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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68화 (68/100)

68화

“편히 앉게나.”

자기 사무실인 것처럼 상석에 앉은 박 회장이 수아에게 소파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원장은 수아에게 눈짓한 후 방을 나갔다.

얼떨결에 자리에 앉는 그녀에게 인자한 미소를 띤 박 회장은 손수 차를 따라 주며 말을 건넸다.

“우리 민 팀장은 언제 봐도 참으로 곱다니까. 내 손주지만 참으로 눈이 높아.”

“저는 원장님이 부르신 줄 알고 왔습니다.”

“김 실장을 시켜서 불렀는데도 오지 않고 선물도 강 변을 통해 거절하니 직접 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투는 꾸짖는 것 같은데 표정은 인자했다. 저번 회식 때부터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는 박 회장의 의도가 심히 미심쩍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 수아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걸음 했는데 성가신 노인네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저, 회장님…….”

“아가, 할아버지라고 편하게 부르려무나. 이것도 다 인연인데.”

‘아가’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말에 닭살이 돋았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박 회장이 재킷 안에서 봉투를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금박으로 ‘창립 50주년’이라고 화려하게 쓰인 초대장이었다.

당황한 수아가 살펴본 카드를 내려놓자, 박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화희 녀석이 오지 않아도 자네만이라도 참석해 줬으면 해.”

“저는…….”

역시 화희가 거절해서 날 찾은 거구나. 깨달은 수아가 단호히 거절하려는데 박 회장이 갑자기 긴 탄식을 흘리며 씁쓸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초로를 훌쩍 넘고 나니 새삼 지난 시간이 후회돼. 평생 회사 일에만 매진하느라 정작 내 식구를 돌보지 못했더구나. 특히 부모도 없이 외롭게 큰 화희 녀석이 제일 마음에 걸려.”

외롭게 내버려 둔 게 아니라 화희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갖은 고생은 다 시켰다고 들었는데.

민철에게 들은 말을 떠올린 수아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 회장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할아비로서 참 면목이 없지만, 지금이라도 화희와 잘 지낼 수 있도록 자네가 애 좀 써 주면 고맙겠어. 창립 기념식에 그 녀석이 오도록 잘 설득해 주면 더욱 좋고…….”

부담스러워서 손을 빼려고 했으나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그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놓을 기색이 아니었다.

차마 화희의 할아버지에게 버릇없이 굴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도 않고.

그녀가 고민하던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험악하게 눈을 치뜬 서 할아버지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박 회장의 손을 냅다 후려쳤다.

“듣자 듣자 하니, 능구렁이가 혓바닥을 같잖게 놀리는구만. 댁네 손자가 안 받아 주니까 우리 착한 민 팀장에게 비빌 생각인가 본데 어림없어!”

어찌나 손길이 매서운지 짝 소리가 원장실 내에 퍼졌다. 밖에서 만류하는 원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바람에 밀린 것처럼 문이 쾅 닫혔다.

“이, 이-! 하잖은 늙은이가 어딜 함부로 기어들어 와!”

황당해서 굳었던 박 회장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쳤으나 서태산은 더 크게 맞받아쳤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삿된 구렁이가 여긴 왜 자꾸 드나들어? 중간에서 나만 들들 볶인다고!”

수아 역시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둘을 번갈아 보다 서태산을 조심히 불렀다.

“……할아버지?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사납게 박 회장을 노려보던 서태산이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차! 민 팀장, 빨리 6층에 가 봐. 김 할매랑 윤 할매가 난리도 아냐.”

“예? 두 분이서 또요?”

“응, 이번엔 진짜 심각하더라고.”

수아는 뜻밖의 말에 멈칫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음 소거라 몰랐지만, 간호 사무실에서 온 부재중 전화만 13통이었다.

김 할머니와 윤 할머니는 비둘기 요양원 전부터 친한 사이였지만 한번 싸우면 매우 떠들썩해서 그 누구도 쉽게 말릴 수 없었다.

그녀에게 찡긋 윙크한 서태산이 어서 가 보라며 손짓했다.

“나는 이 종자와 할 말이 있으니 빨리 가 봐.”

고민하던 수아는 박 회장을 돌아보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방에서 뛰어나갔다.

“저,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가, 내 말 아직 안 끝났…….”

박 회장이 그녀를 불렀으나 서태산이 성큼 앞을 막아섰다.

“내 말도 아직 안 끝났어.”

“이 늙은이가 감히 누구 앞을 막아!”

노기 등등한 박 회장이 소리쳤으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서태산은 느긋하게 품을 뒤져 손가락만 한 물건을 그의 앞에 내던졌다.

“받아 둬. 강 변이 자료를 담은 콤퓨타 주머니 같은 건데. 그 뭐라더라, 유엔? 유비에스? 에스비에스? 아, 헷갈리누먼.”

“……뭐? 강 변이?”

“부신 계열사 은행에서 불이 난 건 알고 있겠지?”

“부신? 그건 극비일 텐데……. 네가 어떻게 알지?”

“거기에서 빼내 온 자료라던데.”

“뭐?!”

성의 없이 USB를 탁자 위에 내던졌던 박 회장은 크게 놀라 다시 집어들었다.

“왜 너 따위가 이걸 갖고 있지? 아니, 그보다 은행에 불이 난 게 설마 화희 짓이라는 건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한 서태산이 클클클 웃으며 턱짓했다.

“조심히 다루는 게 좋을 거야. 그걸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네놈 말년의 때깔이 정해질 테니까.”

“대체 당신이 뭐길래 화희가…….”

USB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박 회장이 다시 눈길을 돌렸을 때, 서태산은 이미 방 안에 없었다.

박 회장은 허탈하게 소파에 기대며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USB와 금박 초대장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 * *

이렇게 두 분만 두고 와도 될까. 서 할아버지가 회장님과 할 말이 뭐지?

수아는 6층으로 서둘러 뛰어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은 눈앞의 상황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서 할아버지가 대충 둘러댄 말인 줄 알았는데 6층은 온통 난리 법석이었다.

“민 팀장님! 할머님들 힘이 왜 이렇게 세세요? 제발 좀 말려 주세요!”

난처한 표정으로 김 할머니와 윤 할머니의 팔을 붙잡고 있던 보호사와 간호사들이 수아를 보고 반색했다.

복도 바닥 여기저기 화투장이 널려 있고 두 할머니의 옷차림이 엉망이었다. 침대 시트와 베개까지 나와 있는 걸 보니 대충 사건의 전말을 알 것 같았다.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화투를 즐겨 치던 할머니들끼리 싸움이 난 것이었다. 평소엔 말싸움으로 그치고 마는데 연례행사처럼 한 번씩은 크게 몸싸움으로 번졌고, 하필 그게 오늘인 듯했다.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는 수아를 본 김 할머니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간호사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와 소리쳤다.

“민 과장, 아니지, 민 팀장! 저 할마시 손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해. 글쎄, 밑장빼기를 했다니께!”

“아냐, 민 팀장. 내 손은 눈보다 빨라. 눈이 침침한 할마시가 봤을 수가 없당께!”

변명하는 것처럼 윤 할머니가 마주 소리치자, 휙 고개를 돌린 김 할머니가 눈을 부릅떴다.

“이 할마시가 어디서 이빨을 털어?”

“이빨도 없는 주제에 털긴 뭘 털어?”

“뭐라? 넌 절대 건드려선 안 될 걸 건드린 거여. 내 틀니와 이혼한 내 아들 얘기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잖여!”

아, 나와선 안 될 금기어까지 나와 버리고 말았다. 화가 난 할머니들은 없는 사투리까지 쓰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수아는 급히 달려가 가까운 윤 할머니부터 붙들었다. 윤 할머니가 잠시 주춤했으나 지기 싫었는지 대거리를 멈추지 않았다.

“내 주둥이 갖고 내가 말하는데, 왜 안 되여?”

“네년이 내 틀니에 보태 준 거라도 있냐!”

“네년은? 내가 밑장빼기 했단 증거 있냐?”

“이게 한 입으로 두말한다는 그 증거……! 어, 민 팀장!”

“어르신들, 이제 그만하시…… 앗!”

김 할머니가 뭔가를 던지는 것을 보고 앞을 막아서던 수아는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그녀가 낮게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감싸 쥐자, 복도에 싸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얼얼한 이마를 어루만진 수아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제 이마를 맞고 떨어진 ‘틀니’를 보자 화가 더욱 치밀었다.

“……할머님들!”

“아이구, 미, 민 과장, 아니, 민 팀장, 괜찮아?”

“그러게 왜 중간에 끼어들어서…….”

한껏 풀이 죽은 할머니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한 마디씩 보탰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화나서 뾰족해진 눈과 마주친 할머니들이 입을 다물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오늘은 무슨 일진이 이렇지? 온종일 남의 일에 시달린 듯했다.

수아는 거울을 보고 이마의 상처에 밴드를 붙이면서 혼자 투덜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할머니들에게 한 시간 동안 잔소리를 퍼부었더니 목까지 다 아팠다.

“……이마는 왜 그래요?”

“아, 깜짝이야.”

거울을 보느라 화희가 사무실에 들어온 줄도 몰랐다.

미간을 찌푸린 채 책상 앞에 서 있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손을 뻗어 그녀의 상처 주변을 가볍게 더듬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별말 하지 않고 그저 손만 닿았을 뿐인데 다정한 손길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수아는 커다란 손에 얼굴을 기댄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화희는 푸른색 빛이 도는 슈트 차림에 머리를 모두 넘겨서 부쩍 남자다워 보였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전화 목소리가 좋지 않길래. 더 일찍 올 걸 후회되는군요.”

그의 눈길이 조금 긁힌 것에 불과한 상처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간질간질했다.

왠지 멋쩍어진 수아는 우물거리면서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어, 일이 좀 있었거든요. 할머니들끼리 화투를 치시다가 화가 나셔서……. 그, 그걸 던지셨……. 푸흡.”

그런데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차마 틀니에 맞아서 상처가 난 거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설명하다 말고 깔깔대며 웃기 시작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화희가 인상을 썼다.

“다친 주제에 뭐가 그렇게 웃겨서요?”

“뭐, 뭐에 맞았는지 마, 맞춰…… 봐요.”

“힌트 좀 써도 됩니까?”

한번 웃음이 터지자 그의 심각한 표정조차 웃겼다. 그래서 화희가 밴드를 떼고 상처를 진득하게 핥았을 때도 수아는 웃고 있었다.

뒤늦게 이마에 그의 뜨거운 혀가 스치고 상처가 축축하게 젖고 나서야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 뭐, 뭐 한 거예요?”

화희가 제 입술을 엄지로 쓸면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쳤다.

“아, 남의 싸움을 말리다 다쳤다?”

“보, 보여요, 그게?”

놀라 그를 올려다보던 수아는 그의 이마에 붉은 기가 나타났다 옅어지는 걸 발견했다. 급히 거울을 끌어다 제 이마를 살펴보니 상처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사소한 걸로 힘 쓰지 마요!”

“왜요, 수아 씨는 남 대신 다쳐도 되고 나는 안 됩니까?”

“안 돼요. 적어도 나 때문에는요.”

한숨을 쉰 화희가 책상을 양손으로 짚고 그녀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딱 잘라 말했다.

“하,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군요.”

“그게 뭔데요?”

“나의 순정과 당신의 오지랖.”

“……지금 나한테 욕한 거죠?”

“수아 씨가 웃었으니 오늘 일은 더 말하지 않겠지만, 내가 한참 손해죠. 내 순정이 매번 지는 것 같으니까.”

수아는 부쩍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생긋 웃었다.

“사실은요, 오늘 좀 마음이 복잡했는데 이사님 얼굴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어요.”

“나 때문에 귀찮은 일이 있었다면서요. 늦게 알아서 미안…….”

“난 이사님이 사과 안 했으면 좋겠어요.”

“수아 씨가 허락만 해 준다면 조부가 다신 얼씬도 못 하게 할 수도 있어요.”

“내가 궁금한 건요. 어, 음, 저요, 회장님과 친하게 지내도 되나요?”

화희가 굳은 채로 잠시 말이 없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것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여기저기 살피기까지 했다.

수아는 상처가 지나간 흔적에 짧게 입맞춤을 하고 중얼거렸다.

“회장님 말이에요. 볼수록 어딘가 화희 씨와 닮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잘 지내고 싶어요.”

그녀의 입술이 닿자 목 안쪽으로 깊은 신음을 흘린 화희가 그녀의 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하아, 그래요. 수아 씨 마음대로 다 해요. 대신 내 주변보다 나한테만 집중해 준다면.”

제 할 말만 마친 그가 그녀의 입술을 단번에 삼켰다. 타액으로 축축해진 입술 사이로 단단하고 부드러운 혀가 미끄러져 들어와 그녀의 것을 찾아 야하게 비볐다.

저릿한 감각이 금세 황홀하게 온몸을 감쌌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둘은 한참이나 사무실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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