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델피늄-6화 (6/100)

6화

한참 수아가 밖을 내다보자, 자신을 따라 밖을 내다보려는 윤성을 제지하려고 물었다.

“글은 잘돼 가?”

“남 걱정하지 말고 본인 걱정이나 하라니까? 누구든 돌봐 주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 버릴 것 같이 생긴 주제에.”

“그래, 네 소설 걱정은 괜히 했네. 없는 말도 그렇게 잘 지어내는데.”

수아는 슬쩍 창밖 아래를 내다보다 아껴두었던 꿀밤을 윤성에게 하나 더 먹이고 냉장고를 열어 햄을 꺼냈다.

“근데 츤데레는 은근 민. 과. 장. 님. 아냐? 나더러 꺼지라고 한 여자는 처음이었어. 그게 진심으로 걱정되서 한 소리였다니 더 놀랍다고.”

윤성과는 요양원 정원의 나무 가지치기를 하다가 친해지게 됐다. 엄밀히 말하면 나무를 올라타던 그가 떨어져서 한 달 정도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됐고 그것이 안쓰러웠던 수아가 그에게 말을 건넸었다.

<인대 상처는 관리 잘 해야 돼요. 덧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다 나으면 와요.>

<이딴 건 아무것도 아냐.>

<딱 봐도 내가 나이가 많은데 말이 짧네요?>

<나한테 신경끄시지?>

<걸리적거리니까 꺼지라고요. 정 돕고 싶으면 다 낫고서 와요.>

<누군 오고 싶어서 오는 줄 알아? 꼰대가…….>

<아, 깁스를 혀에 했어야 했네. 짧은소리밖에 못 하는 걸 보니 혓바닥이 고장 났는데.>

윤성의 첫인상은 삐딱했다. 그래서 수아도 그 이후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의외로 그는 불편한 다리로도 시키는 일은 곧잘 했다. 그게 자존심 때문이라는 걸 알고 귀여워서 그 이후 잘 대해 주게 됐다.

수아는 잠시 작년 일을 떠올리다가 붕대 감은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를 보며 냉장고를 다시 열었다. 제 걱정을 해주는 게 기특해서 특별히 사과라도 깎아 몇 조각 내줄 셈이었다.

“오, 사과까지? 봐, 츤데레 맞잖아. 시들시들해 보여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

“나 칼 들었는데 작작하시지?”

사과를 열심히 써는 수아를 보고 삐뚤어진 초등학생처럼 굴던 윤성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슬쩍 보인 해맑은 웃음에 수아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한낮의 지하철은 한산하고 따뜻했다. 마치 햇살 좋은 카페 같기도 해서 여유로웠다.

303호 할머니의 부탁으로 연락이 되지 않는 아들 집을 찾아갔던 일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유일한 혈육이 아들뿐이라는데. 적잖게 실망하실 할머니를 위해 뭐 좋은 수가 없을까?

수아는 자리를 찾아 앉고서 벽에 잠시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깜빡 잠이 쏟아졌다.

눈앞에 붉은 천이 나풀거렸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피라는 것을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그러나 인지의 순간은 찰나였을 것이다. 갑작스럽지만 의도된 죽음이 곧 육체를 짓누르기 시작했으니까.

다행히 곧 시야가 어둠에 잠기고 고통이 무뎌지면서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영혼을 뒤흔드는 강한 염원이었다.

나는 이토록 간절하게 무엇을 바라고 있지?

수아가 마치 남의 일처럼 그것을 엿보려는 순간, 귓가에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낮고 갈가리 찢어진 목소리는 그녀의 간절한 염원처럼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당신을 여전히 연모합니다. 그리하여 죽어도 잊지 못합니다.”

모든 감각이 사라졌음에도 남자의 애절한 음성은 사그라지는 의식을 잠시 얼어붙게 했다. 그의 흐느낌 섞인 음성은 너무도 선연해서 뜨거운 입김까지 느껴지는 것만 같아 수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낯익은 목소리여서 더욱 섬뜩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현실은 눈이 아플 정도로 또렷했다.

꿈이었던 걸까? 이질감에 잠시 속이 울렁였지만, 남자가 아직도 곁에 있는 것 같아 수아는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졸았었나 보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익숙한 지하철 안은 온갖 색으로 뒤덮이고 갖은 소음으로 가득한 현실이 분명했다.

하아, 본래 삶도 생존을 위한 투쟁인데 잠조차 죽는 꿈을 꾸다니.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수아의 넋 빠진 표정을 보고서 픽 웃었다.

수아는 멍하니 앞에 선 여자의 눈이 시릴 정도의 흰 피부와 피처럼 붉게 발린 립스틱을 바라보다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도 여자는 힐끗 밖을 내다보고 곧 자리를 옮겼다.

‘저렇게 과감한 화장도 어울리고 좋겠다. 나도 나중에 기분 전환 삼아 해 봐야지.’

수아는 서서히 닫히는 문밖으로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무릎 위에 놓인 가방에서 이어폰을 찾아 뒤적거렸다. 밝은 음악을 듣고서 불쾌한 꿈의 여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역에서 막 내린 수아는 어디선가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에 고개를 들었다.

“악! 저, 저 사람 뭐야!”

급히 전철을 타려는 것처럼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비정상적으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그는 달리면서 피 묻은 식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역사의 플랫폼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향하려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흩어졌고 남자는 뒤처진 여자들만 쫓았다.

“아악!”

본능적으로 비명을 듣자마자 도망치던 수아는 돌아보고 순간 멈칫했다. 달리다 넘어진 여자에게 섬뜩한 칼날이 닿을락 말락 아슬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수아는 달려가서 매고 있던 가방으로 남자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안 돼!”

“뭐야?!”

호되게 등을 얻어맞고 휘청한 남자가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곁눈으로 넘어졌던 여자가 더듬더듬 일어서는 걸 확인한 수아는 주춤 물러나면서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하도록 가방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광기에 휩싸인 눈으로 수아를 훑어본 놈이 칼을 고쳐잡고 달려들었다.

“너부터 죽여줄까?”

“너, 너나 죽어, 이 미친놈아!”

이를 악물고 가방을 냅다 놈의 얼굴에 던져버린 수아는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플랫폼이 끝이 나서 길이 막혔다. 급히 돌아보았으나 남자가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와 칼을 휘둘렀다.

“되바라진 년들은 기를 죽여야 돼!”

조금만 버티면 역무원이든 누구든 도와줄 거야. 도망칠 구석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적재함 위에 놓인 빈 커피 병을 발견했다. 수아는 병을 있는 힘껏 던지곤 반대편 벽 쪽으로 뛰었다.

“미친놈, 이거나 갖다 버려!”

“윽!

묵직한 병에 가슴팍을 얻어맞은 남자가 비틀거렸으나 바로 씩씩대며 달려들었다. 막 방향을 바꿔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악에 받친 고함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전부 죽여 버릴…… 컥!”

그런데 미처 말을 끝내지도 못한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썩은 나무토막처럼 넘어갔다.

그 뒤에 서 있던 장신의 남자가 갑자기 드러났다.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미친놈의 목을 가격했던 손을 내리면서 고개를 까딱였다.

얼어붙은 수아는 겨우 눈만 움직여 바닥에 쓰러진 미친놈과 무심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구둣발로 짓밟아 식칼을 빼내는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손뼈가 우드득 으스러지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이 섬찟했다.

뒤늦게 다리가 후들거린 그녀가 비틀거리자 남자가 손을 뻗었다. 분명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는데도 남자의 손을 피한 것은 본능적이었다.

흠칫한 수아가 겨우 버티고 서자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툭 내뱉었다.

“박화희입니다.”

“……네?”

“내 이름. 속으로 미친놈이라고 부를 것 같아서요.”

수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화가 난 것처럼도 들리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서, 설마요. 구, 구해 주셨는데요.”

“그래도 이놈과 나를 보는 눈빛의 차이를 모르겠는데.”

잠시 그녀의 희게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던 박화희가 구둣발 끝으로 쓰러진 남자의 옆구리를 세게 걷어찼다. 성인 남자의 육중한 몸이 발길질 한 번에 먼 계단 앞까지 죽 밀려났다.

공포에 질려 아득해진 정신이 번쩍 돌아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잠시 정신을 차린 남자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부러진 갈비뼈를 감싸 쥐고 꿈틀거렸다.

수아는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얼른 고개를 숙인 수아는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

“그렇다면 잠시 참아 주시겠습니까?”

“네?”

박화희가 그녀의 말을 끊고 고개를 기울였다. 들어본 질문이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또 그의 품에 덥석 안겨있었다.

수아는 겨우 놀란 비명을 삼키고 작게 항의했다.

“저기, 이번엔 진짜 안 다쳤어요!”

“나도 다쳤다고는 안 했습니다. 계속 힘없이 나풀거리길래.”

박화희는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를 가볍게 들어 근처의 대기 의자에 내려놓곤 성큼성큼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를 보던 수아는 자신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걸 깨닫고 진정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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