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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43화 (43/118)

제43화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파훼식을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가 있나.

오필리아를 만나기 전 알레이의 연구는 아교 없이 나뭇가지로만 집을 지으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그녀 덕분에 전에는 무엇을 해도 텅텅 비어 있었던 식의 요소들이 이제는 제법 채워져 있었다.

일단 수식의 말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알레이’가 아닌 ‘알레한드로 디아뮈드’를 적게 된 것만으로도 수식은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본명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이 잃어버린 스스로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훨씬 늘어난 덕분이었다.

전이라면 그 사실에 순순히 기뻐할 수 있었을 텐데.

아까의 불청객이 남긴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 신경을 빼앗았다.

오필리아가 일어날 때까지도 그 현상은 지속 되었고, 결국 알레이는 반강제적으로 오필리아와 마주 보게 된 지금까지 연구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를 다시 떠올리고만 알레이가 인상을 썼다.

‘기분 나쁜 남자.’

그는 분명 수려하고 날카로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딘지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짐승이 인간 행세를 하는 걸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딘지 결여되어 있는 느낌이 났다.

게다가 어제 오필리아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는 인어 공주의 사랑을 받는 남자였다.

-저 남자는 그 인어를 만나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그는 막내 인어 공주가 사랑하는 남자거든요.

그런 남자였기에 더욱 오필리아와의 관계를 궁금했을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한 것도 있었다.

‘검은 머리는 북쪽에 많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로넨 공국 출신인가.

로넨 공국의 방문객들이 며칠 전 밀레세트의 항구를 떠난 것은 알레이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개중 난파를 당한 이가 하나쯤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텐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오필리아에게 가진 다른 의문들처럼 외면하기에는, 이번엔 그 부피가 너무 컸다.

듣고 후회할지라도 대답을 듣고 싶었다.

“잠드신 사이 그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당신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고, 당신과의 관계가 궁금하면 당신에게 직접 물으라 하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내가 세상모르고 잔 건가요? 방에 손님이 왔다면 깨워도 됐을 텐데.”

“피곤해 보이셔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자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그랬다고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당신이 그와 무슨 관계인 건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전에 사귀었다가 안 좋게 헤어진 남자라고 하면 좀 설명이 될 것 같네요.”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 알레이는 후회했다. 알레이의 낯에 진 음영이 더욱 짙어졌다.

“아마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그는 로넨 출신이에요. 로넨 대공이죠.”

“거물이 들어온 셈이군요. 이것도 당신이 계획한 일입니까?”

“아뇨. 우연이에요. 나도 놀랐어요. 그가 올 줄은 몰랐거든요.”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안이 올 줄은 몰랐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오필리아는 적당히 진실을 가공해 말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한정적이에요. 어제 말했다시피 인어에 대한 부분은 비늘을 삼킨 뒤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알게 되었어도 그 주인공이 누가 될진 몰랐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습니까?”

“비슷하네요. 다시 말하지만 정말 예상 밖이었어요.”

“그럼 혹시 어제 당신을 붙잡으려는 이가 있어 계획을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다던 게 그의 얘기였습니까?”

오필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알레이는 자신이 미뤄 놓은 의문들의 무게를 한꺼번에 받게 되었다.

‘돌겠군.’

로넨 대공과 오필리아가 일전에 연인 관계였다. 그리고 로넨 대공은 그녀를 붙잡으려 한다.

그 명제의 거북함 때문일까.

평소라면 제 목 안에 가두었을 질문이 툭 내뱉어졌다.

“오필리아. 그가 당신을 사랑합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오필리아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글쎄요. 그건 왜 묻는 거죠?”

“그가 당신을 붙잡으려 하는 게 문제라면 계획을 서두르는 것보다 그가 마음을 고쳐먹게끔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발상이 아닙니까. 그리고 원인을 알아야 해결책도 찾을 수 있을 테고.”

변명이 자연스러웠다. 오필리아는 의심할 생각조차 못하는 듯했다.

실제로, 알레이의 말은 오필리아에게 있어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안은 날 사랑하지 않잖아.’

그건 그냥 일방적인 집착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집착을 단념할 수 있게끔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이안은 본인이 오필리아를 사랑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오필리아가 겪은 바로는 아니었다.

이안이 오필리아를 사랑한 순간이 있다면 처음 라딘에서, 그것이 전부였다.

순수한 열망과 애정으로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가 오필리아에게는 유일한 사랑의 기억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안은 오필리아를 붙잡는 것에 최선을 다했으나, 분명히 달랐다.

그때는 첫눈에 보기에도 사랑이 본질이었다면, 지금은 오필리아를 붙드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느낌.

그가 변화한 원인이 제 죽음에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내 죽음에 그렇게까지 반응할 이유가 있나?’

그 이유를 알면 이안의 마음을 돌려놓을 만한 방법도 생각날 것 같은데.

현재로서는 잘 모르겠다. 염두에 두고 있는 방법은 있는데.

‘이 방법이 먹힐까.’

오필리아가 고민한 순간, 발코니에서 톡톡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틀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옷은 체면치레로만 차려입은 산테가 날개를 털고 있었다.

힘 있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금빛 날개는 햇빛 아래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 화려한 모습에 알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성가시겠다고 작정을 한 날인가?’

아까의 불청객으로도 충분히 성가신데.

“산테, 어서 와요.”

“문까지 다 열어 주고. 웬일로 이렇게 환대를 하나.”

“오늘도 올 줄 몰랐거든요.”

날개를 거두어들인 산테가 어깨에 남은 깃털을 툭 털어 내며 싱긋 웃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이목구비와 매혹적인 목소리까지,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문제는 그 매력적인 이가 오필리아의 곁에 몹시 잘 어울린다는 점이었고.

“인간들이 이럴 때 하는 게 있던데. 칭찬이라고.”

“문을 열어 주는 환대로는 부족했나요?”

“아, 물론이지. 나는 네게 있어서는 뭘 들어도 부족한 기분이라.”

심지어 산테는 오필리아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것을 감출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저 잘생기기만 한 의뭉스러운 낯이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는 몰라도, 그는 오필리아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제도 그러더니.’

오필리아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건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덕분에 알레이의 속은 초 단위로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결국 알레이는 참지 못하고 둘 사이를 갈랐다.

“쓸데없는 대화는 그쯤 했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방문한 용건이 뭡니까.”

오필리아의 앞으로 나선 알레이를 보고, 산테는 그제야 그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조금 전 오필리아에게 했듯 눈을 휘어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또 보는군, 디안. 여전히 매정하고.”

“나는 당신이 기억에 없으니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한 건 하루 만에 잊으신 건지.”

“정정하지, 예전이 더 상냥했던 것 같아. 그때는 제법 웃을 줄도 알고 여유라는 것도 있던 놈이었는데 말이지.”

“당신도 기억을 잃고 5년쯤 지낸 뒤 다시 성격에 대해 논해 보면 형평성에 맞겠습니다.”

“하하!”

날카로운 대답에 산테가 웃음을 터트렸다. 기억을 잃어도 성질머리는 여전했다.

‘살짝 걱정했는데 말이지.’

사실 그간 산테는 알레이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어제 오필리아의 방에 왔을 때 은신을 쓰고 있었던 것도 어린 세이렌들에게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알레이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돌아왔을 때 결국 알레이를 마주치긴 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산테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는 있었을 터다.

그는 알레이를 친근하게 언급하면서도 간만에 들려온 친구의 소식에 그를 보고 싶어 안달 내지 않았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라면 당장 친구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을 텐데, 산테는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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