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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혼-6화 (6/95)
  • 두 번째 신혼 6화

    사과.

    이한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던 단어였다.

    그가 잘못했다고 인정한다는 뜻인 걸까.

    “그 전에 한 번만 안아 보면 안 되나. 겨우 참고 있는데, 손이 먼저 나가면 안 되잖아.”

    “무슨 의미예요?”

    “말 그대로 안고 싶단 소립니다.”

    세인은 커다란 눈동자와 함께 머리를 굴려 보았다.

    정말 서이한 맞나?

    사람이 변하는 건 죽을 때가 다 되어서라던데…….

    세인이 설마 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큰 병에…… 잠깐만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세인이 손을 들어 이한의 대답을 잠시 막았다.

    충분히 심호흡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해 줘요. 서 전무님, 혹시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았어요?”

    진심으로 묻는 투에 이한의 눈썹이 실룩였다. 이어 잠시 침묵한 그가 하, 하고 숨을 터뜨렸다.

    “그런 거면, 안아줄 건가.”

    “아닌, 아닌 거죠?”

    “멀쩡한 사람 병자 만들 만큼 내가 싫나?”

    다시금 웃고 있는 이한에게서 시한부의 고뇌는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재미없는 장난이었던 걸까.

    힘이 쭉 빠진 세인은 이런 식으로 이한 때문에 감정을 소모하느니, 늦어버린 퇴근을 조금이나마 앞당기는 게 낫단 생각을 했다.

    마침 세인을 향해 다가온 부하 직원이 고개를 숙여 왔다.

    “정 지배인님, 아가씨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갈게요. 바로 퇴근할 거니까 사무실 문단속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돌아서려는 세인의 뒤로 이한의 목소리가 들러붙었다.

    “그렇게 가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건데.”

    “유치한 저주는 사양할게요.”

    “하던 얘긴 마무리 짓고 가야지.”

    “용건 있으면 정식으로 미팅 요청하세요.”

    말을 마친 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

    억울했다.

    긴 시간 상처를 치유하고 겨우 아물었다 싶었는데, 이한이 나타나 딱지를 강제로 뜯어내는 형국이었으니.

    그렇게 떠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남편 행세야.

    세인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걸음을 빨리했다.

    높은 구두를 신고 황급히 걸으려던 게 문제였을까.

    순간 세인의 발목이 삐끗했고 중심을 잃었다.

    “읏…….”

    벽을 짚고 신음을 삼키고 있자니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날 거라던 이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쁜…… 자식.”

    세인의 목소리 끝이 자잘하게 떨려왔다.

    서이한이 결혼하자면 하고, 헤어져 있자고 하면 쥐 죽은 듯 지내고.

    다시 나타나서 부부 행세를 하면 거기에 맞춰 줘야 하는 건가.

    “하…….”

    이한의 액세서리 중 하나에 불과한 정세인.

    아니. 차라리 액세서리라도 되면 다행이다.

    세인은 이한에게 도움이 되질 못 했다.

    이 결혼으로 득을 본 건 당연히도 세인 쪽이었다.

    탐욕스러운 그녀의 부모는 이한을 통해 사업적 이득과 인맥을 확보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제문의 안주인으로 당당히 지분을 거머쥐라던 부친 정홍춘의 얼굴을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이한과 불화설이 도는 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바로 부모님이었다.

    오늘 로비에서 이한과 실랑이했다는 사실이 부모의 귀에 들어가면, 자초지종을 물어오며 꾸지람을 할 게 분명했다.

    “하아…….”

    세인의 인생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세인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세인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녀는 체념한 얼굴로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언니 혜인의 객실이 보였다.

    세인은 그 맞은편인 자신의 객실로 향해 카드 키를 스쳐 보안을 해제했다.

    푸근한 호박색 불빛이 세인을 맞이했다.

    세인은 종종 새벽에 출근한단 핑계를 앞세워서 혜인과 방만큼은 따로 사용하고 있었다.

    혜인은 까다로운 성격이었기에, 객실까지 함께 쓴다면 제대로 쉴 시간조차 없을 터였다.

    혜인에겐 미안했으나, 컨디션을 유지해야 그녀를 보살필 수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세인이 분주하게 욕실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동선을 따라 움직여 침실 문을 열었다.

    더블나인의 객실은 이제 집과도 같았다.

    서울 시내에 있는 신혼집은 2주에 한 번쯤 의무적으로 들를 뿐, 길게 머무른 적 없었다.

    신혼집은 세인이 주기적으로 신경 써야 할 커다란 짐 덩어리일 뿐이었다.

    “읏…….”

    급하게 걷다 보니 발목에 다시 통증이 일었다.

    이맛살이 찌푸려질 만큼 쩌릿하게 아팠지만, 혜인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세인은 종일 갑갑하게 조여오던 슈트와 구두를 벗어버리곤 따뜻한 물줄기 속으로 몸을 맡겼다.

    화장을 지우거나 머리를 감을 시간이 없었기에 급히 몸만 씻고 나왔다.

    옷장을 열어 편한 옷을 꺼내 들었다.

    직장과 주거지가 한곳에 있는 세인은 온 오프를 확실히 나누기 위해서 퇴근 후에는 일부러 캐주얼한 옷을 입는 편이었다.

    부총지배인이라는 직함을 내려놔야 여가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기에.

    세인은 쇼트 팬츠에 후드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풀어 모자를 눌러썼다.

    서둘러 혜인의 방으로 향하자, 이미 준비를 마친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컬이 들어간 단발머리와 푸른빛의 원피스가 어울리는 단아한 미인.

    두 살 위의 언니, 혜인이었다.

    세인은 한 시간 넘게 기다렸을 혜인에게 사과부터 건넸다.

    “늦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너는 항상 이래. 늦는다고 전하는 게 많이 어렵니?”

    직원을 보내 늦을 거란 말을 전하긴 했으나, 7시까지 오겠단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할 말은 없었다.

    “미안해. 도중에 일이 생겼어.”

    이한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착잡해졌다.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 줘야지. 넌 밖에서 있으니 모르겠지만, 기다리는 나는 1분이 1시간 같아.”

    “알지.”

    “알긴 뭘 알아. 나도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으면 너 안 기다려.”

    혜인의 뒤로 다가서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세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해, 언니. 지금 얼른 나갈게.”

    혜인은 화났다는 것을 알리듯 대꾸가 없었다.

    그런 혜인을 의식해 세인은 일부러 밝은 콧노래를 불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지하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속도 빠른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을 리조트 클럽으로 데려다주었다.

    리조트의 지하에 있는 클럽은 젊은 회원들이 주로 찾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가벼운 카드 게임과 술을 즐기며 하룻밤 상대를 물색하기도 하는 혈기 넘치는 공간.

    바로 위층엔 카지노도 있어 우르르 몰려가 흥청망청 돈을 쓰기도 했다.

    사람과 술자리,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는 혜인의 성향 덕에 퇴근 후엔 꼭 클럽에 들렀다.

    매일같이 클럽에 방문하는 일을 간병인 이모님께 맡길 수는 없었기에 늘 세인이 동행했다.

    거의 아는 얼굴이었지만 종종 새 회원들이 유입되곤 했다.

    오늘 만날 이들도 얼마 전에 해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재벌 3세 무리였다.

    혜인은 새 정보를 물어오는 그들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이젠 제법 익숙한 얼굴들을 앞에 두고서 세인이 휠체어를 멈추었다.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걱정 없이 놀고먹는 족속들.

    물론 세인도 부족한 것 없이 자랐기에 그들을 비난할 처지는 아니었다.

    둥근 테이블을 두고 포커가 한창이었다. 그 주변에서 술을 즐기는 무리도 함께였다.

    “오늘은 좀 늦었네?”

    이 무리의 리더 격인 강현준이 카드로 패를 돌리며 말했다.

    그는 세인에게 종종 더러운 추파를 던지는, 겉만 번지르르한 저급한 남자였다.

    다행히 이런 일엔 인이 박인 세인은 어렵지 않게 현준을 밀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저 눈인사만 하고 혜인의 휠체어를 그들과 더 가까운 곳에 세웠다.

    “나도 줄래?”

    혜인이 빈 잔을 눈짓하며 빙그레 웃자,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남자 하나가 술병의 주둥이를 기울였다.

    혜인은 제 몫의 술잔이 위태롭게 출렁이는 것을 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넘쳐, 형배야.”

    “누나 많이 마시라고요. 이게 다 제 마음이에요.”

    “마음 한번 요란하네?”

    혜인은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다.

    일정한 선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는 세인과는 성향이 달랐다.

    다만 가끔 혜인을 상대로 질 낮게 구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인이 중재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혜인은 지나친 참견이라며 짜증을 부리곤 했다.

    혜인이 금세 무리랑 어울려 술잔을 주고받았고, 세인은 조금 비켜서 바 테이블에 등을 기대고 섰다.

    평소엔 이렇게 옆만 지키고 있으면 달리 할 게 없었다.

    “우리 정 지배인도 마시지?”

    가진 카드를 던져 다이를 선언한 현준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빤한 시선을 보내왔다.

    두툼한 담배를 손에 끼우더니 볼이 홀쭉해지도록 필터를 깊게 빨았다.

    세인은 그의 거만한 작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평일엔 안 마셔. 전에도 말했잖아.”

    퇴근 후엔 직함을 떼고 이들과 어울렸고, 그게 서로 편했다.

    그러나 현준이 듣는 척도 안 하고 다시금 권했다.

    “얘 또 이러네. 빼지 말고 좀 마시지?”

    “난 됐어.”

    “앉기라도 하든가. 정혜인 꽁무니만 졸졸졸, 그거 진짜 별로인 건 아냐? 자꾸 물 흐리잖아.”

    가만히 있는데 무슨 물을 흐린단 말일까.

    “억지 부리지 마.”

    “X나 흐려.”

    오늘 현준은 조금 집요했다.

    그가 소파에 기댔던 등을 띄우더니 직접 아이스 버킷에 손을 뻗었다.

    빅 볼이 온더록스 잔에 투하됐다.

    세인이 꼴꼴 소리를 내며 거칠게 떨어지는 술의 줄기를 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마신다고 말했어.”

    “마시라고 했다.”

    “뭐 잘못 먹었니? 왜 먹기 싫다는 술을 억지로 권해.”

    “너 술 마시는 거 보고 싶으니까?”

    현준이 웃자, 그의 의견에 동조하듯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비웃음이 명백한, 세인을 낮잡아 보는 저질스러운 행태였다.

    그녀가 이 이상 큰 소란을 일으킬 수 없는 위치라는 것을 알고 이용하려는 거다.

    “자자. 정 지배인님, 한잔하시죠.”

    현준이 테이블 위로 온더록스 잔을 턱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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