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나를 죽인 여자의 결말 (7/21)

6장. 나를 죽인 여자의 결말

따사로운 봄볕이 온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포근한 공기 속에서 나비 한 마리가 양 날개를 활짝 편 채 하늘하늘 날아다녔다.

여자는 색색의 꽃밭 위에 앉아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노래를 불렀다. 나는 홀린 듯이 노래의 근원을 향해 걸어갔다.

여자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나를 보며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여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나’였다. 나를 향해 우아하게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은 몽환적이었다.

내게로 천천히 다가온 여자가 내게 아이를 건넸다.

-에스델…….

내가 익히 알고 아끼고 사랑하던 아이가 나를 향해 짧은 팔을 바둥거리고 있었다. 내 아이였다. 내 아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무렵의 모습으로 내게 다시 안겼다.

에스델과 다시 만났다는 기쁨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에스델, 나의 에스델…….

나는 내가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다.

태어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아이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다.

나를 가르쳤던 남자는 내게 아이를 낳고 키우는 법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출산과 육아에 관한 지식이 전무하였던 나는 썩 어설프고 모자란 어머니였다.

내 모자람은 결국 아이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인도했으며 끝내는 아이마저 말도 채 익히지 못한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했다. 그런 내가, 대체 뭐가 좋다고.

-아, 우으!

에스델, 너는 어째서 내게 떨어지지 않으려 이토록 애를 쓰는 거니.

-아우으!

레이몬드도, 에스델도. 나를 세상에서 가장 혐오해야 마땅한 이들이 내게 사랑을 논한다.

나는 보채는 아이의 이마에 달래듯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이가 또다시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방싯방싯 웃을 때마다 옴폭 패이는 볼우물이 이다지도 사랑스러웠다.

아이를 안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여자가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생기 넘치던 여자의 얼굴 위로 점차 짙은 병색이 드리웠다. 앙상하게 마른 몸과 창백한 인상은 죽기 직전 나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내게 독을 건넸던 여자는 나더러 사람의 몰골이 아니라고 하였다. 죽기 직전의 나는 저토록 아픈 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구나.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유일한 삶의 조각들을 모두 잃어버린 채.

아주 뒤늦게, 나는 깨달았다.

어머니의 목숨을 내어 주고 간신히 살아남아 짐승을 자처했던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음을.

혼자 남겨진 ‘나’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한 발짝씩 다가갈 때마다 ‘나’는 한 발짝씩 멀어졌다.

-가지 말아요.

용기를 내어 외치자 ‘나’는 뒷걸음질을 멈추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 주어도 괜찮아요?

내가 감히 나를 사랑하여도 되는 걸까. 멍청하고, 쓸모없고, 고장 난 인형 같은 내가, 마찬가지로 멍청하고, 쓸모없고, 고장 난 인형 같은 나를 감히 사랑하고자 한다.

혐오해야 마땅한 나라면, 그런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일 테니까.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느리게 심호흡을 하며 ‘나’에게 다가갔다. 양 팔을 벌려 안아 주고 싶었으나 한 팔엔 작은 에스델을 안고 있어서 하다못해 남은 손이라도 ‘나’를 향해 뻗었다.

하지만 내 손이 닿는 순간 ‘나’는 투명한 눈물방울이 되어 흩어졌다. 나는 허공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나’의 마지막 흔적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내내 얌전히 안겨 있던 나의 작은 에스델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헉……!”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키니, 황후궁의 내 방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서늘한 겨울이었다.

“……에스델.”

나의 작은 에스델이 머물다 간 가슴팍에서 그리움의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에스델을 떠올리며 흐릿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에스델이 다녀간 그 포근한 봄날의 꿈은 내게 굉장한 위로가 되었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는데, 침대 머리맡에 불편한 앉아 잠들어 있는 레이몬드가 보였다.

동시에 악을 써 대며 그를 밀어내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다 괜찮다고, 나는 다 괜찮다고.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네가 있어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밤공기를 울리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나를 감싸며 귓가로 내려앉았다. 나는 느리게 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이불 끝을 말아 쥐었다.

‘레이몬드도 시간을 거슬러 왔어. 나와 카일로스와 마찬가지로.’

뒤늦게 파악된 진실 속에서 그간 그가 보였던 행동들을 조금씩 납득할 수 있었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와 달라진 그의 행보는 단순히 나와 카일로스가 전과 달리 행동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레이몬드 또한 그 사라진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다.

‘사랑해, 클로이.’

그 한마디가 내 가슴 위로 단단히 박혀 뿌리를 내렸다. 꿈틀거리며 싹을 틔워 나가는 그 이질적인 감각을 도무지 뽑아 낼 수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긴 심호흡을 하며 미약하게 뛰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그의 사랑은 감히 내가 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의 고백에 설레서는 안 되었다. 그에게 나는, 영원한 죄인이니까.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걸 기억하면서 나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고백을 받은 직후에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는 아마도 레이몬드일 것이다. 앉은 채로 잠든 그의 모습이 불편해 보였다.

나는 도무지 레이몬드를 이해할 수 없어서 입술 끝을 깨물었다. 나는 그를 배신하고 파멸로 이끌었는데, 당연히 나를 미워해야 옳지 않나. 내가 나를 짓밟고 에스델을 앗아 갔던 카일로스를 증오하는 것처럼.

‘여전히 이상한 남자…….’

고요히 잠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니, 이상하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몸을 비틀며 손을 뻗었다.

내 손끝이 그의 얼굴 위로 닿으려던 순간, 그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아…….”

당황한 나는 황급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을 거두려 했다. 곧바로 내 손목을 붙잡는 레이몬드만 아니었더라면 성공했을 것이다.

“클로이.”

반쯤 잠긴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음색이 묘하게 가슴을 간질였다.

“몸은, 괜찮은가? 아픈 곳은?”

“네, 폐하. 아주 괜찮아요.”

어색하게 답하며 시선을 피하자 내 손목을 움켜잡고 있던 손이 서서히 힘을 풀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내 손을 거두어 이불 아래로 숨겼다.

쿵쾅, 쿵쾅.

그와 닿았던 손목이 화끈거렸다. 묘하게 의식이 돼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가 닿았던 손목을 반대편 손으로 문지르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잡았다.

그에게는 지난밤의 일을 다시 물어보아야 한다. 정말로 그 또한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것이 맞는지.

그러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잠식하고 있어서 나는 차마 입술을 떼지 못하고 이불 위의 하얀 레이스만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시선을 피하지 않아도 돼. 나를 봐, 클로이.”

여전히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목소리로 그가 나를 불렀다. 느리게 고개를 들자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나른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이렇게 나를 봐.”

“…….”

“예쁘군.”

나직하게 울리는 칭찬에 얼굴이 더워졌다. 예쁘다는 말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익숙한 말이었는데도 레이몬드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새삼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목은 괜찮으세요? 어째서 폐하의 침실을 두고 이곳에서 불편하게…….”

“불편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렇게 의자에 앉아서 주무시면 목과 허리가 아프잖아요.”

“나를 걱정하는 건가?”

씨익 말리는 입꼬리가 유난히도 색정적이었다. 레이몬드는 기분 좋게 웃으며 내 정수리 위로 포옥 손바닥을 올렸다.

“덕분에 썩 기분 좋은 아침이야.”

느릿하게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그는 종종 이렇듯 내게 자잘한 스킨십을 하며 함께 아침을 맞이했었다.

“하지만, 클로이. 네가 잊고 있었나 본데, 이래 봬도 난 아스타 제국 최고의 전사야. 전장에서 지낼 적에는 차가운 노상에서 이보다 더 불편한 자세로 밤을 샌 적이 허다해.”

“폐하께서요?”

나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아무리 전쟁이라 하나, 그는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다. 대륙에서 제일 고귀한 존재인 그가 일반 군인들과 같이 길가에서 불편한 자세로 밤을 지새우다니. 잘 상상이 안 갔다.

“물론. 전장의 군인에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안락한 축복이지. 그러니까 내 말은 이 정도는 전혀 내게 불편하지 않으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

그는 내가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나 보다. 어쩐지 민망해져서 이불 아래로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데 그가 내게 불쑥 손을 보여 달라 했다.

“대충 치료하긴 했는데 그래도 내가 의사는 아니라서. 아침 식사 후에 황궁의를 보내 주지.”

“괘, 괜찮아요. 고작 이 정도 상처로 황궁의를 부르는 건 지나친 처사예요.”

“네가 아프면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그래도 거절할 텐가?”

“……치료를 받도록 할게요.”

레이몬드는 내가 자신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폐하께서도 시간을 거슬러 오신 건가요?”

말하는 김에 나는 내내 피하고 싶었지만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그러자 레이몬드가 애틋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쁘게도, 너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

“…….”

이미 어젯밤에 한 번 알게 되었던 진실이 맑은 이성 속에서 다시 한번 확인 사살을 받게 되었다.

“제가 폐하였다면 그 기회를 이용해 숙부님과 제게 복수를 했을 거예요.”

“이미 너를 용서한 지 오래야.”

“이미 한 번 폐하를 배신한 여잔데, 저를 어떻게 믿으시고요? 제가 또 폐하를 배신할지도 몰라요.”

지극히 논리적인 나의 말에 레이몬드가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나를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클로이, 나는 네가 나를 밀어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똑바로 마주쳐오는 시선을 받아내며, 나 또한 곧은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는 흐리게 웃으며 두 눈을 휘었다.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하겠지. 그래서 나는 더욱더 루드비히 대공을 용서할 수가 없어. 너 역시 그 사람에 의한 피해자인데, 너는 스스로를 가해자라 여기고 있어서.”

이쯤 되면 정말로 레이몬드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게 콩깍지가 단단히 씐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에게만큼은 가해자일 수밖에 없는 나를 이렇게까지 감싸 줄 수 없다.

“저는 피해자가 아니에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가엾은 여자일 뿐이더라도, 폐하께만큼은 악독하고 못된 여자여야 해요. 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충분히 알고 있었어요. 폐하를 대공성으로 데리고 가는 것으로 폐하께서 위험해질 것을 알고 있었어요. 알면서 그렇게 했다고요.”

시간을 거스르기 전의 나는 레이몬드와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보낸 시간은 기억에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 직전, 대공성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내내 나를 보며 즐거이 미소 짓던 그의 얼굴만은 여전히 기억에 남았다.

당시의 나는 그를 어리석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이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따라 나서는 바보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가장 어리석고 바보 같은 것은 나였는데, 그것도 모르고서.

“너는 열두 살 때 루드비히 대공에게 거두어졌다고 했지. 그리고 루드비히 대공은 너를 자신의 말에 맹목적으로 따르게끔 길들였고.”

“그렇다고 해서 폐하께 한 행동이 제 잘못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그러니 네 행동이 더 이상 잘못이 아닐 수 있도록, 그 남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내가 도울 거야.”

그런다고 해서 내 잘못이 없어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비록 시간을 거슬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엄연히 내 기억 속에,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일인데.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레이몬드는 내게 과분한 남자라는 사실이 뼛속 깊이 나를 일깨웠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젊은 황제라고 부르는 걸까. 이렇게 관대하고 다정한 남자인데. 나 같은 여자가 감히 우러러보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은, 그런 남자인데.

“다행이야. 상처가 없어서.”

레이몬드는 느리게 손을 뻗어 내 목덜미 부근을 매만졌다. 찌푸려진 그의 눈가와 조심스럽게 더듬는 손길로 보아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카일로스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그 시간 말이다.

“당연한 말씀을요. 죽음마저 되돌아왔는걸요.”

“죽음?”

내 말에 멈칫,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너도 죽음을 겪었나, 클로이?”

“……당연하신 말씀을. 사람은 누구나 죽잖아요.”

그의 예리한 질문에 나는 침착을 가장하며 애매하게 논지를 흐렸다. 레이몬드는 집요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뜯어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무언갈 숨기고 있군.”

나는 그 말에 긍정하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레이몬드는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손을 뗐다.

“굉장히 이상해. 너는 루드비히 대공이 네 목에 칼을 세우고 널 죽일 뻔했는데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지. 그런 네가 시간을 거슬러 온 직후부터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벗어나고, 복수하고 싶다 말하고 있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무거운 한숨 소리에 내 마음도 함께 무거워졌다.

레이몬드는 그의 죽음 이후 시간을 모른다. 우리의 작은 에스델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물론 나는 그것을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에스델을 잃은 슬픔은 나 한 명이 감당하는 것으로 족하니까.

“그래서 나는 더 불안한 거야. 나의 죽음 이후 너의 삶이 어땠기에, 네가 이렇게 변한 건지.”

“……제가 많이 변했나요?”

이상한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카일로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물론.”

레이몬드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 남자로부터 벗어나고자,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잖아.”

“어쩌면 의미 없는 몸부림일지도 몰라요.”

나는 그를 따라 쓰게 웃었다.

그토록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는데도, 지난 밤 나는 카일로스의 그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을 깨달았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잘 생각해 봐, 클로이. 대공성에 있어야 할 네가 지금 그 남자로부터 도망쳐 황궁에까지 숨어들었지. 그리고 어제는 아주 훌륭하게 여러 귀족들 앞에서 네가 그 남자에게서 독립하였음을 보여 주었어. 이제 그 남자는 더 이상 네 보호자라는 지위로 너를 휘두르지 못해.”

잠자코 그의 말을 듣던 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모두 폐하의 덕분이지요.”

하지만 그건 모두 레이몬드와 다리아의 합작이었다. 내 힘으로 벗어난 게 아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데 말이야, 클로이.”

레이몬드가 내 생각을 꿰뚫어 보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이렇게 나를 잘 아는 남자가 왜 그때는 그렇게 나를 몰랐을까.

……아니,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는 거슬러 온 시간 속에도 어렴풋이 나에 대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일로스에게 맹목적이었던 나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짚어 낸 그의 말을 떠올리자 문득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야, 설마.’

나는 서둘러 그 오싹한 감각을 지워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가 카일로스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그가 나를 곁에 두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과연 그럴까, 마음 깊은 곳에서 또 다시 의혹이 치밀었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레이몬드를 바라봤다.

“네가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내게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도, 루드비히 대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거짓을 제안했던 것도 모두 너였어. 그런 너의 노력마저 헛된 것으로 치부하지 마.”

나를 설득하는 레이몬드의 얼굴이 조금 필사적으로 보였다면, 그것 또한 나의 착각일까.

“너는 지금도 충분히 노력하고 있잖아.”

어째서 그는 항상 내게 위로가 되는 말들만 골라서 해 주는 걸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폐하.”

이제는 그만 울고 싶었다. 레이몬드에게 매번 눈물만 흘리는 여자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신경 쓰는 나의 모순이 참 우스웠다.

* * *

레이몬드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스티가 달려왔다.

“클로이, 클로이! 방금 황제 폐하께서 다녀간 것 맞니? 설마 폐하와 밤을 보낸 거야?”

베스티는 상당히 흥분한 얼굴로 잔뜩 격양이 되어 말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베스티.”

나는 난처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 순간 베스티가 얼룩덜룩한 상처가 남은 내 손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외쳤다.

“너, 손이 왜 이래!”

“아…… 그게, 어젯밤에 실수로 발을 헛디뎠는데 넘어지는 순간 손을 잘못 짚었지 뭐예요.”

멍청한 클로이 가넷슈! 손을 다쳤는데 넘어졌다고 핑계를 대면 어떡해!

“아, 그렇구나. 어떡해, 많이 아팠겠다.”

순진한 베스티는 다행히 그 말을 믿어 주었다. 만약 눈치 빠른 다리아였더라면 절대 나의 어설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음, 아무튼 그래서 폐하께서 상처를 확인하러 아침에 잠깐 들르신 거예요. 어제 넘어졌을 때, 폐하께서도 함께 계셨거든요.”

“폐하께서 그렇게 세심하신 분이란 말이야? 이제까지 다리아 언니의 시녀들에게 항상 냉담하신 분이었는데…….”

“제가 넘어진 게 폐하 때문이었거든요. 어…… 그러니까 제가 잠시 바람을 쐬려고 나갔다가 폐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그 앞에서 넘어져 버렸어요.”

베스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아무 말이나 지어내고 말았다.

“뭐? 그럼 네가 바로 앞에서 넘어졌는데도 폐하께선 널 붙잡아 주지 않으신 거야?”

베스티는 그럼 그렇지,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레이몬드의 흉을 봤다. 나는 레이몬드가 얼마나 상냥한 남자인지 역설하고 싶은 마음을 꾸욱 억눌러야 했다.

미안해요, 레이몬드. 그렇지만 나와 엮여 염문설에 휩싸이는 것보다는 조금 무정하고 매너 없는 남자가 되는 편이 당신에게도 더 나은 길일 거예요.

“그래도 이렇게 걱정이 되셔서 아침에 찾아와 주시고 황궁의까지 보내 주신다 하셨는걸요.”

“이런 걸 두고 병 주고 약 주는 거라고 하는 거야!”

마음속으로 레이몬드에게 잔뜩 미안한 마음을 담아 사죄한 나는 어떻게든 그를 변호하고자 하였지만, 베스티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화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가녀린 레이디가 눈앞에서 쓰러지는데 붙잡아 주지도 않고!”

나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베스티가 귀여워 가만히 웃으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레이몬드에게는 정말 미안했지만, 다행히 베스티의 의심은 피해간 것 같았다.

“그럼 어제 중간에 사라져 버린 것도 다쳐서 그런 거였구나?”

“네, 드레스가 모두 엉망이 되어 버려서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이번에는 교묘한 진실을 말하며 어제의 알리바이를 꾸며 댔다.

“그런 거면 나한테 알려 주지. 내 방엔 깨끗한 새 드레스들이 많이 있었단 말이야.”

“시간도 너무 늦었고, 한창 재미있게 무도회를 즐기던 베스티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귀찮다니! 그렇게 말하지 마!”

베스티가 이번에는 정말로 화를 내며 말했다.

“넌 내가 무려 이름을 허락한 내 친구인걸.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지금도 충분히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더 화를 내면 얼마나 더 귀여울까.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흠흠, 아무튼 클로이. 네가 폐하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 해서 하는 말인데…….”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베스티가 아무도 없는 방 안을 휙휙 살피며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흡사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를 연상케 하는 모습에 또다시 웃음이 나려 했다.

“어제 봤던 우리 오빠, 어때?”

“네?”

그러나 이어진 베스티의 뜬금없는 물음에 내 안면에선 웃음이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음, 우리 오빠가 네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너와 따로 만날 수 있을까 물어 보더라고.”

“캐롤라인 소공작님께서요?”

“네가 부담스럽다면 절대 억지로 권하진 않을게!”

급격히 굳어진 내 얼굴을 본 베스티가 황급히 양손을 휘휘 저었다.

“조금, 부담스러워요.”

사실은 굉장히 부담스럽지만 최대한 순화한 표현으로 대답했다.

나는 내 처지를 잘 알고 있다. 루드비히 대공가의 방계 출신 사생아인 내게는 지방의 소귀족을 만나는 것도 굉장히 과분했다. 그런 내게 제국의 몇 안 되는 공작 가문인 캐롤라인 가문의 후계자라니. 당연하게도 아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캐롤라인 소공작 또한 그런 나의 처지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신년 무도회 이전 카일로스가 부풀려 놓은 나에 관한 소문 때문이겠지.

“으음, 그래. 불편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해, 클로이”

어쩐지 풀이 죽어 보이는 베스티의 모습에 너무 단호하게 거절했나 싶었지만, 그래도 대답을 바꿀 의사는 없었다.

“괜찮아요, 베스티. 그보다 빈센트 백작 영식께 편지를 써야 하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손이 다쳐서 혼자서는 힘들거든요.”

“응응, 물론이지!”

나는 어젯밤에 제대로 인사를 못하고 헤어진 빈센트 백작 영식에게 베스티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보냈다.

내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젬마 부인의 부탁으로 격이 맞지 않는 나의 파트너가 되어 준 빈센트 영식에게는 충분히 무례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조금 뒤에 레이몬드가 보낸 황궁의가 찾아 왔고, 내가 다쳤단 소식을 접한 다리아가 내 방에 찾아와 내 손의 상처를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어쩌다 다쳤냐고 물어보면 알려 줄 거니?”

“클로이는 어젯밤에 발을 헛디뎌서 다쳤대요!”

다리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의자에 앉자, 곧바로 베스티가 냉큼 대답했다.

“발을 헛디뎠다고?”

눈치 빠른 다리아는 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곧바로 알아채고는 두 눈을 세모꼴로 떴다.

“그런데 세상에, 폐하께서 그 앞에 있었는데 클로이가 넘어지는 걸 붙잡아 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지 뭐예요?”

“흐음…….”

다리아는 내게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으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루드비히 대공이 오늘 아침부터 계속 황후궁에 방문 신청을 하고 있어. 너를 만나고 싶다더군, 클로이.”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내 거짓을 알게 된 카일로스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이렇게 곧바로 접근해 올 줄은 몰랐다.

“일단은 너의 의사를 알 수 없어 그의 방문 신청을 거절했어. 네가 원한다면 이대로 계속 거절할 수도 있는데.”

“아니요, 폐하.”

생각을 정리한 나는 망설임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숙부님과 만나게 해 주세요.”

물론 이대로 레이몬드와 다리아가 만들어 준 황궁이라는 벽 뒤에 숨어 영영 카일로스를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하기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너는 지금도 충분히 노력하고 있잖아.’

오늘 아침, 레이몬드가 내게 해 주었던 말이 내 마음속 불씨를 당겼다. 레이몬드에게 정말로 보여 주고 싶었다. 내가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어차피 부딪쳐야 한다면 이제는 그들의 도움이 아닌 나의 힘으로 맞설 차례였다. 더 이상 그 남자 때문에 흔들리지 않도록, 나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괜찮겠니?”

“네, 물론이요.”

조심스러운 다리아의 물음에 나는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씩씩하게 답했다.

“그저, 제 숙부님을 만나는 일인 걸요.”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남자였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남자도 아니었다. 그저 형식적인 먼 친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남자였다.

“네가 괜찮다면 그의 방문을 허락하도록 하마. 그래도 오늘 당장은 무리겠지? 손도 불편하고…….”

“언제든 상관없어요.”

“음, 그래…….”

다리아는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나는 작은 응접실에서 카일로스를 맞이했다.

카일로스는 언제나 자기 관리에 철저한 남자였는데, 오늘의 그는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제대로 면도를 하지 않아 거뭇거뭇한 입 주위와 창백한 안색이 어제 무도회장에서의 그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어서 오세요, 숙부님.”

나는 언젠가 그가 내게 가르쳐 주었던 매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그에게 인사했다. 마치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가족이 아님을 명시하며.

이미 어제 한차례 그와 부딪쳤기 때문일까. 혹은 최악을 보았기 때문일까. 카일로스의 앞에서 훨씬 수월하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클로이…….”

고통스러운 척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에 신물이 났다. 그는 나를 정말로 바보로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 표정으로, 그런 목소리로 날 대하면 내가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제 뵙고 만 하루만이네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타인을 대하듯, 부드럽지만 선을 긋는 화법 또한 그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상대를 앞에 두고 감정을 죽이는 법도,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워 나를 조절하는 것도.

모두 언젠가 쓰임이 있을 거라며 그가 알려 준 것들이었다.

그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나는 내가 그것들을 그에게 사용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어제는…….”

어제의 일을 다시 떠올리는 그의 미간이 가느다랗게 좁혀지며 잔주름이 잡혔다.

“왜 그렇게 가 버렸지?”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꼭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추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또한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다시금 부드럽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투를 달리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 나온 게 아니었니? 네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그렇게 달아나 버려서 조금…… 놀랐어.”

“그 여자는 누구예요?”

“…….”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하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거칠게 크로바트를 풀어헤쳤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여자야. 그 여자는 잊어버려, 클로이.”

“그 여자가 내 대역인가요?”

조소를 감추지 못하며 묻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표정을 굳혔다.

“대역이라니?”

“로잘라인 후작 영애에게 들었어요. 이미, 대역을 마련하셨다고요.”

“후작 영애가, 네게 그런 말을 했다고?”

카일로스는 느리게 두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저것 또한 가증스러운 연기의 일부일까. 나는 두 눈에 힘을 잔뜩 주며 그의 저의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는 내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섬뜩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 더욱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숙부님께서 저를 찾는단 말에 굉장히 놀랐어요. 이제 대역도 있으니 더 이상 제가 필요 없을 텐데요.”

“그렇지 않아, 클로이. 후작 영애의 말은 모두 잊어버려. 그 여자가 무슨 의도로 네게 그런 말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절대 그런 게 아니야.”

어금니가 바드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몇 번을 보아도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금의 카일로스는 내가 알던 그와 굉장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실 말씀은 그것이 전부인가요?”

“너를 데리러 왔어.”

카일로스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흠칫 뒤로 물러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저는 숙부님과 함께 돌아갈 생각이 없어요.”

“너만 동의하면 방법은 충분히 있어. 같이 돌아가자, 클로이.”

“방금 못 들으셨나요? 저는 숙부님과 함께 있고 싶지 않다고요.”

“기억나? 그해 첫 눈이 내리던 날이었어. 불에 타 가라앉은 저택 앞에서 너는 예쁘장한 얼굴 위로 새카만 잿가루를 묻히고 있었지.”

내 말은 깡그리 무시하고, 카일로스는 오랜 추억에 잠긴 얼굴로 느른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혼자 남은 너를 거둔 건 나였어. 그리고 우린 꽤 행복했지. 오직 둘만이 가족이란 테두리에 걸려 있었던 대공성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스산하게 웃는 모습에 한기가 돌았다. 그는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루드비히 대공 전하.”

조금 더, 확실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당신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당신을 증오한다던 내 말을 기억하지 못하나요?”

“클로이!”

“다시 한번 짚어 드릴게요. 나는 당신을 증오하고, 혐오해요. 당신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아서 폐하께 부탁을 했어요. 거짓으로 폐하의 아이를 임신한 시늉을 해서 당신을 벗어났고, 당신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이곳으로 피신했죠. 내가, 모두 내가 그랬어요. 내 의지로 당신을 떠난 거라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

침착하게 상황을 되짚어 주는 나와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카일로스. 우리 두 사람의 극명한 대비가 지금 이 상황을 더욱 해괴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내게 상대보다 먼저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누누이 일러주던 이가 바로 카일로스 아니었나.

“네가 그랬을 리가 없다는 걸 내가 아는데, 어째서 자꾸 거짓말을 하는 거야?”

시뻘겋게 핏대가 선 눈으로 카일로스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내 너머의 어딘가를 노려보며 미친 사람처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너는 착한 아이잖아, 클로이. 언제나 내 말에 순응했잖아. 레이몬드, 그 놈 때문이지? 그 놈이 아니라면 네가 변할 리가 없는데. 그가 네게 뭐라 속삭였니? 황제가 너를 사랑한다고 했니?”

언성을 높였다가 곧바로 소리를 낮추어 상냥한 말씨로 속삭이는 모양이 굉장히 섬뜩했다. 절대 그의 앞에서 당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돌변한 그의 모습에 두려움이 커졌는지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어 댔다.

“우스운 소리, 클로이. 너도 알잖아. 황제는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내가 만들어 낸 너의 모습을 사랑하는 거야.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어떤 여자든 내가 만들어 내보였을 여자를 사랑했을 거야.”

나는 숨을 꼴깍 삼키며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나 또한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논점을 잘못 잡았다. 내가 그를 떠난 건 결코 레이몬드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 그의 거짓된 사랑 놀음에 휩싸여 이러는 거라면…….”

“폐하 때문이 아니에요.”

느리게 심호흡을 하고서 나는 그를 쏘아보았다. 초조하고 날카로운 인상으로 변해 버린 그 얼굴을 노려보며 나는 나의 온 증오를 담아 한 글자씩 또박또박 짓씹듯 꺼내 뱉었다.

“당신이 에스델을 죽인 시점부터 우리는 절대 다시 이어질 수 없었어.”

“…….”

깜빡, 깜빡. 그의 두 눈이 느리게 감겼다 뜨이기를 반복했다.

“에스델…….”

그는 마치 잊었던 이름을 다시 떠올리듯 어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그래, 에스델! 에스델!”

내 작은 에스델의 이름을 반복해서 외치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감히, 어떻게 그가 내 앞에서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한마디 하려던 나는 곧바로 그의 잇새로 터진 광기 어린 웃음소리에 멈칫하고 말았다.

“하하하, 에스델! 그래, 다 그 애 때문이었어!”

눈물을 찔끔 흘리며 웃어 재끼는 그가 슬금슬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사람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위를 살필 때였다.

“그때, 그 앨 더 확실히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순식간에 내 몸을 감싼 분노가 두려움을 밀어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내 작은 에스델을 그렇게 죽였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내가, 그 앨 죽였다고?”

돌연 웃음을 뚝 멈춘 카일로스가 사납게 되물었다.

“대체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니? 그때도 그렇게 물었었지. 정말로 ‘내가’ 에스델을 죽였냐고.”

“그 말은 당신이 에스델을…… 죽이지 않았다는 소린가요?”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 앨 제대로 죽이지 못한 거야.”

잔인한 내용이 담긴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카일로스는 키득키득 웃어 댔다.

“네게 황제의 아이를 낳으라고 한 것이 실수였어. 쓸데없이 가르치지도 않은 모성을 알게 되는 바람에 모든 게 꼬여 버렸어.”

“제대로 말씀해 주세요! 에스델을 정말로 죽이지 않았어요?”

다급한 외침에 가까운 물음에 카일로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 입을 뗐다.

“이걸 알려서 나를 향한 네 원망이 줄어든다면……. 그래, 난 그 앨 죽이지 않았어.”

“그럼 내가 죽었을 때…….”

“그때도 물론 살아 있었지. 그 이후로도, 아주 오래오래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나를 끝까지 괴롭혔지.”

“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내가 죽기 직전, 나를 죽이러 왔던 엘리자베스 로잘라인은 내게 에스델이 이미 죽었음을 암시했다. 어째서 그 여자는 내게 거짓말을 한 걸까.

하긴, 굳이 애써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그녀는 언제나 내 존재를 거슬려 했으니까.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인가. 네게 그 아이가 죽었다고 말한 사람이?”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았는데, 카일로스는 곧바로 정답에 근접한 결론을 내렸다.

“여러 가지로 참 거슬리는 여자로군.”

한때는 제게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라고 치켜세웠던 여자를 두고 그는 스산한 살기를 내뿜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는 내 관심 밖이었기에 딱히 대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려 주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또박또박 내뱉은 나의 말에 그가 테이블을 치우고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잘못?”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장신의 남자와 대치해야 하는 상황은, 더욱이 그 남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조건이 더해졌을 때의 상황은 내게 굉장한 두려움을 선사했다.

“클로이.”

카일로스는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내가 앉아 있던 의자의 손잡이를 붙들었다.

“나는 너도, 네 아이도 죽이지 않았어.”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벽시계를 힐긋 보았다.

내가 시간을 가늠하는 동안 그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양손으로 내 오른손을 가져가 움켜쥐었다. 저릿, 하며 느껴지는 아픔에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애원하듯 변명했다.

“우리 사이에 있던 모든 일들이 오해였잖니.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그 여자를 죽여 줄까? 그 여자의 목을 베어서 네게 가져다줄게. 이미 한 번 죽였으니까, 두 번은 더할 나위 없이 쉽지.”

“그 여자를…… 죽였다고요?”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모르겠지만, 카일로스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네게 독을 건넨 여자잖아. 그래서 내가 죽였어. 네 복수를 하려고 내가 죽였어.”

진심으로 두려운 남자였다. 황제가 되기 위해 마음껏 이용해 놓고서, 가치가 떨어지니 그 여자를 죽였다니.

심지어 그 여자는 그의 아이를 배고 있다 했는데!

“처음부터 그 여자가 없었더라면 달라졌을까? 우리 사이에 그 여자가 없었더라면…….”

엘리자베스 로잘라인은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여자였다. 나는 감히 우러러볼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의 사랑을 받았던 여자였다.

이제와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지난 삶에서 그 여자가 내게 가지는 크기는 굉장했다.

그러나 그 여자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그가 황제가 되는데 바쳐진 제물이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내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커서 더 이상 대꾸할 말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카일로스 루드비히……. 당신에게 있어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쉽게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것이었나.

“그래. 기다려, 클로이. 조금만 기다려 주면…… 그 여자의 목을 가져와 네게 바칠게. 그땐 네가 나를 다시 돌아봐 주겠지. 그렇지, 클로이?”

“…….”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벽에 달린 앙증맞은 나무집 모양의 시계 속에서 뻐꾸기가 나와 시간을 알렸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그쳤을 때, 나는 카일로스의 손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루드비히 대공 전하, 당신이 그 여자를 어떻게 하든 나는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런다 한들 당신이 오랜 기간 나를 농락하고, 기만하고,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농락이 아니었어! 나는……! 난……!”

카일로스는 말문이 막히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적막한 대치 상황 속에서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나요, 루드비히 대공?”

우아한 걸음걸이로 들어선 다리아가 나와 카일로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황후, 폐하…….”

카일로스가 짓씹듯이 그녀를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아는 흐트러지고 구겨진 그의 차림새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당신에게 내 시녀를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빼앗긴 것 같아서요. 클로이는 이후 일정이 있어서 이만 내가 다시 데려가야겠네요.”

“…….”

“대화는 잘 끝났니, 클로이?”

카일로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다리아는 자연스럽게 내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네, 황후 폐하. 덕분에요.”

나는 물론 방긋 웃으며 그녀의 말에 화답했다.

“그것 참 잘되었구나. 그럼 루드비히 대공, 당신의 마차에 기별을 보내 둘 테니, 조금 쉬다가 나가도록 하세요.”

다리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카일로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곤 나를 데리고 곧바로 응접실 바깥으로 나왔다.

“정말 이야기가 잘 끝난 게 맞니?”

심상찮았던 방 안의 분위기를 감지하였을 그녀가 내게 물었다.

“아니요.”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아마 또 다시 찾아올 거예요.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거든요.”

문득, 어쩌면 그가 다시 찾아올 때는 정말로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목을 들고 올지도 모른다는, 아주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섬뜩해져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것 참 큰일이네.”

다리아는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감했다.

카일로스는 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그가 나를 포기하거나, 혹은 그가 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때까지.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네가 레이몬드와 결혼을 한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텐데. 나는 레이몬드와 이혼을 해서 위자료를 잔뜩 뜯어 낼 수 있으니 좋고, 너는 루드비히 대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어 좋고.”

“그런……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네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게 레이몬드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시간을 거슬러 온 지난 삶에서도 끝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리아는 그 잊힌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 불가능해? 그럼 나와 결혼할래, 클로이?”

“더더욱 불가능한 말씀이세요.”

아스타 제국에서 동성 간의 결혼은 명백히 불법이었다. 그것은 다리아와 이혼한 레이몬드가 나를 황후로 들이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황후 폐하와 함께 마녀로 몰려서 화형당하고 싶지는 않아요.”

“너무하네, 클로이. 나는 널 위해서라면 마녀로 몰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굉장히 영광스러운 말씀이지만, 불에 타 죽는 것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하자 다리아가 두 눈을 샐쭉하니 떴다.

“실망이야. 내 사랑을 이렇게 배신하다니.”

“폐하의 일방적인 짝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배신이라고 표현하긴 좀 그렇지요.”

“이제 보니, 클로이. 너 참 말을 잘하는구나. 처음 만났을 때는 계속 눈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는데.”

“그때는 황후 폐하가 굉장히 무서웠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막 시간을 거슬렀을 때의 내 기억 속 다리아는 친족마저 무참하게 도륙하는 악명 높은 여자가 아니었던가.

“이제는 안 무섭다는 거야?”

“음…….”

“내가 너무 잘해 줬나 봐. 이제는 무서워하지도 않고, 내 사랑도 거부하고…….”

대답을 회피하자 다리아가 잔뜩 토라진 말투로 불평을 해 댔다.

“처음에 봤을 때가 귀여웠지. 그때는 내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놀리는 맛이 있었는데.”

다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카일로스 때문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점차 나아졌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따끔거리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까 카일로스가 붙잡아서 상처가 다시 갈라지고 말았다.

‘에스델…….’

나는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남았다는 나의 작은 에스델을 떠올렸다. ‘살았다’와 ‘살아남았다’가 주는 어감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었다.

그 작은 아이가 홀로 살아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었을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아픔과 죄스러움이 몸을 감쌌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버티어 준 나의 에스델이 대견했다.

‘하지만 이 시간 속에는 더 이상 에스델이 존재하지 않지.’

그 불변의 사실에 가슴이 허전해졌다.

* * *

손바닥의 상처가 상당히 아물어 갈 즈음에 빈센트 백작 영식으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

편지는 그날 무도회장에서 내가 먼저 사라진 일로 전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걱정 말라는 내용과 정 미안하다면 다음 사교 행사에서도 그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나로서는 굉장히 감사한 제안이었다. 그렇잖아도 당장 열흘 뒤에 있을 캐롤라인 공작저에서 열릴 파티에서 파트너가 되어 달라던 캐롤라인 소공작의 요청을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던 탓이다.

빈센트 백작 영식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답장을 보낸 뒤, 시간을 확인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다리아의 도움으로 황궁 도서관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게 된 나는 오늘처럼 쉬는 날이면 늘 도서관으로 향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카일로스는 늘 그가 지정해 준 책만 읽도록 규제해 왔기 때문에 도서관을 마음껏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굉장한 사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사치를 즐길 시간이 없었다. 서가에 한가득 꽂혀 있는 책들이 나를 유혹했지만, 지금의 내게는 내 취향에 맞는 책을 찾아 읽는 것보다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 엄지손가락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찾아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문득 내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큼, 크흠.”

낯익은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니 레이몬드가 내 맞은편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국의 태양을…….”

“아니야. 그냥 앉아. 책 읽는 걸 방해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려는 나를 만류하고는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힐끔 살펴보았으나 그의 주변에 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책을 읽으러 왔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이쪽으로 온 모양이었다.

“네가 책을 즐겨 읽는 줄은 몰랐군.”

내가 읽고 있던 것을 두 눈으로 훑어보며 그가 말했다.

“책을 좋아하는 줄 알았더라면 종종 함께 왔을 텐데.”

이곳은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는 한 번도 그와 함께한 적이 없는 장소였다. 레이몬드는 그 시간 속에서 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책을 좋아하시나요?”

“음, 물론. 이 도서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지.”

“아…… 그렇군요.”

다리아와 몇 번 왔을 때는 한 번도 그와 마주치지 못해서 전혀 몰랐다. 그가 자주 드나드는 장소라고 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읽던 것 마저 읽도록 해.”

그는 내게 신경 쓰지 말라 해 놓고서는, 느슨하게 턱을 괸 채로 내가 책 읽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말려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뒤편으로 보이는 웅장한 서가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렸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얼굴을 바라보던 레이몬드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내가 읽고 있던 책을 훑어보았다.

“제국법을 다룬 책이군.”

“네, 조금 관심이 생겨서요.”

“흐음…….”

레이몬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화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필이면 내가 읽고 있던 부분이 ‘황족 시해’와 관련된 파트였기 때문이다.

“무서운 내용을 보고 있군. 설마 나를 죽이려는 생각은 아닐 테고. 다리아가 널 괴롭히고 있나?”

“아,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시피, 굉장히 위험한 여자야. 네 혼자 힘으로 잘 안 되면 언제든 나를 불러도 좋아.”

“절대,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무서운 말씀 마셔요.”

“하하, 장난이야.”

짓궂은 농담에 얼굴 위로 열이 올랐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던지 레이몬드는 입가에 미소를 가득 띠우며 내가 읽던 책장을 툭툭 두드렸다.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나 의문 가는 점이 있다면 언제든 물어봐도 좋아. 이래 봬도 황족 시해와 관련해서는 아스타 제국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니까.”

잠자코 레이몬드의 말을 듣던 나는, 문득 그의 부모가 한날한시에 독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카일로스는 한 번도 그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대공성의 집사였던 에릭슨을 통해 전해 들었다. 선황제 부처와 그의 어머니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독살을 당해 죽었다고.

나의 세상은 언제나 카일로스가 중심이었기에, 그 말을 들은 나는 오직 어린 나이에 홀연히 부모를 잃은 카일로스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레이몬드의 부모 역시 죽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레이몬드는 카일로스보다 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했구나.’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레이몬드를 바라봤다. 이렇게 큰 남자에게도 부모를 잃고 슬픔에 빠졌을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정말로 나쁜 의도로 이 책을 읽고 있던 건 아니에요. 이 부분을 펼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나는 억울한 표정을 꾸며내며 거짓을 말했다. 내가 황족 시해 파트를 살펴보던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십 년 전, 다리아의 유산. 나는 그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한때 내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 남자는 내 아이의 아버지를 죽이고, 다리아의 아이를 죽이고,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자신의 부인마저 그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인 살인마였다.

한차례 시간을 거슬렀기에 그의 죄악은 모두 없던 일이 되었으나, 오직 한 가지만이 여전히 일어난 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카일로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그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완벽하지 않았다.

루드비히 대공의 지위는 아스타 제국 내에서도 굉장히 드높았고, 이성을 잃은 그가 나를 보호해 줄 가문에 어떤 압력을 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내가 마지막에 보았던 카일로스는 당장 무슨 짓이라도 벌일 것처럼 섬뜩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도서관에 찾아온 이유도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잘못을 밝혀내면 그의 힘을 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암담해졌다.

황족 시해죄에서 일컫는 황족의 지위는 탄생 이후 교단의 승인을 거친 이후에야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리아가 잃어야만 했던 뱃속의 아이는 그 조건에 해당되지 않았다. 다만 다리아의 몸에 직접적으로 해가 되는 일을 벌였으니 황족 음해죄에 해당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즉결 처분이 가능한 황족 시해죄와는 처벌의 경중이 달랐고 카일로스의 지위를 생각했을 때 그 수위가 낮추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책에 등장한 판례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고 말이다.

‘물론, 내가 그 모든 것에 앞서 십 년 전 일의 증거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미지수지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하지만 다리아를 위해서라도 그의 죄를 밝히고 싶어.’

다리아는 레이몬드와 더불어 내게 은인이었다. 비록 레이몬드와의 계약으로 인해 나를 보호하는 것이라 했지만,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내게 호의적이었으며 내가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물심으로 도와주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 덕분에 웃는 날이 많아졌다.

“흠, 그래. 네 말이 그렇다면 아주 우연히 그 부분을 펼친 것으로 해 주지.”

레이몬드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한손으로 턱을 괴고서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의 거만한 자세가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주치는 시선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폐하!”

그를 찾는 남자의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바라볼 뻔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아아, 라트 후작.”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도 몇 번 보았던 얼굴이었다. 황제의 보좌관이었던 저 남자는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하게도 이 시간 속의 남자는 나를 알지 못했다. 그저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레이몬드에게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평소엔 잘 찾지도 않는 도서관엔 뜬금없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무슨 소릴. 원래 내가 즐겨 찾는 장소가 아닌가!”

“……업무가 상당히 쌓인 걸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어서 집무실로 돌아가야지요.”

“분명 오전에 다 끝내 놓았는데.”

“북쪽 지방의 겨울철 조세 징수 건과 관련하여 급히 처리해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으음…….”

그 말에 레이몬드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힐긋 나를 돌아보더니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럼 클로이, 나중에 또 보지.”

그러고는 곧바로 몸을 홱 돌리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붉은 머리카락 아래에 슬쩍 보이는 귓불이 어쩐지 그의 머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분이 안 좋으신가.’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모처럼 책을 읽으러 도서관까지 왔는데 보좌관이 찾아와 일을 하러 가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는가.

그렇잖아도 최근 다리아가 내게 시키는 일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었던 탓에, 나 또한 그의 기분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레이몬드는 참 상냥한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기분이 안 좋으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순순히 일을 하러 가는 모습이 정말 황제다웠다.

다리아는 어떻게 저런 완벽한 남자를 남편으로 두고서도 사랑에 빠지지 않은 걸까? 만약 내가 다리아였다면…….

‘아, 그러고 보니 내일까지 지난 번 무도회 때 사용한 예산 결산서를 제출하라고 했었는데!’

뒤늦게 다리아가 시킨 일이 생각난 나는 서둘러 책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이튿날, 늦지 않게 결산서를 제출한 나는 피곤함을 감추며 다리아가 넘겨준 새로운 업무를 받아들였다.

“언니, 클로이를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야?”

“맞아, 다리아. 클로이에게 주는 업무량이 과다한 것 같아.”

베스티와 젬마 부인의 말마따나 점차 내가 맞는 업무의 양은 과다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중 몇 가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한 다리아의 업무였다. 베스티는 다리아를 가리켜 악덕 상관이라며 내게 험담을 했다.

“내 청혼을 거절한 벌이야, 클로이.”

다리아는 당연하게도 베스티의 비난에 굴하지 않고 일감을 던져주었다.

물론 그녀가 전적으로 모든 일을 나에게 떠넘기는 건 아니었다. 내가 모르거나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흔쾌히 도와주었으며 최종 검토는 늘 그녀가 직접 도맡아 했다. 이따금 실수가 발견될 때는 다시 불러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도 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그녀가 직접 하는 게 훨씬 빠를 텐데. 굳이 두 번 세 번 일을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도 내게 일을 맡기는 걸 보면 단순히 나를 괴롭히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후 폐하의 청혼을 받아들일 걸 그랬어요.”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대답했다. 그녀가 던져 주는 일감은 대부분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일개 시녀인 내가 황후궁 전반과 관련된 업무들을 이렇게까지 도맡아 하는 게 옳은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

다리아는 깔깔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이럴 때의 다리아는 조금 얄미웠지만, 나는 군말 없이 그녀가 주는 일들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주는 일들은 힘들긴 했지만 싫진 않았다.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 나를 보호해 주는 그녀에 대한 보답으로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세 시까지 마칠 수 있겠니?”

다리아가 벽시계를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세 시에는 베스티와 함께 황후궁 후원에서 수도의 몇몇 귀족 영애들을 초청해 다과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네, 물론이요.”

나는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서류뭉치를 품에 안고서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자 나를 쳐다보던 다리아의 두 눈이 곧바로 샐쭉해졌다.

“그렇게 웃지 마.”

“네?”

“나를 유혹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웃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당황스러워 반문하자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며 입꼬리를 씨익 당겼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 나왔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다과회 시간에 맞추어 일을 끝내려면 서둘러야 했다.

간신히 일을 모두 마치고 잠시 쉬고 있을 무렵, 베스티가 찾아왔다.

“클로이! 다들 도착했대! 우리도 어서 나가자!”

그녀는 모처럼의 다과회에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황후궁의 후원에서 다과회가 열린 건 다리아가 황후가 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다리아 언니는 워낙 사교 활동을 질색해서.’

그렇게 사교 활동을 꺼려한다는 다리아가 수도의 귀족 영애들을 자신의 후원에 초대하여 티타임을 벌이는 이유는 모두 나를 위한 것임을 안다. 내가 자신의 사람이란 것을 보다 견고히 하여 카일로스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려고…….

그녀의 호의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베스티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한결 풀린 날씨는 성큼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황후궁의 후원에는 모처럼 귀족 영애들이 모여 티타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다리아가 이 자리에 함께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젬마 부인과 함께 간단하게 얼굴만 내비친 뒤에 곧바로 사라졌다.

“반가워요, 레이디 가넷슈. 정말 만나 보고 싶었어요.”

“캐롤라인 공녀가 레이디 가넷슈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던지, 저는 두 분이 사귀는 사이인 줄 알았다니깐요.”

한 아가씨의 말에 모여 있던 영애들이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무, 무슨 소리야!”

베스티가 얼굴을 화륵 붉히며 극구 부인했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레이디 가넷슈! 정말 캐롤라인 공녀와 교제하는 게 아닌가요?”

“그런 말 하지 마! 클로이가 난처해하잖아!”

물론 나는 전혀 난처하지 않았다. 나보다는 베스티가 더 난처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그녀들은 베스티의 반응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어머, 혹시 곤란하게 해 드렸다면 정말 죄송해요, 레이디 가넷슈.”

“아니요. 이렇게 관심을 주셔서 기쁜걸요.”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내가 직접적으로 대면했던 귀족 아가씨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귀족 아가씨들을 그녀에 맞추어 생각했다. 오만하고, 대하기 어려우며, 불편한 존재라고.

그러나 베스티가 초대한 아가씨들은 내가 생각했던 귀족 아가씨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깨뜨려 주었다. 그들은 밝고 솔직하며 잘 웃었다.

‘나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

그들 사이에 낀 내 존재가 왠지 어색하다고 느껴졌을 때, 그들 중 하나가 내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레이디 가넷슈는 황후 폐하와 사이가 좋다면서요? 지난달에는 황후 폐하와 함께 오페라 하우스에도 방문했잖아요.”

“정말 대단해요! 저는 황후 폐하와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리던데!”

“오늘 황후궁의 후원에서 다과회를 허락해 준 것도 모두 레이디 가넷슈 덕분 아니에요? 그동안 캐롤라인 공녀가 매번 부탁해 왔는데도 시끄러운 건 싫다고 허락 안 해 주셨는데.”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말들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신기하게도 대화의 중심은 나였지만,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다리아 언니가 클로이를 엄청 예뻐하지.”

베스티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 마냥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했다.

“황후궁 업무의 절반은 클로이가 다 맡아서 하고 있는걸. 클로이가 없으면 다리아 언니는 아무것도 못할 거야.”

어, 그건 아닌데…….

나는 베스티의 말을 정정해 주고자 했지만, 내 바로 오른편에 앉아 있던 영애가 그보다 훨씬 빠르게 입을 여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정말 대단해요, 레이디 가넷슈! 저는 우리 어머니가 영지의 살림을 도와 달라 하는 것도 너무 어려워서 매번 끙끙 앓았는데, 어떻게 그 어려운 황후궁의 일을!”

자신을 글로아 백작 영애라고 소개했던 아가씨는 내게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황후 폐하께서 친절하게 알려 주셔서…….”

“세상에, 겸손하기까지!”

나의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베스티를 돌아보자 베스티가 키득키득 웃으며 내게 말했다.

“글로아 영애는 원래 예쁜 여자한테 관대해.”

베스티의 말에 모여 있던 아가씨들이 또다시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뭐가 재미있어 웃는 건지 나 혼자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레이디 가넷슈는 루드비히 대공 전하와도 굉장히 친밀한 관계겠네요?”

멍청하니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니, 내게 그답지 반갑지 않은 주제가 튀어나왔다. 나는 잠시 카일로스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 내고는 싱긋 웃었다.

“네, 제게는 먼 숙부뻘 되는 분이시지요.”

“부러워요. 대공 전하 같은 분과 가족으로 지내면 어지간한 영식들은 남자로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아요.”

“하하, 그럴 리가요.”

확실히, 카일로스를 좋아했던 시절의 나는 레이몬드와 브란스 경의 출중한 외모마저 눈에 차지 않을 만큼 사랑에 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나의 아둔함 때문이었지, 그가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잘생겼기 때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가 아무리 준수한 외양을 지녔다 한들 브란스 경에 미치지는 못했고.

“워낙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지라 그런 건 잘 느끼지도 못하는걸요.”

“하긴, 저도 자꾸만 다른 영애들이 우리 셋째 오라버니더러 잘생겼다 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그 불한당 같은 이가 대체 어디가 좋다고 다들 난리인지.”

“케니스 영애, 그럼 케니스 경을 제게 넘겨요!”

“내게 넘겨도 괜찮아요! 우리 오라버니가 케니스 경의 절반만 따라가도 평생 모시며 살 텐데!”

“케니스 영애는 그렇게 훌륭한 오라버니를 둔 기쁨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한숨을 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잠자코 있던 다른 영애들이 호들갑을 떨며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아,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그들처럼 웃고 있었다. 그들의 무리에 껴서…….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올라간 내 입가를 더듬어 보았다. 지금의 내 모습이 어색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클로이는 케니스 경을 모르지?”

“뭐라고요? 세상에, 레이디 가넷슈! 정말 케니스 경을 모른단 말예요?”

“아…… 네, 제가 사교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난처한 얼굴로 웃자 내게 목소리를 높이며 묻던 글로아 영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럼 브란스 경은 알지요? 루드비히 대공가의 기사니까요.”

“네, 잘 알지요.”

문득 아는 이름이 나오자 나는 반가워하며 냉큼 대답했다.

“어머, 정말요? 브란스 경은 실제로 어떤 성격인가요?”

“이제 보니 레이디 가넷슈는 대공 전하뿐만 아니라 브란스 경까지 가까이서 보았겠네요.”

“자주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니 정말 아쉬워요.”

“브란스 경이 지난 신년 무도회 때 레이디 가넷슈의 파트너로 참석하지 않았나요?”

브란스 경이 수도의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녀들은 얼굴에 옅은 홍조까지 띠우며 브란스 경의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케니스 영애의 셋째 오라버니는 브란스 경과 더불어서 아스타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로 꼽히는 사람이에요.”

혼자 그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앉아 있던 내게 글로아 영애가 설명을 해 주었다.

“물론 지위를 내려놓고 보면 브란스 경 쪽이 훨씬 더 우월하지만요!”

급기야 그녀는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며 브란스 경의 외모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글로아 영애는 잘생긴 남자를 숭배해. 철저하게 외모 지상주의인 여자야.”

“무, 무조건 사람의 외양만 보고 판단하지는 않아요.”

베스티의 말에 글로아 영애가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아름답지만, 그녀의 외모와 별개로 그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하긴, 그건 그렇지.”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성격이 진짜 별로니까.”

별안간 대화의 주제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에게로 넘어갔다. 자꾸만 휙휙 바뀌는 주제에 나는 머리가 아팠는데, 그녀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새 주제에 동참했다.

“레이디 가넷슈, 정말 루드비히 대공 전하께서 로잘라인 후작 영애와 약혼을 하게 될까요?”

“저번 신년 무도회 때도, 이번 황후 폐하의 탄신 무도회 때도 함께 등장했잖아요.”

영애들은 하나같이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 눈엔 그 두 사람만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없는데, 그들이 보기엔 아닌 모양이다.

“레이디 가넷슈가 대공 전하께 잘 좀 말씀드려요. 후작 영애의 성격이 얼마나 못됐는지.”

“벌써부터 자기가 대공비가 된 것처럼 우릴 업신여긴다니까요?”

그녀들은 로잘라인 후작 영애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베스티는 그녀의 악행 하나하나에 격하게 공감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나는 슬슬 이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조용히 웃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거슬러 온 시간 속,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여자가 이처럼 많은 이들에게 미움 받는단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내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던 여자였는데…….

“아, 참. 그 이야기 들었어요? 동쪽의 사미엔 땅에서 성녀가 나타났대요.”

“성녀요?”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이야기에 찻잔을 들어 올리던 내 손이 멈칫했다.

“네, 저희 숙부님이 동부 지역과 연계해서 상단을 운영하시잖아요. 그런데 글쎄, 얼마 전에 성녀가 나타나 교단이 발칵 뒤집어졌다지 뭐예요? 아마 오늘 중으로 황성에까지 소문이 닿을 거예요.”

“그게 정말이에요? 말도 안 돼, 지난 백 년간 나타나지 않았잖아요.”

“사실이라면 정말 굉장한 일인 걸요!”

“성녀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요? 라나 신께서 보내 주신 분이니 아주 아름답겠지요?”

“글로아 영애, 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려는 거예요?”

“앗, 그게 아니라……!”

백 년 만에 출현한 성녀의 존재에 모두들 잔뜩 들떠 버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오직 나만이 굳어지려는 표정을 애써 관리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성녀의 출현.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는 전혀 없었던 사건이다.

조금 껄끄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라미에 교단은 내가 황후가 되는 데에 극도로 반대했던 집단이니까. 내가 그 자리를 원하는지에 관한 여부와 관계없이 내게 우호적이지 않은 이들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성녀가 나타났으니 교단의 위세가 만만치 않겠네요.”

“조만간 수도에도 찾아오지 않겠어요? 봄이 오면 성 플로라의 축일이 있잖아요.”

“올 봄의 축일에는 백 년 만에 성녀님께서 축복을 주시겠네요.”

“아, 참. 그보다 캐롤라인 공녀, 소공작께서는 파트너를 구하셨나요?”

화제가 자연스럽게 아홉 날 뒤에 있을 파티 이야기로 넘어갔다. 어디서 드레스를 맞추었다느니, 이번엔 누가 누구와 파트너가 되어 나타난다느니.

보통의 귀족 아가씨들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구나, 라고 느끼며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내게 누군가 물었다.

“이번에도 루드비히 대공 전하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와 함께겠지요?”

“으음, 아마도요.”

나는 대답하며, 그 여자의 목을 가져와 바치겠다고 하던 카일로스를 떠올렸다.

글쎄, 그가 정말 이번에도 그 여자의 파트너가 되어 나타날까.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약혼녀가 될 여자를 제거하려 들까.

……뒤늦게 그런다 한들, 나와 있었던 일들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나의 불행은 절대 그 여자만으로 인한 게 아닌데.

카일로스, 당신이야말로 내 불행의 근원인데.

* * *

수도에 있는 캐롤라인 공작저에서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베스티는 이미 사흘 전에 휴가를 내고 저택으로 가 버렸는데, 황궁을 떠나던 그녀의 얼굴은 굉장히 들떠 있었다.

듣자 하니 오랫동안 공작령에만 머무르던 공작부인이 최근 수도의 저택으로 옮겨 온 모양이다. 이번 파티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이고.

베스티는 내게도 같이 휴가를 내고 자신의 저택에 가 있자고 청했지만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거절했다. 아직은 레이몬드가 만들어 준 보호막을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다.

카일로스는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황제마저 죽였던 남자다. 캐롤라인 공작저라고 해서 안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추워 보이는군. 왜 내가 보낸 모피를 하지 않았지?”

“이제 봄이니까요.”

근래 들어 황궁을 거닐다보면 레이몬드와 마주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고맙게도 그는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을 알려 주기 전과 마찬가지의 태도로 나를 대해 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대체 누가 이 상냥한 남자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 칭한 걸까. 이토록 온화하고 부드러운 남자인데.

“봄이라기엔 저녁 공기가 쌀쌀해.”

나를 향한 말씨 하나하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야, 클로이. 이래선 안 돼. 이 감정은 결코 너의 것이 될 수 없어.

그의 친절에 설레는 나와 그의 친절을 거부하는 내가 하나의 몸 속에서 치열하게 다투었다. 그의 친절은 지나치게 ‘사랑’과 닮아 있어서, 내게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폐하.”

싱긋 웃으며 답했는데도 여전히 그는 무언가 언짢아 보였다.

“또 저 남자로군.”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빈센트 백작 영식일 것이다.

내 눈엔 작은 사람의 형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레이몬드의 눈에는 얼굴까지 다 보이나 보다. 내가 그의 굉장한 시력에 감탄하고 있을 적에 그가 대뜸 물었다.

“혹시 저 남자와 교제를 하는 건…….”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전혀 아니에요.”

“하지만 벌써 두 번이나 저 남자의 파트너가 되었지.”

레이몬드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두 번이 아니라 ‘고작’ 두 번 아닌가? 그러는 레이몬드는 매번 다리아와 함께였으면서. 나는 조금 억울해졌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절대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

“으음…….”

레이몬드는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 사이 빈센트 백작 영식의 모습은 점차 또렷해졌다.

“나는 오늘 공작저에서 열릴 파티에 가지 않아. 그렇지만 다리아가 그곳에 갈 거야.”

“네, 알고 있어요.”

“조심해서 다녀와, 클로이. 그리고 혹시 다리아가 널 괴롭히거든…….”

“걱정 마세요.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단정하듯 말하자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너무 믿는 거 아닌가?”

“폐하께서 소개해 주신 분인걸요.”

레이몬드는 지난 생에서 유일하게 내 행복을 바라 주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소개시켜 준 이를 내가 어떻게 믿지 못하겠는가.

“그래.”

레이몬드는 가볍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내게서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폐하께서도 같이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빈센트 백작 영식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에 있는 캐롤라인 공작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공작부인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 주었다.

“오, 레이디 가넷슈! 우리 베스티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는지, 얼굴만 봐도 바로 알아보겠어요!”

예상치 못한 환대에 잠시 놀랐으나 나 역시 곧바로 그녀를 따라 웃으며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공작부인. 저도 캐롤라인 공녀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별 말씀을요. 빈센트 백작 영식은 갈수록 훤칠해지는군요. 캐롤라인 저택에서의 파티가 두 사람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랄게요.”

공작부인은 간단하게 인사하고는 그 뒤로 들어오는 이들을 맞이하러 움직였다.

저택 내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규모가 다리아의 탄신 기념 무도회를 방불케 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 것 같아.’

힐끔 주위를 둘러보는데 빈센트 영식이 내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제 친구들을 소개시켜 드려도 괜찮을까요? 지난 무도회 때 다들 레이디 가넷슈와 인사하고 싶어 했었거든요.”

“물론이지요.”

나는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지난 무도회를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빈센트 영식이 소개시켜 준 이들은 모두 그를 닮아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얼마 전에 황궁 기사 서임을 받은 케니스 경, 수도의 모든 남자들의 적이지요.”

“남자들의 적이라니, 무슨……. 절대 아닙니다, 레이디 가넷슈.”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해하는 남자를 보는 순간 저 사람이 케니스 영애의 셋째 오라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나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베스티를 발견했다.

“왔구나, 클로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서인지 베스티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총총거리며 뛰어오던 그녀가 내 옆에 있는 이들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조신한 표정으로 걸음걸이를 바꾸었다.

그 변화가 귀여워서 웃고 있노라니, 가까이 다가온 베스티가 새침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다리아 언니는 같이 안 온 거야?”

내게 물으면서 은근슬쩍 케니스 경을 힐끔거리는 베스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황후 폐하는 조금 늦게 출발하신다 했어요. 저는 빈센트 백작 영식의 마차를 얻어타고 함께 왔고요.”

다리아는 캐롤라인 공작저에서 열리는 이번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굉장히 꺼려했으나, 명색이 그녀의 가문에서 주최하는 파티인지라 빠지기 곤란했다. 내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가기 싫다며 짜증을 내던 다리아가 떠올랐다.

“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베스티는 굉장히 도도한 표정으로 내 옆에 서 있던 이들을 향해 돌아섰다.

“안녕하세요. 다들 캐롤라인 저택에 방문하신 걸 환영해요.”

베스티는 의식적으로 케니스 경이 있는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는데,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에 띄게 놀라는 모양이 영 수상했다.

‘케니스 경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케니스 경은 황후궁 후원에서 있었던 다과회 때 다른 영애들이 말했던 것처럼 굉장히 준수한 외양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아가씨들이 추앙할 정도로 잘생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레이몬드가 훨씬 더…….

“황후 폐하!”

멍하니 케니스 경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다리아가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이제 막 저택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서 와요, 황후 폐하. 캐롤라인 저택은 참 오랜만이지요?”

공작부인이 그녀를 반기며 다가갔다.

“그동안 공작령에도 한 번도 안 찾아와 주시고, 이 숙모가 많이 서운했…….”

철썩.

차가운 마찰 소리에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다리아가 그녀에게 향하던 공작부인의 손을 그대로 쳐낸 것이다.

“아, 이런.”

고요한 정적 속에서 다리아는 서늘한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휘저었다.

“미안하네, 공작부인. 시끄러운 벌레 소리가 들려서 쫓아낸다는 게 그만.”

“아, 하하……. 아직 벌레가 있을 계절은 아니지요.”

그 말에 공작부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마차를 탔더니 피곤하군. 내 자리는 어디지?”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내하겠습니다.”

다리아는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공작부인을 부리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그녀는 딱히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았다.

“음……. 다리아 언니가 조금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나 봐요.”

베스티 또한 어색한 목소리로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베스티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다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냉담한 얼굴로 앉아 투명한 샴페인을 홀짝거리는 다리아와 그 옆에서 절절매고 있는 공작부인의 모습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베스티를 대하던 때와는 또 사뭇 다른 서늘한 모습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원래 사교 활동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사람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마냥 수긍하기엔 지난 번 무도회에서의 모습과 너무나 상반된 태도였다.

‘공작부인과 사이가 안 좋은 걸까?’

나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다리아에게 다가갔다.

“황후 폐하, 괜찮으세요?”

“그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재미있게 즐겨, 클로이.”

내 물음에 다리아의 얼굴이 설핏 풀렸다. 삐딱하니 웃으며 내게 손을 휘휘 젓는 다리아는 황궁에서 늘 보던 쾌활한 모습과 굉장히 달랐다.

내게서 고개를 돌린 다리아가 다시 차가운 얼굴로 샴페인 잔을 들이켰다. 옆에서 공작부인이 무어라 말을 걸었으나, 다리아는 대놓고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문득 내가 거슬러 온 시간 속, 다리아가 자신의 숙부와 그 일가족을 모조리 도륙하고 스스로 공작이 되었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마음이 무거워진 나는 바람을 쐬기 위해 천천히 테라스 쪽으로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와 카일로스가 남들의 눈에는 평범한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로 보이는 것처럼 다리아와 캐롤라인 공작가의 사이에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 있을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다리아는 무시무시한 악녀였지만, 나는 내가 아는 다리아만 생각하기로 했다.

겉보기에는 고고하고 위압적인 황후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쾌활하고 인정이 많은 그녀를 말이다.

“바람을 쐬러 가시는 길입니까?”

문득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니, 베스티와 상당히 닮은 인상의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캐롤라인 소공작님.”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방금 전까지 다리아와 캐롤라인 공작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 와중에 등장한 그가 퍽 반갑지 않았다.

“테라스로 나가는 거라면 안내해 드리지요.”

“아니요, 잠시 혼자 있고 싶어서요.”

“연달아 거절을 당하니 조금 속상한걸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캐롤라인 소공작의 얼굴은 그다지 속상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루드비히 대공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저기, 후작 영애가 혼자 있어요.”

그가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있는 쪽을 힐끔거리며 내게 속삭였다.

그 순간 고개를 돌린 로잘라인 후작 영애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 또한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참 동안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이쪽으로 오는데요?”

캐롤라인 소공작의 말마따나, 그녀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독기 가득한 두 눈동자에서 나 또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뻔뻔하고 더러운 계집.”

적의에 가득 찬 음성을 쏟아 내는 입술 사이로 진한 알코올 향이 번졌다. 그녀의 왼손에 들린 샴페인 잔에는 아까 다리아가 마시던 것과 비슷한 빛깔의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후작 영애!”

그녀가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캐롤라인 소공작이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나는 내 앞으로 나서려는 그를 제지하고는 그녀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며 빙긋 웃었다.

“이목이 많은 곳이에요. 후작가의 아가씨께서 명예를 실추시킬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

후작 영애는 내 말에 분한 듯 화를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샴페인 잔을 쥐고 있는 손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소공작님, 후작 영애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나 봐요.”

“으음…….”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그러지요.”

캐롤라인 소공작은 미심쩍은 목소리로 답하며 물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작 영애가 차갑게 비소를 내지었다.

“카일과 황제 폐하에 이어, 이제는 소공작에게까지 손을 뻗은 거니?”

“손을 뻗다니요, 무슨 말씀을.”

“아, 미안. 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했구나. 손만 뻗진 않았겠지. 그 더러운 몸뚱이를 굴려야 하잖아, 응?”

깔깔 웃으며 비아냥거리는 모습에서 고귀한 후작가 아가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를 도발하려는 것이 분명한 그 말들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푸스스 눈꼬리를 접어 내렸다.

“지금, 내 앞에서 웃는 거니?”

발끈한 그녀가 잔뜩 성을 내며 외쳤다.

“오늘은 혼자 왔네요.”

나는 그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말을 골라내며 생긋 웃었다.

“숙부님이 당신의 에스코트를 맡길 거부하시던가요?”

“무슨 헛소리를……!”

주변에서 몇몇 이들이 힐끔거리고 있었으나 후작 영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언성을 높이는 그녀의 모습은 썩 보기 좋지 않았다.

“당연히 숙부님과 함께 오실 줄 알았는데 혼자 계시길래요. 충분히 불화설이 돌 수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라 걱정되는 마음에 여쭈어 보았어요.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쓸데없는 소리! 불화설이라니, 그런 것 따윈 없어!”

“숙부님의 말씀하고는 조금 다르네요.”

“카일이…… 네게 무슨 말을 했는데?”

후작 영애의 얼굴 위로 얼핏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이 여자와 카일로스의 관계는 상당히 흔들린 상태라고.

“궁금하세요?”

나는 마치 은밀한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어떡하지요.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고 싶지 않은데.”

“뭐, 뭐라고?”

당황한 듯, 멈칫거리는 그녀를 향해 나는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녀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뿐인 여자에게 그토록 허무하게 당했었나. 에스델을 그리워하던 내 마음을 저당 잡히고서…….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아이의 곁으로 가렴.’

나를 기만하였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질투에 눈먼 여자의 거짓에 속아 나는 그 작은 아이를 세상에 혼자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나를 죽인 여자라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 죄를 따지는 것마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디 하루빨리 불화설을 종식시키길 바랄게요. 다른 이들이 뭐라 말하든, 제 눈에는 참 잘 어울리거든요, 두 분.”

여자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에도 그다지 통쾌하지 않았다. 나는 씩씩거리는 로잘라인 후작 영애를 두고서 돌아섰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인 줄도 모른 채.

……얼마 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이 온 수도를 휩쓸었다.

* * *

불의의 사고로 젊은 생을 마감한 엘리자베스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비보가 온 수도를 달구었다.

그녀를 싫어했던 베스티조차 그녀의 죽음 소식에 놀라 충격을 받고 방 안에 틀어박혀 눈물을 쏟아 냈다.

“울지 말아요, 베스티.”

“하지만 너무 무서워.”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한 베스티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를 싫어했잖아요.”

“그렇지만…… 그 여자가 죽길 바란 건 아니었어.”

훌쩍이는 베스티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베스티는 비록 입이 험하고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바로 꺼내는 습성이 있었지만, 천성이 여린 여자였다.

내 심정을 묻는다면,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덤덤했다. 마치 그녀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캐롤라인 공작저에서 열렸던 파티를 즐기다 돌아가던 길에 마차 전복 사고를 당했다. 세간에는 마차 바퀴의 결함으로 일어난 사고라 알려졌지만, 난 그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세간에도 실상은 그녀가 마차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괴한들의 습격으로 인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그녀의 시체가 형체마저 알아볼 수 없게 잔혹하게 도륙 당했다는 소문에 수도 전체가 암울해졌다.

‘그 여자의 목을 가져와 네게 바칠게.’

너무나도 쉽게 그녀를 죽이겠다고 말했던 남자의 섬뜩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그땐 네가 나를 다시 돌아봐 주겠지. 그렇지, 클로이?’

설마, 고작 내 마음을 돌리겠다는 이유로 그가 그 여자를 죽였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다.

나는 최대한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베스티를 간신히 달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나, 오늘 네 방에서 같이 자도 돼?”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베스티의 양 팔에는 커다란 베게가 들려 있었다.

“오늘 밤은 혼자 자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래요, 베스티. 이쪽으로 와요.”

어린 아이처럼 구는 베스티를 내 침대 위에서 재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든 베스티와 달리 나는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창틀 위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나를 죽인 여자의 죽음을 곱씹던 내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 한 줄기가 흘러들어왔다.

“그런 곳에 그런 자세로 앉아 있으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레이디 클로이.”

“브란스 경?”

이곳에서 마주칠 것이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남자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아……!”

화들짝 놀란 몸이 휘청거리며 흔들렸다. 그대로 추락하려는 내 몸을, 그가 붙잡아 주었다.

“괜찮습니까?”

“아…… 네, 괜찮아요…….”

떨어지려던 순간 온몸을 관통하였던 아찔한 감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 심박을 다스리며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브란스 경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 보세요. 제가 위험하다고 했잖습니까.”

브란스 경은 여전히 넋을 놓고 있던 나를 달래며 잔잔하게 웃었다.

“그러는 브란스 경이 제 눈엔 더 위험해 보이는걸요.”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창가에 드리운 나뭇가지 위에 서 있는 상태였다. 내가 앉아 있는 창틀보다도 위태롭기 짝이 없는 나뭇가지였는데 그는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나무를 타는 법도 배워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에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루드비히 대공과 로잘라인 후작의 결합이 완전히 결렬되었습니다.”

“아…….”

대뜸 그의 입에서 나온 한 가지 사실에 나는 작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 사실을 알려 드리기 위해 찾아 왔어요. 레이디 클로이.”

로잘라인 후작과의 결합은 카일로스가 레이몬드를 밀어내고 황제가 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로잘라인 후작가의 재력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그토록 많은 귀족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정말로 황제의 자리를 포기한 걸까. 인생의 전부가 오직 황좌를 위한 것이었던 그 남자가, 정말로?

하지만 오늘의 나는 이미 로잘라인 후작 영애의 죽음으로 인해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머리 아픈 생각을 떨치기 위해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웃어요?”

나는 괜히 샐쭉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브란스 경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새삼 그의 외모를 찬양하던 글로아 영애가 떠올랐다. 어쩐지 이 순간만큼은 나도 그녀와 함께 브란스 경의 외모를 찬양하고 싶었다.

“그냥…… 레이디 클로이를 보면 가끔 웃음이 납니다.”

“……?”

“당신은 늘 저를 미소 짓게 만들어 주는 그런 사람이에요, 레이디 클로이.”

난데없이 훅 치고 들어온, 굉장히 간지러운 말이었다.

“어…… 음…….”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힐끔 쳐다보았다. 브란스 경은 아무런 사심 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황궁엔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어색하게 말을 돌리자 그는 그저 웃었다.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레이디 클로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은은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슬쩍 덧붙이자, 그가 애매하게 논점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런 장난 같은 말은 말고요.”

“장난이 아니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네? 어…….”

순식간에 낮아진 목소리와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중해서, 나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허둥댔다.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던 그가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었습니다.”

“정말 너무해요!”

얼굴 위로 올라오는 열감을 느끼며 작게 외쳤다. 장난이라곤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짓궂은 놀림이라니.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이곳은 지낼 만합니까?”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이른 봄의 공기를 머금고 흘러왔다. 나는 바람이 불어 올 적마다 자그맣게 일렁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쳐다보며 답했다.

“대공성에 비하면, 훨씬이요.”

“레이디 클로이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나는 잠시 내 일상을 더듬어 보았다. 이상했다.

대공성에서 지낸 팔 년의 시간과 비교하면 이 황궁에 머문 시간은 지나치게 짧았다. 그럼에도 이곳은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포근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이곳이 내 집인 양.

“평온해요. 숙부님만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말이지요. 황제 폐하도, 황후 폐하도, 황후궁의 사람들도, 모두 내게 잘해 줘요.”

“다행이네요.”

잠자코 내 말을 듣던 브란스 경이 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푸스스 휘었다. 그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 안에 내 얼굴이 맺혀 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던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브란스 경은 이상하지 않아요? 제가 갑자기 숙부님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이렇게 발버둥치는 게…….”

“그렇게 따지자면 레이디 클로이도 저를 의심해야지요. 이유도 묻지 않고 뜬금없이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나섰잖아요.”

늘 느끼지만, 브란스 경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사람이었다. 그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곧은 시선을 받으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브란스 경을 의심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어떤 나쁜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 해도요?”

천사처럼 깨끗한 얼굴로 되묻는 그의 말에 웃음이 새나왔다.

“브란스 경과 음모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결국 터져 나온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답하자, 그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요?”

그야 나는 당신을 아니까. 날 위해 무엇을 해 주었는지 아니까. 비록 당신이 어떤 이유로 그러했는지는 모를지라도.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거슬러 온 시간의 일을 이야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나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브란스 경은 고요하게 미소 짓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미소를 거둔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은 조금 생소했다. 사브락거리며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참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언제나 내게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레이몬드처럼 나의 사랑을 바라지도 않았다. 무도회장에서 말을 건네던 남자들처럼 애욕이 담긴 눈동자로 나를 보지도 않았다.

그런 대가 없는 그의 호의에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로 아팠다. 그것은 아마도 내게 마지막으로 나의 작은 에스델을 안겨 주었던 그의 마지막을 기억하기 때문이겠지.

“브란스 경은 괜찮나요? 숙부님의 도움으로 기사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은 카일로스에게 나를 도와준 일이 들킨 뒤 병사들에게 붙잡혀 가는 뒷모습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를 볼 수 없었고, 그의 소식 또한 들을 수 없었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사랑에 눈이 멀었던 내가 보기에도 그다지 배신자에게 관대하지 않은 남자였다. 그러니 브란스 경의 그 이후가 어땠을지는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죽었거나, 혹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였거나. 어느 쪽이든 불행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또다시 나를 도와 다치는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고, 그가 또다시 나 때문에 카일로스를 배신하는 게 미안했다.

“숙부님은, 어쩌면 브란스 경에게도 은인일 텐데요.”

“대공 전하께서는 한번 원하는 게 생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요. 저도 그중 하나였고요.”

브란스 경은 나직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가 언젠가를 회상하는 듯,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제 고향은 따뜻한 남쪽의 소도시였습니다.”

“어머, 정말요? 저도요!”

뜻밖의 우연에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브란스 경은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그 작은 우연에, 나는 조금 들떴는지도 모른다.

“저는 아스란타 출신이에요. 조금 자란 뒤에는 가넷슈 저택이 있던 아만티로 떠나야 했지만요.”

비록 나의 유년 시절은 불행했지만, 그럼에도 남쪽의 소도시 아스란타에서 살았던 시절은 내게 아주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희미한 기억 속, 그곳에는 내게도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이가 있었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나요?”

브란스 경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긴 해요.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방문하고 싶지만 그곳에 눌러 살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 그곳으로 돌아간다 한들, 나를 사랑해 주었던 이는 더 이상 그곳에 없다. 얼굴마저 흐릿한 여인을 이제와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움이라는 애틋한 감정을 지니기엔 내가 살아 온 삶이 너무 삭막하여서 나는 그리움마저 죽여야 했다.

“레이디 클로이가 처음 대공성에 왔던 날을 기억해요. 저는 그때 아직 어린 견습 기사였고, 그런데 레이디는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전하의 손을 잡고 나타났었죠.”

내가 처음으로 루드비히 대공성에 발을 내딛던 날. 그날은 굉장히 많은 눈이 왔었다. 나를 쳐다보던 어린 견습 기사의 녹색 눈동자를 나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실은 저도 브란스 경을 기억하고 있어요.”

순간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던 브란스 경의 손이 삐끗했다.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는 내가 자신을 기억할 거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나 보다.

“네, 그때 눈이 정말 많이 왔잖아요. 제가 막 마차에서 내리던 때, 다른 기사들과 함께 마차를 마중하러 정문까지 나왔었지요? 그런데 유독 브란스 경의 머리에만 하얀 눈이 소복하니 앉아 있어서 시선이 갔어요. 차가운 곳에 오래 있던 사람처럼 피부도 창백했고…… 꼭, 눈사람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를 처음 보았던 때의 인상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잠시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파스스한 웃음과 함께 풀어졌다.

“정말 영광이에요. 저를 기억해 주어서.”

“누구라도 브란스 경의 얼굴을 한번 보게 되면 잊지 못할 걸요.”

“으음…… 글쎄요.”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또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안타까웠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브란스 경은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거울을 봤다면 자신의 외양이 유난히 빼어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천천히 고개를 내린 브란스 경은 아까부터 그의 얼굴을 뜯어보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디 클로이,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가 어려운 부탁을 하듯 정중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제게도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을까요?”

“이름이요……?”

“브란스라는 이름 또한, 본디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아, 작은 탄성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가넷슈’라는 이름이 본래 나의 것이 아니었듯, ‘브란스’ 또한 그가 소유하던 본래의 것이 아니었다.

“에녹 경…… 이렇게 불러 드리면 될까요?”

“네, 그렇게요.”

에녹, 입 안에서 굴려 보는 그 이름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퍽 그와 어울리는 형태의 이름자였다.

“알겠어요, 에녹 경…….”

그는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주고받는 것으로 그와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해사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밤의 정취 속에서 그의 미소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누군가 근처에 왔어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힐끔 아래쪽을 내려다본 그가 조금 빠른 속도로 말했다.

“에녹 경?”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손을 뻗은 그가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 쥐며 들어올렸다.

“필요한 순간이 올 거예요.”

그리고 내 손에 짧은 단검을 쥐어 주며 속삭였다.

내가 손 안에 가득 차는 무게감을 느끼며 내려다볼 적에, 그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조만간 다시 만나요, 레이디 클로이.”

에녹 경은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대로 사라졌다.

“…….”

홀로 남겨진 나는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나뭇가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마치 유령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찬찬히 시선을 내리니, 저 아래에서 한 남자가 형형한 눈빛으로 내가 앉아 있는 창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이곳엔 무슨 일로……?”

그 사람이 레이몬드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잔잔하던 나의 심장이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를 볼 때면 시큰하게 아파 오던 가슴이 언제부턴가 거세게 술렁거리며 나를 흔들었다.

‘사랑해, 클로이.’

아, 그것은 아마도 그때부터.

‘내가 나를 아주 잘 아는데 널 사랑하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야.’

시간을 거슬러 왔음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던 그의 고백 이후로.

이름 없는 감정은 점점 부피를 늘려 가며 진득한 죄의식을 집어 삼키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한 번씩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서는 안 돼. 그를 사랑해서는 안 돼. 그와 나 사이에 사랑은 없어야 해.

그 애틋한 감정을 밀어내며 나는 해묵은 다짐을 가슴 위로 새기고, 새기고, 또 새겼다.

“밤이 깊었는데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서 말이야.”

“아…….”

놀라 뻐끔거리며 그를 쳐다보던 나는 곧바로 내 어리석음에 탄복했다. 이곳엔 무슨 일이냐니. 황궁의 경비를 살피러 온 게 분명하지 않은가.

혹시나 그가 에녹 경을 보았을까. 보았다면 어떡하지. 그를 잡아들이기라도 한다면…….

“좋은 밤이군, 클로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던 레이몬드의 얼굴 위로 씨익 미소가 걸렸다.

“요즘 수도 내에 흉흉한 소식들이 많아. 너무 늦게까지 자지 않으면 곤란해.”

걱정이 무색하게도, 다행히 그는 에녹 경을 발견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일찍 잠들도록 할게요.”

“아니, 뭐…… 사과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럼 폐하께서도 너무 늦지 않게 주무셔요.”

조심스럽게 창문 손잡이를 쥐고서 그에게 인사했다.

“바로 자러 가는 건가?”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네?”

“음, 아니. 아무것도.”

어쩐지 불편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두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잘 자. 클로이.”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가슴 위로 뭉근한 감각이 맴돌았다. 왠지 모를 아쉬움에 최대한 느리게 창을 닫고서 돌아섰다.

가슴을 채우는 허전함이 점차 익숙해지고 있어서, 그것 또한 문제였다.

어두운 방 안에는 내 침대를 차지한 베스티의 고롱거리는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가만히 그녀의 곁에 앉아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려 주고서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레이몬드의 말마따나 너무 늦지 않게 잠들어야 했다. 내일은 굉장히 피곤한 날이 될 예정이니까.

* * *

하늘은 화창하고, 날씨는 맑았다. 딱, 약혼하기 좋은 날이었다. 거슬러 오기 전 시간 속에서 로잘라인 후작 영애는 푸르른 꽃내음을 맡으며 카일로스와 미래를 언약하였다.

그리고 오늘, 로잘라인 후작가에는 봄날의 화사한 날씨와 달리 짙은 슬픔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과거에 나를 죽인 여자의 장례식에 와 있는 건 나로 하여금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내 또래의 아가씨들은 훌쩍훌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얼마 전 황후궁 후원에서 열렸던 다과회 때 만났던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니까, 로잘라인 후작 영애를 미워하던 아가씨들 말이다.

그녀를 그렇게 싫어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불행에 슬퍼하고 마는 순진한 아가씨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오직 나만 울지 않고 있어서, 나는 스스로가 홀로 이질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시간의 흐름이 상당히 뒤틀려 버렸다. 나보다 오래 살아 나를 죽여야 하는 여자가 나보다 먼저 죽어 버렸다.

죽음……. 한차례 겪었음에도 내겐 굉장히 생소한 종류의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 나를 낳아 주었던 여자의 죽음, 불에 탄 잿더미 아래 묻힌 가넷슈 자작의 죽음, 나를 짐승처럼 다루었던 이복 오라비의 죽음, 그리고 나를 사랑해 주었던 남자의 죽음…….

그 생각의 끝에서 나는 레이몬드를 떠올렸다.

이 시간 속에서 죽지 않아야 할 여자가 죽었다면 죽어야 할 남자를 살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레이몬드의 죽음 또한, 막을 수 있는 걸까.

나 때문에 죽은 남자였다. 나를 위해 죽은 남자였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을 막고 싶었다.

“클로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내 이름을 부르는 이는 그를 죽였던 남자였다. 그와 마주치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는 거부감에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내 손목을 붙잡으며 그가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젊은 영애의 죽음을 애도하러 온 조문객들이 여기저기서 슬픔을 흘리고 있었다. 몇몇 이들은 카일로스를 힐끔 보고는 동정 어린 눈빛을 하며 다시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이곳에서요?”

연인을 잃고 실의에 잠겼을 젊은 대공에게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그가 이곳에서 대치하는 모습이 그들의 관심을 사게 될 것임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잠시, 나와 함께 걸을래?”

카일로스 또한 그것을 의식한 듯, 내게 넌지시 제안했다.

“싫어요.”

그러나 나는 그와 함께 걷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가려는 나를, 억센 손아귀가 강제로 붙잡아 세웠다. 손목에 이는 악력에 눈가를 찌푸리자 그가 부드럽게 눈꼬리를 접어 내리며 속삭였다.

“나와 함께 걷자꾸나. 마차까지만 널 데려다줄게.”

나는 얼얼한 손목을 느끼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아스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발, 클로이.”

간절한 척, 애타는 척 속삭이는 목소리가 가증스러웠다. 이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강압적으로 굴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상냥한 보호자 행세를 하고 있는 그의 본색이 역겹고 혐오스러웠다.

“……좋아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움을 요청할 이는 없었다. 그래도 마차에 도착하면 베스티와 마부가 있을 테니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판단이 미친 나는 앞으로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로스는 안도하듯 작은 미소를 내지으며 내 손을 놓았다.

마침내 그에게서 벗어난 손목이 아프게 부어 있었다. 아주 잠시 이대로 도망칠까 생각해 보았지만, 얼마 안 가 붙잡힐 리 뻔했다. 나는 정면만 노려보며 그와 조금 떨어진 채로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차츰 끊기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후작 영애를 죽였어. 너를 죽였던 여자 말이야.”

최대한 그와 빨리 헤어지고 싶어서 서두르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뭐, 라고요?”

“내가 죽였어, 클로이. 너를 위해서.”

“……!”

세상에,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자신의 연인이었던 여자를 스스로 죽였노라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죄책감은커녕, 얼핏 자부심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어째서 그런……!”

한 사람의 죽음이 나로 기인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필연적으로 나 때문에 죽었던 다른 이를 동시에 떠올려야 했다.

비록 그녀가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나를 죽인 여자이고 지금의 시간 속에서도 나를 굉장히 싫어했다지만, 그렇다 하여 그녀의 죽음을 바라진 않았다.

“어째서 기뻐하지 않는 거지? 너를 죽인 여자를 내가 죽여 주었는데.”

카일로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는 이렇게 살아 있어요!”

“내게서 널 떨어뜨리려고 이간질을 일삼았던 여자이기도 하지.”

“그걸 알면서도 그 여자를 곁에 둔 건 당신이었죠.”

나는 차갑게 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내게 기억마저 흐릿한 오랜 옛일이었지만, 과거의 후작 영애는 분명 그랬다. 그의 앞에서 나를 헐뜯고 모욕 주길 즐기는 여자였다. 나는 언제나 비참함을 참으며 견뎌 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오로지 그녀만의 잘못이 아님을 안다. 그녀가 내게 가했던 패악들을 묵인하고 방관하였던 카일로스를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알아. 그래서 후회하고 있어.”

“…….”

“하지만 이렇게 늦게나마 잘못을 깨닫고 그 여자를 치워 버렸잖니.”

스스로 잘못을 깨달았노라 말하는 그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머릿속이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카일로스는 가만히 내 뒤를 따라왔다. 최대한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모여 있는 마차들이 보였다. 이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막혔던 숨이 트이려고 했다.

“잠깐, 클로이.”

달아나려는 나의 걸음을 그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그가 멈추어선 곳은 루드비히 대공가의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마차 앞이었다.

설마, 저 마차에 날 태워 납치해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마차들이 모여 있는 뒤쪽을 흘깃거리는 찰나, 그가 파스스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네게 주려고 선물을 준비했어.”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가 짐칸에서 나무 상자를 꺼냈다.

“무…… 슨…….”

그가 꺼내든 나무 상자를 보는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여자의 목을 베어서 네게 가져다줄게.’

얼핏 얼마 전 그가 내게 했던 말이 스치듯 지나갔다.

설마, 설마 그게 정말로…….

“그 여자의 목이야.”

“……!”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강하게 그를 뿌리치며 뒷걸음질 치다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저 관 속엔……!”

나는 한창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는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후작 영애의 시신은 저 관 속에…….

“가짜야. 내가 어떻게 그 여자에게 가족들 틈에서 영면하는 편안한 안식을 주겠니?”

오싹한 소름이 온몸에 돋아났다. 그가 들고 있는 나무 상자 아래가 검붉은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말한 그 여자의 ‘목’은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나를 용서해 줄래, 클로이?”

카일로스가 스산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여자를 죽인다는 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 모두 포기하는 거야, 황위마저도. 오직 널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고?

“제발, 이제 나를 용서해 줘.”

아니다, 이건 나를 위한 게 아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그 여자의 죽음을 부탁한 적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그와 영영 타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그러니 이것은 모두 내가 아닌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만하면 나를 용서해 줄 때도 되었잖아.”

“…….”

나는 대답 대신 감히 용서를 바라는 그의 얼굴을 힘껏 노려보았다. 스산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황제 때문이니? 그 남자 때문에 내게 오지 않는 거야?”

“폐하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야!”

카일로스가 분개한 목소리로 내 말을 잘라 내며 외쳤다.

“황제의 사랑은 거짓이야. 클로이, 너도 알잖아?”

내가 카일로스를 거부하는 것은 단언컨대 레이몬드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레이몬드를 들먹이며 그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내 가슴을 찔러 댔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뿐이지.”

무엇이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걸까. 치미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나는 그를 향해 차갑게 외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나는 어젯밤, 에녹 경이 내게 건네주었던 그 단검을 들고서 그에게 맞섰다. 카일로스는 왈칵 무너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지금 그걸로 나를 찌르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피시식 헛웃음을 흘린 그가 비척거리며 내게 걸어 왔다. 나는 양손에 힘을 가득 주어 단검을 겨누고서 이를 악물었다.

“자꾸 위협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요.”

“재미있는 소리구나, 클로이. 내가 이제껏 들어 본 말들 중 가장 재미있는 말이었어.”

굵은 손바닥이 그를 향해 겨누고 있던 단검의 날을 그대로 붙잡았다. 순간 쇠붙이를 타고 전해지는, 살을 헤집는 감각에 소름이 돋아났다.

“겨우 이런 날붙이가 우리 사이를 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광기에 물든 눈동자를 보며 나는 손에 쥐던 단검을 그대로 놓고 뒤돌아 뛰어갔다.

“클로이……? 클로이!”

당황한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뒤늦게 바닥으로 추락하는 날붙이의 소리가 챙강, 하고 울려 퍼졌다. 혹시나 그에게 붙잡힐까 봐, 나는 치맛자락을 붙잡아 올린 채로 뛰었다.

무서웠다.

카일로스는 타인의 목숨을 이토록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나.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그가 진심으로 두려워졌다.

* * *

카일로스 루드비히는 클로이 가넷슈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제게서 달아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벌써 몇 번째더라.

툭, 투둑.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그녀가 버리고 간 단검이 기괴한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카일로스는 가만히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녀가 쥐고 있던 손잡이에서 그녀의 체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왜, 또…….”

카일로스는 그녀가 버린 단검을 손수건을 꺼내 마치 유품처럼 소중하게 감쌌다.

“도망가는 걸까…….”

줄곧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숙부님이 좋아요.’

열일곱, 막 피어나던 그녀가 그 사랑스러운 입술로 속삭이던 고백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사랑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제가 닿는 순간 파르르 떨리던 작은 몸과 벅차하며 저를 받아 내던 여린 입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올려다보던 울 듯 말 듯한 눈빛도, 사람을 미쳐 버리게 만드는 그 표정도, 모두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는데.

황홀하기까지 하던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작은 눈물방울을 눈꼬리에 매달고서 또다시 입 맞추던 이제 막 여자가 된 열일곱의 그녀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이토록 선연한데.

“그런 네가, 날 싫어할 리 없잖아.”

카일로스는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며 중얼거렸다.

‘로잘라인 후작 영애에게 가 보셔야지요. 저와 함께 있는 것을 알면 후작 영애께서 언짢아하실 거예요.’

시간을 거슬러 온 직후,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며 그 여자에게 가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만 해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너는 내 여자가 될 수 없다’고, ‘적어도 후작 영애 정도는 되어야 내 곁에 설 수 있다’고 아주 오랫동안 그녀에게 세뇌시켜 왔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마 밀어낸다는 의식조차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황제에게 가 볼게요. 어차피 황제를 유혹해야 하는 게 저의 일 아니었나요?’

그것은 어쩌면, 너무 뒤늦게 깨달은 사랑에 대한 작은 복수라고 생각했다.

‘클로이는 조금 토라진 거야. 그래서 내가 가장 혐오하는 그 남자를 들먹이며 나를 밀어 내는 거야.’

카일로스는 자신을 밀어내는 클로이의 모습에 가슴이 무거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갑게 식어 버린 그녀가 아니라 피부 아래로 따뜻한 피가 흐르는 그녀였다. 살아 숨 쉬는 그녀는 이다지도 사랑스러웠다. 어떤 앙탈도 모두 받아줄 수 있을 만큼.

그러나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복동생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망가지고 말았다.

제가 언젠가 그녀에게 유혹하라 명하였던 남자가 이제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제게서 그녀를 앗아가기 위해. 대체 그 남자가 무어라 속살거리며 꼬여 냈기에 그녀가 제 곁을 떠난단 말인가!

카일로스는 그녀의 이런 행동엔 모두 그 남자의 간계가 숨어 있을 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 우스운 소리.’

서로가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 확인된 이후, 그녀를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포고하던 레이몬드의 모습에 기가 차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시간을 거슬러 왔다면 그 또한 명백하게 알 텐데.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또한 그녀는 그의 죽음에 일조해 왔다는 걸. 그녀가 제 사람임을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한다 말하는 이복동생의 소리는 모두 거짓임에 뻔했다.

‘그런 식으로 클로이를 꾀어내어 복수하려는 거야.’

불쌍한 클로이. 가엾은 클로이. 그 남자가 자신을 이용해 복수하려는 것도 모르고, 그 남자의 꼬드김에 넘어가 저를 경계하고 있었다.

카일로스는 어떻게든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걷어 주고자 하였다.

이 세상에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뿐이라고, 그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저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해 엘리자베스 로잘라인을 죽였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저와 결혼을 하여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 교만한 여자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다. 도리어 저를 괴물처럼 보며 도망치기 바빴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클로이, 어떻게 해야 널 다시…….”

카일로스는 이를 악물며 음산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변해 버린 클로이와 그녀를 쥐고 농락하는 레이몬드.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그 아이’의 존재.

황후의 탄신 무도회가 있던 날, 은발의 젊은 여자가 자신을 찾는다는 에녹 브란스의 말에 카일로스는 곧바로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혹여나 클로이가 그 여자와 마주칠까 걱정되는 마음에 곧바로 뛰쳐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클로이와 닮은 외양을 지닌 여자는 ‘그 아이’였다.

‘클로이를 괴롭히지 마.’

서릿발처럼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로 ‘그 아이’가 위협했다. 가슴 위를 짚던 손은 금방이라도 심장을 꿰뚫을 듯 위험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점차 숨통이 조이며 호흡이 가빠졌다.

생명의 공포를 느끼던 그 순간, 갑작스럽게 모습을 보이고는 달아난 클로이의 존재로 인해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멈춰.’

클로이를 쫓으려던 걸음이 그녀의 한마디에 그대로 땅에 붙박이고 말았다.

‘넌 클로이를 쫓아갈 수 없단다, 카일로스.’

‘내게, 무슨 짓을…….’

‘그녀가 네게서 먼저 등을 보인 이상, 너는 절대 그녀의 뒤를 쫓지 못할 거야. 너는 언제나 클로이에게 해가 되는 존재니까, 이 정도 안전장치는 필요하지 않겠니?’

소리를 높여 웃는 ‘그 아이’의 모습에 온갖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레테……. 모든 것을 망가뜨린 원흉. ‘그 아이’만 아니었더라면 클로이는 온전히 제 것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 아이’가 무슨 술수를 써서 시간을 되돌리고 이 시간 속에 나타난 건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그녀와 ‘그 아이’가 마주치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 아이’는 또다시 제게서 클로이를 빼앗아 갈 테니까.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

카일로스는 핏물이 고인 손바닥을 그대로 제 옷에 슥슥 문지르며 마차 위에 올라탔다. 옷이 상당히 더러워졌지만 그다지 상관없었다.

쉼 없이 달리는 마차 안에서 카일로스는 고심했다.

어떻게 해야 클로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후작 영애의 죽음마저도 기뻐하지 않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할까.

거슬러 온 시간에서처럼 레이몬드를 죽여 그의 자리를 빼앗을까. 그러나 이미 변해 버린 시간의 틈새 속에서 그는 황제가 되기 위해 쥐었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레이몬드 또한 거슬러 온 시간을 알고 있으니, 과거처럼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으리라.

대공비 자리를 약속할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대공성이 싫다고 했는데.

시간을 돌아올 거라면 차라리 이보다 더 이전으로 돌아왔다면 좋았을 텐데. 아주 옛날, 어린 그녀와 처음으로 만났던 사박사박 눈이 내리던 그 겨울날이었더라면.

‘어리석은 카일로스, 시간을 되돌린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카일로스는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자신이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행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그 마지막에 등장하여 저를 조롱하며 비웃던 ‘그 아이’의 모습 또한 함께 생각이 났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니 되돌아간 시간 속에서 어디 한번 후회해 보렴.’

자신의 불행을 바라던 ‘그 아이’의 목소리가 마치 저주처럼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불행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불행해졌으면 좋겠구나. 이 손으로 목을 비틀지 못해 안타까운 카일로스야.’

그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리던 카일로스가 돌연 눈빛을 사납게 바꾸었다.

아니다. 이번에 불행해지는 것은 제가 아니었다. 목이 비틀려 죽음을 맞이할 이 또한 제가 아니다. 레이몬드, 로잘라인, 레테…… 제게서 그녀를 앗아 갔던 모든 이들이 불행해질 차례였다.

“각하,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소리에 카일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옷에 묻은 피를 보며 힐끔거리는 사용인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들은 차마 감히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그녀가 떠난 뒤로 삭막해진 대공성의 후원을 거닐었다. 더 이상 돌봐 주는 손길이 없어서일까, 꽃나무들은 망울을 터뜨리지 못한 채 죽어 있었다.

카일로스는 황폐한 나뭇가지를 꺾으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며칠 전 죽은 여자를 무릎 위에 앉히고서 입을 맞췄다. 클로이가 훔쳐보는 것을 알면서, 부러 그리했다.

제가 다른 여자와 있을 때면 그토록 위태로운 눈동자를 흔들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시늉을 하는 그녀가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클로이를 괴롭히는 걸 알면서도 묵인했다.

제가 그 여자의 편을 들 때면 잔뜩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서도 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녀 또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그 눈꼬리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싶었다.

오래전, 저와 첫 입맞춤을 나누며 흘렸던 그 눈물방울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때의 클로이는 정말이지 당장 삼켜 버리고 싶을 만큼 위험하고 황홀하였으니까.

그게 잘못이었을까.

“아니야, 잘못이 아니야.”

카일로스는 자신의 생각을 정정하며 걸음을 옮겼다.

“고작 그 정도로 꺾일 마음이 아니었잖아. 네가 나를 어떤 눈으로 쭈욱 보았는지, 얼마나 깊은 마음으로 나를 품고 있었는지 훤히 아는데. 고작 그 정도로 꺾일 마음이 아니었는데.”

더 이상 클로이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서 방황하던 카일로스는 문득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이젠 헛것이 보이는 걸까.’

카일로스는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눈앞의 인영은 몇 번을 더 눈감았다 떠 보아도 사라지지 않고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 머물렀던 공간이었다.

* * *

포근한 봄날의 공기 속에서 열일곱 살 가량의 카일로스와 열두 살의 작은 클로이가 있었다.

열일곱의 카일로스는 책을 읽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클로이가 종종거리며 따라와 함께 책을 읽었다.

아직 글씨를 모두 깨치지 못한 작은 클로이는 어눌하게 책을 읽었다. 그게 아니잖아, 지적해 주자 양 볼을 부풀리며 뾰로통하니 토라져 버리고 만다. 열일곱의 카일로스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킥킥 웃으며 빵빵한 그녀의 볼을 툭 건드렸다.

‘왜요!’

‘귀여워서.’

작게 반항하는 목소리에도 열일곱의 카일로스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그저 웃으며 답했다.

‘네……?’

멈칫. 그녀의 볼을 가득 채우던 공기가 푸스스 흩어졌다.

‘네가 귀엽다고 했어. 그 말에 무슨 문제라도 있니?’

작은 클로이는 커다란 책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숙부님은 정말 이상해요. 이제까지 나한테 이렇게까지 친절한 사람은 없었단 말예요.’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 클로이, 너는…….’

느른하게 뻗어나간 손이 은사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토록 어여쁘고 사랑스러운데.’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날더러 더럽고 끔찍하다고 했는데……. 클로이는 벌레라고 했단 말예요.’

부끄러운 건지, 작은 클로이는 카일로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카일로스는 잠시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대꾸했다.

‘그건 그 사람들이 멍청해서 그래. 네 가치를 몰라봐서, 그래서 죽은 거야. 바보들.’

‘정말이요? 정말 내가 예뻐요?’

클로이는 여전히 못 믿는 눈치였다. 카일로스도 더 이상 설명하는 걸 포기하고는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책을 읽어 줄까, 클로이?’

‘네!’

작은 클로이가 잽싸게 들고 있던 책을 그에게 건넸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볼 법한 커다란 그림책이었다. 천사가 나오고, 괴물이 나오는 흔한 권선징악의 이야기.

세상에 천사가 어딨어. 다정한 목소리로 동화를 읽어 주며 카일로스는 심드렁하니 생각했다. 그런 게 정말 있었다면 제가 제일 먼저 벌을 받았겠지. 열일곱의 카일로스는 천사를 믿지 않았다.

‘여기요, 숙부님. 이 천사님이요……!’

이때,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클로이가 동화 속 어느 한 장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숙부님을 닮았어요!’

‘나를?’

‘숙부님도 아름답잖아요. 그리고 착하고, 클로이를 구해 줬고……. 그러니까 이 천사님은 숙부님이에요!’

난생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카일로스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보기엔 내가 이 천사 같아?’

‘네!’

작은 클로이는 힘차게 대답하며 화사하게 웃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따스해지게 만드는, 그런 사랑스러운 함박웃음이었다.

스물다섯 살의 카일로스는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다가 찬찬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자란 모습의 그녀가 뜨거운 여름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곁에는 그가 있었다.

열다섯 살의 여전히 어린 클로이와 스무 살의 카일로스는 서로 어깨를 맞댄 채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스무 살의 카일로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적힌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열다섯의 여전히 어린 클로이는 책 위로 두 눈만 빼꼼 내민 채 힐끔힐끔 카일로스를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카일로스가 슬쩍 시선을 내리면 언제 그를 훔쳐봤냐는 듯 책 속으로 고개를 파묻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눈에 띄어서 차마 모를 수가 없었다.

‘책을 거꾸로 들고 있네, 클로이.’

‘으, 으앗!’

열다섯의 클로이는 얼굴을 화끈 붉히며 얼른 책을 바로 들었다.

‘아직도 글을 깨치지 못한 어린 소녀는 아닐 텐데.’

카일로스는 그런 그녀를 키득키득 놀려 대기 바빴다. 클로이는 곧바로 울상이 되고 말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그녀는 차마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고 촘촘한 속눈썹만 힘없이 추욱 늘어뜨렸다.

‘사랑스러워라.’

어느덧 완연한 어른이 된 그의 손바닥이 클로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싫지만은 않은 듯, 클로이는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스물다섯 살의 카일로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 불어 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바닥에 깔린 울긋불긋한 낙엽들 위로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는 자신이 보였다.

아, 저 날이 언제인지 기억난다.

스물두 살의 카일로스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향한 마음을 막 깨치기 직전이었던 열일곱의 클로이가 그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낙엽이 짓밟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스물둘의 카일로스는 그녀가 저를 찾는 것을 알았지만, 무시했다. 도무지 그녀를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숙부님! 숙……!’

제게로 뛰어오던 낭창한 몸뚱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사람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으나 마땅히 함께 들려야 할 비명소리가 없었다.

최근 들어 저를 향한 그녀의 눈빛이 심상찮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일로스는 제게 이성적인 감정을 내비추던 여러 여자들이 이와 비슷한 방법들로 관심을 갈구하던 것을 떠올렸다. 조금, 짜증이 났다.

어쭙잖은 짓은 그만두라고 일침을 날릴 생각으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클로이, 너…….’

그러나 뒤를 돌아선 순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하게 무릎이 찢어진 그녀가 소리 없이 낑낑거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죄송해요, 숙부님. 방해하려던 건 아니고…….’

힐끔, 그녀가 제 눈치를 살피며 소심하게 변명했다.

‘아침도, 점심도 거르셨다고…… 그래서 저는 걱정이 되어서…….’

‘…….’

스물둘의 카일로스는 가만히 입술을 짓씹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느 샌가부터 그의 눈치를 살피는 버릇이 생긴 클로이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빗겨 내렸다.

‘많이, 아프겠군…….’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부러 밝은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눈가가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카일로스는 가만히 몸을 돌려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숙부님……?’

‘업혀.’

‘네? 하, 하지만…… 아니, 전 괜찮…….’

‘어서 업혀, 클로이. 같이 상처를 치료한 뒤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자.’

‘…….’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그의 등에 매달렸다. 업히는 순간에도 찢어진 상처가 아픈지 표정을 움찔거렸다.

스물둘의 카일로스는 열일곱의 클로이를 업은 채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저 멀리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로 차가운 눈송이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겨울, 어느덧 완연한 숙녀가 된 클로이가 그 시린 눈송이를 맞으며 서 있었다. 스무 살의 클로이에게 스물다섯 살의 카일로스가 다가갔다.

스물다섯 살의 카일로스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입을 맞추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도 같은 모습에 그것을 지켜보는 이의 가슴 위로 허전한 구멍이 뚫리는 것만 같았다.

맞닿은 두 입술이 한데 얽히는 두 숨결이…… 이다지도 확연한데. 클로이, 너는 이렇게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입맞춤을 나누는 두 사람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던 현실 속의 카일로스는 그것이 허상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두 발짝 더 다가가는 순간 모든 허상이 산산이 조각나며 멀리 흩뿌려졌다. 동시에 사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클로이가 차가운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아니, 아니야. 이것도 허상이야.”

허상임을 인지하였음에도, 죽은 그녀의 모습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 위에 무릎을 대고 앉은 카일로스가 허상 속 그녀의 시신 위로 손을 가져다대었다.

역시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클로이는 죽지 않았어……. 살아 있어…….”

그는 살아 있는 클로이 가넷슈를 떠올렸다.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자신을 증오하고 혐오한다고 말하던 그 잔인한 클로이 가넷슈를 떠올렸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시간까지 거슬러 왔다. 힘들게 얻은 기회를 이대로 놓을 순 없었다.

“틀림없이 황제가 지금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는 거야. 어떻게든 황제에게서 그녀를 빼내야 해.”

황제에게서 그녀를 빼내기만 하면……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괜찮아, 클로이……. 내 모든 것을 걸고 너를 되찾아 올 거니까……. 내겐 이제 오직 너뿐이야, 너만 다시 내게 오면 돼……. 황위도, 작위도…… 모두 필요 없어. 너만, 사랑하는 너만 있으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마치 소중한 이를 쓰다듬듯 더듬던 카일로스가 돌연 두 눈을 광기로 번득이며 히죽 웃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내 사랑 클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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