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그들의 첫 만남. 오필리아는 투신했다.
그녀는 죽음을 원했다. 인어의 비늘을 삼킨다는 기행의 연유로 그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이 어째서 알레이를 늘 심란하게 하는지.
어쩌면 그것은 평소의 오필리아가 죽음을 원했으리라고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생동감 넘치는 사람인 탓일지도 모른다.
죽으려고 한 주제에 왜 저렇게 삶에 대한 열망 가득한 눈을 하고 있는 건지.
‘사람 속도 모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알레이가 입을 열었다.
“오필리아 당신에게 걸린 마법은 평범한 사람이 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을 정도니까.”
“그게 누구죠?”
“누구겠습니까? 나지.”
알레이가 시니컬하게 대꾸하며 차를 한 입 마셨다.
“그래서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한 건가 싶어 굉장히 심란했는데, 인어의 비늘이라면 이제 좀 설명이 되는 기분입니다.”
“문제가 심각한 건가요?”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데. 확실한 건 인어의 비늘이라는 명확한 매개가 없었더라면 문제가 분명 심각했을 거라는 겁니다.”
“산테가 말하기로는 조건식 마법이라던데. 당신이 아는 건가요?”
조건식 마법. 그들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아마 그들 종족이 사용하는 언어가 따로 있을 것 같은데, 인간들 식으로는 조건식 마법이라고 부른다고 했어요.”
“그게 들은 전부입니까?”
“어째서인지 둘 다 말을 아끼더군요. 산테는 당신이 알 거라는 묘한 확신이 있는 것 같았고요.”
“그의 말이 옳습니다. 마법에 대한 부분은 기이하리만치 모두 기억에 남아 있으니까요.”
알레이가 찻잔을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필리아는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해 찻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빙빙 쓸기만 하다, 문득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기억이 날아간 것과 남아 있는 것의 경계가 있나요?”
“쉽게 말하자면 학술적인 부분과 개인적인 부분을 나누어 날린 느낌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잘은 와닿지 않는군요.”
오필리아의 가감 없는 대답에 알레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감싸 쥐고 있던 찻잔을 들어 보였다.
“예를 들어 이런 차가 있다고 한다면.”
알레이의 손끝에서 찻잔이 가볍게 기울었다.
“나는 이 차를 알고 있습니다. 캐모마일. 허브 잎을 말려 우리는 차이고, 잠이 잘 오지 않을 때 음용하면 좋다는 것도. 나는 이 차를 마실 때 으레 식히지 않은 물을 씁니다.”
“그런 습관까지도 기억에는 남아 있나 보군요.”
“아무래도 몸에 배어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몸에 배어 있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다.
그러니 굳이 이런 것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기억을 날릴 때 거름망을 잘 빠져나온 것이 아니겠느냐며, 알레이가 으쓱했다.
“하지만 내가 이 차를 누구와, 어디서 마셨는지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이 차를 마셨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조차.”
“그럼 기시감 같은 것도 없나요?”
“겪으면 생깁니다. 이 차를 마시고 나면 향과 맛이 마음에 든다는 것을 느끼고, 내가 과거에도 이것을 제법 좋아했음을 체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외의 것은,”
“잉크병을 엎은 편지지 같아 보이나요?”
알레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렇게 정확히.”
“글쎄요. 이런 비슷한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어서?”
오필리아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잉크병을 엎은 편지지.
어디선가 발송이 되었을 것이고, 어딘가의 기억을 담고 있을 활자들이 잉크에 먹힌 종이.
알레이는 과거에도 그런 말을 했다.
-기억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잉크병을 엎은 편지지에서 활자를 건져 내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 검고 막막한 기분을 감히 무어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알레이는 그 화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니 지금 그들이 이 정도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은 과거보다는 친밀해졌다는 뜻이 아닐까.
혹은 그만한 신뢰 관계가 되었거나.
그 깨달음이 오필리아에게는 조금 거북하게 다가왔다.
알레이의 책들 사이에서 아리엘의 편지를 찾았던 날의 감정이 떠오른 탓이었다.
당시에도 그랬다. 자신은 그를 친구로 여겼고, 그는 아니었다.
일방적인 감정의 배반은 곱씹을수록 제 꼴만 우스워지기 마련이라, 어디에 토로할 만한 것도 못 된다.
그때의 배신감과 비참함을 떠올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찻잔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을 콕콕 찌르는 온기가 무너질 뻔한 표정을 다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알레이와 어느 정도의 친분과 신뢰를 유지하는 건 필요한 일이야.’
그러니 거북해하지 말자. 단지 내가 그를 신뢰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믿지 않으면 그 무엇에도 배반당할 일이 없다. 상대가 어떻게든 자신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오필리아는 되새기며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알레이.”
“말씀하시죠.”
”혹시 내가 어제 당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 거 기억해요?”
알레이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세웠다.
“갑작스럽군요. 내가 하루 지난 일을 잊을 정도로 아둔해 보입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해도 표정은 여전했다. 짜증으로 민망함을 애써 감추는 듯한 저 묘연한 표정.
오필리아는 평정을 되찾았다. 미소 지은 오필리아가 부연했다.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웠을 거라는 걸 알아요. 말해 줘서 고맙다는 얘기에요.”
“별것도 아닌 걸로.”
말은 그렇게 해도 알레이의 얼굴은 겸연쩍어 보였다.
아마 떨어트린 시선조차 알레이의 입을 거치면 다른 이유가 붙어 나오겠지.
‘이렇게나 솔직한 사람인데.’
과거에는 왜 나를 속였던 걸까.
오필리아는 잠시 씁쓸함을 곱씹었다가, 뜨거운 차를 마셔 지워 냈다.
쓴 것보다는 혀가 얼얼한 쪽이 나았다.
탁.
잔을 내려놓은 오필리아가 다시 대화를 재개했다.
“그렇게까지 명확하게 경계가 져 있었으니 누군가가 기억을 지웠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겠군요.”
“내가 그런 얘기까지 당신에게 했습니까?”
“내 추측이에요. 마법을 써서 인위적으로 지운 걸 수도 있잖아요.”
물론 과거에 들은 알레이의 말을 되새긴 거였지만.
오필리아가 이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알레이의 기억을 지운 마법의 정체에 조금 더 근접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만약 당신의 기억을 지운 게 마법이고, 풀 수 없다면. 어쩐지 내 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내 억측일까요?”
“아주 틀릴 것도 없을 겁니다. 실제로도 비슷할 테니. 그리고 그게 내가 당신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긴 이유입니다.”
오필리아는 알레이가 이토록 마법에 대한 지식 또한 얼추 잊어버렸기에 제게 걸린 마법을 풀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지켜봐 온 결과 마법에 대한 알레이의 이해도는 생각보다 높았고,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알레이가 마법에 대한 지식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마탑의 주인에까지 오를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인 그가 어째서 제게 걸린 마법만큼은 풀지 못하고 있는가.
답은 간단했다.
“당신에게 걸린 것 역시 조건식 마법이군요.”
알레이와 오필리아, 그들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맞습니다.”
덤덤한 알레이의 대답이, 꼭 아리엘의 마법으로부터 자신은 평생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조건식 마법이 뭐기에 그러는 거죠? 다른 마법과 많이 다른가요?”
“그 역시도 계산식을 이용하니 아주 다를 것은 없습니다만, 그냥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뿐입니다. 말 그대로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만 끝이 나는 마법이라서.”
바로 그 조건을 알아야만 파훼할 수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대개 시전자가 조건을 알고 있지만, 시전자를 만날 수도 없는 현재로서는 파훼법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신 말대로 그렇게 조건을 달성해야만 끝이 나는 단순한 방식이라면, 왜 다들 이 마법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