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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67화 (67/100)

67화

허름한 여인숙을 전전하며 수배자로 숨어 사는 동안, 부신의 육체는 기한이 다 된 기계처럼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지의 근육이 오그라들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에 제대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몸이 쥐어짜이는 고통에 지쳐 잠이 들면 생생한 악몽이 그를 괴롭혔다.

<네놈의 사지를 잘라 벌레처럼 기게 해 주지.>

장검을 든 남자에게 사냥감처럼 쫓기다 온갖 지독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놈은 날 알지 못한다, 이것은 마음의 병이다, 수없이 되뇌어도 악몽은 끊이지 않았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은 데다 고통에 시달리고 잠까지 제대로 자지 못하니, 오기와 악도 소용없었다.

부신은 여인숙 구석에서 고통을 잊으려 술만 마시면서 완전히 폐인처럼 살았다. 두 해를 그렇게 살고 나니,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차라리 죽어서 모든 고통을 잊고 싶어졌다.

괴물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서 이런 고통까지 주다니.

하늘을 욕하며 막 화장실의 거울 앞에서 면도칼을 들었을 때였다.

“나약한 놈, 무슨 멍청한 짓이냐!”

귀청을 찢을 듯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놀란 부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거울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거울 맞은편에서 황금용이 그려진 곤룡포를 입은 남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삿대질을 하며 호통쳤다.

“네가 무엇인지 까맣게 잊었구나!”

처음엔 몸이 망가진 데 이어 머리까지 잘못된 줄 알았다. 그러나 부신은 용기를 내서 거울 속 남자에게 대꾸했다. 죽기 직전인데 뭔들 어쩌랴 싶었다.

“내, 내가 무엇인데?”

부신이 묻자 거울 속 남자가 제 뒤를 가리켰다. 허름하고 더러운 화장실 대신 금으로 만들어진 황좌, 단상 아래 엎드린 수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내, 내가 와, 왕이었다고?”

남자는 제 눈을 믿지 못하며 되묻는 부신에게 분노에 찬 말을 토해 냈다.

“우리는 놈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 억울하지도 않더냐? 어서 보란 듯 영광을 되찾아라!”

부신은 오랜 시간 끼니도 잊고 거울만 보면서 현실을 잊었다.

“드디어 미쳤구만! 왜 거울에다 혼잣말을 하고 지랄이야? 미치려거든 밀린 돈이나 내고…… 허헉!”

숙박비가 밀렸다고 주인이 와서 행패를 부렸지만, 부신은 제 목을 그으려던 면도칼로 그를 죽이고서 거울만 쳐다보았다.

거울 속 남자는 먼 과거의 자신이었다.

신의 사명을 받들어, 나라를 희롱하던 죄인들을 처단하고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섰던 위대한 존재였다.

미쳤다고 해도 좋았다. 그저 이 고통을 이겨 낼 수만 있다면 어떤 허황된 것이라도 믿을 수 있었다. 자신이 괴물이거나 한낱 조직폭력배라는 것보다 과거에 황제였다고 믿는 것이 백배 나았다.

주인의 시체가 썩기 시작하자 그는 여인숙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그때 알았다. 사람을 죽이면 잠시라도 몸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을.

부신은 힘을 모으기 위해 와해된 조직원들을 수소문해서 끌어모았다. 거울 속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가진 자’들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게 만들거나, 예전에 했던 것처럼 잔혹하게 겁을 주면 됐다.

그가 만든 조직은 처음엔 작은 시골 동네 유지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기 시작해 점차 타깃을 높여 나갔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정보를 사서 땅을 투기하고 조직을 크게 키웠다. 시대가 변해 ‘폭력 조직’으로 활동이 불가해지자, 그는 망해 가는 건설 회사를 사들여 신분과 돈을 세탁했다.

돈과 폭력, 남의 약점을 번갈아 이용하면 ‘힘’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가 힘을 얻을수록 거울 속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악몽은 갈수록 심해졌다. 꿈속에서 놈에게 다친 상처가 현실로 나타나는 일도 허다했다.

아직도 뭔가 부족한 것인가,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윤성을 ‘발견’했다.

윤성은 그의 ‘악몽’과 ‘거울 속 남자’를 직접 본 것처럼 말했다.

<아, 아저씨가 옛날 옷을 입었어요. ……예, 예쁜 누나가 울면서 빌어요…….>

마치 신의 계시 같았다. 부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과거에 신의 사명을 받았던 위대한 존재였다는 것의 증명 같았다.

충동적으로 윤성을 양자로 삼았다. 과거의 자신처럼 아이를 ‘무기’로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의 예지는 점점 흐릿해졌고, 그나마 큰 열을 앓고 나더니 능력이 싹 사라졌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를 거울 속 남자라 굳게 믿는 그에게 굳이 윤성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신은 오랜 기간 같이 일한 핵심 조직원들과 일부 정재계 인사를 매수하여 ‘사파이’ 기밀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타 인사들의 약점을 캐내 쥐고 흔들며 정치계 세력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는 인내를 가지고 차근차근 과거의 영광으로 향하는 계단을 만들었다. 한 계단, 한 계단 이제 오를 일만 남을 때였다.

34년 전 선착장에서의 그 남자가 난데없이 뉴스에서 튀어나왔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30년이 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젊었지만 박화희가 그놈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먼 옛날 자신을 배신하고 무참히 살해한 걸로도 모자라 이번 생에서까지 제 인생을 망치려 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놈은 여전히 축복을 받았을까. 자신은 천벌을 받은 몰골로 태어나서 갖은 고통을 겪었는데, 왜 그는 여전히 축복받은 생을 사는 것인가.

부신은 분노했다. 더욱더 철저히 모습을 숨기고 시간과 공을 들여 과거 영광으로의 계단을 공고히 했다.

놈에게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먼 과거이든 현생이든 반드시 놈을 부수고 짓밟을 것이다.

이제 약점까지 알아냈으니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부신은 CCTV를 보며 웃었다.

하늘이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는가 보자. 만약 네놈 손을 들어 준다면 난 신의 손모가지마저 꺾어 버릴…….

똑똑.

약 기운에 빠져 과거를 회상하던 부신은 노크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뭐야!”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분기탱천한 그가 버럭 소리 지르자 웬만한 일로는 언성을 높이지 않는 권 실장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동 은행, 지하 금고에 불이 났습니다!”

“뭐?!”

경악한 부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 은행이라면 그가 돈세탁을 위해 세운 은행이자 사파이 일원의 약점이 될 증거품들을 숨긴 곳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불은 발견 즉시 진압되었으나 그곳은 회장님께서만 출입 가능하신 영역이라 정확한 피해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대체 누가! 금고만 건든 걸 보면 분명 ‘사파이’에 대해 아는 놈이다.

몇 년 전부터 ‘사파이’의 뒤를 집요하게 캐는 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물론이고 일부 앙심을 품은 인사들도 끈질기게 노렸지만 당한 적이 없었기에 방심했다.

머릿속으로 가능한 인물들을 나열하던 부신은 순간 어떤 가능성에 멍해졌다.

박화희가 재계에 등장한 시기부터 누군가 극비인 사파이를 극렬히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그와 직접적으로 마주쳤던 부산 지부부터 당했고.

설마 그놈이? 아냐, 그럴 리 없다. 우연일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권 실장이 희게 질린 부신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언짢은 기색으로 고함을 질렀다. 사냥개 따위에게 자신의 허튼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뭐 하고 있는 게냐? 당장 범인을 알아내지 않고!”

권 실장이 나가자, 부신은 악에 받친 시선으로 흐릿한 영상을 노려보다 멈칫했다.

화면의 검은 부분에 반사된 모니터 위로 곤룡포를 입은 남자가 그를 보며 언짢은 기색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 * *

수아는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서성거렸다. 아침나절 일을 끝내고 점심시간이 되자, 은근슬쩍 미뤄 두었던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천부신 때문에 놀랐던 마음이 진정되자 그가 언급했던 윤성이 걸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윤성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예전부터 그는 아버지를 극도로 싫어했다. 가출도 수차례, 봉사 활동도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한 것이었다.

<센 척하지 마. 누나도 혼자 겁에 질려서 꼼짝 못 하고 있잖아. 나도 그러니까, 그런 건 바로 알 수 있어.>

그럼 자기도 겁에 질렸다는 거잖아? 목을 졸린 게 분명한 손자국과 그의 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찾아온 천부신이 윤성의 행방부터 물었고.

천부신과 가족 관계라는 것 때문에 상황이 미덥지 않았지만, 윤성이 자체에 대한 걱정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아, 안 되겠다.

망설이던 수아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걸린 후 바로 통화가 연결됐다.

-윤성이는 샤워 중이야, 언니.”

“네?”

여자 목소리잖아? 액정을 확인했으나 윤성의 번호가 맞았다.

게다가 샤워라니. 호, 혹시 내가 뭔가를 방해한 건 아니겠지? 수아는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어, 저기, 그럼 나중에 걸겠습…….”

어? 그런데 날 언니라고 불렀지? 어딘가 목소리도 낯이 익었다.

급히 전화를 끊으려던 수아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주해린?”

-어, 언니. 전화 목소리는 되게 섹시하네?

“왜…… 그쪽이 윤성이 전화를 받아?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아는 사이는 무슨. 오다 주웠어. 니 해라. 화희 오빠는 나 주고.

당황한 수아와 달리 해린은 깔깔대고 웃으며 농담까지 던졌다.

어이가 없어진 수아가 자세히 물으려던 순간, 전화 너머로 윤성이 버럭 소리 지르는 게 들렸다.

-이 여자가 또 남의 방에 허락도 없이……! 뭐야, 왜 남의 전화는 들고 있어?

-응, 수아 언니야. 네가 샤워 중이라서 대신 받았다고 말하던 참이야.

-뭐, 수아 누나? 근데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 여, 여보세요? 누나,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이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이, 이건 우연히…….

윤성이 화를 내다 말고 전화를 도로 뺏었는지 급히 수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건 잠깐이었다. 뒤에서 해린이 끼어들었다.

-어머, 거둬 주고 먹여 줬는데 터진 입이라고 그딴 소리 할 거야? 누가 터진 만두 아니랄까 봐. 그보다 뭐라도 좀 걸쳐. 나더러 여자애 어쩌고 할 땐 언제고 달랑 수건만 걸치고 나와?

-누가 남의 방에 막 들어오래?! 아씨, 이거 왜 이렇게 안 잠겨?

-터진 만두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바지부터 걸치면 어떡해? 얼른 위부터 걸쳐!

-뭐? 그럼 입은 바지를 도로 벗으란 말이야? 아, 내가 뭐라는 거야, 진짜. 너 저리 안 꺼져?!

수아는 어느 순간 핸드폰을 귀에 대고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

남자는 급하면 바지부터 입나? 상황이 빤히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아니, 근데 내가 왜 이런 대화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수아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를 듣다가 전화를 조용히 끊었다. 방해하면 안 될 것 같고 방해하기 싫은 분위기였다.

어이없어하며 알 수 없는 조합을 궁금해하는데 뜻밖에도 원장 비서실로부터 호출이 왔다.

원장실로 들어선 그녀를 뜻밖의 인물이 웃으며 반겼다.

박 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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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s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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