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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2화 (2/120)
  • 2화. 난 남편이 있는데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

    지난번 소원을 빌었을 때는 소원을 말하자마자 조각상이 소원이 이뤄졌다며 돌아가라고 말했다.

    “…….”

    하지만 왜인지 이번만큼은 조용했다.

    “다시 말해 보아라.”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

    조각상이 표정을 지을 수 있을 리 없지만, 어쩐지 조각상은 굉장히 황당해 보였다.

    그렇겠지.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르니예 본인도 매우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니까.

    기껏 생각해 낸 문장이 ‘되어 주세요’라니. 다시 소원을 비는 순간으로 갈 수 있다면 더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했던가?

    르니예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시간이 되돌려진다고 갑자기 사람이 현명해질 수가 없는 법인데.

    르니예는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이번 생도 망한 건가?

    “……정녕 그것이 네 소원이라면.”

    한참 만에 입을 연 조각상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네 남편이 되겠다.”

    다시 조각상과 르니예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기뻐하는 것 같지 않군.”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래요. 너무 기뻐서요. 제 남편이 되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해서.”

    르니예는 얼떨결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내 상황을 깨닫고 실소를 흘렸다. 남편이 되어 달라고 했다. 이미 남편이 있는데. 게다가 이번 남편은 조각상이다.

    그것도 말하는 조각상.

    이제 르니예에게는 남편이 둘이다. 하나는 사람인데 바람을 피우는 중이고, 하나는 조각상인데 남의 소원을 들어주고 말도 한다.

    남편 복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어떤 원리로 시간이 돌아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왕 돌려질 것이었다면 애초에 소원을 빌기 전으로 돌아갔으면 좋았을걸.

    “뒤로 물러나라.”

    조각상이 경고했다. 보통 경고를 하면 그에 따른 행동을 할 시간을 주지 않나?

    인간의 상식은 조각상의 상식과 다른지, 르니예가 그 말을 이해하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각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어어, 어!”

    르니예가 넋을 놓고 있다가 어어 하는 순간 조각상이 정수리부터 반으로 쪼개졌다.

    쾅-

    둔탁한 물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대리석 조각과 바닥의 먼지가 풀썩 떴다가 내려앉았다.

    르니예는 콜록거리며 얼굴 앞 먼지를 손으로 휘휘 저었다.

    “……사, 사람?”

    “왜 놀라지? 조각상인 채로 남편이 되어 줄 수는 없지 않나.”

    조각상이 사라진 자리에 조각상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이 된 그에게는 색이 있었다.

    암흑으로 물들인 듯한 머리카락, 언뜻 보면 머리카락과 같은 색인 듯싶지만 보랏빛을 띠고 있는 눈동자, 눈동자를 감싸고 있는 길고 서늘한 눈매까지. 남자는 아름다웠다.

    그 단어 말고는 그를 설명할 수 없었다. 잘 벼린 칼처럼 아름답고 위험해 보이는 남자였다. 손을 대면 반드시 피를 볼 줄 알면서도 손을 뻗게 하는 위압적이고 기이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 벨데메르, 이 순간부터 너의 남편이다.”

    높낮이 없는 낮은 음색으로 남자가 말했다. 절대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이혼 같은 단어는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도 안 나게 하는 목소리 말이다.

    “저기…….”

    조각상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런데 그게 내 남편이 될 사람이다. 이게 정말 꿈이 아니란 말이야?

    르니예는 손등을 꼬집었다. 아팠다. 이건 꿈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남자도 이 상황도. 르니예는 눈을 깜박이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르니예의 눈앞으로 남자의 훌륭한 몸이 펼쳐졌다. 타고나기를 커 보이는 골격과 빚어 놓은 듯 잘 짜인 복근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허벅지, 그 사이의 남자다운……?

    “……!”

    홀딱 벗고 있잖아!

    그래, 조각상에서 튀어나왔으니 당연히 벗고 있겠지. 조각상도 나체인데,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이 옷을 입고 있으면 그것도 웃기니까.

    무심코 그의 몸을 훑던 르니예는 그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렸다.

    “왜 그러지?”

    벨데메르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르니예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더욱 가까이서 보이는 그의 나신에 르니예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또 눈길을 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가 아니라 남의 나체를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서 그렇다.

    “그, 저기, 옷을 안 입고 있어서.”

    “아.”

    벨데메르도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보였다.

    “고개를 돌릴 필요 없다. 이제 넌 나의 부인이니.”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앞으로 한 발 더 다가가며 말했다.

    “원하는 만큼, 마음껏 보아도 좋다.”

    “그게 그렇긴 한데…….”

    부부가 되긴 했지만 벨데메르와는 초면이었다. 초면부터 진도를 이렇게 빼도 되는 걸까?

    “하지만 네가 내 아내가 되었더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르니예는 여전히 고개를 반쯤 돌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물었다.

    “그게 뭔가요?”

    “보는 건 마음껏 봐도 좋지만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쳐다보는 건 되지만, 만지는 건 안 된다? 그게 무슨 부부 사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걸 따지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우선 저 알몸을 가려야 한다. 르니예는 자기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서 벨데메르에게 건넸다.

    “일단 입으세요.”

    마을로 내려가면서 르니예는 생각했다. 이번 생도 망했다고.

    두 번째 남편이 차라리 조각상이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사람이 된 그는 이제 말도 하고, 자기 발로 어디든 갈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만일 르니예에게 남편이 원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수많은 여인이 나를 소유하려 들었지.”

    르니예의 로브를 허리에 둘러 하반신만 간신히 가린 벨데메르는 옛 회상에 젖어 있었다.

    “방에 숨어 있다가 내가 잠들자 침대로 들어온 여자도 있었다. 칼을 들고 협박한 이도 있었지.”

    자기애로 가득 찬 회상이었다. 저렇게 자기애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면 르니예가 저를 두 번째 남편으로 들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엄청나게 자존심 상해할 것이다.

    벨데메르는 조각상에 갇혀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했으니 조각상에 갇혔겠지.

    도대체 어떤 짓을 하면 조각상에 갇혔을까. 그 성질머리를 겪어 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하지만 너처럼 나를 소유하려던 이는 없었다.”

    칭찬인가? 르니예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된 이상 좋은 남편이 되어 주지. 이 벨데메르가 그냥 평범한 남편이 될 수는 없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르니예는 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내 몸에 손을 대선 안 돼.”

    “네네, 명심할게요.”

    좋은 남편인데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다. 그림의 떡 같은 남편 아닌가?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 그림의 떡을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문제였다.

    일단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 거기에는 첫 번째 남편인 에드윈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여인숙으로 데리고 갈 수도 없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반나체이기까지 한 벨데메르를 데리고 들어갔다가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 딱 좋았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비어 있는 집이 있어요.”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상단 소유의 이 층짜리 주택이었는데 지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신축이고 위치도 좋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삼 년 전부터 유령이 산다는 소문이 돌아 세가 나가지 않아서 지금까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다고 빈 채로 두면 더 흉흉한 소문이 돌까 봐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내 관리하고 있으니 당장 지내기에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네가 사는 곳으로 가지 않고?”

    “아, 그게 저는 상단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살고 있어서요. 거기는 아무래도 불편하실 텐데.”

    “상단에서 일하는 건가?”

    르니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미 결혼을 한 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면 어쩔 수 없다.

    “상단이 소유한 부동산을 관리하는 일을 해요.”

    그 집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을 알려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르니예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유령이 무섭다며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한다면?

    그러면 대책이 없다. 그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서 마을로 들어가야 하는데요.”

    르니예는 난감한 표정으로 벨데메르를 훑었다. 자신이 준 로브로 하반신은 간신히 가렸지만, 상체와 무릎 아래는 여전히 맨살이었다.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마을은 숲처럼 어둡지 않다. 저러고 들어가면 반드시 눈에 띌 것이다.

    “그러고 마을로 들어갈 수는 없어요.”

    르니예는 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언제나 들고 다니는 단도를 꺼냈다. 그러고는 원피스 위통과 치마를 박음질한 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벨데메르는 황당한 눈으로 자기 치마를 뜯어내는 르니예를 쳐다보았다.

    “집까지 가는 동안만 이걸 망토처럼 두르세요. 전 속치마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앞부분의 박음질을 뜯어낸 르니예는 벨데메르에게 단도를 건네며 말했다.

    “뒤에 좀 해 주실래요?”

    그는 순순히 단도를 받아 들며 르니예의 뒤에 섰다.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네가 마을에 가서 옷을 가져오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왕 뜯었으니, 뜯도록 하지.”

    “아, 그런 방법이…….”

    그거참 일찍도 말해 준다. 뜯기 전에 말해 줬다면 참 좋았을 텐데.

    “다 됐다.”

    르니예는 헐렁해진 치마를 벗어서 벨데메르에게 건넸다. 그는 한숨을 지으며 치마를 뒤집어쓰고 어깨에 걸쳤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펑퍼짐한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잔뜩 찌푸린 벨데메르를 보며 르니예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가실까요?”

    깊은 밤. 마을은 잠들어 있었다.

    르니예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행인이 몇 있기는 했지만 멀리서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여기예요.”

    르니예는 주택의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주기적으로 관리를 한다고 해도 매일같이 쌓이는 먼지는 어쩔 수 없었다.

    “청소는 이따가 하고 피곤하실 테니, 침실 먼저 보실까요?”

    부동산 업자처럼 말한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데리고 이 층 침실로 올라갔다. 창문을 열고 침대 전체를 덮고 있던 천을 들어내고 보니, 하룻밤 지낼 만은 했다.

    “침대에는 먼지가 없을 거예요.”

    창밖으로는 어슴푸레 동이 트고 있었다. 르니예의 할 일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잠깐 쉬고 계세요. 저는 옷을 구해 올게요.”

    “그러지.”

    르니예는 창문을 다시 닫고서 방을 빠져나갔다. 르니예가 계단을 내려가,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자 벨데메르는 몸을 속박하고 있는 천을 걷어냈다.

    다시금 아랫도리를 시원하게 개방한 벨데메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얼마 만에 누리는 자유인가.

    조각상 속에 봉인되었던 동안 잃어버린 육체의 감각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었다.

    “하아.”

    피부로 느껴지는 서늘함, 코끝을 스치는 공기와 폐부로 깊게 들어오는 먼지 냄새까지.

    “청소부터 해야겠군.”

    벨데메르는 청소를 직접 하는 편은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그가 깨어난 것을 알고 그의 충실한 종이 달려오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빨라도 오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내내 먼지 구덩이에 있을 수 없었던 벨데메르는 몸을 푸는 셈 치고 주변을 치워 볼 결심을 세웠다.

    “…….”

    벨데메르의 청소 도구는 마법이었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자 저주인 그의 능력. 마법은 그의 무기였지만, 그를 찌른 칼이기도 했다.

    그리고 셀 수 없는 수많은 밤이 지나, 이제는 그의 빗자루가 될 것이었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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