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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32화 (32/95)
  • 두 번째 신혼 32화

    셋의 얼굴이 세인을 향해 있었다. 갑자기 세인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한과의 관계에 가족 모두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우스웠다.

    “아빠, 아이 가지는 건 천천히 할게요. 이 부분은 저희 부부 문제잖아요.”

    “그게 왜 부부 문제야? 넌 제문가 며느리야. 서 회장 생전에 손주 하나 떡하니 안겨줘야지.”

    “…….”

    “그래야 서 회장 눈에 들 거 아니냐. 좋은 자리라도 하나 내줄지 알아? 하이고, 모자란 것.”

    홍춘이 한심하단 듯이 말했고 세인은 한 귀로 흘려보내며 부친의 욕심을 외면했다.

    “그래서 서 전무는 언제 찾아온다니? 귀국한 지가 언젠데 소식이 없어?”

    은희가 묻자 홍춘이 혀를 찼다.

    “어허, 사람이 일하다 보면 정신없는 거지. 괜히 연락이라든가 해서 사람 귀찮게 하지 마.”

    “누가 귀찮게 한다고 그래요? 그래도 귀국을 했으면 처가에 전화라도 해야죠. 그게 예의예요.”

    은희의 대꾸에 세인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 전무님.]

    낯선 글자가 액정에 찍혀 있었다. 호랑이도 아니면서 전화하는 타이밍이 귀신같았다.

    세인은 핸드폰을 꽉 쥐며 혜인에게 말했다.

    “언니 퇴원하면 나도 서울 집에서 출퇴근해야 할 것 같아.”

    그 말에 혜인이 얼굴을 팍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뭐?”

    “이한 씨 들어왔으니까, 집으로 들어가야 해.”

    “그럼 혜인이는 누가 신경 쓰니?”

    은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할 거예요. 퇴근하고 언니 자는 거 보고 집으로 돌아갈 거고요.”

    “벌써 얘기가 다 된 거란 소리네?”

    날카롭게 물은 혜인이 급작스레 툭, 눈물을 떨어뜨렸다.

    세인이 놀라 티슈를 뽑아 건네는 사이 부지런히 울리던 핸드폰 진동이 멈추었다.

    그래, 세인은 차라리 이한을 모른 체하고 싶었다.

    곱씹을수록 진심이 느껴지는 이한의 고백이 거짓이라면, 그땐 너무 아플 테니까.

    ***

    초저녁, 이르게 잠이 든 혜인은 낯선 발소리에 잠에서 깼다.

    “누구야?”

    혜인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으나, 어둠이 깔려 어슴푸레한 병실에서 그녀에게 답해 주는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둔탁한 구두 소리가 점점 더 그녀에게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구냐니까?”

    흠칫 놀란 혜인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몸도 불편한데 종일 시위하듯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으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었다.

    혜인이 병실 베드 위에서 끙끙대는 사이, 차가운 바닥을 두드리는 발소리가 더욱 커졌다.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서늘한 목소리가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병실이 싫으면 요양도 좋지. 해외가 나으려나.”

    조소하듯 미소 지은 이한이 어느덧 혜인의 지척에 있었다.

    내리깐 시선이 목을 조르듯 그녀를 직시했다.

    서이한, 그는 동생의 남편이었다.

    “여, 여긴 어떻게…….”

    “가족이니 병문안은 와야지.”

    동갑인 두 사람은 6년 전 세인을 통해 이 병원에서 마주쳤고, 그때부터 쭉 존대를 생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이건 무례하잖아. 갑자기 불쑥 나타나선…….”

    불안하게 입구를 바라보며 묻는 혜인을 향해 이한이 낮게 웃었다.

    “병원 생활이 잘 안 맞나 봐. 표정이 영 어둡네.”

    “서 전무, 혼자 온 거야?”

    혜인이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켕기는 게 많은 사람처럼 그녀는 이한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이며, 혜인의 말을 긍정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나 봐.”

    이한이 비웃듯 말했다.

    혜인은 전부터 이한에게 눈엣가시였다.

    세인의 인생을 제 것처럼 누리고 있는 혜인이 반가울 리가.

    혜인이 세인을 구했다고 해서, 세인의 인생을 거머쥐고 조종할 자격은 없었다.

    6년 전, 이한은 형의 죽음으로 깊게 자책하던 시기에 세인을 만났다.

    구김 없이 반짝이는 세인은 이한에게 신기한 존재였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하지, 어떻게 저렇게까지 헌신할까.

    이한이라면 하지 못했을 일을, 세인은 웃는 얼굴로 척척 해내었다.

    그래서 자꾸만 관심이 갔고 결국엔 마음이 갔다.

    세인을 위하고 싶을수록 혜인이 미워진 건 당연했다. 혜인은 과도하게 세인을 착취하고 있었다.

    평생을 고통받은 세인이 이젠 편해질 차례였다.

    그러려면 원흉을 제거해야지.

    “솔직히 와줘서 고맙다곤 못 하겠어. 보시다시피 내 상태가 별로야.”

    혜인의 손이 담요를 꾹 쥐고 있었다.

    “긴장 풀어. 아직 해칠 마음 없어.”

    이한이 피식 웃으며 환자복을 입은 혜인을 내리훑었다. 그에 그녀가 움찔 놀랐다.

    “자.”

    이한이 손에 든 걸 내밀었다.

    조금 전 민성에게서 받은 두툼한 갈색 봉투가 혜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게 뭔데?”

    “열어 봐.”

    “아무리 서 전무가 외국 생활을 오래 했다지만, 이젠 호칭 정리를 해야지. 그리고…….”

    봉투 안을 살피던 혜인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이윽고 그녀의 낯이 시퍼렇게 질렸다.

    “이걸 어떻게…….”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색채가 선명한 사진이 바르르 흔들렸다.

    “출처가 궁금해? 아니면 내가 이걸 어떻게 쓸지 궁금해.”

    “서, 서이한…….”

    “이럴 게 아니라 정신과 치료를 우선해야지 않겠어?”

    이한이 미간을 좁히며 혜인을 향해 쓰게 웃었다.

    “누, 누구더러 정신병이라는 거야?”

    “아. 정신병을 폄하할 뻔했네. 너 따윈 그저 쓰레기인데.”

    “이건 사, 사랑이야!”

    이한이 코웃음 쳤다.

    “우, 우리는 정말 사랑하고 있어. 저, 정신병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야!”

    사진을 꽉 움켜쥐는 혜인의 낯은 겁에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아, 사랑.”

    “터뜨리려면 해. 나, 난 겁나지 않아.”

    “우리 세인이가.”

    이한이 말을 끊으며 한 발 더 혜인에게 다가섰다. 혜인은 겨우겨우 물러나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많이 힘들어하니까.”

    막다른 길에 닿았음에도 혜인은 더 멀리 도망가고 싶은 눈치였다.

    이한이 가만히 압박하자 이윽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사, 사람을 부를 거야.”

    어두운 병실 안에서 이한이 서늘하게 물었다.

    “뭘 그렇게 겁먹었지.”

    “나, 나가…… 여기서 당장, 나가!”

    “호텔 일을 정리해야겠지.”

    “뭐, 뭐? 왜 세인이가…….”

    이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혜인이 호텔 지배인으로 세인을 묶어두려는 이유가 뭘까.

    단순히 더블나인에 머무는 게 좋은 거라면, 세인도 함께 투숙하면 될 것 아닌가.

    펄쩍 뛰는 혜인의 반응을 보자 뭐가 더 있긴 했다.

    사진에 등장한 남자는 이한도 잘 아는 이였다.

    남자와 혜인이 밀회를 즐기기 위해 세인을 지배인으로 묶어둔다?

    아니.

    굳이 세인을 호텔에 붙잡아 두지 않고 투숙하는 것에 그쳐도, 두 쓰레기가 만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거다.

    이게 다가 아니겠지.

    다른 이유가 더 있을 터다.

    이한은 궁금증을 뒤로하고 말을 이어갔다.

    “호텔 일이 세인이에게 무리가 된다면 쉬게 해야지.”

    “그거야 서 전무 생각이지. 세인이는 절대 안 그만둘 거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혜인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누가 보면 이한이 힘없는 약자를 괴롭히는 악당처럼 보이겠지만, 뱃속 가득 악귀를 품은 건 혜인 쪽이었다.

    민성을 통해 조금 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한은 그저 혜인이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혜인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할 말을 고민했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자폭할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을 보니.

    결국 혜인은 한껏 처량해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런 모습으로 세인을 구워삶으며 이용했겠지.

    평생을 휘둘렸을 세인을 생각하자 이한은 화가 치밀었다.

    감히 누굴.

    “그래, 앞으론 그렇게 입 닥치고 있어. 나도 정혜인 씨를 언제 어떻게 죽일지 모르겠으니 조용히 꺼지는 편이 좋겠지.”

    “뭐, 뭐?”

    “세인이한테서 멀리 떨어져. 연을 끊으면 더 좋고. 저게 어떻게 쓰일지 알고 싶지 않다면 머리 잘 굴려 봐.”

    갈색 봉투를 눈짓하는 이한의 음성이 살벌했다.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서둘러 수습해 봉투에 담아 꾹꾹 누르며 혜인이 말을 더듬었다.

    “6년 전에…… 세인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 알면 이렇게 못 할걸?”

    “6년 전?”

    “주석이 알지? 세인이 걔, 걔랑 바람났어.”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어.”

    “아냐! 결혼식 하자마자 떠나 버린 남편 같은 거 버리라고 내가 그랬거든.”

    “그래?”

    이한이 옅게 미소 지으며 볼우물을 내보였다.

    “서이한 네가 버림받은 거야! 세인이는 이제 널 싫어해! 이 결혼이 얼마나 갈 것 같아?”

    쾅.

    이한이 침대 헤드의 프레임을 거칠게 움켜쥐곤 미끈하게 웃었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조금 전에 말한 것 같은데.”

    이미 이한은 주석인지 뭔지, 나무젓가락 같은 남자를 알고 있었다.

    6년 전부터 세인의 곁에서 얼쩡대던 학과 선배.

    그러나 경계 대상은 아니라고 판단했고, 예상대로 주석은 세인에게 어느 정도 선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근래가 문제였다. 업무차 더블나인을 찾은 주석이 세인의 곁에서 설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이야. 사실 세인이 아직도 주석이 만나. 그러니까 서 전무는 그냥…… 서 전무 인생 살아. 왜 세인이한테 다시 목매려고 그래?”

    “유주석이라면 며칠 전 부산으로 발령 났지.”

    이한이 건조하게 말하자, 혜인이 젖은 뺨을 경련했다.

    “부, 부산에 갔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곧 승진한다고…….”

    “그거 알아? 내가 우리 세인이 옆에서 치워 버린 새끼만 여럿인데.”

    혜인이 황급히 머리를 굴리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입술을 질끈 문다.

    유주석이 부산을 어떻게 가게 됐는지는 이한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한이 보낸 거니.

    “저, 정말 주석이 걔랑 세인이랑 같은 객실로 들어가는 걸 내가 봤어! 그게 무슨 뜻이겠어!”

    거짓말이 통하지 않자 혜인은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아마 평생을 이렇게 살았겠지.

    투정을 부리고 억지를 주장하면 받아주는 가족들이 있으니.

    그러나 이런 짓은 이한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에게 법칙을 무시한 채 통용되는 절대적 가치는 오직 세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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