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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18화 (18/95)
  • 두 번째 신혼 18화

    이한이 재차 물었다.

    “정말 단 한 번도 안 챙겼어?”

    세인은 헛숨을 삼키며 말을 아꼈다. 대답할 수 없었던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네가 이러는 게 꽤 마음이 아픈데, 꼭 나쁘진 않아. 너와 생일 파티 하는 건 나밖에 없단 소리니까.”

    “제정신이에요?”

    멀어지더니 제멋대로 돌아와선 누구보다 친밀한 척 구는 서이한.

    세인은 그의 뻔뻔함에 치가 떨리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인의 바로 턱 아래에서 짙은 동공을 번들거리며 이한이 말했다.

    “다른 새끼가 사주는 건 먹으면 안 되지.”

    “……뭐라고요?”

    “치워도 치워도 계속 나오는 걸 내가 어떻게 할까.”

    의뭉스러운 말을 중얼거리며 이한이 손을 뻗었다.

    움찔한 세인은 앞머리를 쓸어 귀 뒤로 꼽아주는 이한의 손가락이 차디찬 걸 깨달았다.

    이한의 체온을 의식하자 뺨을 타고 내려오는 손이 얼마나 차가운지 확연히 느껴졌다.

    아까부터 이 시간까지 기다린 거라면, 적어도 6시간은 여기서 이러고 있었다는 건데…….

    세인이 저도 모르게 이한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기다린 거예요?”

    가만 보니 이한에게서 은은한 술 냄새까지 났다.

    “술도 마셨어요?”

    “취한 것처럼 보여?”

    말하는 이한의 입가가 즐거운 듯 올라가 있었다.

    아차, 세인은 저도 모르게 주무르던 이한의 손을 봇짐 던지듯 놔버렸다.

    세인이 내치기 무섭게 이한이 다시금 손을 대령했다.

    “더 만져도 되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거지, 별 뜻 없었어요.”

    “아, 본능이 먼저? 이렇게까지 앞뒤 안 보는 편인 줄은 또 몰랐는데.”

    “본능대로 했으면 여기서 전무님, 밀어버렸을걸요?”

    말을 마친 세인이 창백한 얼굴로 애써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어두운 조도 속에 파묻힌 짐승 같은 남자가 세인을 직시했다.

    그의 안에서 알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무언갈 간절히, 애타게 원하는 갈망이 엿보였다.

    이한이 다가와 단단하게 잠가둔 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쿵쿵쿵. 침입자의 부름이 세인의 심장까지 두들겨 대고 있었다.

    “더 만져 봐.”

    이한이 손을 내밀었고, 세인은 뭔가에 홀린 듯 덥석 그 손을 잡았다. 다시금 그의 체온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손등과 손목을 조심히 어루만지자 이한의 체온이 소스라칠 만큼 차갑다는 게 선명해졌다.

    이대로 두면 아무리 이한이라도 탈이 나겠지.

    이한이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자리를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한이 감기에 들든 말든 상관없었으나,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사양이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앓아누웠단 소리야말로 끔찍했기에 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선 내려가서 내 객실로 가요. 그게 낫겠어요.”

    순간 이한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그런데 세인이 무영의 옷을 챙겨 드는 순간이었다.

    재킷을 앗아간 이한이 그걸 휙, 의자 위로 던져 버렸다.

    “지금 뭐 하는……!”

    “향수 냄새가 심해.”

    “무슨 향수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무영이 쓰는 향수는 크게 거슬리지 않는 향이었다.

    “저걸 굳이 가져가야 할 이유라도 있나?”

    “대표님께서 빌려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두고 가야지.”

    “회사 잘리라고 시위해요?”

    “저거 놓고 간다고 잘려? 잘됐네. 정세인 백수 만드는 게 내 소원인데.”

    “…….”

    그게 왜 당신 소원이에요?

    기가 막힌 세인이 붕어처럼 입술을 뻐끔대다가 포기하고 앞장섰다.

    “말을 말죠.”

    이한과의 말씨름은 무의미한 소모전일 뿐이었다.

    재킷은 나중에 루프탑을 청소한 직원에게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이한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막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세인은 이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이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맞잖아. 그 자식 향수 냄새가 뱄어.”

    무영을 그 자식이라고 칭하는 무도함에 화를 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기껏 참고 있는데.”

    뭘 참고 있는지 물으려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

    그녀가 짧게 한숨 쉬었다.

    세인은 그동안 자기 자신을 이성인이라고 생각해 왔다.

    본능 따위는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한에게 말려들자 미소 짓는 쉬운 일마저 어려워지고 있었다.

    세인은 점점 다가오는 이한의 팔을 의식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내려. 다 왔어.”

    정수리에 닿는 이한의 목소리에 눈을 번뜩 떴다.

    고개를 돌리자, 닫히려는 문을 그가 붙들고 있는 게 보였다.

    이한을 한껏 의식하고 있단 걸 들킨 듯해서 세인의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리려고 했어요.”

    “내리려고 했어요.”

    세인의 말을 따라 한 그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추격자를 피해 달아나는 토끼처럼 재빠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뒤를 사냥꾼처럼, 아니, 포식자처럼 이한이 따라붙었다.

    커다란 보폭으로 거리를 좁힌 이한은 세인이 객실 잠금을 해제하기 무섭게 직접 문을 열었다.

    “발 조심하고 들어가.”

    세인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태도가 마치 이곳의 주인이 그인 양 자연스러웠다.

    객실로 들어가 슬리퍼로 갈아 신는 세인의 등 뒤로 커다란 체온이 닿았다.

    이한이 뒤에서 그녀를 가볍게 껴안은 거다.

    이한의 호흡이 와인 향과 뒤섞여 흘러들었다.

    이 팔을 뿌리쳐야 하는데, 머리와 다르게 세인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불쾌함 때문은 아니었다.

    “전부 내가 잘못했어.”

    사슬처럼 옭아매는 그의 목소리가 애틋하게 들려오기 시작하는 게 문제였다.

    “서이한 씨.”

    “사과할 기회를, 틈을 줘.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병신 같은 놈이 되어도 좋으니까 날 봐줘.”

    이한은 짐승 중에 여우가 아닐까. 간악한 술수로 사람을 현혹하는 나쁜 짐승.

    “내 말을 듣고, 나한테만 안기고.”

    “왜 이러는…….”

    “나한테만 집중해.”

    “…….”

    “정세인.”

    이한이 부르는 이름이 마법처럼 그녀의 가슴으로 스몄다.

    간을 빼먹으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구미호처럼 이한이 속살댔다.

    “다시 시작해. 난 잘할 자신 있거든.”

    “취한 거 맞잖아요. 지금, 취했죠?”

    세인이 묻는 순간, 등으로 맞닿은 체중이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서이한 씨?”

    세인은 급격하게 무거워지는 등 뒤를 확인하려 했으나, 몸을 짓누르는 무게감에 휘청이고 말았다.

    “……아.”

    “……네?”

    “자면 안 되는데…….”

    짧은 욕설을 내뱉은 이한의 커다란 몸이 서서히 그녀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세인은 점점 더 아래로 향하는 이한의 몸에 깔리지 않으려 버둥댔다.

    그녀는 집채만 한 몸을 겨우겨우 두 손과 이마로 받쳐냈다. 넘어질세라 다리에 힘을 주며 물었다.

    “왜 그래요? 많이 취했어요? 저기, 서이한 씨?”

    “왜 지금…….”

    이한이 눈을 깜빡거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기다란 눈꺼풀이 굳게 닫혀 버렸다.

    “저, 정신 차려요!”

    “……미안. 버려.”

    버리라니. 어디에, 바닥에?

    “네 다리부터…… 조심하고 그냥, 놔.”

    “저기……!”

    세인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한의 몸이 점점 더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읏……!”

    불면증이라더니 한계에 달한 모양일까. 이한은 고른 숨을 내쉬며 수면에 빠져들고 있었다.

    “서이한 씨! 잠깐만요. 일어나 봐요!”

    선 채로 잠든 남자의 무게를 감당해 보려 했으나 슬리퍼가 죽죽 미끄러졌다. 결국 그녀는 몸을 다시 돌려 그의 두 팔을 가방처럼 둘러맸다.

    “읏, 무거워……!”

    그렇다고 이한을 바닥에 내팽개칠 정도로 매몰찬 사람은 아니었다.

    사랑은 없지만 인류애는 남아 있었다.

    세인은 있는 힘을 다해 이한을 끌고 침실로 향했다. 마음속으로 이를 갈며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짰다.

    잠시 눈앞의 소파에 던져 버릴까 갈등했다.

    그러나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이한의 피부가 너무 차가웠다.

    감기라도 들면 이한은 그 핑계로 더 눌러앉을 게 뻔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잠드는 데 성공했으니, 더더욱 질척거리며 뭐라도 되는 사이인 양 능청을 떨어댈 남자였다.

    그렇게 되면…… 이보다 더 이한에게 휩쓸리겠지.

    세인은 끙끙대며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이한을 짐처럼 끌고 갔다.

    괴력을 발휘해 이한을 침대에 눕히는 데 성공한 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푹신한 침대에 파묻힌 거대한 몸.

    침대 밖으로 튀어나온 다리와 넓은 어깨를 보자, 새삼 이한의 몸집이 커다랗게 느껴졌다.

    세인은 더러운 것을 대하듯 이한의 슬리퍼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쳐서 벗겨냈다. 이어 남은 힘을 쥐어짜서 낑낑댔다.

    “왜, 이렇게 무거…… 워!”

    이한이 천장을 보도록 바로 눕히고 나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하아…….”

    이마에 송골송골 땀까지 맺힌 세인과 달리 이한은 평화롭게 숙면 중이었다.

    세인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헛웃음 지었다.

    “진짜…….”

    깊게 잠든 듯 미동도 없는 이한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싶어서 울분이 차올랐다.

    딱 한 대만 때려봤으면 좋겠다. 마침 머리칼이 갈라져 이한의 이마가 보기 좋게 드러나 있었다.

    세인은 침대에 무릎을 대고 이한에게로 조심히 다가갔다.

    정말 때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시늉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그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아서.

    “얄미워서 한 번만 해볼게요.”

    그녀의 침대를 차지해 놓고 뻔뻔하게 잠든 이한의 이마 위로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긴 팔이 낚싯줄처럼 뻗어와 세인을 낚아챘다.

    “읏……!”

    눈앞이 뒤집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이한의 가슴 아래에 깔려 버렸다.

    당황한 세인은 눈을 연신 깜빡였다.

    잠들긴커녕 형형하게 눈을 뜬 이한이 지척에서 그녀를 도사리듯 바라보고 있었다.

    “서이한 씨?”

    “아주 가끔 기절하듯 잠들어.”

    “기절은 내가 할 것 같거든요? 비켜요.”

    “방금도 그랬어.”

    “……알았으니까 비켜요.”

    “퓨즈가 끊겼나 봐.”

    “알았으니까…….”

    세인은 맞붙은 체온을 의식해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그럴수록 가슴 아래쪽이 밀착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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