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베일란의 말에 카델리아가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신전에 억제구가 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어! 그런데 베일란, 오필리아가 방해하려 들면 어떡하지?”
그놈은 오필리아와 가까워 보였다며 카델리아가 말끝을 흐렸다.
수도에서 안하무인으로 지내던 카델리아였지만, 라딘으로 와 보니 제 신분이 생각보다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긴 한 모양이었다.
“시녀만 좀 데려오느라 내 기사도 안 데려왔단 말이야.”
“개인 호위 하나 없이 내려오신 겁니까?”
“남는 자리가 부족했는걸! 난 시녀가 셋은 있어야 단장을 제대로 마칠 수 있다고!”
라딘에 온 목적이 로넨 대공, 이안을 꼬여 내겠다는 것이었던 만큼 치장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카델리아의 말에 베일란은 잠깐 말문이 막힌 듯한 눈을 했지만, 카델리아에게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녀들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해. 언니는 여기서 직속으로 부리는 사람만 한 손이 넘어가는데!”
“걱정 마세요. 저희 사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전하를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나설 겁니다.”
“그래도, 방해를 할 것 같은데…….”
“정 걱정이 되신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오필리아 전하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그사이에 마법사를 치죄하는 겁니다.”
베일란의 말에 카델리아의 눈이 기묘한 이채를 띠었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그렇잖아도 자꾸 대공 각하께 꼬리를 치는 게 꼴 보기 싫었는데.”
둘이 묶어서 보내 버리면 되겠다!
카델리아의 외침이 환호성처럼 터졌다.
“대공 각하께서도 오필리아가 얼마나 지독한지 안다면 틀림없이 진절머리를 내실 거야.”
그리고 그런 여자보다는 나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겠지.
카델리아의 머릿속에는 떠나기 전, 황제가 했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짐은 이번 기회에 로넨 대공이 반드시 밀레세트와 연을 맺게 할 것이다. 상대가 누가 될지는 네게 달렸으니, 무운을 비마.
카델리아를 아낀 만큼, 황제는 카델리아에게 제법 너그러웠다.
단순히 아끼는 딸에게 다정한 말을 해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는 정보를 일찍 흘려주기도 했다.
-짐 역시 짐이 아끼는 딸을 늙은 왕의 후처로 보내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카델리아는 비록 아둔했지만, 사교계에서 오래 구른 만큼 메이너드 대륙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오필리아 못지않게 빠삭했다.
그러니 황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후처를 들일 만한 늙은 왕이 있는 나라는 이 대륙에 오직 크센트밖에 없었으므로.
크센트의 늙은 왕으로부터 혼담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란 작자는 두 딸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어느 냄비에 누구를 넣을지 저울질을 하는 중이었고.
‘늙은 왕의 후처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절대로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이안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이안이 오필리아 대신 자신을 선택하게 만드는 쪽이 훨씬 쉬울 테니까.
“어느 쪽도 절대로 포기 못 해…….”
카델리아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마법사를 치죄하고, 오필리아를 크센트에 넘길 것이다.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니며, 정략결혼을 시키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할 것이다.
그렇게 실추된 제 명예를 회복하리라.
카델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베일란, 나 오필리아가 자리를 비울 때를 알아.”
라딘으로 오기 직전 전서구를 통해 받은 밀고장에는 밤이 되면 오필리아가 해안으로 이안과 몰래 만남을 가지러 나간다고 했다.
그때를 노리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카델리아의 낯이 결의로 빛을 냈다.
* * *
그 시각, 오필리아는 산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돌아온 산테가 가지고 온 놀라운 소식에 대해서.
“산테, 아리엘하고 이야기가 잘됐다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아리엘의 언니들과 이야기가 잘됐다고 하는 게 맞겠군.”
산테가 으쓱하며 씩 웃었다. 자신이 해낸 일이 제법 뿌듯한 모양이었다.
“아리엘이 바닷속에서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게 문제였던 모양이야. 마냥 강압으로만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다들 아는 거지.”
산테의 말에 오필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강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는 것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으므로.
오필리아가 대꾸하지 않자 산테의 설명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아리엘을 만나러 나간 거였는데, 거기에 다른 인어들이 있어서 적잖이 놀랐어.”
산테는 그때 다시 도망가야 하나 고민하며 다가갔다고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가 깃털이 빠져라 도망칠 일이 다시 일어나지는 않았다.
-세이렌의 수장.
-당신에게도 인정이라는 게 있다면 우리를 도와요.
-우리는 세이렌을 등지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저 자매를 지키고 싶을 뿐…….
인어들은 노래하듯 저마다 한 마디씩 중얼거리더니, 결국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 애는 뭍으로 가면 안 돼요.
-아리엘은 바다에 있어야 해요!
-하지만 그 아이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만나러 왔어요.
인어들은 말했다. 아리엘이 언니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며칠째 식사를 하지 않고 있다고.
-자신을 자유롭게 해 주지 않으면 해초 한 입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아리엘은 암초의 틈을 이용해 몰래 빠져나가, 산테와 조금씩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리엘이 산테에게 세이렌과의 만남까지는 허락받았다고 이야기했던 것은 순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산테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한 아리엘의 속내가 우스워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머잖아 비소로 바뀌었다.
어쩐지 만날 때마다 수척해져 가는 것 같았던 모습이 이해가 가는 것도 같아서.
대체 왜 이 붉은 머리 여자들은 자신을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지.
‘성가시게 말이야.’
기실 아리엘이 밥을 굶든 말든 그의 알 바가 아니었지만, 오필리아에게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가 오필리아의 귀에 들어가면 그 성격 상 또 적잖이 신경 쓸 게 분명했다.
오필리아는 아리엘에게 자신이 무슨 대단한 죄라도 지은 것처럼 굴곤 했으므로.
그래서 산테는 오필리아에게 이 이야기만큼은 빼놓고 했다.
아리엘의 고집이 워낙 강경했던 탓에 그녀의 언니들이 직접 산테를 찾아왔다고.
“……뭐, 나라면 아리엘을 회유할 수 있을 거라 믿는 모양이더군. 그렇게 고집을 부리느라 아무하고도 대화하지 않는 와중에 나하고는 꼬박꼬박 만남을 이어 왔으니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인어들은 아리엘이 산테를 마음에 담은 것은 아닐지 걱정하기까지 했다고 했다.
“부탁받은 내용은 한 가지야. 아리엘이 뭍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도록 회유하는 것. 대신 아리엘이 누구와 만나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더군.”
“결과적으로 괜찮은 기회를 잡아 왔군요.”
오필리아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착잡한 태도는 가시지 않은 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손톱 밑의 가시처럼 자꾸만 그녀를 거슬리게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알레이를 너무 매정하게 돌려보냈던 것 같은데.’
알레이를 문전 박대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다른 때였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에 걸려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는 서로가 모두 느낄 만큼 노골적으로 최근 오필리아를 피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피하던 도중 그가 먼저 오필리아의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런데 오필리아는 그걸 문전 박대했고.
오필리아에게도 물론 사정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상대의 입장으로 보자면 오필리아가 화가 났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그런 식으로 알레이와 자신의 관계에 오해를 쌓아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전 베일란이 떠난 직후, 오필리아는 서둘러 성의 층계를 내려갔다.
알레이의 방문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서재를 찾아가기도 하고.
하다못해 성문 앞에서 치료소를 운영하고 있던 코르넬리에게까지 가서 알레이의 행방을 물었지만.
-알레한드로 님이요? 여기는 안 오셨는데요?
알레이의 행방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