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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21화 (21/95)
  • 두 번째 신혼 21화

    미쳤어.

    나른하게 웃는 이한의 볼우물을 외면하며 세인은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카페테리아를 빠져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세인은, 층이 변하기 시작하는 숫자판을 보고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미쳤나 봐…….”

    시선이 그리로 가다니. 아무리 종일 그 생각뿐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그 시선을 이한이 눈치챘을까? 챘을 거다. 눈치 빠른 사람이니까.

    “아…….”

    세인은 머리를 흔들어 창피함을 털어 내려 애썼다.

    발목이 또다시 욱신대는 걸 참으며 세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러곤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세인이 노크를 하고 총지배인 사무실로 들어서자, 마침 얼굴이 낯익은 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세인은 한편에 비켜서서 그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사했다.

    “살펴 가세요.”

    “그래요.”

    점잖게 응수한 손님이 문밖으로 사라진 뒤에야 세인이 다시 움직였다.

    “앉아.”

    세인에게 자리를 권한 총지배인의 이름은 강제일. 그는 마른 몸에 안경을 낀, 서른아홉의 기혼 남성이었다.

    부부 사이에 아직 아이는 없다고 들었다.

    제일이 소파를 가리켰고, 세인이 그의 대각선 방향에 착석했다.

    제일이 특유의 깐깐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말에 클럽 파티 잡힌 건 알지.”

    “네.”

    “그날 정 지배인이 일해 줘야 하겠어.”

    “제가요?”

    세인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파티와 외부 행사, 이벤트를 주관하는 건 신 부총지배인의 일이었다.

    “그래. 손님께서 지명했어. 꼭 정 지배인이 당일 관리를 해달라더군.”

    “신 지배인님께서는요?”

    “그쪽에는 내가 얘기할 거야.”

    잘 이해되지 않았다.

    세인의 담당도 아닐뿐더러, 콕 짚어 세인을 지명한 손님의 의중이 의아했다.

    뭘 보고 자신을 지목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임지윤 씨가 직접 정 지배인을 픽한 거야.”

    “임지윤 회원님이요……?”

    “그래.”

    임지윤이라니. 세인의 입안이 모래를 씹은 것처럼 불편해졌다.

    임지윤은 골프장 클레임을 건 임 본부장의 딸이었다. 그리고 강현준의 약혼녀이기도 했다.

    지윤이 사석에서 번번이 시비를 걸기에 면박을 준 적이 있었다.

    설마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서 앙갚음을 하겠단 걸까.

    강현준의 일이나 임 본부장의 클레임 건도 문제가 됐을 터다.

    지윤이 좋은 의도로 자신을 지명했을 것 같진 않았다.

    “말씀은 알겠지만, 주말이 바로 코앞인데 준비하기엔 시간이 촉박해요. 언니 검진도 있고요.”

    “정혜인 씨 검진이라면 오전에 끝날 텐데. 점심 식사하고 이리로 출발할 거 아니야?”

    제일은 잘 안다는 듯 얘기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네. 하지만 바로 저녁부터 투입돼도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거예요.”

    파티라는 이름이 붙으면 뭐든 과해지는 동네였다. 가진 돈을 물 쓰듯 쓰며 당연함을 느끼는 부류들을 충족하게 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신경 써야 했다.

    “준비는 다 됐어. 토요일 오전에 신 지배인이 마무리할 거야. 정 지배인은 파티에 참석해 주면 돼. 파티 컨디션 체크하고 분란만 없도록 조율해.”

    말을 마친 제일이 내민 것은 초대장이었다.

    그러니까 지윤은 세인을 직원이 아닌 손님으로 초대하겠단 소리였다.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습니다.”

    세인이 커다란 눈을 똑바로 뜨며 말했다.

    “임지윤 씨 어리잖아. 기분 좀 맞춰 줘.”

    세인이 씁쓸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파티에 불러내 얼마나 유치하게 사람을 골려댈지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무리를 대동해서 세인을 골탕 먹이려는 아주 빤한 속셈이었다.

    “VIP 기분 맞추는 건 정 지배인 전문이잖아?”

    세인은 시간을 확인하곤 마지못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어차피 그녀는 위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 하는 위치였다.

    “그리고 말이야.”

    제일이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강현준이 오늘 나갔어.”

    “네.”

    “강현준 회원 떠난 게 서이한 전무 때문이라는 소리가 있어. 사실이야?”

    “……죄송합니다.”

    보고 듣는 눈과 귀가 많은 곳이었다. 제일이 그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서 전무랑 같은 객실 쓰는 건 뭐야. 다시 잘되어가는 거야? 아니면 보여 주기식?”

    “총지배인님, 이런 개인적인 질문은 불편합니다.”

    “뭐가 불편해?”

    “그래도요.”

    세인이 미소를 쥐어짜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파티에 필요한 개인 물품은 신 지배인한테 받으면 돼.”

    “네.”

    사무실을 벗어난 세인은 갑갑하게 조여 오는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소화제를 먹었는데 효과가 없었다.

    약에 내성이 생긴 걸까. 위장병이 악화된 기분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서둘러 서류를 마무리하고 회의를 앞당겨야 혜인을 데리고 일찍이 본가로 넘어갈 수 있었다.

    검진 전에 하루 집에서 자는 건 정해진 루틴이었다.

    검진 날이 되면 굉장히 예민해지는 혜인을 생각하면 늦장 부릴 수가 없었다.

    “지배인님!”

    그때, 누군가 허겁지겁 달려와 세인을 불렀다.

    얼굴이 상기된 채 달려온 지민은 어딘가 급해 보였다.

    세인은 차분하게 대응했다.

    “지민 씨, 무슨 일 있어요?”

    “지배인님!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지민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건이 또 터졌구나. 세인은 슬픈 직감을 하며 지민을 따라 뛰었다.

    지민을 따라 찾은 별관의 직원 휴게실.

    그 안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울고 있었고 그녀의 주변은 쓰레기투성이였다.

    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세인을 알아본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물을 훔쳤다.

    “죄송합니다…… 흐윽, 죄송…….”

    “윤선희 씨?”

    세인이 이름표를 보며 묻자 선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흐읍, 네에…….”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화장이 번지고 코가 새빨갰다.

    “선희 씨, 진정하고 차근차근 설명해 보세요.”

    “흐읍, 네에…….”

    선희는 인턴 과정을 지나 정직원이 된 지 고작 한 달 차인 신입이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지배인님, 제가 1시간 전에 회원님 핸드백을 맡았는데, 그 속에 들어 있던 귀걸이를 분실한 것 같아요.”

    “회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흡, 네…….”

    “그래서 귀걸이를 찾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진 거예요?”

    “죄송, 죄송합니다.”

    선희가 서럽게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어갔다.

    “흐읍, 청소 트레이에 가방을 올려놨는데…… 가방을 챙기려다가 쓰레기통에 빠뜨렸었어요.”

    “그때 가방에서 귀걸이가 떨어진 건가요?”

    “흐윽, 네…… 아마 그런 것 같아요. 확실하진 않지만……. 흑, 지배인님, 저 너무 억울해요.”

    옅게 한숨 쉰 세인은 잘게 떨리는 선희의 등을 토닥였다.

    고객이 어떤 식으로 말했을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물건이 없어졌으니 첫 번째로 선희를 의심했을 거다. 이런 일은 사실 종종 일어나곤 했다.

    세인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선희 씨, 핸드백을 가지고 들렀던 곳을 모두 얘기해 보세요.”

    “고객님께서 뷰티 숍으로 부르셔서 거길 들렀다가…… 주차장엘 갔어요. 그다음엔 기계실 옆, 설비실에 잠깐 갔어요. 흐윽…….”

    “설비실은 왜요?”

    “회원님께서 기계실 쪽에서 잠깐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하셔서 저는 설비실 구경을 했거든요……. 그때도 핸드백을 들고 있었습니다.”

    “말해 줘서 고마워요. 선희 씨는 세수부터 해요. 그리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요.”

    “……네?”

    선희가 눈물 젖은 얼굴로 의아하단 듯이 되물었다.

    “오늘은 쉬고 내일 얘기해요.”

    “하지만…….”

    세인은 불안해하는 선희의 어깨를 한 번 더 도닥거렸다.

    “이런 일을 책임지라고 내가 있는 거예요. 오늘은 푹 쉬고, 내일 함께 사과하도록 해요. 이해했어요?”

    “네. 감사합니다.”

    선희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세인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파리한 손에 쥐여줬다.

    이런 일은 책임자가 나서야 했다. 고객을 달래는 것도, 추후 보상하는 것도 세인의 몫이었다.

    세인은 일이 더 커지지 않길 바라며 발을 재촉했다.

    4시간 뒤.

    호텔 건물의 뒤편, 쓰레기를 임시 보관하는 보관소 앞에서 세인이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지배인님…… 아무래도 정말 없는 것 같아요오.”

    함께 있던 지민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희가 핸드백을 올려두었다던 트레이를 다시금 뒤지고, 혹시 몰라 쓰레기 보관소까지 살폈으나 주얼리 케이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요.”

    세인이 허탈하게 말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이 일을 어쩔까.

    “주차장 바닥도 찾을 만큼 찾았고…… 지배인님, 이제 어쩌죠?”

    “나는 마지막으로 설비실에 가 볼게요. 지민 씨는 먼저 들어가요.”

    “저만요?”

    “네. 지민 씨는 사무실에 들러서 오늘 회의 월요일 아침으로 미뤄주세요.”

    “지배인님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힘들면 다른 분들과 찾아볼게요. 지민 씨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세인이 난감하게 미소 짓자 지민이 입술을 감쳐물며 곤란해했다.

    세인은 재킷을 벗어 들었다. 냄새가 밴 것 같아서였다.

    지민도 여기저기 엉망이 된 꼴이었다. 조만간 지민에게 옷을 한 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경 쓸 일을 하나 더 머릿속에 기록하며 세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재킷 주머니를 뒤져 혜인에게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세인의 전화를 받은 건 혜인이 아닌 간병인 이모님이었다.

    -네. 아가씨, 저예요.

    세인이 별관으로 향하며 물었다.

    “언니는요?”

    -지금 작업 중이세요.

    “그럼 죄송하지만 언니한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먼저 본가에 가든지, 아니면 저녁 늦게 가자고 전해 주시겠어요?”

    -……많이 늦으세요?

    간병인 이모님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세인이 늦어진다는 소식을 전하면 혜인이 필시 짜증 부릴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세인은 미안함에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죄송해요.”

    -아휴. 작은 아가씨께서 죄송할 일이 뭐가 있어요. 바깥일이 다 그렇죠. 그럼 몸 생각해 가면서 하셔요.

    “네. 부탁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세인은 찜찜함을 느낄 새도 없이 설비실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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