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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7화 (7/95)
  • 두 번째 신혼 7화

    술이 넘치듯이 출렁거리자,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집중했다.

    세인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거절을 표했다.

    “마시고 싶으면 내가 따라 마실게.”

    “내가 술에 장난이라도 했을까 봐? 의외로 겁이 많네, 우리 정 지배인.”

    “무서운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야.”

    “뭐?”

    현준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혜인의 고개가 휙 이쪽으로 돌아왔다.

    세인을 바라보는 눈빛엔 그만 고집 피우란 질책이 담겨 있었다.

    어울려 주란 의미인 것을 알지만, 오늘따라 혜인의 뜻을 따라 주기가 싫었다.

    이한을 본 이후 속이 한바탕 뒤집혔기 때문인지, 기분이 바닥에 가까웠다.

    “X발. 우리가 더럽다는데. 정 지배인이.”

    현준이 욕설을 내뱉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내가 너희 노는 걸 몰라서 이래?”

    처음엔 술을 권하고 다음엔 스킨십을 시도할 거고, 그다음은 객실로 가자고 속삭이겠지.

    뻔한 수순이었다. 이들에게 결혼이나 약혼은 걸림돌이 아니었다.

    “아, 맞다. 우리 정 지배인이 또 서방님한테 버림받은 지고지순한 캐릭터였지.”

    “그래. 나 지고지순하니까, 닳아빠진 몸 들이밀 생각하지 마.”

    “하…… X발.”

    “욕도 좀 줄여. 천박해.”

    말을 마친 세인이 싱긋 웃었다.

    “야, 정세인. 어차피 못 쓰는 거 아끼지 말고 좀 어울리자고. 깨끗한 척하기엔 너도 결국 우리 때문에 밥벌이하는 건데. 안 그래?”

    어차피 못 쓰는 몸뚱이.

    어딜 가나 이한과의 결혼이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아까 접질린 발목이 욱신거렸다. 세인의 한숨이 깊어졌다.

    “수고스러워서 그런 거면 오빠가 직접 먹여 줘? 입술로 잘 먹여 줄 수 있는데.”

    한층 누그러진 현준의 목소리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세인은 이만 나가잔 의미로 혜인을 바라보았다가, 허탈감을 느꼈다.

    혜인도 덩달아 웃고 있었다.

    술자리에서의 일은 돌아서면 잊는다는 식으로, 그저 가벼운 유희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인이 비정상이고 가벼운 그들이 정상인 이곳.

    다들 약혼자와 애인이 있으면서 손쉽게 다른 이성과 부대끼며 논다.

    그러곤 밖에선 멀쩡한 사람인 척, 사회에 이바지하는 지배층인 척 으스대는 거다.

    역겨워서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지만 잘 웃는 혜인을 생각해 참곤 했다.

    “그냥 마셔 줘라. 설마 현준이가 널 뭐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겠냐? 분위기 망치지 말고 한 잔만 해라. 어?”

    “형배야, 왜 속단하고 그래. 내가 어떻게 해보고 싶은 걸지도 모르잖아.”

    형배의 말에 현준이 기분 나쁘게 낄낄거렸다.

    최후의 승자는 결국 그가 될 거란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어쨌든 현준은 고객이었고, 세인은 내일 아침이면 리조트를 책임질 직원이 된다.

    “아니면 강제로 우리 세인이 입을 벌려서 부어줘야 하니?”

    현준이 정말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꼬았던 다리를 내렸다.

    세인은 현준을 노려보느라고 천천히 다가오는 커다란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표면이 젖은 술잔을 그러쥐었다.

    “붓긴 어딜.”

    매끈한 손가락의 뼈대를 타고 올라가자, 이한의 얼굴이 보였다.

    유연하나 묵직한 목소리는 이한의 것이었다.

    세인이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한이 여긴 왜…….

    이한의 서늘한 눈매는 현준을 향해 있었다.

    “사람 말 못 하는 네 주둥이에?”

    살벌하게 말하는 이한은 아까와는 다른 블랙 셔츠 차림이었다.

    주변의 공기를 단번에 휘어잡은 이한이 서서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 입을 억지로 열고 붓는 거라고 했나.”

    이한이 깨달음을 얻은 투로 말한 뒤, 술이 찬 잔을 쥔 채 현준을 향해 다가갔다.

    “뭐야. 누구……!”

    현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한이 억센 손가락의 힘으로 그의 양 뺨을 눌러 억지로 입을 벌렸기에.

    현준의 위에서 이한이 선득한 목소리로 그를 제압했다.

    “왜. 재미없나? 네가 하려던 거잖아.”

    “너, 혹시 서이……! 읍!”

    잔에 담긴 술이 순식간에 현준의 입속으로 쏟아졌다.

    이제야 이한을 알아본 것 같으나, 그는 소파 헤드에 뒤통수가 짓눌려 발버둥 치느라 달리 반항하질 못했다.

    “쿨럭! 커헉!”

    갑자기 들이닥친 많은 양의 액체에 현준이 목을 쥐고 기침을 쏟아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쨍그랑!

    이한이 빈 잔을 바닥에 던지자, 날카로운 파열음이 흩어졌다.

    “서이한 전무니임……! 크헉! 대체 왜 이러세요…….”

    “왜 이러는지 모르면 더 처먹어야지.”

    “커흑! 아뇨. 아뇨!”

    황급히 소리 지른 현준이 젖은 얼굴을 손으로 쓸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짧게 욕설을 내뱉으며 뒷걸음을 쳤다.

    재빨리 이한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폼이 볼썽사납기 짝이 없었다.

    “이제 알아?”

    “네. 네! 압니다!”

    현준이 벌게진 얼굴로 더듬더듬 외쳤다.

    이 상황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세인이 이한의 등을 향해 다가갔다.

    하나 접질린 발목이 욱신거려서 발을 떼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럼 사과해야지.”

    “……네?”

    “사과해.”

    “뭐, 뭐를…….”

    현준이 포식자 앞에 놓인 힘없는 동물처럼 어수룩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멍청한 놈도 사람 행세를 하다니 X 같은 세상이지. 사과하란 쉬운 말도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네……?”

    “그냥 나가 뒈지는 게 낫지 않겠나.”

    이한이 팔을 움직여 낚아챈 것은 술이 가득 찬 술병이었다.

    현준이 겁에 질려 사방을 살폈다.

    도와줄 이를 찾는 듯했으나, 이한이 이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 판도는 바뀌었다.

    이곳의 우두머리는 이한이었고, 감히 나서서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로 뭐 뭘, 어쩌려고……!”

    “해야 할 말도 모르는 싸구려 입에 처넣기엔 술이 아깝고.”

    촤르르.

    이한이 술병 입구를 돌려 내용물을 카펫에 쏟아냈다.

    그러곤 텅 빈 술병의 주둥이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이한이 저대로 현준의 머리를 내려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건 세인뿐이 아닌 듯했다.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이한의 손끝을 불안하게 주시했다.

    불똥이 튈까 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는 이들도 속속 보였다.

    “됐어요, 그만해요.”

    서둘러 다가간 세인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단단한 이한의 팔을 잡아당기며 세인이 재차 말했다.

    “하지 말아요. 치우기 번거롭단 말이에요.”

    그녀가 힘주어 당기니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이한의 단단한 팔이 쉽게 딸려갔다.

    “정세인 씨, 말릴 걸 말려야지.”

    “저 때문인 거면 하지 말아요. 괜찮으니까.”

    세인이 옅게 웃으며 잡은 팔을 다독였다.

    보는 눈을 생각해서 미소 지은 건데, 서늘하기만 했던 이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유연해졌다.

    “정세인 씨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화가 난 건데.”

    “어쨌든 이런 식으로 해결할 일 아니에요.”

    “그럼 저거한테 사과부터 받고.”

    “괜찮다고 말했잖아요. 그만하라고요.”

    세인이 속삭이며 자꾸만 상황을 극적으로 몰아가는 이한을 탓했다.

    사과, 그게 뭐라고.

    세인으로서는 들어도 그만, 못 들어도 그만이었다.

    여기서 일을 크게 키우면 더블나인의 책임자인 세인이 책임을 떠안게 될 터였다.

    또한 그들이 하는 말은 틀린 게 없을지도 몰랐다.

    “이딴 거에 익숙해져서 어쩌자고.”

    “맞아요. 익숙해졌어요. 그래서 별로 아무렇지 않아요. 굳이 화낼 일도 아니라고요.”

    세인은 정말 괜찮다는 듯 입꼬리를 힘주어 올렸다.

    그러곤 이한의 손에 들린 술병을 뺏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아무렇지가 않아?”

    되묻는 이한의 목소리가 웃음에 잠겨 있었다. 그게 꼭 아까보다 화가 더 난 것 같았다.

    잘못 건드렸나?

    이한의 성격이 보통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제게만 약했던 남자.

    세인은 뒤늦게 사과를 듣고 끝내는 게 빠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는 눈이 너무 많았고, 지금으로선 고집스러운 이한을 꺾을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사과받고 빨리 끝내자.

    크게 심호흡한 세인이 현준을 향해 말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해.”

    “아, 어…… 그래.”

    현준은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은지 사태 파악을 마친 얼굴이었다.

    그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사과를 해왔다.

    “미안. 미안하다, 야.”

    바라지도 않은 사과를 받는 이 상황이 조금 웃기달까, 허탈했다.

    “세인아, 오빠는 그냥 장난이었지. 우리가 그 정도 장난도 못 할 사이야? 너랑 나랑 얼굴을 봤어도 몇 번을 봤는데…… 그러니까 기분 상했다면 풀어라.”

    친근감 섞인 목소리를 내며 현준이 살려 달란 눈빛을 애절하게도 보내왔다.

    이한에게 버림받은 세인을 두고 수도 없이 입방아를 찧어댈 땐 언제고, 금세 넙죽 엎드리는 꼴이라니.

    이한은 이런 남자였다.

    어딜 가든 지배자가 되고,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완벽한 갑이 되는 남자.

    그래서 세인은 그가 첫사랑이라는 이유까지 더해서, 그와의 결혼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한이 혼자 떠나겠다고 얘기했을 때도 마음 한구석으론 그럼 그렇지, 하고 수긍했다.

    알콩달콩 행복한 신혼 생활을 할 거란 약간의 기대감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한은 만만한 아내가 필요했을 뿐이고, 세인은 적격자로 발탁됐다.

    혜인에게 정신이 팔린 세인이야말로, 이한에게 매달리지 않을 좋은 신붓감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한이 뭐라도 되는 양 편드는 게, 참으로 의아했다.

    “사과받았으니, 이제 된 것 같네요.”

    세인이 이한을 보며 생긋 웃었다.

    “억지로 웃는 건 언제 배웠습니까?”

    이한이 낮은 음성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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