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각자의 옳은 길
샤피로는 연신 훌쩍이며 벨데메르의 어깨에 로브를 걸쳤다.
“주인님, 어서 사람들이 보기 전에 돌아가세요.”
“그래요, 벨데메르. 이제 다 해결됐어요.”
다 해결이 되었는데 대체 왜 운단 말인가?
“정말 문제가 없다면서 왜 우는 거지?”
“감동해서요.”
르니예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진정한 사랑을 본 것 같아요.”
샤피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다 잃어도 사랑했다는 그 사실은 잊지 않은 거예요.”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말입니다.”
“…….”
겨우 그런 일로 울었단 말인가? 덕분에 누구는 조각상에서 나오자마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건만.
벨데메르의 표정은 조각상보다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니까 그게 울 일이다?”
“완전 감동적이잖아요.”
르니예가 답답한 듯 토로했다.
“마리아는 자기 목숨보다 로이드가 슬퍼할 걸 생각했고, 로이드는 자기 기억보다 마리아를 위했어요.”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겠습니까.”
샤피로와 르니예가 서로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벨데메르, 생각해 봐요. 벨데메르의 머릿속에서 내 기억을 전부 지웠는데, 나를 위해서 소원을 빌 수 있겠어요?”
르니예는 로이드가 떠나간 자리를 보며 거의 울분을 토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울분을 토할 일인가.
“이런 사랑이 있어서 세상이 아름다운 거죠.”
르니예가 마리아와 로이드의 사랑에 취해서 중얼거렸다.
“그 말만큼은 동의합니다, 르니예 님.”
샤피로는 두 손을 꼭 모으고서 감동에 파묻혀 있었다. 르니예에게 꿀벌 말고 샤피로를 붙여 줘야 하나. 감수성이 풍부한 게 아주 잘 맞는군.
“사랑이 그저 허상일 뿐인 것을.”
벨데메르는 감정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그런데 계속해서 르니예가 한 말이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벨데메르는 기억을 지워도 나를 위해서 소원을 빌 수 있겠어요?’
“흠.”
글쎄.
그렇다면 너는 어떨까, 르니예. 기억을 지운다면 나를 까맣게 잊을까.
* * *
마차 안.
르니예는 마리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러 가는 중이었다.
“이거 좀 눈에 대고 계세요.”
에니가 찬물에 적신 수건을 르니예의 눈두덩이 위에 올려 주었다.
“그렇게 심해?”
“아까 부단주께서 작은 마님 눈병 걸렸냐고 물어보시던데요.”
마리아와 로이드 때문에 이틀을 훌쩍였더니 눈이 팅팅 부었다.
“억울해. 같이 운 샤피로는 멀쩡하던데.”
역시 사역마는 사역마였다. 샤피로는 그렇게 울고도 말끔한 얼굴을 유지했다.
“근데 무슨 사역마가 감수성이 풍부해요?”
“내 말이. 다시 봤다니까.”
“……겨우 그걸로?”
에니는 르니예의 얼굴 위에서 물수건을 치웠다.
“다 왔어요, 작은 마님. 또 울지 마시고요.”
“마리아도 멀쩡한데 왜 울겠어?”
라고 한 것이 무색하게 르니예는 마리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코끝이 찡해 미간 사이를 꾹꾹 누르며 르니예가 마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마리아, 몸은 괜찮은 거예요?”
“아주 멀쩡해요.”
마리아의 얼굴에 꽃잎 같은 생기가 피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신께서 정한 제 시간을 마음대로 늘려도 될지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마리아?”
“저 어렸을 때, 제 또래 아이가 죽었어요. 그 아버지가 죽은 아들을 살리려고 방법을 수소문했었나 봐요.”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아들이 살아났다며 미친놈처럼 웃고 다녔다.
“마을 사람들이 가서 정말인지 확인해 봤어요. 저도 몰래 따라갔고요.”
“그래서 아이가 정말 살아났어요?”
“아니요, 죽어 있었어요. 그런데 꼭 산 사람 같았어요. 산 사람 같았는데도, 아주 소름 끼쳤어요. 며칠간 악몽을 꿀 정도로. 난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 나서 그 아버지란 사람은 미쳐 버렸다. 완전히 광인이 되어서 사람 구실도 못하고 떠돌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순리를 거스르는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에요. 소원도 마찬가지죠. 죽을 운명을 살려 달라고 했다가, 그 아이처럼 되거나 아니면 그 아버지처럼 미쳐서 길거리를 떠돌 수도 있었어요.”
“대가에 관해서라면 마리아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대가를 치렀으니까요.”
르니예는 로이드를 보며 말했다.
“게다가 마리아는 죽은 게 아니잖아요. 병에 걸렸던 거지.”
옆에서 마리아의 손을 꼭 잡은 로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걱정은 제가 돈벌이를 할 수가 없는 것뿐입니다.”
로이드는 제빵 기술을 거의 다 잊었다. 다시 배우려면 또 한참이 걸릴 텐데, 그동안은 마리아가 로이드를 먹여 살려야 했다.
“걱정하지 마요, 로이드. 내가 로이드에게 아주 딱 맞는 일자리를 알거든요.”
아주 쉬워서 어린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르니예는 의아해하는 로이드를 데리고 상단으로 돌아왔다.
“하루에 세 번 밥을 가져다주고, 하루에 한 번씩 돌멩이를 몇 개 주워다 주기만 하면 돼요.”
“짐승을 키우시는 겁니까?”
르니예가 입가만 억지로 끌어 올려서 웃었다.
“짐승은 아니고 그냥 돌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르니예가 굳게 닫힌 창고 문을 똑똑, 똑똑 박자에 맞춰 쳤다. 그러자 아주 작게 난 창이 열리고 허옇게 질린 얼굴 하나가 쓱 나타났다.
“인사해, 체이스. 앞으로 네 돌멩이를 책임져 줄 로이드야.”
* * *
“부인, 잠시 얘기를……, 우셨습니까?”
에드윈이 르니예의 부은 눈을 보고 멈칫했다.
“아니요, 눈병이에요.”
“그런 거짓말에 속을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에드윈의 정갈한 미간에 선이 그였다.
“부인.”
에드윈이 낮은 목소리로 르니예를 불렀다.
“……할 말이 있으면 해요.”
“그 남자를 만나는 거, 혹시 나한테 갚아 주고 싶어서 그런 겁니까?”
르니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르고 르니예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에드윈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 시작한 일은 맞다. 그러나 에드윈의 마음을 얻으려 벨데메르를 이용하는 건 아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이 가지고 싶지 않다.
“잘못 짚었어요.”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건압니까? 밤늦게 알몸에 로브만 입고 돌아다니는 건 알아요?”
“잠깐, 에드윈… 설마 벨데메르 미행했어요?”
르니예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이내 찌푸려졌다. 알몸에 로브라면, 소원을 들어주고 돌아갈 때 본 것 같은데.
“우연히 본 겁니다.”
“우연히는 무슨. 미행했죠? 왜 그러는 거예요, 정말?”
르니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에드윈이 왜 이러는 건지. 애초에 이 결혼에 요만큼의 미련도 없는 사람이 에드윈 아니었던가.
르니예는 한숨을 쉬고서 책상 아래에 있는 편지를 꺼냈다.
“에밀리한테 사람을 보냈어요.”
그에게서 온 편지였다.
“결혼할 사람은커녕 만나는 사람도 없다던데요.”
르니예는 에드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거짓말했어요?”
에드윈은 말이 없었다. 에밀리에게 사람을 보내 감시를 할 정도로, 그 남자와 합치고 싶은 건가?
“나랑 이혼하지 않으려는 진짜 이유를 말해 줘요.”
솔직히 편지를 받고서 화가 났다. 하지만 그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고 싶었다.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남자의 실체가, 최악은 아니기를 르니예는 빌었다.
“이건 부인을 위해서입니다.”
“에드윈의 목적을 위한 거겠죠. 말해 주면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도울게요.”
“시간이 흐르면 모든 걸 알게 될 겁니다, 부인.”
에드윈은 그대로 돌아섰다. 르니예가 사람까지 보내 확인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까지 해서 빨리 이혼을 하려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부인.
“바딜.”
“네, 도련님.”
르니예의 꿍꿍이든, 그 남자의 시꺼먼 계획이든,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 뻔했다. 에드윈은 그 싸움에 프리야가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다.
“프리야의 가족이 사는 마을 주변에 집을 알아보도록 해라. 그 가족도 함께 살 수 있을 만한 집으로.”
* * *
“담장에 장미가 다 졌던데, 다시 피게 해 줄까?”
“괜찮아요, 벨데메르. 내년이 되면 또 피겠죠.”
르니예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책상 위에 펼친 종이 위로 시선을 돌렸다.
“아기를 가지게 해 주세요, 이 소원이 잘못될 확률이 있나?”
“흠, 평범한 아이라고 하면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점술가 노파에게서 얻어 온 소원 목록을 두고 샤피로와 르니예가 머리를 맞대었다. 정작 소원을 들어주는 당사자인 벨데메르는 매우 소외되어 있었다.
“이 부부가 엄청 간절하대.”
“저도 들어주고 싶긴 합니다만.”
르니예는 아주 열심이었다. 에드윈이 이혼을 쉽게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그사이에 소원 개수라도 줄여 주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면 소원을 아주 헷갈릴 일이 없게 정해야 돼.”
“동의합니다, 르니예 님.”
르니예는 샤피로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그 모습이 어여뻐 벨데메르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흠.”
이상했다. 누군가를 어여삐 여겨 본 적이 있던가. 벨데메르의 시선이 샤피로로 향했다. 샤피로는 어떤가. 그 역시 르니예 못지않게 열심이었다.
나름 어여쁜 것 같기도 했다. 샤피로가 울고 있으면 신경이 쓰일까? 당연히, 쓰일 것이다. 그러니까 둘은, 비슷했다.
“내 사람이라고 받아들였나 보군.”
벨데메르는 자신의 감정 또한 연구의 대상처럼 다뤘다. 르니예를 대하며 느끼는 감정은 그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한 발 떨어져 보니 선명하게 보였다.
르니예를 자신의 테두리 안에 들인 것이다. 자기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니, 거짓말에 화가 나고 울면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흣.”
모든 것이 정리되던 그 순간, 벨데메르는 돌연 등줄기를 타고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샤피로와 르니예가 놀란 눈으로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벨데메르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누군가 나를 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