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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22화 (22/95)
  • 두 번째 신혼 22화

    지하에 자리한 설비실은 대체로 침침한 분위기였다. 바로 옆 기계실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있는지라 음산하기까지 했다.

    플래시를 켜고 설비실 바닥을 샅샅이 살펴보길 1시간.

    이번에도 주얼리 케이스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찾지 못했다.

    “하아…….”

    세인은 숙였던 허리를 펴며 뜨끈한 눈두덩을 꾹 눌렀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나을 듯했다.

    그래, 주얼리 케이스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기계 아래까지 굴러갔을 리가 없지.

    세인은 씁쓸하게 숨을 몰아쉬며 설비실 안쪽에 연결된 기계실 문을 한 번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니 저기라도 살펴볼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기계실 문을 잡아당기는 순간이었다.

    “아무 데나 불쑥불쑥 들어가면 위험해. 그렇게 함부로 기웃거리면 쓰겠어?”

    세인의 뒤에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세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자 이한의 긴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냥 두면 정세인 밤새 이럴 것 같아서 왔지. 우선 안을게.”

    이한이 허리를 굽혀 두 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갑작스럽게 몸이 두둥실 떠오른 세인은 저도 모르게 이한의 목에 팔을 감고 말았다.

    이한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세인의 심장이 철렁했다.

    무언갈 떠올리고 만 세인이 경련하듯 그의 가슴을 밀어버렸다.

    “읏!”

    하지만 이한이 더 바짝 끌어안는 바람에 그와 멀어지려는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불쾌해도 참아 봐. 지금 다리 상태 안 좋아.”

    이한의 눈가가 설핏 구겨진 채였다. 마치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이한의 나체를 목격한 이후로 그와 가까이 마주하는 건 처음인지라 얼굴을 똑바로 볼 순 없었지만, 서늘한 기색만은 감지되었다.

    “다리가 이 지경이 되도록 혹사하면 짜릿하고 그런가? 아픈 거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세인은 사실 아까부터 절뚝거리며 설비실을 헤매고 있었다.

    제대로 쉬질 못하고 계속 아픈 다리를 끌고 다녔으니 탈이 단단히 난 것이다.

    “쓰레기통을 뒤지질 않나. 겁도 없이 혼자 이런 곳엘 들어와서 바닥을 기질 않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걸 봤다는 건, 카페테리아부터 따라왔단 소리일까.

    “……전부 본 거예요?”

    이한이 잘생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도망갔잖아. 사람을 보곤 도망을 가니까 쫓고 싶지.”

    “스토커도 아니고…….”

    “스토커 안 되게 도와 봐. 자꾸 눈 피하지 말고.”

    눈을 휘며 웃는 이한의 미소에는 세인의 부끄러움을 꿰뚫는 예리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세인의 귓불이 뜨거워졌다.

    이한이 몸을 돌려 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봐요. 아직…….”

    “귀걸이 똑같은 걸로 주문했고 내일 바로 받아 볼 수 있어. 그러니까 우선 발목부터 치료하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 마음 같아선…….”

    입술이 일자로 닫힌 이한은 뭔가 억누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말해요.”

    이한이 빠르게 걸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귀걸이 새것으로 구해 주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기에 내 쪽에서 바로 주문했어.”

    “설마 회원님을 직접 만났어요?”

    “그래. 이 정도면 치료받을 마음이 들어?”

    “왜 서이한 씨 마음대로 고객을 만나요?”

    이한이 고객을 직접 만날 이유와 명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객은 화가 몹시 많이 난 상태였다. 이한이 나섰다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더 꼬였을지도 몰랐다.

    “혹시 고객분을 협박했어요?”

    하? 이한이 헛숨을 내뱉다가 나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정세인은 나를 뭐로 볼까.”

    “무뢰배요.”

    세인의 말에 이한이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고객이 마침 나와 아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직접 찾아간 거고 흔쾌히 이 일을 덮어주겠단 약속을 받았어. 이제 됐나?”

    “…….”

    그렇다 한들, 기뻐할 수는 없었다.

    고객이 진심으로 용서한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또한 분실된 귀걸이를 새것으로 보상한다고 해서, 잃어버린 물건과 가치가 같다 말할 순 없었다.

    “중요한 의미를 가진 물건일 수도 있어요.”

    이한이 세인의 발 쪽을 눈짓하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이 꼴을 하고 더 찾아보겠다고?”

    “조금만 더요.”

    “안 돼. 더는 못 봐.”

    “선물 받은 물건이라면, 그건 돈으로 못 사는 거잖아요.”

    “귀걸이는 그냥 귀걸이야. 선물을 받았으면 마음을 받은 거고 그거로 된 거지, 이미 수용한 가치가 변하나?”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보고 싶어요. 받은 사람 마음이 아플 수 있잖아요.”

    “마음은 다시 주면 돼. 계속. 채워질 때까지.”

    이한의 어두운 동공이 그녀의 시선에 스몄다. 얽히듯 맞닿은 서로의 숨결과 시선이 동화되듯 섞였다.

    세인의 심장이 또 말썽을 부렸다. 쿵쿵. 이한이 자꾸만 문을 두드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세인은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애써 이한을 외면했다.

    “정말 이 일 말고 다른 일 해볼 생각은, 없어?”

    “전에도 말했던 거로 아는데요.”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남 뒤치다꺼리하는 게 정세인 일이라면, 말려야지 싶은데.”

    세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선을 넘은 지적에 발끈해야 정상이지만, 정곡을 찔렸기 때문일까.

    민감한 부분을 건드는 이한이 싫기보단, 바보처럼 비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비상구의 초록색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걸어갈 테니까 내려줘요.”

    “말이 되는 소릴 해. 절대 안 돼.”

    “내려 달란 소리 안 들려요? 자꾸 당신 멋대로 할 거예요?”

    “내리면. 제대로 걸을 순 있고?”

    세인이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실상 발목 상태는 거의 한계였다.

    “사람…… 불러서 갈 거니까 내려 달라고요.”

    “내가 떡하니 있는데 다른 사람을 부르면, 더 불편한 상황이 되겠지.”

    이한을 두고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긴다는 건, 불화설을 뒷받침하는 꼴밖에 안 되었다.

    “……서이한 씨가 가면 되잖아요.”

    “아픈 널 두고 어떻게 가.”

    그렇게 세인의 의지를 깨끗하게 무시한 이한이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1층 복도였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이한과 다툴 수는 없었기에 세인은 눈을 내리깔며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의료실 어느 쪽이야?”

    “왼쪽 끝이요.”

    두 사람이 의료실로 들어가자, 상주 중이던 김 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한에게 안겨 들어온 세인을 알아보곤 매우 놀란 표정을 했다.

    “지배인님, 어디 아프십니까?”

    이한이 보호자인 양, 세인을 대신해 대답했다.

    “이틀 전에 다리를 접질렸습니다. 지금은 잘 걷질 못할 정도고.”

    “어떻게 다치셨습니까?”

    “구두를 신고 뛰다 꺾인 것 같던데.”

    세인이 끼어들 새도 없이 의사와 주거니 받거니 대답하던 이한이 베드에 걸터앉았다.

    문제는 세인을 안은 채로 착석했다는 것이었다.

    기묘한 자세에 당혹스러운 건 세인뿐인 듯했다.

    이한이 제 한쪽 허벅지로 세인을 고쳐 안자, 김 의원이 미끄러지듯 달려와 세인의 발을 확인했다.

    “신발을 벗어보시겠어요?”

    “잠시.”

    이번에도 대신 대꾸한 이한이 그녀의 신발을 벗겨냈다.

    세인이 어찌할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김 의원이 발목을 잡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스쳤다. 세인이 어깨를 굳히며 눈살을 찌푸렸다.

    “읏…….”

    “여기 아프십니까?”

    “네.”

    세인의 발목을 이리저리 살펴보면 김 의원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이거, 더 방치하면 골치 아파집니다. 혹시 모르니 엑스레이 한 장 찍어봅시다. 최소 반깁스하시고 몇 주는 상태 보셔야 할 겁니다.”

    “그건 안 되는데…….”

    주말에 클럽 파티를 총괄해야 했다. 그런데 반깁스라니.

    누가 봐도 파티에 불만이 있어 일부러 다친 척을 하는 모양이지 않을까.

    세인이 고뇌하는 사이, 이한이 옆에서 한술 더 떠 말했다.

    “목발이나 휠체어는 없습니까? 아예 눌러 앉힐 수 있는 거면 더 좋겠는데.”

    “하하하…… 휴식이 필요한 상태이긴 합니다.”

    김 의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헤아리려 눈알을 도륵도륵 굴리며 웃었다.

    이한에겐 상대를 위축시키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여유로운 듯했으나 날카로웠고 가벼운 듯했으나 묵직한 위압감이 존재했다.

    그래서 김 의원도 그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VIP를 모시는 것처럼 이한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

    진료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방사선실까지 세인을 안고 들어간 이한은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나서서 그녀를 보살폈다.

    그녀가 김 의원이 보이지 않을 때 슬쩍 이한을 밀어냈으나 그는 바위처럼 옆을 지켰다.

    “무서워? 그냥 사진 찍는 것뿐이야.”

    손까지 잡아주며 이한은 세인을 어린애처럼 달랬다.

    기가 막힌 세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한에게 휩쓸렸다.

    다행히 엑스레이상으로 골절은 확인되지 않았다. 근육이 놀란 데다가 무리해서 부어오른 정도란 진단이 내려졌다.

    차트를 정리하며 김 의원이 물었다.

    “지배인님, 엉덩이 주사 한 대 맞으시겠어요?”

    “주사는 됐습니다.”

    이한이 나서서 대답했다. 세인이 뾰족한 눈으로 자꾸만 대리인처럼 대답하는 이한을 바라보았다.

    실컷 극성을 떨더니만 정작 주사를 마다하는 그의 의중은 또 뭐란 말인가.

    도무지 이한이 이해되질 않았다.

    “간호사는 따로 없어 보이는데.”

    이한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예, 뭐. 아시다시피 다들 개인 주치의를 두시니 살림을 더 늘려봐야 의미가 있겠습니까. 허허허.”

    김 의원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한이 세인을 베드에 앉혀 놓고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또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았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이한의 무릎 위에서 해방된 기쁨도 잠시였다.

    반깁스를 하지 않은 발에 스타킹이며 구두를 다시 신겨주는 이한의 손길이 민망하고 불편했다.

    이한을 마다해야 하는데 김 의원의 시선이 머무르는 터라 세인은 거부하지 못하고 주먹만 꼭 말아 쥐었다.

    “계속 열감이 있거나 붓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오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세인이 가까스로 웃으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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