면서도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단 것이지.

“이건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벨데메르는 샤피로가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고 생각 안에 매몰되었다.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어올 틈도 없이 휘몰아치는 잡념에 벨데메르는 정신을 빼앗겼다.

르니예를 마음에 둔 누군가가 또 있다. 에드윈이 아닌 다른, 또 다른 누군가가. 이게 이토록 신경 쓰일 일인가.

“주인님?”

벨데메르는 답도 해 주지 않은 채 이 층 제 방으로 올라갔다.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쓴 편지 한 통, 예쁘지도 않은 선물 하나. 그게 뭐라고 이리 신경을 거스른단 말인가.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정작 편지의 당사자인 르니예보다 벨데메르가 훨씬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딴 게 왜 신경이 쓰이는 거지?”

“르니예 님, 왜 다시 돌아오십니까?”

“꿀벌이를 두고 갔어. 집 안에 갇혀 있나 봐.”

르니예는 현관문을 열고 꿀벌을 불렀다. 집 안 구석에서 딴짓하며 놀고 있던 꿀벌이 르니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날아 나왔다.

“그럼 갈게. 응? 그건 왜 들고나왔어?”

샤피로는 여전히 손에 그 머리핀을 쥐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이건 어떻게 할까요?”

“그거? 준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버려야 하지 않을까?”

르니예는 샤피로에게서 머리핀을 건네받았다. 저에게 온 선물이니 버려도 제가 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버릴게.”

“그러십시오.”

그러고서 르니예는 정원 한쪽에 있는 커다란 통에 머리핀을 휙 던졌다.

“……?”

그것은 샤피로가 낙엽을 모아 태우려 만든 통이었다.

“거기는 쓰레기통이 아닙니다, 르니예 님!”

“그럼 뭔데?”

“낙엽을 태우는 통입니다. 타지 않는 쓰레기는 타지 않는 쓰레기끼리 모아서 버려야 한단 말입니다.”

“미안, 몰랐어.”

평생 쓰레기 한 번 치워 본 일 없는 르니예가 그런 걸 알 턱이 없었다.

“근데 그냥 낙엽이랑 같이 태우면 안 돼? 알아서 녹겠지.”

“보석이 겨우 저 열기에 녹겠습니까? 아무튼 제가 알아서 치울 테니 르니예 님은 이만 상단으로 가 보십시오. 이러다 또 늦으시겠습니다.”

투덜거리면서도 르니예를 위해 대문을 열어 주는 샤피로와 그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는 르니예는 알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지켜만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시선이 질투에 활활 불타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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