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물론 산테는 그에 대한 적당한 변명도 생각해 두었지만, 오필리아는 워낙 그녀의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그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싶었다.
아니면 알아차리고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거나.
이유야 어쨌든 그렇게 피하고 있던 차에 오필리아의 방에 왔다가 알레이를 맞닥뜨렸으니 난감할 법도 했다.
그러나 도망쳤던 것이 무색하게도 재회는 썩 나쁘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여파인 건가.’
산테는 알레이가 추방당하기 직전 그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방문을 열었다가 문전 박대를 당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나가! 당장 나가. 지금 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제발, 나가. 나가 줘…….
그토록 불안정한 알레이는 본 적이 없었다.
얼핏 문틈 너머로 본 얼굴이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제대로 볼 틈도 없이 알레이는 문을 닫아 버렸고, 다음날 마탑에 방문했을 때 들려온 건 그가 금제를 어긴 일로 그가 추방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금제를 어길 만한 일은 많지 않다.
대개는 흑마법에 손을 대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자신의 마력 대신 영혼을 마법에 갈아 넣는 행위.
재료가 다르니 그만큼 파괴적이고 강력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사용한 이는 금세 정신이 붕괴하고 불안정해진다.
금제가 금제인 데에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문제는 흑마법을 사용한 이가 주변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별문제가 없겠지만 마력을 기민하게 느끼는 마법사들이나 인외 종족들에게는 영향이 상당했다.
흑마법에 손을 댄 이를 구금하지 않고 기억을 빼앗아 추방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래서 그간 산테는 알레이를 되도록 만나지 않으려 했다.
아직 그의 상태가 어떤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를 만나 괜히 영향을 받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안정되어 보이는군.’
마탑에서 추방당하기 직전의 그 불안정한 모습도 없고, 오히려 카랑카랑한 것이 아주 멀쩡해 보였다.
다행인 한편 의아한 일이었다.
흑마법에 손을 댄 게 아니라면 대체 그가 어긴 금제가 무엇이란 말인가?
‘마탑에서도 거의 흑마법에 손을 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코르넬리라는 수컷이 가겠다고 나서기 전까지는 다들 미적거리던 태도를 떠올린 산테가 고개를 기울였다.
마탑의 형벌에 대해 그가 조금 더 잘 알았더라면 이렇다 할 생각을 더 했겠지만, 산테는 본디 인간들의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가 오필리아의 방에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정작 장본인은 조금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좋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가장 큰 걱정이었던 알레이의 상태를 확인했으니.
산테는 알레이에게 다시 한번 친근감이 한껏 묻어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레이는 더욱 질색하는 모양을 했지만, 그럴수록 산테의 미소는 짙어지기만 했다.
둘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끊은 것은 오필리아였다.
그녀는 내심 산테를 반기고 있었다.
‘마침 불러야 했는데 잘됐다.’
그리고 어제 산테의 반응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던 터라, 그가 먼저 찾아온 것은 오필리아에게 희소식이었다.
“그래서, 산테. 오늘은 또 무슨 일이죠? 깃털을 부러뜨릴 일이 있기는 했는데.”
“알려 줄 게 있어서 왔다가 또 코 꿰이게 생겼군.”
투정을 한마디 던진 산테가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책상으로 가, 의자를 비뚤게 꺼내어 앉았다.
“아까 이 인근 해역을 지날 때 인어들이 소란을 떨던 걸 봤어. 인어들은 폐쇄적인 집단이라 물 위까지 올라와서 소란을 떠는 건 드문데 그러고 있더군.”
인어라는 말에 오필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인어가, 물 위로 올라왔다고요?”
“그래.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지. 모여서 막내 인어 공주 이야기를 하던데. 우리가 어제 만난 그 어린애 말이야.”
산테의 설명은 이어졌다.
물은 수중 생물들이 숨 쉬는 공간이자 그 자체로 정보값을 가지기 때문에, 물속에서의 이야기는 굉장히 빨리 퍼진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을 유지하고 싶을 때 인어들은 물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 게 의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옛말에 그런 말이 있지 않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을 쥐가 듣는다고.
“아리엘이 뭍으로 나갈 생각을 하는 모양이야.”
산테는 조금 전 해안 부근을 날다가 목격한 것을 떠올렸다.
암초에 몸을 숨긴 인어들이 작게 소곤대는 모습.
인어들은 애써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산테는 한 줄기 바람만 있어도 나뭇잎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가 아리엘이 다녀간 곳이라고?
-확실해. 진주조개가 봤대. 바다에 빠진 수컷 인간을 구해 줬대.
-그럼 그게 문제인 걸까? 인어가 뭍으로 나갈 생각을 하는 건 위험해!
-아버지께서 아시면 분명 난리가 날 거야. 절대로 알릴 수 없어. 우리 선에서 해결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그 애는 고집이 대단하잖아. 아아, 뭍이라니. 아리엘! 뭍으로 간 인어들은 전부 죽었다는 걸 너도 알 텐데!
인어들에게 있어 뭍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는 인간으로 치자면 바닷속으로 뛰어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아리엘의 언니들이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산테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공감할 수는 없었다.
이해는 그의 연륜으로부터 비롯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종족이기에 느낄 수 없는 감정 또한 분명 존재했으므로.
그리고 산테는 늘 그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런 건 느낄 수가 없는데.’
누군가에게 깊은 애정을 쏟고, 또 무언가에 얽매인다는 것은 산테에게 너무 먼 이야기였다.
세이렌은 그들의 능력이 뛰어난 만큼, 닿지 못하는 곳이 없는 만큼 자유로운 종족이었다.
그만큼 흥미나 쾌락 위주의 일생을 보내고, 개인주의도 강하다.
그러니 다른 때였더라면 산테는 인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흘긋 듣고 다시 제 일을 하러 갔을 것이다.
인어 한 명이 갑자기 뭍으로 투신을 하든 말든 그에게는 별 흥미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너한테 얘기해 주려고 듣고 왔지.”
오필리아에게 필요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백여 년간 만나 본 인간 중 가장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시선이 가는 대상이기도 했고. 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불편해지는 구석도 있고.
그 원인이 뭘까.
‘처음에는 디안 때문에 알아보려 한 건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필리아 본인에게 더 흥미가 생겼다.
만약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산테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 안의 청염이 궁금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을 태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불인지.
어제 아리엘이 돌아간 뒤, 산테는 문득 질문했다.
-오필리아. 아까 하려던 대답. 혹시 다시 들을 수 있겠나?
-대답이요?
-네가 부러워하는 게 뭔지 궁금해서.
-아, 별것 아니에요.
오필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난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부러워요.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
그 대답이 어쩐지 자신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두려워했던 것이 우습게도, 오필리아의 대답은 평이했다.
이렇게까지 별 감흥이 없을 수 있나.
산테는 의아함에 대답했다.
-그럼 날 부러워해야 할 것 같은데.
오필리아는 대답 대신 건조하게 웃었다. 그게 긍정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았다.
다른 종족이었더라면 충분히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산테가 상념에 잠기느라 말을 멈추자 잠자코 듣고 있던 오필리아가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또 가 볼 텐가? 이 근처야. 저기 숲이 있는 쪽.”
“글쎄요. 그 언니들에게는 딱히 볼일이 없어서. 물론 아리엘과 다시 만날 필요는 있겠지만.”
오필리아가 산테의 이야기에서 걸린 부분은 인어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산테에게는 미안하게도, 오필리아는 이미 아리엘의 결정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필리아는 이 이야기에서 산테가 간과한 것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저기 숲이 있는 쪽의 해안이라면 인기척이 없는 부근을 말하는 거죠?”
“아, 절벽이 있는 쪽을 말하는 거라면 맞지.”
“그쪽은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부근인데. 왜 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