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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31화 (31/95)
  • 두 번째 신혼 31화

    민성이 한 번 헛기침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혜인 씨 입원 후 병원 방문객은 가족 외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로품은 더블나인에서 화분을 보낸 게 다입니다. 정홍춘 대표가 입원 사실을 비밀에 부친 듯합니다.”

    이한은 등받이에 기대어 민성의 보고에 집중했다.

    “입원 전, 정혜인 씨가 주기적으로 호텔 밖으로 외출했던 정황에 변동은 없었습니다. 주로 금요일이나 토요일 새벽을 이용했죠.”

    민성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혜인에게 붙여둔 자석이 보낸 사진을 날짜에 맞춰 추려보았습니다.”

    민성이 갈색 봉투를 내밀었다. 두둑한 부피감이 느껴지자 이한이 말했다.

    “꽤 되네.”

    “예. 많습니다.”

    이한은 한국을 떠나며 세인의 주변에 제 사람을 심어두었다.

    함께 있지 못하니 그렇게나마 그녀를 지켜봐야 했다.

    서 회장이나 다른 가족, 혹은 이 바닥의 누구든 그녀에게 칼날을 겨눌 수 있었으니.

    그렇게 세인의 주변을 살피고 때론 정리하던 중, 혜인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리고 오늘, 제대로 된 관련 자료를 가져오라 민성에게 지시해 두었다.

    이한이 봉투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혜인이 희미한 인상을 지닌 남자에게 안겨 웃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누굴 이용하려고 머리를 굴려.”

    더러운 거머리는 세인이 모르게 하나하나 떼어낼 것이다.

    그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정혜인이었다.

    ***

    이한의 객실에서 빠져나온 세인은 자신의 방에 들러 급히 씻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주말은 휴무 지정이 되어 있었으나,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가야 했다. 그러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삑.

    더블나인의 지정 주차 구역. 세인은 주차된 자신의 차를 눈으로 좇으며 걸음을 옮겼다. 2년 전 이 차를 고른 이는 다름 아닌 혜인이었다.

    그녀가 운전대를 잡는 순간, 모친 은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세인은 덜 말라 엉킨 머리칼을 대충 귀 뒤로 넘기며 블루투스를 이용해 통화를 연결했다.

    “네, 엄마.”

    -너 어디니? 지금 몇 시야!

    평생 우아하게 살아왔을 법한 모친 은희는 세인에게만 야차가 되었다. 매서웠고, 모질었다.

    세인은 놀란 어깨 근육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지금 호텔 주차장이에요.”

    -아직도 호텔이니? 정신이 있는 거야?

    “죄송해요. 지금 출발해요.”

    전방을 살핀 세인이 핸들을 감으며 말했다.

    -혜인이 애가 밥을 안 먹어.

    “속이 안 좋아요? 아니면, 병원 밥이 별로라고 해요?”

    -그러니까 네가 미리미리 신경을 썼어야지. 혜인이 예민한 거 모르니?

    “……우선 갈게요. 금방 가요.”

    세인은 통화를 종료하고 한숨 쉬었다.

    은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바스락대고 있었다.

    “하…….”

    세인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종종, 자신이 주워온 자식은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다.

    부친 정홍춘을 빼닮은 외모를 생각하면, 정씨 집안의 핏줄인 건 확실했다.

    “차라리, 어디서 주워온 거였으면 좋겠네.”

    그렇다면 마음이 덜 아팠을 텐데.

    세인이 중얼거리며 속도를 높였다.

    은희에게 천천히, 혹은 운전 조심해서 오란 말까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부모가 자신에 대해 조금이나마 궁금해하길 바랐다.

    홍춘과 은희가 다른 부모처럼 딸이 밥은 먹었는지. 딸이 뭘 좋아하는지.

    한두 가지만 알아줬어도 불쑥불쑥 마음이 아려오진 않았을 터다.

    “생일조차 축하받지 못하는 처지에, 바라는 게 많지…….”

    세인이 씁쓸하게 혼잣말했다. 죄인은 가져서 안 될 욕심이었다.

    문득 바라지 않던 위로를 주던 이한을 떠올렸다.

    그 이유가 어떻든 이한은 좋아한단 말로 세인을 두드렸고, 커다란 풍랑은 손쓸 수 없이 그녀를 휘저어놓았다.

    “하…….”

    세인은 핸들을 꽉 쥐고 입술을 씹었다.

    이한의 숨결이 닿던 귀가 아직 뜨거웠다.

    그가 왔으니 신혼집으로 돌아가는 게 옳은 건데도,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이한의 생각으로 가슴이 꽉 차서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언니, 나 왔어.”

    세인이 병실에 들어서며 혜인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응접실을 지나, 베드가 있는 침실로 들어섰다.

    그러곤 난장판이 된 광경을 마주하곤 착잡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게…… 무슨.”

    혜인이 식사가 담긴 쟁반을 엎었는지 침대 위와 바닥이 엉망이었다.

    “왜 이제 와?”

    그릇이 나뒹구는 침대에 앉은 혜인의 눈가가 새빨갰다. 울었는지 힘이 죄 빠진 모습이었다.

    “언니, 이러다 다쳐. 전에도…….”

    세인이 서둘러 혜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한쪽에 있던 은희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 세인의 뺨을 내려쳤다.

    순간 날카로운 충격이 세인을 관통했다.

    “…….”

    벌 받는 것처럼 한쪽에 서 있던 간병인 이모님도 흠칫할 만큼 강한 손찌검이었다.

    세인은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입안을 힘주어 다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쯧. 병원에서 잘하는 짓이야.”

    창가에 앉은 부친 홍춘이 눈살을 찌푸리며 은희를 타박하는 소리가 웅웅, 멀리서 메아리쳤다.

    세인은 어지러운 시야를 정돈하려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정세인, 너 정신 안 차리니?”

    은희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고, 세인은 다시금 눈앞이 캄캄해졌다.

    “죄송해요.”

    “엄마, 나 머리 아파. 그만해요.”

    혜인이 끼어들고 나서야 은희가 한발 물러났다.

    세인은 두 주먹을 꽉 쥐곤 혜인을 향해 살짝 웃었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왜 자꾸 손을 올려요. 세인이 성인이에요, 엄마.”

    혜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세인이 아닌, 은희를 향해 원망을 쏟아냈다.

    그러나 세인은 그게 그다지 고맙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혜인은 이렇게 편을 들다가도 금세 은희의 분노를 부추기는 말을 하곤 했다.

    세인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겨 정돈한 뒤 싱긋 웃었다.

    “미안해. 어제 좀 과음을 했더니 늦잠 잤어.”

    “네가 약속 안 지키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 입원했잖아. 빨리빨리 다녀야지. 그 정도도 못 해?”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세인이 그렇게 몇 번인지 모를 사죄를 했다. 그러곤 애써 분위기를 환기하려 말했다.

    “급하게 왔더니 너무 배고프다. 언니, 우리 밥 먹을까?”

    “너는 웃음이 나오니?”

    은희가 나무랄 만큼 환하게 웃은 세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혜인을 업고 응접실의 테이블로 향했다.

    간병인 이모님이 더러워진 곳을 치울 때까진 응접실 소파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담요와 쿠션을 가져와 혜인의 자세를 잡아둔 후 세인은 뜨거워진 눈시울 숨기려 고개를 돌렸다.

    서러운 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곤 인터폰을 눌러 따뜻한 죽을 가져다 달라 주문했다.

    혜인은 언제 히스테리를 부렸냐는 듯, 곧잘 밥을 먹었다.

    그릇이 반쯤 비었을 때, 그녀가 갑자기 세인에게 물어왔다.

    “근데 너 서 전무랑은 어떻게 된 거야?”

    “응?”

    부드러운 반찬을 찾아 혜인의 숟가락 위에 올리던 세인이 고개를 들며 의문을 띄웠다.

    “어제 파티에서 둘이 장난 아니었다면서?”

    심란한 표정으로 혜인을 지켜보던 은희와 홍춘의 이목이 단번에 세인에게로 쏠렸다.

    “서 전무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홍춘이 먼저 물어왔으나, 세인은 고개를 살짝 저어 별것 아니란 태도를 보였다.

    “아뇨. 그런 거 없어요.”

    “그래, 없어야지. 이제 좋은 날 시작인데, 흠흠.”

    홍춘이 헛기침하며 은근히 압박했다.

    홍춘은 제문 그룹을 사돈으로 둔 뒤부터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거저 얻은 권력과 명예를 잃고 싶지 않을 터다.

    홍춘의 욕심을 변함없이 채워주려면 세인이 이한의 곁에 잘 붙어 있어야 했다.

    “아빠는, 여자끼리 얘기예요.”

    혜인이 살짝 눈을 흘기며 홍춘에게 투정했다. 그러더니 세인에게 재차 물었다.

    “정말 서 전무랑 그랬어?”

    “……뭘?”

    “아니, 둘이 사이가 엄청 좋았다던데. 제대로 불붙었다고 주은이가 그러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사람들 보는 데서 입 맞췄다며. 아니니?”

    “……뭐?”

    혜인의 입을 보고 있던 세인이 젓가락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가족 앞에서 이런 식으로 이한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 앞에서 얘기하긴 불편한 소재였다.

    “주은이 언니도 어제 오셨어? 난 못 봤는데.”

    그래서 세인은 빙긋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더블나인에 지인이 많은 혜인의 귀에 어제 일이 흘러들어 간 건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소문이 어떻게 변질되고 부풀려졌을지 가늠이 안 되었다.

    본디 소문이란 건 더 자극적이고 과장되게 퍼지기 마련이다.

    “어. 다 갔다더라. 나만 못 갔지. 그래서? 정말 그랬어?”

    젓가락을 다잡은 세인이 반찬을 덜어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냥 별거 아니었어.”

    “둘이 잤어?”

    “……뭐?”

    애써 골라낸 부드러운 고깃덩어리가 젓가락 사이에서 툭 떨어지자, 은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시 사이좋아진 거야? 이미 한 번 정떨어진 사이인데, 어색하진 않았니?”

    “언니.”

    “난 둘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부터 영 찝찝했어. 어떻게 결혼 앞둔 신랑이 얼굴을 한 번 안 비쳐? 이미 마음 떠난 거 빤히 보이더라.”

    숨을 고른 혜인이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요즘 애들은 그러더라. 마음 떠났어도 잘 수 있다며? 으…… 난 못 해.”

    혜인이 질색하며 어깨를 떨었다.

    그에 세인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부모님이 함께 있는 자리였다. 원래 혜인과 사생활을 전부 얘기하는 관계도 아니었다.

    “언니, 미안한데 이 얘긴 못 들은 걸로 할게.”

    세인이 불편함을 드러내자, 은희가 웬일로 세인을 두둔했다.

    “그래, 혜인아, 부부라면 당연히 잠자리도 가지는 거야.”

    물론 그 내용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 이제 2세도 봐야지.”

    홍춘까지 한술 더 뜨며 세인을 압박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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