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12)
  • <1화>

    [연지곤지]

    망한 게임에는 네 가지 규칙이 있다.

    첫 번째, BGM만 기깔나게 뽑아낸다.

    두 번째, 마지막까지 빨아먹으려고 키트, 즉 랜덤 아이템 박스를 신나게 낸다.

    세 번째, 매번 이름만 바꾼 같은 이벤트를 사골처럼 우려먹는다.

    네 번째, 망겜망겜 외치면서도 플레이 하는 골수 유저층이 있다.

    난 이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게임의 골수 유저였다.

    망겜 소리는 들어도, 다행히 게임에 쓴 돈이 많은 나 같은 애들 덕에 게임이 버티고는 있었다.

    하지만 뉴비 유입이 없으면 게임은 언젠가 망하기 마련.

    “이번에 들어온 팀장은 제대로 된 팀장이어야 할 텐데.”

    취임 기념으로 무슨 이벤트 한다고 했더라?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난 광장에 들어섰다.

    > 귓속말(힐러남친) : 그니까 기믹 밟은 멘딜이 잘못이지 왜 내여친탓을하냐고

    그러는 사이 귓속말이 울렸다. 조금 전까지 나와 함께 최상위 던전의 공격대를 하던 사람이었다.

    누군가들의 연애질로 망한 공대였다. 수고하셨습니다하고 나왔으면 그냥 다물고 있으라고!

    < 귓속말(유니) : 애초에 힐러가 처리해야 하는 기믹을 님한테 처리하라고 넘긴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거든요

    > 귓속말(힐러남친) : 내여친이 힘들다잖아 ㅡㅡ

    아 예…….

    < 귓속말(유니) : 그럼 니여친이랑 둘이 공대뛰시기 바랍니다 그럼 20000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난 그냥 힐러남친인지 뭔지 하는 놈을 차단해 버렸다.

    망한 게임의 마지막 특징.

    엔드컨텐츠를 할 놈들이 죄다 건너건너 아는 놈이라서 막 나가는 놈들이 많다.

    어휴.

    “옛날엔 초보 마을 광장에 사람이 꽉 찼었는데.”

    지금은 완전 파리 날린다.

    옛날에 이 게임이 이름깨나 날리던 시절에는 퀘스트를 진행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NPC를 누르기도 힘들 정도로 퀘스트 관련 NPC마다 사람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캬, 완전 망겜이다, 망겜.”

    난 오늘도 현금 결제창을 켜면서 말했다.

    그래서 오늘 한다는 이벤트가 뭐라고?

    또 한 일 년 전에 했던 이벤트 우려먹는 거겠지?

    [유네리아를 사랑해주신 당신께, 오직 한 분께만 특별한 선물을 드립니다!]

    “특별한 선물? 선물이 랜덤으로 나오는 키트 아니고?”

    난 기대를 완전히 버린 채 스크롤바를 내렸다.

    [현금 결제액 상위 1% 유저에게 붉은 구슬 아이템 증정!

    붉은 구슬 아이템을 갖고 있으면, 추첨을 통해 단 한 명에게만 전 세계 게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회 부여!]

    “현금 결제액 상위 1%?”

    이건 좀 자신 있는데?

    물론 이 이벤트에는 맹점이 있었다.

    스크롤바를 내리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놈들이 이미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유네리아>>자유게시판]

    [제목 : 그러니까 1% 중에서도 한 명만 준다는 거지?

    글쓴이 : ㅇㅇ

    진정한 흑우대결 ㅋㅋㅋㅋㅋㅋ]

    [(댓글)네리아사형좀: 그래서 그 특별한 선물이 뭔데

    └ㅇㅇ: 모름

    └네리아사형좀: 경험치 두 배 구슬 이딴 거면 때린다 진짜

    아직도이런거하니: 내가 유얼머니게임즈 본사 창문 열 개는 달아준거같은데 나한테 줘야지]

    “창문 열 개?”

    코웃음이 나왔다.

    난 아마 유얼머니게임즈 사옥 벽 한쪽은 댔을걸?

    인간적으로 유얼머니게임즈가 머리가 있다면, 계속 충성하라는 의미로 상위 1% 추첨이 아니라 가장 많이 지른 놈한테 선물을 주지 않을까?

    “그래서 그 선물이 뭔데?”

    이벤트 페이지를 아무리 뒤져 봐도 그 선물이 뭔지는 나오지 않았다.

    “뭐 이래 놓고 선물 별거 아니라서 또 욕 신나게 처먹겠지.”

    이 패턴은 강약중강약이다! 이미 익숙했다.

    난 턱을 괸 채 유네리아 관련 커뮤니티를 돌아다녔다.

    커뮤니티는 죄다 자기 현금 결제액을 인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금결제액 인증한다...jpg]

    하지만 진짜 중의 진짜는 인증하지 않는다.

    > 귓속말(에이리) : 유니님 이벤트 보셨어요? 저 이벤트 당첨 각 섰음

    그때 귓속말 알람이 띠링 울렸다.

    내 닉네임인 유니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누가 보냈나 하고 보니 어제 술김에 게임에 돈 신나게 지르신 에이리님이다.

    < 귓속말(유니) : 님 그거 다 사람한테 게임머니 산 거잖아요ㅋㅋ 유저 간 거래는 합산 안 될 듯

    > 귓속말(에이리) : 들켰네; 유니님 당첨되는 거 아니에요? 저번 달에 얼마 지르셨다고?

    난 에이리님의 귓속말을 애써 무시했다.

    그때 화면이 잠깐 멈추면서 BGM이 뚜둑 끊겼다.

    “아, 또 렉 걸리네.”

    윗집 공사한다고 뭘 잘못 건드렸는지 그날 이후로는 렉이 심했다.

    > 귓속말(에이리) : 이벤트 댓글 보니까 어떤 애가 창문 열 개 해 줬다고 자랑하고 있던데

    < 귓속말(유니) : 전 유얼머니게임즈 본사 벽 한 쪽은 해줬을 듯;

    < 귓속말(유니) : 걔가 그거 받으면 진짜 서비스 종료하기 전에 내가 해준 벽 한쪽 허물어버릴 거임

    내 말에 에이리님의 웃음이 대화창을 뒤덮었다.

    어차피 스킬 찍을 것도 다 찍었겠다, 할 일도 없었던 나는 마을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어?”

    그렇게 한참 동안 밖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아까도 지나갔던 캐릭터 하나가 내 앞을 다시 지나갔다.

    검은색을 어지간히도 좋아하는지 머리도 새까만 흑발에 옷도 검은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딱 봐도 뉴비 같은데, 저 방향으로 가면…….

    “아,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 하고 있는 건가?”

    난 하늘로 날아올라 유저를 주시했다.

    대놓고 따라가면 저쪽도 이쪽도 피차 낯간지럽지 않겠는가.

    문제의 유저가 점 하나로 보일 정도로 고도를 높이고 나서야 유저를 오른쪽 클릭해 살펴보았다.

    “아니, 왜 옷을 저기다 끼고 있어?”

    유네리아는 아이템 장착 창이 두 개인 게임이었다.

    장비창은 겉옷과 속옷이라는 탭으로 구분되었는데, 속옷이라고 정말 속옷만 입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고 겉옷에 가려진다는 의미로 쓰인 말이었다.

    요컨대, 속옷 탭에다가는 못생겼지만 능력치 좋은 옷을 입고, 겉옷 탭에다가 저런 멋들어진 제복을 입으란 뜻이다.

    하지만 저 사람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겉옷 창이 있는지도 모르는 건지 속옷 창에 제복을 입어 놨다.

    “저러면 몹한테 맞으면 골로 갈 텐데…… 근데 뭐 하는 거지?”

    문제의 속옷 제복남은 똑같은 곳을 세 바퀴째 돌고 있었다.

    난 좀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고서야 이유를 알아챘다.

    원래 샛길로 들어가야 하는 던전인데 어떤 놈이 잠수 타는 척하면서 길을 막고 있었다.

    “아니, 안 그래도 뉴비 없는 게임인데 저러다 접으면 어쩌려고!”

    난 그 자리에서 급강하해서 그놈 앞에 내려섰다.

    “!”

    그러자 길 막은 놈이 움찔했다.

    “저기요. 여기 길 막으시면 어떡해요?”

    “…….”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 길을 막은 놈은 답이 없었다.

    “저기요?”

    “…….”

    “여보세요?”

    어쭈? 잠수인 척하는 게 티가 났다.

    로브를 쓴 놈에게서 몇 걸음 물러선 난 스킬창을 뒤적거렸다.

    “이럴 때 쓸 만한 스킬이 있지.”

    보통은 이런 스킬 찍지도 않겠지만, 이 게임 고인물이라면 다들 갖고 있는 스킬!

    [멱살잡이!]

    내 캐릭터의 오른손이 빛나자 난 마우스로 로브 쓴 놈을 클릭해서 바깥으로 냅다 던져 버렸다.

    미스터 로브는 그렇게 멀리멀리 언덕에 처박혔다.

    멱살잡이 스킬은 5년 전에 너무 폭력적인 스킬이라며 배우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해진 스킬이었다.

    “아까 그분 어디 갔지?”

    난 주변을 재빨리 살폈다.

    이제 주변을 네 바퀴째 돌고 있는 검은 물체가 보였다.

    닉네임이…….

    “네드 님!”

    주변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검은 캐릭터가 우뚝 멈춰 섰다.

    화면 돌리기에 익숙하지 않은 뉴비들은 누가 부르면 자주 저런다.

    대화창에 자기 닉네임이 뜨긴 뜨는데 어디서 부르는지를 못 찾기 때문이다.

    “언덕 아래예요.”

    “아.”

    네드 님은 내가 말리기도 전에 이쪽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아이고, 저렇게 뛰어내리면 낙하 데미지가…….

    [-89]

    네드 님의 체력 게이지 바를 보니 완전 빈사 상태였다.

    저럴 줄 알았다.

    힐링해 주자 그가 고맙다는 제스처를 해 왔다.

    “이 던전은 이리로 들어가시면 되는데…….”

    난 다시 그의 장비창을 살폈다.

    무기는 꼴랑 칼 하나 든 게 끝인가?

    보통 뉴비들은 아이템창이 너무 좁아서 있는 무기는 다 들고 다니는 게 대부분이었다.

    저 칼로는 여기 못 깨는데.

    하필 이 던전은 유네리아의 진입장벽으로 유명한 던전이었다.

    레벨 높은 유저가 깨줄 수도 없는 1인 단독 플레이 던전인 데다, 원거리 공격 마법을 쓰는 몬스터들이 포진해 있어서 뭣도 모르고 저렇게 칼만 들고 들어가면 죽기 딱 좋았다.

    “저기, 혹시 활 있으세요?”

    난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내가 가까이서 말하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네드 님의 캐릭터가 고개를 들었다.

    헉.

    난 화면을 돌려 네드 님의 캐릭터를 확대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그냥 까만 막대기인 줄 알았는데 완전 실례였다.

    죄송합니다!

    속옷 제복남이라고 놀린 것도 죄송합니다!

    이 구린 유네리아의 외형을 어떻게 조합하면 저렇게 잘생긴 남캐가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유네리아는 운영진이 남자 캐릭터를 버렸다고 소문 난 게임이었다.

    선택지는 헤어스타일, 눈동자, 입 모양에 턱 모양부터 피부색까지 각각 수백 가지는 되었는데도 그랬다.

    그만큼 남캐 외형 중에 잘생긴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그 와중에 보석을 집어 올리신 매의 눈이 대단하다.

    완전 내 취향인 외형이네.

    감탄하던 난 정신을 차렸다.

    “여기 원거리 공격 몬스터가 많아서 칼만 들고 가시면 죽어요. 이거라도 들고 가실래요?”

    아이템창을 연 나는 눈에 보이는 활 하나를 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니, 활을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템창에 활은 그대로였다.

    “어라?”

    아이템창을 끄고 보니 마침 네드 님이 바닥에 떨어진 붉은 구슬을 줍고 있었다.

    아니, 저건 그 빌어먹을 이벤트 아이템이잖아!

    템창을 다시 열어본 난 기함했다.

    이벤트 아이템을 떨어뜨릴 수 있게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 이 멍청한 개발자들!

    “아, 이건 저도 있어요.”

    근데 주운 네드 님 반응이 수상하다.

    “엥?”

    내가 멍청한 소리를 낸 사이 네드 님이 붉은 구슬을 두 개 내려놓았다.

    하나는 당연히 내 거고, 다른 하나는……

    “……헉, 돈 많이 쓰셨구나.”

    이 던전 올 정도의 뉴비가 현금 결제액 상위 1%라고?

    지름신이 보통 지름신이 아니잖아!

    부캐인가 싶어도 부캐면 여기서 길을 헤매고 있을 리가 없었다.

    “버려도 되는 건가요?”

    “아뇨, 안 됩니다!”

    난 순수한 이 뉴비한테 재빨리 붉은 구슬을 손짓해 보였다.

    “빨리 도로 가져가세요!”

    내 것도 줍고 나서 이벤트에 대해 설명해 주자, 네드 님은 그럭저럭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 당첨자가 나온다는 거죠?”

    “네.”

    아까 본 그 재미없는 이벤트 창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난 붉은 구슬을 템창에 잘 넣고 원래 주려던 활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비싼 아이템도 아닌데 거래 시스템 사용하기 귀찮다.

    “이거 들고 들어가시면 돼요.”

    나한텐 잡템이어도 뉴비한텐 엑스칼리버 뺨치는 사기템일 것이다.

    화살을 쏘는 게 아니라 활로 툭 때리기만 해도 몬스터가 한 방 날걸?

    “감사합니다. 이런 걸 막 받아도 되는지…….”

    이런 뉴비들의 조심스런 걱정을 틀어막는 방법은 따로 있다.

    뭐라고 답해 주는 대신 난 아이템창에서 같은 활을 몇 개나 꺼내 바닥에 툭툭 내려놓았다.

    그거 많으니까 하나쯤 들고 가셔도 티 안 납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중에 돌려드릴게요.”

    안 줘도 되지만 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즐거운 유네리아 하세요.”

    즐유즐유~ 내가 손짓하자 네드 님은 던전 안으로 쏙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후, 간만에 코피 터지게 귀여운 뉴비였어.”

    물론 코피 터진 건 외형 때문이다.

    “유네리아, 아직 안 죽었구나!”

    난 템창을 켜서 다시 붉은 구슬을 확인했다.

    근데 아까 본 거랑 모양이 좀 다른 것 같은데……

    혹시 아까 바뀌었나?

    “뭐 어때, 붉은 구슬만 가지고 있으면 되겠지.”

    난 몇 시간 후 내가 인터누텔라에 나오는 장면처럼 과거의 나를 보며 울부짖을 거라곤 생각도 못한 채, 그렇게 훌라훌라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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