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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17화 (17/95)
  • 두 번째 신혼 17화

    무영과 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내내 이한을 신경 쓰고 있었는데 혜인을 돌보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한이 기다리고 있단 걸.

    두 번째 메시지가 온 건 10분 전이었다.

    [겉옷 입고 나와. 그 몸으로 밤바람 맞으면 탈 나.]

    핸드폰을 가방에 쑤셔 넣고 혜인의 객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면 안 되는데 몸이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이한이 아직도 파티 중이라면, 아내가 없는 게 이상하게 비칠지 몰랐다.

    그에게 버림받았단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이상 의미 없는 짓일지 모르겠으나, 이한의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두면 더 큰 추문을 막는 데 도움은 될 거다.

    얼굴 정도는 비칠 수 있으니까.

    세인은 그런 이유를 갖다 붙이며 피곤한 몸을 옥상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옥상 문이 닫혀 있었다.

    세인은 자동문 버튼을 눌렀다. 곧장 루프탑으로 들어선 뒤 의아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위가 깜깜했다. 천천히 걸어가 커브를 돌자 무언가 보였다.

    촛불이 은은하게 빛나는 테이블, 옆에 다리를 꼬고 앉은 검은 인영.

    호화로운 파티 분위기는 그 어디에서도 엿볼 수 없었다.

    단 하나의 테이블만이 까만 밤하늘과 대비되어 주인공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이한은 혼자였다.

    세인은 적당한 조도의 조명에 둘러싸인 이한에게로 다가가며 물었다.

    “오늘 파티 하는 거 아니었어요?”

    “파티?”

    이한이 되묻고 나서야 세인은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귀국 파티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럴 여유가 있나. 정세인 기다리기도 벅찬데.”

    이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우선 생일 축하해.”

    “……네?”

    세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당혹스러운 세인과 다르게 맞은편 자리를 눈짓하는 이한은 태평하기만 했다.

    “일단 앉아. 파티는 둘이 해야지.”

    세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마련된 테이블이 꼭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 같아서였다.

    예쁜 촛대, 미역국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돔 커버, 와인 잔.

    한쪽에 보이는 케이크 상자까지.

    “……이런 거 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동안 못 했던 것까지 많이 축하해 주고 싶어. 그런데 이게 맞는지 확신은 없고. 그러니까 거기 앉아만 줘.”

    “…….”

    “다시 말할게. 생일 축하해.”

    세인은 급격히 차오르는 눈물에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노력이 무색하게 시큰시큰한 콧대 너머로 뜨거운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몸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이렇게 슬픈 말이었을까.

    이한의 가증스러운 입에서 나온 말인데 왜.

    왜 위로라도 받은 것처럼 자꾸…….

    세인이 주먹을 쥐며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한의 뒤편으로 연주단 단상에 의자가 비치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 머물렀던 듯 비뚤비뚤 흔적이 남았다.

    “음악, 좋아해?”

    “…….”

    “늦어져서 연주단을 돌려보냈는데, 좋아한다면 내일이라도 다시 부르고.”

    세인은 이한의 덤덤한 목소리를 들으며 공들여 준비한 테이블을 다시금 눈에 담았다.

    하나 이런 건 그녀에게 사치였다.

    “식었으니까 먹지는 말고 말만 들어. 일단 앉고.”

    세인은 두 다리가 풀릴 것만 같아서, 정말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가족조차 모르는 음력 생일을 이한이 짚어낸 것이 의아했다. 남보다 못한 남자 아니던가.

    “스물두 살 생일도 함께 지냈어. 어떻게 몰라, 네 생일을.”

    이한이 눈가를 얼핏 찌푸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손가락을 툭, 내려쳤다.

    “겉옷 입고 나오라는 말이 다른 남자에게 신세 지란 뜻은 아니었는데.”

    아. 세인은 손에 들고 있던 무영의 겉옷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혜인의 어깨에 덮어준 것인데, 세탁을 맡길 생각으로 가지고 왔다.

    “내려놔.”

    이한이 빈 의자를 눈짓했다. 어쩐지 이한이 다른 새끼에게 눈 돌렸냐며 묻던 때의 표정과 겹쳐 보였다.

    마치 불미스러운 짓을 저지른 아내를 단속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세인, 내가 직접 내려놓을까?”

    정말 질투라도 하듯이, 왜…….

    그럴 이유가 없는데.

    설마 주변의 이목을 생각해서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여기 오면 대답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너무 늦었단 생각은 안 하고?”

    “서이한 씨는 얼마나 떳떳하길래, 이런 옷 하나에 예민하게 구는지 궁금해서요.”

    세인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된 탓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타인을 가까이 두지 않는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제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에 대해서.”

    6년이란 긴 타지 생활 동안, 이한의 곁에 정말 여자가 없었을까.

    침대까지 허락하진 않았을지 모르나, 가만히 있어도 누군갈 유혹하는 매력이 있는 남자니 어떠한 상황을 마주했을지 세인은 알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성 문제로 속 썩일 일은 안 했어.”

    “……그러니 저도 행실을 조심하라, 그런 건가요?”

    세인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전에도 말했듯, 기회를 달라는 거야.”

    결국 기회, 사과.

    이한은 계속해서 그런 걸 피력하고 있었다.

    “글쎄요. 생각해 봤는데, 서이한 씨가 저한테 뭘 잘못했는지 그래서 뭘 사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세인이 미소로 대응했다. 그에게 아무것도 바란 적 없기에 실망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었다.

    늦여름의 밤공기가 제법 쌀쌀하게 세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한이 가지런한 손가락으로 툭, 테이블을 내려치며 말했다.

    “결혼 시작부터 어긋난 거 알아.”

    “서이한 씨는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인이 담담히 되물었다.

    “관계를 호전시키기 위해서 노력은 해봐야지. 우리, 부부잖아.”

    이한이 입술을 부드럽게 올려 웃었다.

    다만 세인은 바로 답할 수 없었다.

    이혼을 입에 올리긴 했으나, 그게 쉽지 않은 문제란 걸 그녀도 은연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일 선물은 싫어해서 준비 안 했는데, 혹시 섭섭하면 말해 주고.”

    생일 선물은 싫다고 했던 6년 전의 일을 이한이 여태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문득, 조금 사납던 6년 전 이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색조 옅은 눈동자와 부드러운 입술로 뭐라고 했었던가.

    ‘생일 때마다 이따위로 우울해했어? 정세인, 앞으론 꼬박꼬박 축하받아.’

    ‘네가 태어난 날은 나한테도 귀중해.’

    그렇게 귀중해서 서둘러 곁을 떠났을까.

    쉽게 싫증 내고 달아난 주제에 이제 와 살랑살랑, 꼬리를 친다는 건 결국 이한에게 숙면이 필요하단 소리밖에 안 되었다.

    “확실히 말할게요. 서이한 씨 불면증 치료엔 도움 못 줘요.”

    “생일인데 케이크는 먹어야지.”

    이한이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종이 상자를 열어 케이크를 꺼냈다.

    딸기가 콕콕 박힌 생크림 케이크가 6년 전, 이한과 나눠 먹은 그 케이크와 모양이 거의 똑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억측일까.

    하트 모양 케이크 위를 가득 덮은 딸기와 촌스럽게 박힌 초콜릿은 흔치 않은 디자인이었다.

    더군다나 케이크 모양을 세인이 착각했을 린 없었다.

    그런 행복한 생일은 처음이었기에 곱씹고 곱씹어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한이 익숙하게 라이터를 튕겨 초에 불을 붙였다.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걸까. 이한의 이너 포켓에서 나온 라이터를 살피는 세인에게 그가 말했다.

    “오늘은 울지 마.”

    “제가…… 아직도 어린애예요?”

    “나한텐 그래도 돼. 응석도 부리고 짜증도 내고, 울고 싶으면 울어. 그런데 오늘 말고, 내일. 내일부터 그렇게 해.”

    “그런 건 제 마음이에요.”

    떨려오는 음성을 감추려 퉁명스레 말한 세인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빵빵하게 부푼 풍선처럼 무언가 차올라서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유독 힘들었던 하루여서일 거다. 일렁이는 촛대를 손짓하며 불어 보라고 재촉하는 이한에게 마음이 술렁이는 것은.

    “정세인, 우는 거 아니지.”

    “벌써 노안이 오셨나 봐요.”

    “못된 말을 하면 더 귀여운 거 알아?”

    세인은 이성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입술을 씹으며 그를 노려봤다.

    이한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인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한의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이 잦은 것처럼 느껴졌다.

    군림하는 게 어울리는 남자이면서 마치 너에게만 쉽게 저자세를 허락한다는 듯이, 이한은 재회 뒤에 몇 번이고 이런 모습을 보였다.

    “전무님, 여자한테 능숙한 거 맞지 않아요?”

    “시력이 안 좋은 건 내가 아니라 정세인 같은데, 자.”

    이한이 케이크를 들어 세인의 얼굴 가까이 두었다.

    6년 전 그날과 같은 자세였다.

    달라진 것은 둘 사이의 거리가 회복할 수 없이 망가졌다는 점뿐.

    “불어봐. 누구는 소원도 빈다던데, 그런 것도 좋고.”

    이한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리는 점이 두렵고, 또 괴로웠다.

    세인은 눈을 깜빡이면 고인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일렁이는 촛불을 겨우겨우 쏘아보았다.

    한참 뒤.

    결국 초를 끈 건 이한이었다. 그가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무릎을 굽힌 채로 물어왔다.

    “저녁 식사는 맛있게 했나?”

    “……되게 맛있는 거 먹었어요.”

    “정말?”

    이한이 나긋하게 웃었다. 새 모이만큼 먹는 식사량을 꿰뚫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그동안 생일 챙긴 적은 있어?”

    “없어요. 그러니 앞으론 이런 짓 하지 말아주세요.”

    그녀에게 생일이 지옥이란 걸 이한도 알고 있는 점이, 세인은 미치게 싫었다.

    초라한 생일을 들키는 게 너무도 창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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