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코어를 공격하면서 깨달은 건데, 거인은 생각보다 컸다.
이걸 잡으려면 코어 다섯 개를 동시에 쳐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날아오는 구슬을 먹어야 하는 ‘세상의 조화’ 기믹 때문에 공략이 까다로웠다.
[세상의 조화를 지켜냈습니다!]
벌써 조화를 몇 번 지켜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날아오는 구슬을 다 먹고 조화를 지켜내야만 데미지가 들어가는 시간이 생겼던 것이다.
[00:00:04]
딱 5초만.
이걸 딜하라고 만들어 놨냐!
PC 버전이었으면 용 움직이면서 동시에 스킬 차징도 해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플레이는 해 봤을지 의심스러운 난이도였다.
하지만 유네리아 유저가 무엇인가?
보스몬스터 조르아가 피격 직후 1초간 무적 상태가 되는 버그가 있을 때도 조르아를 때려잡아 드랍템을 기어코 먹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이 정도면 할 만하지!
[강력폭탄(Lv.4)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기믹을 피하는 사이 설치형 스킬을 코어 앞에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인의 첫 번째 코어 : 7%]
[거인의 두 번째 코어 : 6%]
[거인의 세 번째 코어 : 9%]
[거인의 네 번째 코어 : 4%]
[거인의 다섯 번째 코어 : 6%]
틈틈이 코어를 공격해 HP를 깎아놓았지만, 느낌이 왔다.
직접 상대해 보니까 확실했다.
코어를 한 번에 박살 내지 않으면 아주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 조화 때 터뜨릴게요!”
내 외침에 네드 님이 고개를 돌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슈웅!
그러는 사이 거인의 검이 내 바로 아래를 스쳐 지나갔다.
엘데는 끝내주는 무빙으로 칼질을 피하고 있었다.
이놈은 원래 빨랐으니 그렇다 치고, 비상식량이 좀 걱정이었는데 이놈은 말 그대로 펄펄 날아다니고 있었다.
원래 저놈이 저렇게 무빙이 좋은 놈이 아닌데?
[헤르암의 거인 : 세상의 조화 75%]
그리고 다시 조화 기믹이 왔을 때.
나와 네드 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구슬을 다섯 개씩 나눠 먹었다.
[조화를 지켜냈습니다!]
[00:00:05]
그리고 딜타임이 뜨는 순간.
지금이다! 내가 폭탄을 터뜨리려고 UI 오른쪽의 버튼을 누르려는 때였다.
[네드가 ‘열린 마음’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네드가 ‘연금술 : 폭발강화(Lv.5)’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깨알 같은 버프가 들어오는 걸 보면서 난 버튼을 눌렀다.
―퍼펑! 퍼퍼퍼펑!
그러자 시원한 폭발 소리와 함께 거인의 다섯 개의 코어가 회색으로 변해 사라졌다.
그리고.
[헤르암의 거인 : 99%]
진짜 거인의 HP가 떴다.
이때부터는 진짜 공격을 해야 했다.
[크오오오오……!]
[헤르암의 거인이 침입자를 감지했습니다!]
[헤르암의 거인이 분노합니다!]
실컷 얻어터지고 나서야 감지하고 분노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둔한 놈이 분명했다.
[헤르암의 거인 ‘세상의 조화’ 20%]
그러면서 스킬을 준비하는데, 이번에는 새빨간 빛의 네모가 떠올랐다.
아까와 똑같이 9칸의 정사각형으로 나뉘었지만 왠지 불길했다.
원래 불맛은 음식점에서 말고는 피하는 거랬어!
“네드 님, 이건 피해요!”
느낌 안 좋아!
내 말에 네드 님이 곧바로 비상식량을 움직여 방향을 틀었다.
―슈우우욱!
나와 엘데의 옆을 빨간 구슬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부조화의 구슬을 피했습니다!]
놓쳤다고 안 하는 걸 보니 피하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구슬이 지나면 공격 타이밍일까?
내가 놈을 주시할 때였다.
네드 님의 머리 위로 스킬 여러 개가 겹쳐 올라오는 게 보였다.
[네드 ‘하늘 속성 스킬 조합’ 92%]
이번 기믹이 끝나면 바로 꽂으시려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헤르암의 거인이 ‘분노의 눈길’을 가합니다!]
“어어!”
별안간 눈에서 시뻘건 빛을 발한 거인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시선을 쭉 올리기 시작했다.
―!
엘데도 놀랐는지 급히 옆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비상식량은 엘데와는 달리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었다.
―콰지지직!
살벌한 소리와 함께 비상식량의 HP가 쭉 닳는 게 보였다.
“!”
네드 님은 타고 있던 비상식량이 죽기 전에 소환을 해제해 버렸다.
아니, 그, 안 죽이는 건 좋은데!
그리고 소환이 해제되자 당연히 네드 님은 허공에서 낙하하기 시작했다.
“네네네드님 잡아!”
난 급히 엘데의 등을 두드렸다.
―목 꽉 잡아라.
뭘 꽉 잡아?
내가 되물을 틈도 없이 네드가 바로 날개를 접고 급강하했다.
시야가 바다로 기울어지는 걸 마지막으로 잠시 화면이 멈추었다.
“…….”
목 잡으란 게 이런 뜻이었냐?
렉 걸리는 게 잡는다고 안 걸리는 줄 알아?
내가 인자한 미소를 짓는 사이.
―탓!
네드 님이 엘데의 등 위로 착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면서 네드 님의 모습이 보였다.
근데 문제는 그것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네드 님 뒤에!”
네드 님이 돌아보길 기다릴 틈은 없었다.
난 그의 뒤로 휘둘러져 오는 거대한 거인의 검을 보면서 급히 네드 미니를 돌아보았다.
[네드 미니가 ‘견고한 방어막’을 사용합니다.]
―카가각!
[-99,763!]
방어막이 깎여 나가는 걸 보니 한 번에 큰 데미지가 들어오는 게 아니라, 데미지가 여러 번 자잘하게 들어오는 공격인 듯했다.
요컨대 방어막으로 막기 힘든 공격이라는 뜻.
[-11,245]
[-28,593]
[네드 미니의 ‘견고한 방어막’ 효과가 해제되었습니다.]
3타 막고 사라지면 안 되지!
“되감기!”
[네드 미니가 ‘되감기’ 효과를 자신에게 부여합니다.]
[-72,416]
[-22,887]
네드 님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한 숫자들이 떠올랐다.
―파앗!
그리고 간신히 검을 다 막았나 싶었을 때.
거인의 검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잠깐, 다 좋은데 이게 머리 위에서 번쩍이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내 얼굴이 새파래진 순간이었다.
[네드가 ‘견고한 방어막’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네드가 ‘밀어내기’ 스킬을 사용합니다.]
[네드가 ‘강풍’ 스킬을 사용합니다.]
밀어내기랑 강풍은 왜 쓰시나 했더니, 거인의 대검이 뒤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들어오는 데미지도 줄어들었다.
오…….
역시 세기의 서포터였다.
―캉!
그렇게 결국 검이 우리를 베지 못하고 튕겨 나가자, 우린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네드 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좋아요!”
―짝!
우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이파이브했다.
처음 만났을 땐 손 잡는 것도 어색했는데, 지금은 무슨 전우애가 솟아나는 듯했다.
* * *
그 뒤로 거인의 HP를 깎는 건 나름 순조로웠다.
엘데가 워낙 공격을 잘 피하는 덕에 우린 공격에만 집중하면 되었으니까.
심지어 공격만 하면 된다고 하니까 네드 님이 주는 데미지는 점점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헤르암의 거인 : 88%]
처음엔 몇 대 때려서 11% 깎는 게 고작이었지만, 나중엔 한 대에 9%씩 깎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십몇 퍼센트를 깎아내 버렸다.
공격에 집중한 상태로 버프와 디버프를 수도 없이 중첩시킨 결과였지만,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였다.
나보다…… 딜을 잘하시는 것 같은데……?
나중에 스킬 조합 레시피 써달라고 할까?
뭐랑 뭘 합친 거지? 내가 네드 님의 머리 위를 볼 때였다.
“네드 님.”
[헤르암의 거인 : 33%]
“저게 보통 HP가―”
[헤르암의 거인 : 26%]
[헤르암의 거인 : 24%]
“10%나 5% 이하로 내려가면―”
[헤르암의 거인 : 16%]
[헤르암의 거인 : 9%]
“특수한 기믹이 나올 수도 있거든요?”
아니 언제 9% 됐어? 내 눈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헤르암의 거인 : 4%]
거인의 HP가 4% 남았다는 시스템창과 함께 거인이 별안간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네드 님이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저게 특수한 기믹입니까?”
[헤르암의 거인 ‘세상의 조화’ 53%]
그걸 무슨 기믹 맞기 2초 전에 물어보세요?
난 네라고 답하는 대신 외쳤다.
“막아요!”
[네드 미니가 ‘견고한 방어막’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네드 미니가 ‘방어 효과 상승’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네드가 ‘견고한 방어막’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네드가 ‘방어 효과 상승’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쿠콰콰쾅!
방어막 네 개 위로 굉음이 울렸다. 폭딜을 너무 잘해도 문제잖아!
근데 5% 이하에 나오는 기믹이 이거밖에 안 한다고?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구오오오!]
누가 봐도 빡쳐 보이는 거인이 우리한테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뭐뭐뭐뭐야!”
바닥에 있던 작은 섬들이 우지끈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절명하며 장난감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맹렬한 속도로 다가온 거인이 우리 앞에서 입을 쩌억 벌렸다.
[헤르암의 거인 ‘흡수’ 25%]
“흡수?”
설마 이 근처에 있는 바다 몬스터를 잡아먹고 HP라도 채우려는 건가?
내가 멈칫했을 때였다.
[헤르암의 거인에게로 빨려 들어갑니다!]
“뭐뭐뭐라고?”
―후우우웁!
별안간 엘데가 날아온 것과 같은 총알 같은 속도로 거인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엘데도 놀랐는지 날개를 펴서 버티려고 해 보았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공기의 흐름이 점점 빨라집니다!]
[헤르암의 거인 ‘흡수’ 59%]
아무리 버텨도 흡수 스킬 준비가 끝나기 전에 거인 앞을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인 뱃속으로 들어가 봐야 좋은 엔딩은 안 날 것이 분명하고.
험난한 미래를 떠올리는 나와 엘데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네드 님이 외쳤다.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그러면서 엘데의 날개 바로 옆을 툭 쳤다. 용의 날개를 접게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마치 인간으로 치면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엘데가 용 중의 용이든 993년 묵은 용이든 간에 어쨌든 엘데도 용이었으므로, 그는 반사적으로 날개를 접었다.
그리고.
―쓔웅!
“얿!”
우리는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거인의 입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거인 밥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내가 눈을 꽉 감은 순간.
―쿠콰콰콰쾅!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이 주변을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