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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36화 (36/120)

36화. 후회의 정석?

“르니예 님, 오셨…….”

로이드는 기억의 파편 속에서 지금 르니예가 짓고 있는 표정을 떠올렸다. 누군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다면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로이드는 르니예 가는 길을 막지 않고 비켰다.

“체이스, 이 염병할 놈이.”

르니예는 체이스가 지내는 창고 문을 발로 뻥 찼다. 문이 부서질 듯 흔들리고 낮잠을 자고 있던 체이스가 화들짝 놀라 깼다.

“아우, 놀라라.”

그의 옆에는 금이 된 돌멩이, 금이 되다 만 돌멩이, 그냥 돌멩이가 굴러다녔다. 르니예는 그중에서 가장 단단해 보이는 짱돌을 주웠다.

“왜, 왜 그래, 고용주.”

체이스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너 입 그렇게 함부로 놀릴래?”

체이스였다. 페롤라에게 소원에 대해 말한 사람은.

“이리 와, 다시는 허튼소리 못 하게 강냉이를 털어 줄 테니까.”

소원을 고르고 골라서 간절한 사람 위주로 들어주려고 했는데!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면 소문을 낼 거예요.’

페롤라는 깜찍하게도 그들을 협박했다.

‘이 소문이 영주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그 욕심 많은 양반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그녀의 협박은 먹혔다. 페롤라를 처치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긴 했지만, 소원을 들어주는 쪽이 간단했다.

‘누굴 죽이거나 살리거나, 뭐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소원은 안 빌게요. 정말이에요.’

페롤라는 벨데메르의 바짓가랑이를 붙들 기세였다. 벨데메르는 질색을 했다. 그는 두 번 다시 자신의 조각을 만지지 말라는 조건을 걸고, 소원을 수락했다.

‘그럼 이제 말해 줘요. 소원 이야기를 해 줬다는 전 남자친구가 누구예요?’

‘그, 체이스라고…….’

‘체이스랑 사귀었어요?’

르니예는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페롤라에게 정보를 흘렸다는 그 ‘전 남자친구’가 체이스라니.

체이스의 이름이 나오자 소원을 이룰 생각에 화색이던 페롤라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게, 어쩌다 보니 실수로 사귀게 됐어요.’

‘아.’

할 말은 많았지만 르니예는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샤피로는 참지 않았다.

‘남자 보는 눈이 최악이시군요.’

‘그땐 외로워서 그런 거예요. 사람이 외로우면, 가끔 판단력이 흐릿해지기도 하고 그런 거니까.’

라고 말하는 페롤라의 얼굴이 어찌나 씁쓸해 보이던지.

아무튼 르니예는 체이스에게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받으러 왔다.

“돌 좀 내려놓고 말해.”

“왜 헤어진 여자친구한테 가서 입은 털었어?”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헤어진 여자친구라니.

“아니, 나는…….”

“너, 페롤라한테 미련 남았지?”

체이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미련이 남았다기보다 그냥 어? 그런 마음 몰라?”

“뭐, 무슨 마음?”

보여 주고 싶었다.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예전 그 지질한 모습이 아니라 돌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네가 찬 남자가, 실은 이렇게 대단한 남자라고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다. 뭐, 페롤라가 후회하고 잡으면 잡아 줄 마음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는 있었지만.

“구질구질하기는.”

“야, 아니거든?”

“페롤라가 후회하게 하고 싶었으면 돌을 금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네 얼굴을.”

거기까지 말하고 르니예는 멈칫했다. 심한 말을 할 뻔했다.

“나 상처받았다.”

“원래 진실은 아픈 법이야.”

르니예는 짱돌을 내려놓았다.

“하여간 앞으로 밖에 나갈 때 내 허락 맡고 나가. 안 그러면 목줄 채워서 묶어 놓는 수가 있어.”

체이스가 입술을 삐죽이며 비아냥거렸다.

“그런 취향이야?”

“아니, 여차하면 강냉이 터는 게 내 취향인데.”

체이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는 소중하니까.

에드윈은 프리야가 상단을 나가 가족과 살기 원했다. 에드윈의 명으로, 바딜은 프리야의 고향에 적당한 집을 얻어 주러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딜은 프리야가 그들을 속였음을 알아차렸다.

프리야의 가족은 그곳에 살지 않았고, 프리야가 말한 사연이 전부 거짓이었다.

“도련님께서 아시면 충격받으실 텐데.”

바딜은 복잡한 심경에 상단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자꾸 멈췄다.

‘이번 일에 프리야가 휘말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 바딜.’

‘그렇게 위험한 일입니까?’

‘그래. 그리고 프리야는, 내 약점이다. 지금 부인과 내 사이에 끼면 프리야는 예전보다 더 힘들어질 거야.’

바딜은 그가 맡은 사건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에드윈의 의견에 동의했다.

르니예가 있다는 것만으로 상단은 프리야에게 위험했다.

상단을 나가 편히 지낼 수 있으면 프리야에게도 더 좋겠지. 바딜을 최선을 다해 좋은 집을 찾아주려 했다.

“프리야.”

그러나 프리야의 거짓으로 인해 그의 계획은 다 물거품이 되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지금?”

“응, 중요한 얘기야.”

프리야가 거짓말한 사실을 알고도 바딜은 프리야를 믿고 싶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려 온 사람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바딜은 애써 합리화했다.

“실은 오늘 네가 살았던 마을에 다녀왔어.”

“뭐라고?”

“도련님이 가 보라고 했거든.”

프리야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바딜이 빨랐다.

“내 말 먼저 들어. 가서 내가 뭘 알아냈는지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해.”

프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콜론의 상단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기 위한 연극이었다. 이게 다 콜론이 지독한 구두쇠였기 때문이다.

콜론은 저택의 사용인을 따로 고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을 사용했다. 그들은 노동으로 빚을 상환한다는 전제하에, 아주 적은 금액을 받으며 일을 했다.

그래서 프리야는 도둑 길드에 있는 다른 길드원과 합을 좀 짰다.

“그 집에 사람 안 산 지 오래되었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야?”

프리야와 다른 길드원은 가족인 척하기 위해서 외딴 마을에 빈집을 잠시 썼다. 아버지 역을 맡은 사람은 일부러 콜론에게 돈을 빌리고서 갚지 않았다.

그러자 콜론은 빚쟁이를 보냈고, 프리야는 아픈 아버지 대신 본인이 가겠다며 자원했다.

그렇게 가족 놀이가 끝났다.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거기에 다시 누가 찾아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그건 아니야.”

침착하자. 프리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몰래 심호흡을 했다.

“그럼 뭔데?”

프리야는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짰다. 부디 바딜이 속아 넘어가기를 바라면서.

“그 사람은 내 양아버지야. 엄마가 나를 데리고 재혼했거든. 그런데 엄마가 죽고 나서부터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

자, 슬픈 생각 하자, 슬픈 생각. 프리야는 눈물을 쥐어짜 내며 말했다.

“그 빈집은 원래 우리 외할아버지가 살던 집이었거든. 빚쟁이들이 찾아오니까 그 집으로 잠깐 간 거였어.”

드디어 프리야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날 내가 콜론 상단에 들어오겠다고 한 건, 양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어. 적어도 여기 오면 때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프리야…….”

바딜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났다.

“작은 주인님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원래 주소를 말하지 않은 건, 다시 거기로 돌아가지 않고 싶어서 그런 거야.”

프리야는 애처로운 눈동자로 바딜을 쳐다보았다.

“상단을 나가면 아버지가 바로 찾아올 거야. 나 계속 상단에 있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

프리야의 눈물을 닦아 주려던 바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프리야는 제 주인의 여자.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다.

하지만 눈물을 흐르지 않게 해 줄 수는 있겠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프리야.”

* * *

페롤라는 어느 순간 조각에 빠졌다. 사랑에 빠지듯 조각칼이 운명처럼 페롤라의 인생에 들어왔다.

그렇게 마법을 부업으로 삼고 조각에 전념한 지 몇 년, 페롤라는 너무나 아름다운 대리석을 발견했다.

남들 눈에는 그저 돌덩이였지만, 페롤라에게는 운명의 상대처럼 보였다. 페롤라는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대리석을 샀다.

‘이제 어쩌지?’

그걸 딱 작업실에 가져다 두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탁 막힌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 대리석을 쳐다만 본 지가 일 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페롤라는 광장에 서 있는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보게 되었다. 영감이 번개처럼 페롤라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그때부터 밤낮없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페롤라는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고 작업에 전념했고, 드디어 그녀의 역작이 완성되었다.

“반가워, 내 사랑.”

“주인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벨데메르는 다시 조각상으로 향했다. 오늘이 페롤라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페롤라의 소원이 뭘까요?”

부디 너무 이상한 소원은 아니기를 빌었다. 르니예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최대한 간절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줘서 신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 기도할 때 근거로 제시하려고 했다.

“유명한 조각가가 되게 해 달라거나, 그런 능력을 달라는 소원일 것이다.”

딱 보니 그랬다. 르니예가 걱정하는 바를 모르지 않지만, 르니예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일지라도 저를 위해 나서서 걱정하는 모습이 아주 기특했다.

이것은 벨데메르가 간혹 샤피로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다.

역시, 나는 르니예를 샤피로와 비슷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군.

명쾌한 정리에 벨데메르의 머릿속은 깔끔해졌다.

“그럼 주인님, 곧 뵙겠습니다.”

샤피로의 인사를 끝으로 벨데메르는 조각상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행위는 물 흐르듯 흘렀다.

르니예는 바닥에 떨어진 블러디 사파이어를 주웠다.

“하긴 페롤라가 뭐 얼마나 이상한 소원을 빌겠어? 보니까 사람은 괜찮은 것 같던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르니예 님은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시군요.”

샤피로의 말에 르니예가 욱해서 쳐다보았다. 그런데 샤피로는 르니예가 아니라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쳐다보는 거야?”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쳐다본 르니예의 얼굴에 무수한 물음표가 떴다.

“……저 조각상, 내 눈에만 벨데메르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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