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12)
  • <34화>

    배가 찢어져라 웃고 싶었지만 영상이 나오고 있어서 웃음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흥, 미련한 것들.]

    그때 카메라 앵글이 항아리의 뚜껑으로 올라갔다.

    먼지 쌓인 뚜껑이 근엄하게 클로즈업되더니 대사를 뱉어냈다.

    [그렇게 쓰러질 것이면 진작 덤비질 말았어야지.]

    어떤 버그가 걸리나 했더니, 그냥 우리가 쓰러진 것처럼 강행되는 거였냐!

    하지만 영상에서 쓰러졌다고 주장하는 우리는 멀쩡하게 서서 항아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깔보고 있어야 할 리리스는 항아리로 변신한 지 오래였다.

    개판 오 분 전인 영상에 누군가 난입한 건 그때였다.

    [하아!]

    날카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스르릉 뽑힌 검에서, 푸른 물 속성 스킬이 뻗어 나왔다.

    아니, 누가 뜬금없이 튀어나와서 물뿌리개 짓을?

    의아해하는데 다음 순간 카메라가 비춘 건 켄이었다.

    ‘엥?’

    어떻게 NPC가 속성 스킬을 갖고 있지?

    속성 스킬을 가지게 하는 정령석은 모험가만 지닐 수 있다는 게 설정일 텐데?

    설정 까먹었어, 설마?

    [흐아압!]

    내가 당황하든 말든 켄은 검을 있는 힘껏 리리스……가 아니라 항아리에 내질렀다.

    ―쩡!

    당연히 Lv.??? 항아리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항아리 주제에 어떻게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켄의 공격을 받아쳤다.

    [크윽!]

    켄이 우리 쪽으로 쭉 밀려났다. 그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어서 이곳을 피하십시오!]

    갑자기 튀어나와서 하는 소리가 저거였다.

    아까는 우리 모가지 베어갈 것처럼 서늘한 얼굴이더니, 지금은 뜬금없이 간절한 얼굴이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알라반의 위기를 끝내겠습니다!]

    내가 떨떠름해 하든 말든 켄은 기사의 정석 같은 대사를 외치며 다시 항아리에게 검을 내질렀다.

    [그 힘을 원한 건 너일 텐데, 켄.]

    항아리가 말하니 정말 없어 보였지만 아무튼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흐아압!]

    켄은 항아리를 다시 이를 악물고 공격했고, 영상 속 우리도 검을 들고 그와 함께 힘을 합쳐 리리스를 공격했다.

    아니, 난 이렇게 항아리를 정성스럽게 패고 싶지 않았다고!

    내가 그러든 말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상은 충실하게 우리의 박 터지는 싸움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때.

    [후후후후…… 하하하하……!]

    리리스 모습이었으면 손을 그러쥐었을 틈을 두고 항아리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거 세게 박히는 공격인데?

    ―화르르르르륵!

    불이 붙은 창이 순식간에 내게로 날아왔다.

    이 타이밍은!

    [‘회피’ 스킬을 사용합니다.]

    [영상 재생 중에는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니 XX!

    내가 욕을 박은 순간이었다.

    ―챙!

    켄이 간신히 그 창을 쳐냈다.

    어라, 이 익숙한 전개는?

    [이곳은…… 제가 책임질 테니 어서……!]

    이 익숙한 플래그는?

    켄 이놈 죽을 것 같은데?

    자유도 높은 유네리아가 이상한 데서 자유도가 떨어진다면, 바로 이런 때였다.

    [① (말없이 물러난다)

    ② 그럼 부탁할게요!]

    거절 따윈 거절한다! 단호한 선택지뿐이었다.

    아니, 어이가 없네!

    둘 다 켄에게 여길 맡기고 튀는 선택지뿐. 결국 난 첫 번째 선택지를 택했다.

    네드 님도 같은 선택지를 택한 듯 말없이 물러났다.

    ―화악!

    다시 시야가 까맣게 점멸되었다가 돌아왔다.

    다시 원래 내 시야였다. 영상이 끝난 거였다.

    ―챙! 쩡!

    “죽어라!”

    “꺄하하하하하!”

    진부한 대사를 늘어놓는 켄과 리리스……여야 했을 항아리는 보스룸 안에서 난투 중이었다.

    나와 네드 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일단 물러나는 것 말곤 선택지가 없네요.”

    내 말에 네드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항아리에서 아직 뭐가 나올 거라고 믿는지 항아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두어 걸음 물러난 순간.

    세상이 회색으로 변해 버렸다. 마치 굳은 것처럼.

    “……!”

    그리고 그곳에서 색을 가진 건 나와 네드님 뿐이었다.

    네드 님은 놀란 듯했지만 난 이 상황이 익숙했다.

    이거 시나리오 영상 길게 나올 때 이러는데?

    아니나 다를까 알림과 선택지가 떴다.

    [지금부터 영상이 연속으로 재생되며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됩니다.

    중도에 일시 정지가 불가능하오니 준비가 되면 YES를 눌러주세요.]

    [YES]

    준비할 게 뭐가 있어?

    PC버전이었으면 음료수라도 한 잔 가지고 왔겠지만 우린 그런 것도 없었다.

    [YES]

    YES를 선택하자마자 화면이 서서히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 * *

    가장 먼저 클로즈업된 건 켄의 얼굴이었다.

    [하아!]

    기합 넘치는 청년 켄은 검을 내지를 때마다 기합을 넣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유네리아를 10년 하는 동안 본 적도 없던 화려한 스킬과 액션을 펼치기 시작했다.

    얼씨구, 저래 봐야 보스몹 스킬 맞고 날아갈 텐데.

    ―퍼억!

    ……라고 생각하자마자 켄의 몸이 공격에 튕겨져 날아갔다.

    [쿨럭!]

    하지만 그는 기침을 하면서도 비틀비틀 일어섰다.

    [유니 님을 노리지 마라……!]

    저 말은 아마 네드 님한텐 ‘네드 님을 노리지 마라!’로 나가고 있을 터였다.

    저런 간절한 대사가 나오면 보통 보스몹은 강한 공격을 날리기 마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하하하하!]

    항아리의 어디에서 이런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나는진 모르겠지만, 리리스가 우리 쪽으로 뭔가를 던지려고 했다.

    [!]

    흠칫한 켄이 우리 쪽으로 와다다다 달려왔다.

    저건 방어 스킬로 막을 수 있는 건데?

    우리 방어 스킬 좀 쓰게 해주면 안 될까?

    [영상 재생 중에는 스킬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어림도 없다는 알림창과 함께 켄이 내 시야 앞에 뛰어들었다.

    ―푸욱!

    그리고 다음 순간.

    역광과 함께 켄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켄의 몸에는 창 같은 긴 것이 꽂혀 있었다.

    얼씨구, 이럴 줄 알았지!

    이건 유네리아에서 시나리오 퀘스트를 낼 때마다 우려먹는 연출 중 하나였다.

    모험가 대신 공격을 맞고 죽는 NPC. 아무튼 아련한 연출.

    아니 근데 자기보다 몇 배는 강한 모험가 대신 몸빵은 왜 하는 건데?

    유네리아에서는 시나리오를 깰수록 ‘평화의 수호자’, ‘극강의 모험가’, ‘최강의 영웅’ 따위의 칭호로 모험가를 불렀지만 NPC들은 우리를 위해 몸을 던지길 서슴지 않았다.

    아니 대체 왜??

    아무래도 유네리아에 시나리오 라이터가 있다면 희생캐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어휴, 또 시작이구만.

    내가 혀를 찰 때였다.

    […….]

    카메라가 돌아가면서 네드 님의 표정이 잠깐 보였는데, 네드 님은.

    심각해진 얼굴이었다.

    ―털썩!

    켄이 그때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서 영상이 새까맣게 다시 천천히 물들었다.

    영상이 꺼지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시야가 돌아온 순간.

    “켄 경?”

    아까 내가 부르는 이름을 들으셨는지 켄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자연스러웠다.

    네드 님이 심각한 얼굴로 쓰러지는 켄을 받쳐 안았다.

    게임사의 의도에 충실한 유저님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감탄하는 순간 네드 님이 부축한 켄이, 아련한 표정으로…….

    “모험가…… 아니, 네드 님…….”

    네드 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

    네드 님의 표정이 순식간에 떨떠름해졌다.

    그의 표정은 대충 이랬다.

    이렇게…… 친한 사이였습니까,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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