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12)
  • <82화>

    “파개한다가 카렌갑도 팔았어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잘 아는 사이셨―”

    “그건 아니고요.”

    난 대번에 부인했다.

    원래 웬수 같은 놈 정보는 알게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백 미터 멀리서 봐도 머리끝이 삐쭉 서는 그런 감이 온다니까요?

    물론 내가 이 카렌갑의 존재를 아는 건 파개한다가 신나게 입을 털었기 때문이었다.

    [제목 : 카렌갑 23강좌 등장.jpg

    글쓴이 : 파개한다

    내용 : 네리아서버 PVP는 내가 평정한다 불만시 콜로세움으로]

    [(댓글)개춥네요 : 23강?? 데미지 들어오긴함?]

    └파개한다 : 어지간한 보스 전멸기맞아도 안뒤짐ㅋㅋ]

    카렌의 갑옷은 극강의 방어력으로 유명했지만, 그만큼 다른 보조능력치가 없는 갑옷이었다.

    게다가.

    [카렌의 갑옷 효과로 ‘둔화(+23)’ 디버프 효과가 부여됩니다.]

    강화할수록 더 강한 둔화 효과가 붙는 바람에 강철깡통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갑옷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헤르암 거인이 얼마나 강한 데미지를 먹일지 모르니까.

    “갑옷 안 깨지게 조심히 입을게요.”

    난 그래도 눈을 찡긋했다.

    23강짜리 카렌갑이 박살 날 공격을 받으면 나도 박살 나겠지만, 난 살릴 수 있어도 카렌갑은 살릴 수 없잖아요?

    내 말에 네드 님이 작게 웃었다.

    “갑옷은 어차피 입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편히 입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카렌 23강쯤 되면 때로는 사람보다 쓸모 있을 수 있습니다.

    난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헤르암 군도’에 진입합니다.]

    그때 알림창이 불쑥 떴다. 그리고 난 눈을 크게 떴다.

    “어?”

    구름 아래, 훤히 드러난 시야에 전과 다른 군도의 모습이 보인 탓이었다.

    “!”

    네드 님도 놀랐는지 멈칫하는 게 보였다. 엘데의 시선도 아래로 향했다.

    ―죄다 박살이 났군.

    엘데의 말대로였다.

    군도는 마치 어린아이의 포크가 무자비하게 쑤시고 간 빵조각들처럼 두서없이 잘려 있었다.

    그 위로 거대한 검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아예 깔끔한 단면만 남기고 윗둥이 사라진 섬도 있었다.

    “헐…….”

    맵을 저렇게 부순다고?

    헤르암 거인이 무슨 파개한다야? 너 접고 나서 저기 취직했어?

    이전에 왔을 때는 이렇게 부서져 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뜰 때 네드 님이 말했다.

    “제가 유니 님께 우편을 보낼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네?”

    설마 우편 보내다가 섬 윗둥이 날아갔다고요?

    [용의 HPㄱ]

    갑자기 지난 편지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긴, 이 사람이 편지를 끊었다면 끊을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건 오히려 저 와중에 편지를 보낸 게 더 신기하잖아!

    내 뉴비를 바다에 수장시키려고 했던 그 싹수없는 거인이 바로 근처에 있다는 말이지?

    “좋아요, 이번엔 잡읍시다.”

    저번엔 본의 아니게 튀었지만 이제 정면대결 할 때였다.

    잡아서 저놈 드랍템 아무거나 넣고 주머니 만들면 된다!

    불끈! 내가 주먹을 쥐었을 때였다.

    [‘헤르암 거인’ 필드 보스존에 입장합니다.]

    [파티 전체 입장 가능 횟수 : 2/3]

    1번은 아마 우리가 전에 입장한 것 때문에 깎여 있는 듯했다.

    꽤 시간이 지나 다시 왔는데도 재입장 횟수가 초기화되지 않은 걸 보면, 초기화 시간이 길거나 아예 초기화가 안 되는 컨텐츠일 수도 있었다.

    요컨대 기회가 많이 없다는 말이다.

    “일단―”

    반드시 저 안에 잡는다!

    내가 마음을 다잡으며 네드 님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네드 님이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보스몬스터의 패턴을 먼저 파악하는 거죠?”

    그의 말에 난 잠시 입을 막았다.

    역시 이 기본기가 다른 뉴비님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비상식량.”

    네드 님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포만도에 음식 버프까지 둘둘 감아 최상의 컨디션인 노란 용이 튀어나왔다.

    ―뀨!

    기분이 좋아도 너무 좋은지 비상식량은 윙크까지 하면서 튀어나왔다.

    이놈은 보스한테 신나게 맞을 미래를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 잡으러 가는 애는 엄청 센 애야. 맞으면 엄청 아플 거야. 지금 신나 할 때가 아니란다.”

    난 혀를 차면서 비상식량을 쓰다듬어 주었다.

    ―뀨우우우!

    하지만 비상식량은 더 신난 듯했다.

    못 알아들었나?

    아니면 고생은 젊어서 한다더니 고생한다고 신났나?

    하지만 비상식량은 젊다고 보기엔 내가 너무 오래전에 조련한 친구였다.

    그때 엘데가 말했다.

    ―지금 컨디션이라면 어떤 놈도 무섭지 않다는군.

    뀨우우우 네 글자에 그런 심오한 뜻이 들어 있었단 말인가?

    그건 둘째치고 비상식량이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헤르암 거인은커녕 200레벨 보스몹 앞에서도 딴짓하던 놈이.”

    황당해서 쳐다보자 비상식량이 얼굴을 구겼다.

    ―뀨!

    단호하게까지 들리는 저 울음소리는 뭔가를 따지는 것이 분명했다.

    ―너라도 사흘 내리 굶고 어두운 곳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적을 상대하라고 하면 같은 반응이었을 거라고 하는데.

    “……제대로 번역해 주는 거 맞지?”

    뀨 한 글자 아니었냐?

    내가 비상식량과 엘데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볼 때였다.

    ―네가 연초에 새해기념 도장 깨기를 한다면서 오전 00시 21분부터 자신을 불러 부려먹었다는데.

    “오전…… 뭐?”

    난 멈칫했다. 에이리 님하고 새해 되자마자 도장 깨기 간 건 맞……는……데…….

    난 슬그머니 비상식량을 돌아보았다.

    비상식량도 엘데도 심지어 네드 님마저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진짜 사흘 굶겼었어?”

    진짜? 포만도 최대로 유지해 놨을 텐데?

    내 말에 비상식량은 엘데가 번역해줄 필요도 없이 단호하게,

    ―뀨웃!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 님…….”

    네드 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왠지 내 인성에 실망했다는 목소리 같았다.

    아니, 저도 억울하거든요?

    게다가 엘데도 혀를 차면서 날 보고 있었고 비상식량은 눈물이라도 뽑기 직전이었다.

    “아니, 나 포만도…… 분명 제대로 해 놨……는데…….”

    슬그머니 말하자 비상식량이 억울한 얼굴로 또 뀨뀨거리기 시작했다.

    ―뀽! 뀨뀨뀨!

    ―검은 공간에 있어도 배는 고파진다고 하는군.

    “뭐?”

    검은 공간이라면 인벤토리에 넣어뒀을 때를 뜻하는 듯했다.

    용을 안 꺼내놨을 때.

    “아니, 그때 포만도 안 깎이는데?”

    시스템엔 그렇게 안 나와 있었는데?

    내 말에 비상식량은 다시 억울한 듯 울어댔다.

    ―뀨우우……!

    대체 뭐라고 한 건지 엘데는 날 쓰레기 보듯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잠깐, 이건 진짜 몰랐거든?”

    아니, 뭔 시스템을 이렇게 만들어 놔?

    용들 집어넣어 놓으면 어지간히 그냥 유네리아에 남는 풀밭 맵에 나오게 해 놓든지!

    검은 공간에 가둬놓는 것도 모자라서 포만도도 깎이는 거였냐!

    심지어 유저가 UI창으로 보는 포만도는 그대로였다. 이건 진짜 억울하다!

    “앞으론 밥 잘해 줄 테니까 그렇게 보지 마.”

    이건…… 내가 잘못……했……나?

    난 뭔가 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뀻?

    그때 비상식량이 내게 은근히 몸을 기대어 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이냐고 묻는군.

    “진짜로.”

    내 말에 비상식량이 금세 빙그레 웃었다.

    ―뀨우우~!

    그러더니 좋다고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야야, 근처에 보스몹 있어! 그러다 맞지 말고 내려와!”

    ―뀨!

    비상식량은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우리 옆으로 곱게 날아왔다.

    일단 지금은 시스템상 네드 님의 용이었기 때문에, 비상식량의 노란 등에는 네드 님이 올라타게 되었다.

    “살다 살다 용이랑…….”

    용이랑 대화를…… 내가…….

    아니 근데!

    난 황당해서 고개를 기울이면서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챙겨 들었다.

    말 안 듣는다고 버그인 줄 알고 죽였다 깨웠던 것에 이어서 굶긴 채로 일 시키기까지.

    정말 쓰레기 중의 쓰레기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헤르암의 거인’과 조우하였습니다!]

    [헤르암의 거인 / Lv. 526]

    [HP : 100%]

    우리 앞으로 거대한 거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건 네드 님이 그린 것과 똑같이 생긴 헤르암의 거인이었다.

    코어는 알고 있던 대로 머리와 팔다리에 하나씩, 총 다섯 개였다.

    일단 저것 먼저 깬다!

    “그럼 조심하세요!”

    내 말에 네드 님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상식량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뀨우!

    엘데에 비해서는 작은 몸인 비상식량은 왠지 이제 보니 아기 용 같았다.

    내가 너무…… 심했나?

    아니 근데 자기 용을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제 용용이 보실래요? 이번에 용 갑옷 대신 천옷으로 입혀줬는데 너무 귀여운 거 있죠!?’

    ……바로 가까이에 있었구나.

    난 에이리 님을 떠올리면서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에이리 님도 긴 시간 소환 안 했다가 쓸 때 새로 밥 주진 않았을걸!

    그분도 기본적으로 유네리아 고인물이라고!

    아무리 유네리아를 3D 아바타 채팅게임으로 더 많이 사용하시는 분이지만 쓸데없는 데에 돈은 안 쓰……실걸?

    에이리 님이 포만도를 무시하고 맛있는 건 무조건 용용이와 나눠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당연히 내가 게임을 나간 후였다.

    * * *

    [헤르암의 거인 ‘세상의 조화’ 1%]

    헤르암의 거인의 기믹은 예상대로 까다로웠다.

    일단 허공에서 용을 움직여 피해야 하는 기믹인 것부터 난이도가 수직 상승했다.

    ―공격은 내가 알아서 피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이게 용과 의사소통이 되는 상태가 아니었으면 일일이 컨트롤해야 했을 테니 꽤 스릴 있을 뻔했다.

    “땡큐.”

    하지만 엘데는 말이 통하는 것도 모자라 일반적인 용도 아니었으므로, 기믹을 피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난 엘데에게 움직임을 맡긴 채 헤르암의 거인의 기믹을 집중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우웅!

    [헤르암의 거인 ‘세상의 조화’ 19%]

    스킬 준비도가 20%에 달하자 헤르암의 거인 앞 전면에 빛으로 된 네모가 떠올랐다. 그 네모는 곧 넓이가 같은 아홉 개의 정사각형으로 나누어졌다.

    ―후웅!

    그 네모에서 무작위로 푸른 공 같은 것이 튀어나와 우리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구슬을 놓쳤습니다!]

    엘데가 그 구슬을 피하자마자 알림창이 떴다.

    저건 먹는 거였냐!

    “저 구슬 가서 먹어!”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엘데는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다른 용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경로로 비행경로를 틀어버린 엘데가 입을 앙 벌려 구슬을 삼켰다.

    [조화의 구슬 1/10]

    우리의 움직임을 보셨는지 네드 님도 곧 비상식량에게 구슬을 먹이기 시작했다.

    [조화의 구슬 3/10]

    이걸 다 못 먹으면 뭔가 피해가 오는 방식인 것 같은데?

    [네드 미니]

    불길한 마음에 난 네드 미니를 돌아보았다.

    “견고한 방어막.”

    그 말에 네드 미니가 눈을 반짝이더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우리 앞에 견고한 방어막이 올라오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빛이 번쩍였다.

    [조화의 구슬 9/10]

    [‘조화’를 무시한 인간들에게 헤르암의 거인이 ‘음파’를 가합니다!]

    [-109,372]

    “오.”

    420이 된 데다 카렌갑으로 시작하는 비싼 장비를 잔뜩 껴입은 덕에 내 체력은 140만을 넘은 상태였다.

    [HP : 1,292,855 / 1,402,227]

    요컨대 간지럽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크리티컬 박히면 좀 아프겠는데?

    내가 인벤토리를 뒤적거릴 때였다.

    불쑥 다가온 네드 님이 내게 방패를 건넸다.

    “이걸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이건 언제 꺼내셨대?

    난 원래 공략할 때 방패를 드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고마워요.”

    고개를 끄덕인 내가 네드 님에게 찡긋해 드렸을 때였다.

    ―쿠콰콰쾅!

    아무래도 솔로가 분명한 헤르암의 거인의 거대한 검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네드의 ‘견고한 방어막’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네드 미니의 ‘힐링’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그리고 네드 님과 미니 네드 님이 동시에 스킬을 사용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네드 님은 네드 미니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맙다는 듯이.

    “……!”

    그러자 네드 미니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래도 본체(?)와는 달리 이쪽은 좀 거만한 성격인 듯했다.

    “그럼 저도 잠시 유니 님의 능력치를 빌리겠습니다.”

    네드 님이 불쑥 말했다.

    “네?”

    이 능력치에 빌릴 게 있어요?

    그렇게 생각한 순간 네드 님의 손에 내 모습이 떠올랐다.

    [네드가 ‘유니 미니’를 소환합니다!]

    “아니 걔는 쓸데도 없을…….”

    텐……데……라고 입 밖으로 내자니 네드 님 캐릭터가 쓸모없다고 하는 것 같잖아!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지를 때 네드 님이 옅게 웃었다.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뭐가요?”

    난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귀여움이?

    사실 좀 귀여운 것 같긴 했다.

    PC 버전에서 봤을 땐 미니가 귀여운 줄 몰랐는데, 작은 사람 모양 인형처럼 생긴 3D버전 미니를 보자니…… 정말 숨 막히게 귀여웠다.

    그래, 옆에서 열심히 춤이라도 춰라.

    난 유니 미니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날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유니 미니가 내게 브이를 그리며 윙크해 보였다.

    음, 저쪽은 인싸 스타일이군.

    난 슬그머니 유니 미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미니 성격은 본체랑 정반대로 만들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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