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안 되겠어, 이 남자 너무 이상해. 자신을 구해준 상황에 대해 감사의 인사나 자초지종을 물으려 했던 생각이 싹 사라질 정도로 남자는 기이했다.
수아가 더 견디지 못하고 차 문을 열려는 순간, 남자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치료하도록 합시다.”
“전 정말 괜찮다니까요.”
도망치듯 내리려던 수아는 남자가 다른 쪽 손으로 제 엄지를 억지로 끌어내리는 걸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상당히 웃겼을 텐데 포스가 남다른 그가 그러니 가까스로 뜻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민수아 씨는 여전히 고집이 세군요.”
여전히? 그가 한숨까지 쉬며 투덜거리는 표정이 매우 싸늘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또 그의 시선을 받으며 꼼짝할 수 없는 느낌이 덮쳐와서 수아는 눈을 피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떻게 나에 대해 이리 잘 알까. 자기 손은 왜 물어뜯고? 설마 살짝 미친 스토커는 아니겠지?
남자가 한참 고개를 기울이며 노려보는 바람에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수아는 마지못해 말을 건넸다.
“저기, 제가 어딜 그렇게 다친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남자가 수아의 손을 눈짓했다. 제 손을 들어보던 그녀는 김칫국물로 범벅이 된 걸 보고 다른 손으로 닦아보려다가 움찔했다. 손바닥에 생채기가 있었다. 넘어질 때 바닥에 긁힌 모양이었다.
따갑고 피가 좀 나긴 했지만 남자 손가락에 생긴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운전대를 꽉 움켜쥔 그의 피 묻은 손을 곁눈질하던 수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해 보았다.
“요양원에서 치료받으면 돼요.”
“병원은?”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나더러는 오래 살고 싶으면 병원을 가라면서?”
수아는 남자의 눈살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지는 걸 보고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정 그러시면 요양원에 데려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못마땅한 듯 잠시 입을 꾹 다문 남자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말을 했어. 모르는 남자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이 영 껄끄러워진 수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다 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 않는 음주 운전자를 발견했다.
금테 안경은 그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수아는 덩치를 살펴보다 미심쩍게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괜찮은 거겠죠?”
“그럴 리가.”
대답이 지나치게 빠르고 단호했다.
“네? 설마 죽었……!”
“물론…… 죽이고 싶었지만 안 죽였습니다. 다신 음주 운전을 못 하도록 처리했을 뿐. 본래라면 저놈은 민수아 씨를 치고 도주하다가 시내 한복판에서 무고한 시민 여섯을 더 죽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그의 살기 찬 어조가 너무 섬뜩해서 수아는 당장 차 문을 열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차마 더 묻지도 못했다. 둘만 있는 좁은 공간에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시동을 거는 남자를 보던 그녀는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남자의 손이 깨끗했다. 분명 엄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는데도. 심지어 피에 젖어 들던 셔츠 소매까지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슬쩍 손가락을 보았는데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상처는커녕 길고 흰 손가락은 험한 일 한번 해보지 않은 것처럼 매끄러웠다.
수아의 당황스러운 시선을 쫓아 제 손을 흘깃 내려다본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회복이 빠른 편이라서요.”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수아가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남자는 오히려 그녀의 다친 손과 안전벨트를 번갈아 흘깃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스로 맬 수 없으면 도와주겠다는 뜻 같아서 수아는 황급히 벨트부터 맸다. 그러다 제 짐이 전부 도로 위에 내팽개쳐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잠깐만요. 제 가방 좀 가져올게요.”
“바로 보내드리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가 대답하며 차의 속도를 올렸다.
도로 위에 붉게 번진 김칫물을 보자 남자의 말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아니었다면 저것은 김칫물이 아니라 제 피 웅덩이가 될 수도 있었다.
수아는 충격으로 곤죽이 된 머릿속을 헤집어 가장 객관적인 사실만 겨우 말했다.
“저기…… 고마워요.”
차를 출발시키며 전방을 주시하던 남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매우 뜻밖의 말을 들은 것처럼.
남자는 그 후 요양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절이 하얗게 변하도록 운전대를 꽉 잡았던 손은 어느새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 * *
“민 과장님, 나 햄 치즈 토스트 만들어줘.”
수아는 어제 사고의 여파로 종일 정신이 딴 데 팔려있었다. 아침 식사 후 평소 하던 일을 마치고 접수대 앞에 앉아서도 넋을 놓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윤성이 바로 코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서야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수아는 헛기침하며 반갑게 뒤늦은 인사를 했다.
“어, 윤성이구나. 언제 왔어?”
천윤성, 그는 반년 전부터 요양원에 찾아오는 대학생 자원봉사자였다.
소설가 지망생으로 휴학을 했다는데 한적한 이곳을 작업실로 정했다며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방문했다. 사뭇 건방진 태도에 비해 은근히 싹싹해서 요양원에서는 인기가 아주 좋았다.
접수대를 돌아 수아의 앞에 기대있던 윤성이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뭐야, 완전 정신이 나갔네. 한 시간 전에 인사했잖아. 뭔 일 있어?”
“아, 그랬지, 미안. 방금 뭘 달라고 했어?”
“햄 치즈 토스트 만들어 달라고.”
“내가 그런 걸 만들 줄 안다고 누가 그래?”
“맛이 기가 막힌다고 김 할머니가 그러던데. 해 줘, 엄마가 없으니까 아침도 못 챙겨 먹거든.”
수아는 순순히 일어나 간이 주방으로 향했다. 윤성이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다는 ‘엄마’ 카드를 내밀 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뒤를 따라온 윤성이 비치된 식탁 의자에 앉다가 놀란 듯 물었다.
“손 뭐야, 다쳤어?”
“아, 이거? 어제 사고가 있었거든.”
“사고? 무슨 사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데도 윤성이 소리를 버럭 질러서 수아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붕대가 과하긴 했다. 어제 요양원까지 데려다준 남자가 ‘사고가 심각했다.’는 말로 근무 중이던 닥터를 압박해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치료 내내 수아의 옆에서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려고 하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게 끝입니까’ 묻는 통에 닥터는 한 달 전, 발목을 삔 서 할아버지의 다리보다 더 두껍게 붕대를 감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아는 치료가 끝나고 그가 순순히 돌아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아직도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놀라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사고가 다시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사기꾼으로 보였던 남자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나서 자신을 구해 준 것인지. 정확히는 흑차 탄 무지막지한 기사님이겠지만, 하여튼.
걱정하는 게 진심인 것 같아서 차마 남자를 사기꾼 취급하면서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투성이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본 것처럼 말하질 않나. 자기 피도 먹으라고 하질 않나. 분명 피가 나는 걸 봤는데 어떻게 금방 나을 수가 있는 건지.
뒤에 와서 사고 처리를 한 듯한 안경 낀 남자는 또 누굴까. 단체로 수상하다. 혹시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돌은 건 아니겠지?
남자에 대한 생각이 멎자 다시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차려고 했다.
안 돼. 아무것도 확실치 않은데 구해준 은인에게 나쁜 상상은 하지 말자. 일단 음주 운전 사고로 죽을 뻔했던 건 사실이니까.
수아는 윤성에게 손을 휘휘 저어 보이고서 간단히 설명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고가 난 걸 보고 놀라서 혼자 넘어진 거야. 내 코앞에서 차 두 대가 충돌했거든.”
“혼자 넘어진 거라고?”
“창피하니까 더 묻지 마. 근데 넌 이런 츤데레가 컨셉이니? 얄밉게 굴다가 잘해 주는 거?”
붕대를 노려보던 윤성이 뜨악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꼈다.
“설마. 난 사람 자체를 싫어해. 민 과장님이 특별한 거지.”
“특별?”
“내게 소설의 영감을 주니까. 이상하게 민수아만 보면 뭔가 떠올라.”
특별이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윤성에게 수아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이마에 꿀밤을 내리쳤다.
“민수아? 이게 진짜 오냐오냐했더니. 반말은 어떻게든 넘어가지만 호칭은 안 돼.”
“윽, 차라리 뺨을 쳐. 내가 애냐?”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감싸는 윤성의 정수리에 한 번 더 꿀밤을 먹이려던 수아는 순간 뒤를 훽 돌아 유리창을 보았다.
분명 시선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후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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