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오.”
확실히 네드 님의 아이디어는 괜찮았다.
비록 알라반 왕성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건 물 속성 크리스탈을 쫓는 것이었지만, 불 속성 크리스탈을 쫓도록 만드는 게 불가능하진 않을 터였다.
문제는.
“좋은 생각인데 문제가 있어요.”
난 그 크리스탈 추적기를 게임 내에서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밖으로 나와서 마법사들이 기우제……가 아니라 뭔가 작은 기계를 설치하면 발동하는 물건이 맞았지만…….
“전에 알라반 왕성에서 크리스탈 추적기를 썼던 건, 크리스탈도 바로 근처에 있고 크리스탈 추적기 본체도 바로 근처에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였거든요.”
“본체가 따로 있었습니까?”
네드 님이 눈을 크게 떴다. 그야 못 보셨으니 모르실 만도 했다.
퀘스트가 바뀌기 전, 마탑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크리스탈 추적기는 거의 웬만한 방 하나를 꽉 채울 크기였으니까.
그건 아마 좀 작아진 버전(?)으로 그들의 비밀 연구실에 숨겨져, 아니 구겨 넣어져 있을 것이다.
내 설명을 들은 네드 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법사들이 설치했던 기계로부터 정보를 받아 분석하는 방식이었나 보군요.”
이해가 빠른 네드 님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마법사들이 크리스탈 추적기를 쓸 때 설치했던 것을 가져온다고 해도, 이곳에서 그곳까지는 정보를 보낼 방법이 없을 거고요.”
“바로 그겁니다.”
내 말에 네드 님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으음.”
이러면 정말 탐문뿐인가?
아니야……. 난 유네리아를 하면서 무식하게 탐문으로 퀘스트를 깬 적이 없었다.
뭔가……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늘 그랬듯이……!
[대륙 남부 : 마법의 숲
- 엘프들의 사정 들어보기(완료)
- 엘프 도울 방법 찾기(완료)
- 숲의 불 정령에 대해 물어보기(완료)
- 엘프들의 방식대로 수장 만나기(NEW!)]
난 퀘스트창을 열심히 꼬나보았다.
더 퀘스트창에 뭐가 안 뜬다는 건 나름 힌트 줄 건 다 줬다는 소린데.
“아까…….”
그때 네드 님이 입을 열었다.
“물과 바람 정령들이 도망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뭐로부터 도망치는지가 문제지만…… 잠깐만.
“어?”
난 눈을 크게 뜨고 네드 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게? 뭐로부터 도망치는지는 몰라도 어디를 피해 도망치는지는 알 수 있을 거 아냐?
그럼 십중팔구는 거기에 불 속성 크리스탈이 있다는 뜻 아닌가?
어차피 숲 중심이란 건 알고 있으니 거슬러 가다 보면, 불 정령들은 많아지고 물 정령과 바람 정령들이 도망쳐 나오는 위치가 특정될 것이다.
난 숲을 돌아보았다.
“숲을…… 뒤져볼까요?”
근데 입 밖으로 내놓고 보니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엘프들이 허락해주진 않을 것 같습니다.”
네드 님도 엘프들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느낀 듯했다.
하긴, 눈이 달려 있는 사람이면 우릴 경계하고 지나가는 엘프들의 모습을 못 볼 리가 없다.
“그야 몰래 뒤져야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정답만 알아내면 되는 게 유네리아 퀘스트 아니겠습니까?
“숲이 생각보다 넓습니다. 수색 범위를 숲 중심으로 한정한다고 해도 수색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네드 님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하지만 내 의견은 달랐다.
“그래도 이 동네 호감도 퀘스트보단 나을지 몰라요.”
내 말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네드 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퀘스트가 많이 번거롭습니까?”
그 말에 난 아련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에이리 님은 호감도 시스템에 미친 사람이었다.
요컨대 남부 숲 NPC 호감도도 다 올렸고, 사냥하다가 쉬러 나온 나는 에이리 님에게 끌려다니면서 온갖 NPC들의 진상 짓을 듣고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숲 NPC들이 정말 보통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여기 호감도 올리려면 무슨 정령 기쁘게 하기라고, 정령 앞에서 쇼해서 기쁨의 눈물 채취해야 할걸요?”
그것도 NPC당 50개씩? 혹시 몸개그에 자신 있으십니까?
난 네드 님을 돌아보았다.
“그거 다 하는 동안에 숲이 싹 다 타버릴걸요.”
그럼 펠릭스도 울고 우리 겉옷도 울고 깡통만 웃는 사회적 말살 엔딩만이 우릴 기다릴 터였다.
“하지만 천리안으로는 볼 수 없을 겁니다. 너무 넓고, 무엇보다 설명서대로라면 크리스탈 영향권에서는 천리안을 쓸 수 없으니…….”
네드 님이 곤란한 듯 말했다.
난 그 말을 듣다가 멈칫했다.
잠깐. 크리스탈 영향권에서는…… 천리안을 쓸 수 없다?
오는 길에 천리안이 튕겨 나간 이유도 결국 크리스탈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잠시만요.”
난 인벤토리를 뒤져 보았다.
[저항의 정령석]
이건 크리스탈의 영향을 무시하게 해 주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천리안하고는 패치 시기가 겹치지 않았다.
천리안이 없어지고 나서 한참 후에 생긴 아이템.
요컨대 유네리아에서 천리안을 고려하지 않고 만든 아이템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버프 : 속성 저항(현재:불)]
게다가 나와 네드 님의 버프창에는 분명히 속성 저항 아이콘이 떠 있었다.
우리가 불 속성 크리스탈 옆에 있는 덕에 친절하게 불 속성이라고도 나와 있다.
과연 천리안을 막는 크리스탈의 영향이 우선일까, 저항의 정령석이 우선일까?
크리스탈 영향권 밖에서야 당연히 천리안으로 크리스탈 영향권 내부를 보는 게 불가능했다.
저항의 정령석의 ‘속성 저항’ 효과는 크리스탈 영향권 안에서만 나타나니까.
속성 저항 없이는 크리스탈을 천리안으로 볼 수 없다는 뜻.
그렇다면 크리스탈 영향권 안에서 속성 저항을 받은 상태로 천리안을 쓴다면?
“잠시만 있어 보세요.”
설마 게임을 이렇게 엉터리로 만들었겠어?
라고 의문을 가지기에는 수많은 정기점검 긴급점검 연장점검 임시점검의 4대명검을 시도 때도 없이 뽑아대는 유네리아였다.
분명히 이런 것도 패치 한번 해 놓고 유저들이 편법 찾아내면 패치할 게 분명하다.
그니까 지금은 발견이 안 됐을 거고, 어이가 없지만 천리안 사용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
[‘천리안’ 스킬을 사용합니다.]
[위치 지정 : ‘남쪽 숲’ 지역 중앙]
진짜 되잖아!?
난 반신반의하면서 지도에서 아무 데나 찍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기가 막힌 장면이 나타났다.
“?”
아니 이게 뭐야?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일단 분명 내가 찍은 건 엘프들의 숲 한가운데였다.
그런데 불쑥 화면에 들어찬 건.
“……고기?”
고기였다. 그것도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
그리고 심지어 그 고기를 가져가는 건 엘프의 손이었다.
그리고 그 엘프는 허겁지겁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슨 먹방 BJ처럼 맛깔나게.
아니, 뭐, 그래. 갑자기 고기 먹방 볼 수도 있지.
근데 그 고기 먹방이 엘프의 숲 한가운데에서 진행되면 문제가 아닐까요?
실화냐?
「……!」
천리안이라 소리까지 지원되진 않았지만 불판 위에 고기가 올려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익어가는 고기에서 육즙이 흘러 떨어지는 게 아까웠다.
진짜 기깔나게 맛있겠다!
근데 그걸 왜 엘프가 먹냐고!
알고 보니 엘프와 인간 혼혈의 슬픈 식도락 이야기 뭐 이런 거 아냐?
순혈 엘프가 고기를 먹을 리가 없잖아?
머릿속에서 온갖 소설을 써내린 것이 무색하게도, 천리안을 위로 올려보자 고기를 먹고 있는 순혈 엘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
그들은 모두 어디에 들키기라도 할까봐 허겁지겁 고기를 먹고 있었다.
미친, 정말 고기를 저기서 구워 먹는다고?
그것도 바람 정령들을 이용해서 고기 냄새가 안 흘러나가게 막고 있기까지 했다.
나름 치밀했다.
「…….」
그리고 그들 옆에는 불 정령들이 날아다녔다. 한눈에 봐도 매우 친근해 보이는 사이였다.
엘프가 불 정령이랑 숲 한가운데에서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를 먹는다?
이건 스크린샷 찍어서 게시판에 올려도 주작이라고 욕먹을 장면이었다.
요컨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천리안’ 스킬이 해제됩니다.]
그때 천리안이 꺼지면서 원래의 시야가 돌아왔다. 난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
네드 님한텐 뭐라고 설명하지? 난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숲 한가운데에서 엘프들이 고기 먹방을 찍고 있거든요?”
“엘프들도―”
뭐라고 말하려던 네드 님이 굳었다. 그리고 기억력 좋은 분답게 되물었다.
“엘프들이 고기를요?”
“네! 고기를!”
말도 안 되지! 난 머리를 싸맸다.
“일단 숲 한가운데로 가봐야겠어요.”
뭔가 이상하다.
내 겉옷을 고쳐주고 사회적 체면을 지켜줄 엘프들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비상사태다!
난 아까 배고프다면서 튀었던 펠릭스를 찾았다.
엘프들의 숲에 진입하려면 일단 마탑주와 장로가 발행한 숲 통행증이 필요하니까.
그를 어떻게든 구슬려서 그걸 받아내야 했다.
* * *
“뭐? 숲 통행증?”
아까 배고프다고 사라졌던 펠릭스는 내 말에 아니나 다를까 노발대발했다.
“내가 아무리 자네들한테 부탁했다지만 다짜고짜 통행증을 달라니! 그럼 자네들이 걸렸을 때 나도 도매금으로―”
“뭐요?”
“아니, 아, 아무튼 안 돼!”
펠릭스가 손을 내저었다.
“내 부탁은 없던 것으로 하세!”
[퀘스트가 변동됩니―]
자자자잠깐만! 그럼 메인 퀘스트 꼬인다고! 살벌한 알림창이 뜨려는 순간이었다.
“그럼 이걸.”
네드 님이 주머니에서 불쑥 뭔가를 꺼냈다.
설마 저번처럼 유려하게 협박하실 셈?
기겁해서 돌아보니 협박용 무기보다 더한 게 튀어나와 있었다.
“자자자잠깐만!”
내가 네드 님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라비스를 가렸을 때였다.
“호오.”
펠릭스가 네드 님에게 손을 뻗었다.
“방금 내게 주려던 게 뭔가?”
이미 라비스 봤잖아! 망했다!
난 머리를 싸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