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의 이야기Ⅱ
황제의 이복형제이자 루드비히 대공가의 수장인 카일로스는 방계 쪽인 그녀의 가문이 몰락했을 때, 사생아인 그녀를 데려와 후원하며 키워 낸 남자였다. 명실상부한 그녀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그 아이를 귀애해 주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나, 저는 그 아이의 보호자로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카일로스는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레이몬드의 맞은편에 앉아 뜨거운 찻잔을 들어올렸다. 레이몬드는 등을 의자 위로 기대며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걱정이라니, 무엇이?”
레이몬드의 미간 위로 언짢은 듯 작은 주름이 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워 마지않는 그 흉흉한 기세에도, 카일로스는 우아하게 찻잔을 한 모금 들이켰다 다시 내려놓았다.
“아시다시피 그 아이는 이미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습니다. 적당한 짝을 찾아 보내 주는 것이 제 의무이기도 하지요.”
“짝을 찾아…… 보내 준다고?”
레이몬드는 어금니를 짓씹으며 이복형제를 노려보았다. 카일로스는 여전히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 폐하의 정부로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 비록 방계의 사생아 신분이지만 운이 좋으면 나이 든 귀족의 후처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
“스쳐가는 불장난에 너무 오래 휘둘리고 있어요. 더 소문이 퍼지기 전에 그만둬야겠지요.”
“불장난, 이라니.”
분노한 음성이 잇새로 새어나왔다. 자신의 사랑을 고작 ‘불장난’ 따위에 비유하는 카일로스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절대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그 아이를 곁에 두는 게 아닙니다, 형님.”
“…….”
노기 어린 레이몬드의 목소리에 카일로스가 입을 닫았다. 레이몬드는 분했다. 이복형제의 말에 화를 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더욱 분노했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벌써,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클로이 가넷슈, 황제의 정부……. 황제를 유혹해 옆자리를 차지하였으나, 결국은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부정한 여자…….
‘아니야, 클로이는……!’
처음으로 사랑을 깨닫게 해 준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레이몬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제게는 유일한 존재인 그녀가 자신의 정부라 불리며 손가락질 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폐하, 먼저 일어나…… 숙부님?”
옆방에서 잠들어 있다 레이몬드를 찾아 응접실로 건너온 클로이가 카일로스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르륵, 얼굴을 붉히며 가운을 여미는 모양이 그토록 사랑스러웠다. 부끄럽겠지. 가운 사이로 얼핏 드러나는 자신의 흔적이.
“죄, 죄송해요. 숙부님께서 찾아오신 줄을 몰랐어요.”
얼굴을 푸욱 수그리고 우물쭈물하는 그녀의 모습에 온몸을 휘감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레이몬드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클로이.”
쭈뼛거리며 다가온 그녀를 자신의 옆에 앉혔다. 클로이는 이 상황이 영 어색한 듯 자신과 카일로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카일로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끝만 내려다보던 클로이의 시선이 그를 따라 위쪽으로 향했다
아주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안절부절 못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카일로스가 빙긋 웃었다.
“그럼, 클로이.”
레이몬드는 그의 음성 하나하나에 파르르 몸을 떨며 반응하는 그녀를 새삼스럽게 쳐다봤다.
“대공성에서 다시 보자꾸나.”
“……네.”
카일로스는 그대로 뒤를 돌아 밖으로 나갔다. 문득 레이몬드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했다.
클로이가, 나의 클로이가.
어째서 나의 이복형제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클로이.”
레이몬드는 눈가를 찡그리며 그녀의 턱을 감싸 제게로 돌렸다.
“아, 네, 폐하.”
그제야 자신과 마주한 눈동자는 평소와 같이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 * *
의심이 확신으로 변모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레이몬드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유혹하는 것이 분명한 저 몸짓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한다 말해 주지 않는 클로이를.
“카일로스 형님은, 네게 어떤 존재지?”
“네……?”
순간, 맑은 수프를 떠먹던 그녀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바드랍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분이시지요. 가넷슈 가가 몰락하던 날, 저를 불길에서 꺼내주시고 대공성으로 데려와 지금까지 키워 주셨으니까요.”
“…….”
카일로스를 떠올리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레이몬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먹을 꽈악 말아 쥐어야 했다. 자신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었다.
조금 더 애틋하고, 조금 더 상냥한…….
그래,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보이는 얼굴은 바로 이런 얼굴이구나.
레이몬드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녀를 보았다. 습관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향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폐하?”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너의 은인인 그를 어떻게 치하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어.”
느슨하게 풀린 눈매가 작게 눈웃음을 쳤다. 그의 손짓에 클로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무릎 위로 안겼다. 레이몬드는 그 사랑스러운 눈가를 어루만지며 그녀를 따라 짧게 웃었다.
* * *
대공성으로 보낸 황실의 마차가 그대로 돌아왔다. 마부의 손에는 루드비히 대공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사나운 눈으로 편지를 훑던 레이몬드가 벌떡 일어났다.
“루드비히 대공성으로 갈 것이다!”
그의 엄한 목소리에 황궁의 사용인들은 빠르게 나갈 채비를 마쳤다. 대공성으로 가는 내내, 레이몬드는 편지의 내용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버논 백작가에서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슬슬 신부 수업을 하며 혼약 준비를 하여야 하는 바, 송구하오나 앞으로는 마차를 보내지 말아 주십사……]
까드득, 어금니가 맞물리며 갈리는 소리가 났다.
대공성에 도착한 그는 문을 지키는 이들이 주인에게 보고를 올릴 틈도 없이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다.
성큼성큼 걸으며 오래전 방문한 적 있던 대공성의 구조를 떠올리던 그는, 저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카일로스, 자신의 이복형제와 클로이가 마주 서 있었다.
“하…….”
짧은 숨이 레이몬드의 잇새로 터져 나왔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슬픔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그러나 카일로스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지 상냥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사소한 손길에 어깨를 움찔 떠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보이지 않는다고? 저렇게 적나라하게 당신을 사랑하노라,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데?’
레이몬드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양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한참 동안 카일로스와 마주 보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먼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축하드려요. 숙부님.”
“고마워, 클로이. 너라면 그렇게 말해 줄 거라 생각했어.”
남자의 손끝이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상황에서도 화끈 붉어지는 그녀의 양 볼이 이토록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후작 영애의 기대가 커. 약혼식 후 첫 방문일 테니까.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게 준비해야 할 거야.”
“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게요.”
레이몬드는 뒤늦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복형제는 자신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약혼녀를 대접하라, 그렇게 이르고 있는 것이었다.
“기대하마.”
카일로스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턱끝을 잡아 올렸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입술에 레이몬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자신이 입을 맞출 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의 입맞춤을 받아내고 있었다. 말아 쥔 주먹 안쪽에서 생채기가 났다. 레이몬드는 피 내음이 퍼지지 않도록 더욱 거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복형제는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유린하고 있었다. 쾌락을 채우기 위함이든, 혹은 그 어떤 다른 목적이든 저것은 명백히 그녀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자신의 눈에도 확연히 보이는 그녀의 감정을 저 남자가 모를 리 없었다.
조금 뒤, 이복형제가 먼저 그녀를 두고서 자리를 뜨는 게 보였다. 한참 동안 제 자리에 서 있던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남들보다 유달리 예민한 후각이 눈물 내음을 알아챘다.
‘위로해 주고 싶어.’
안쓰러웠다. 클로이가, 작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클로이가. 저토록 서럽게 울고 있는데.
그러나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다가가는 대신 이복형제를 찾아 갔다.
“폐하? 이곳까지는 기별도 없이 무슨 일로 납시셨습니까.”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뻔뻔하게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저 얼굴을 찢어 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참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였다.
“이 편지.”
툭, 이복형제의 편지가 테이블 위로 나뒹굴었다.
“버논 백작가에서 혼담이 들어왔다고? 그 자는 이미 장성한 딸들이 있는데다가 그 딸들조차 클로이보다 스무 살은 많다고 알고 있는데?”
노기어린 음성이 쏟아져 내렸으나, 카일로스는 시종일관 느긋한 태도로 싱긋 웃을 뿐이었다.
“폐하, 클로이와 같은 처지의 아이가 어떻게 감히 백작가의 안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나마 폐하께서 그 아이를 몇 번 찾아 주신 덕에 유명세를 얻어 허울뿐인 백작부인 노릇이라도 할 수 있는 거지요.”
“허울뿐이라니? 그럼, 그 혼담은……?”
“말이 좋아 백작부인이지요. 늙은 백작의 기쁨이 되기 위함이랍니다.”
“어떻게 그대가 그 아이에게 그런 짓을 시킨단 말인가!”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클로이는, 클로이는 그대를……!”
“…….”
내내 여유를 머금던 카일로스의 얼굴 위로 작은 균열이 일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한번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진 것 없는 어린 여자의 마음처럼 장난치기 좋은 것도 없지요. 하여 폐하께서도 그 아이를 몇 번이나 데리고 놀았던 게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정말, 진심으로 그 아이를……!”
“송구하오나, 폐하. 클로이의 거취를 정하는 것은 그 아이의 보호자인 저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와 버논 백작가와의 결합으로 인해 루드비히 대공가가 얻어 낼 것들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조건이고요.”
“내가 데려가겠다!”
레이몬드는 두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단언컨대, 그가 이토록 격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카일로스는 그런 이복아우의 모습을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 아이를 어떻게 데려가시려고요?”
“……황비 제도를 검토 중입니다, 형님.”
느리게 진정을 한 레이몬드가 떫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녀가 원한다면.”
“오래전 없어진 제도일 텐데요?”
“조금 더 검토한 뒤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때까지 클로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레이몬드는 어떻게든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절대 너와 같이 재미 삼아 그 아이를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제 마음에 품은 것이 얼마나 뜨겁고 열렬한 진심인지 보여 주고 싶었다.
반쯤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이복형제를 노려보곤 돌아 나왔다. 마침 복도 맞은편에서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레이몬드를 발견한 클로이는 빨개진 두 눈을 한 주제에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듯 사랑스럽게 웃었다.
“폐하, 어쩐 일이셔요? 숙부님은 폐하께서 몹시 바쁘셔서 한동안 저를 찾지 못할 거라고 하셨는데…….”
“형님이 그렇게 말을 했나?”
레이몬드는 클로이의 얇은 손목을 움켜쥐며 물었다. 형형한 기세에 놀란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을 본 순간, 속으로 작은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놀라게 하려는 건, 흠, 아니었어.”
작은 헛기침을 하며 레이몬드는 변명했다. 답지 않게 얼굴이 붉어진 모습에 클로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클로이.”
레이몬드는 그 해사한 웃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네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이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
“……아니, 아무것도.”
레이몬드는 회피하듯 고개를 저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그녀가 그의 앞으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레이몬드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좋았다. 비록 그녀의 마음이 자신의 것과 같지 않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좋았다. 그녀가 어떤 목적으로 저를 향해 이토록 아름다이 웃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설사 자신의 지위와 부를 이용하려는 것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이용당할 용의가 있었다. 그만큼, 소중한 여자였다. 그렇게 소중한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손에 팔리듯 늙은 귀족의 기쁨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가 널 지켜 줄 것이다.”
“네?”
“그러니까 너는 절대 울지 마.”
그의 말에 당황한 그녀가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레이몬드는 피시식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나는 지금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너도 같이 갈 테냐?”
“아, 저는 숙부님께서 시키신 일이…….”
그녀의 얼굴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그 까닭을 알고 있던 레이몬드는 참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런 것 따위 하지 않아도 좋아. 형님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릴 테니. 지금 당장 가자, 황궁으로.”
“폐, 폐하? 폐하?”
클로이는 당황해 그를 연신 불러 댔으나, 그녀의 자그마한 손이 레이몬드를 밀어 내는 건 불가능했다.
클로이는 결국 발을 동동 구르며 레이몬드의 마차에 함께 올라탔다.
“불안한가?”
“숙부님께서…… 화가 나진 않으실지…….”
끝까지 그 남자의 눈치를 보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레이몬드는 가만히 다독였다.
“내가 누구라 생각하느냐? 비록 너한테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지만, 이 나라의 황제야. 네 숙부쯤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어.”
“아…….”
그녀가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불안한 듯 양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레이몬드는 그녀를 이복형제의 옆에 두고 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손으로 그 남자의 약혼녀를 대접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만 눈을 붙여 둬. 꽤 가야 하니까.”
레이몬드는 공연히 퉁명스레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 새근새근거리는 그녀의 숨소리만이 마차 안을 가득 메웠다.
* * *
클로이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레이몬드의 침대 위였다. 언제 마차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 걸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나?”
레이몬드가 그녀의 옆에 의자를 끌어 앉은 채로 물었다.
“어째서…… 깨우지 않으시고요.”
“네가 너무 곤히 자서 깨울 수가 없었어.”
레이몬드는 짧게 웃으며 답했다. 클로이는 두 팔을 뻗어 그에게 안기려 했다.
“잠깐.”
자연스럽게 자신과 몸을 섞으려는 그녀를 제지하며 레이몬드는 생각했다.
클로이, 너는 그 동안 어떤 마음으로 내게 안겨 왔던 걸까.
레이몬드는 이 관계를 보다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신의 쾌락이 아닌 온전한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길 바랐다.
“일어날 수 있겠나?”
“물론이요.”
클로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일어났다. 레이몬드는 느리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끼자, 그녀만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폐하?”
“네게 보여 줄 게 있어.”
레이몬드는 맞닿은 손바닥이 조금씩 습윤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자박자박 걸어가던 그는 문득 그녀를 돌아봤다. 어디를 가는지, 왜 이러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순종적으로 따라오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화가 났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몰랐으나, 이제는 너무나 확연히 보였다. 클로이 가넷슈는 자신의 의지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그토록 쉽게 휘둘리는 여자였다.
이렇듯 그녀의 의지를 말살한 이가 누구일지 짐작이 가서 레이몬드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여기는……!”
“온실이야. 오직 아스타 제국의 황제만이 발을 디딜 수 있지.”
“그런 곳에 제가 함께 들어가도 괜찮나요?”
“물론.”
레이몬드는 그녀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
사랑하는 사람, 레이몬드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온실 안쪽으로 이끌었다.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들로 둘러싸인 채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를 두고서 레이몬드는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흠흠.”
작은 헛기침 소리에 그녀가 싱긋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정말 굉장해요, 폐하. 소문으로 전해 들었던 황궁의 온실을 보여 주셔서 정말 영광이에요.”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데리고 와 줄 수 있어.”
기뻐하는 기색이 은근히 드러나는 그녀를 보자 레이몬드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 꽃.”
레이몬드는 불쑥 붉은 꽃송이를 그녀에게 건네었다.
“아스타로트야.”
제국의 상징인 붉은 꽃, 아스타로트. 그 자체로 제국과 동일시되는 붉은 꽃은 레이몬드 자신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건…….”
클로이는 그가 내미는 꽃송이를 쳐다보며 당황한 듯 말끝을 더듬었다.
“아스타로트를, 나를 네게 주고 싶어.”
“아…….”
“네가 좋아.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클로이. 나는…… 절대 이 마음을 강요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레이몬드가 그녀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고백을 읊었다.
“언젠간 네가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어. 너도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어.”
“폐하, 저는…….”
언뜻 그녀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나는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붉은 꽃송이가 얼결에 그녀의 손에 들렸다. 다소 성급한 고백과 함께 레이몬드는 그녀의 허리를 꽈악 끌어안았다.
“너도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 그때 말해 줘.”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녀에게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작은 신음과 함께 터져 나온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나를, 사랑한다고.”
“…….”
갑작스러운 고백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두 눈만 깜빡이는 그녀를 보자, 레이몬드는 슬슬 마음이 초조해지고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
“…….”
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거지. 부담스러운 걸까.
……그래, 부담스럽겠지.
이어지는 긴 적막을 견딜 수 없었던 레이몬드가 더욱 강하게 그녀를 껴안을 적에, 그의 품 안에서 사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찬찬히 고개를 내리자 느리게 눈을 맞춘 그녀가 붉은 눈동자를 나른하게 휘며 말했다.
“전 이미 폐하의 사람인걸요.”
“…….”
레이몬드의 입술 사이로 나릿한 한숨이 쏟아졌다.
차라리 제가 조금만 더 아둔했더라면. 그래서 그녀의 저 사랑스러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모두 진실로 치부할 만큼 어리석었더라면.
“무거운 한숨이네요.”
클로이는 푸스스 웃으며 레이몬드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대체 무엇이 그리 근심인 거예요? 제게 말씀해 주셔요. 함께 나눠요, 폐하.”
“아니야, 근심 같은 게…… 있을 리가.”
레이몬드는 그녀를 따라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아직은 과욕임을, 가슴 위로 다시 한번 되새기며.
* * *
그날 이후로, 레이몬드는 여전히 종종 루드비히 대공성으로 마차를 보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들이 만나는 장소가 황제의 침실이 아닌 다른 곳이라는 점이었다.
그녀가 마음에 들어 했던 황궁의 온실, 레이몬드가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꽃들이 만발한 황제궁의 후원…….
클로이는 미묘하게 달라진 그의 태도에 조바심을 갖는 듯했다.
“어째서 저를 침실에 들이지 않는 거예요?”
“그냥…….”
레이몬드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람결에 포스스 흩날리는 머리카락마저 사랑스러웠다.
정말, 단단히 홀려 버린 게 틀림없다.
“가끔은 그저 얼굴만 마주 보아도 좋으니까.”
“…….”
“넌 아니더냐?”
그의 물음에 클로이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좋아요, 폐하.”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담으며 둥글게 휘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저 두 눈에 가득 담긴 긴장을 감추지 못했었는데, 두 번의 계절이 지나간 사이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평온해져 있었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잔잔했다. 레이몬드와 클로이를 둘러싼 그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하다고 여겨지는 때였다.
실상은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바깥에서 레이몬드는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다리아의 친정인 캐롤라인 공작가를 위시한 귀족들과 국교인 라미에 교의 교단은 레이몬드가 다리아 외의 다른 부인을 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일부이처가 불가능하다고?’
그들의 주장을 잠자코 듣던 레이몬드는 차갑게 웃으며 그들의 말을 되뇌었다.
그래, 그들이 옳았다. 비록 허울뿐이라 해도 다리아는 엄연한 황제의 부인, 그녀가 존재하는 한 클로이의 자리는 언제고 위태로웠다.
‘그대들의 말마따나 나의 부인은 오직 단 한 명만이 존재해야겠지.’
하여, 레이몬드는 선언했다. 오직 클로이 가넷슈만을 자신의 부인으로 둘 것이라고.
“너는 디저트를 먹을 때도 새 모이처럼 먹는군.”
레이몬드는 조각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먹는 클로이를 바라보며 느른하게 턱을 괴었다. 클로이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저런, 먹는 걸 방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계속 먹어.”
“아니에요. 그보다는…… 계속 저만 먹은 것 같아서요. 폐하께서는 왜 안 드세요?”
“나는 네가 먹는 것만 봐도 즐거워.”
“네?”
클로이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레이몬드를 쳐다봤다.
“……폐하는 정말 이상한 분이셔요.”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속삭임에 레이몬드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근래의 그는 이상했다. 굉장히 이상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이토록 멍청하고 저돌적일 줄은, 그 당사자인 레이몬드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일이다.
“치즈 케이크를 더 가져다 달라고 할까?”
레이몬드는 그녀가 깨작거리며 남긴 조각 케이크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요, 저는 초코 케이크를…….”
“넌 치즈 케이크를 좋아하잖아.”
단정적인 어투에 클로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요, 폐하! 저는 치즈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정말이요!”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그녀의 모습마저도 귀엽게만 느껴지니 이것 참 큰일이었다. 레이몬드는 피식 웃으며 검지를 뻗어 그녀의 이마를 꾸욱 눌렀다.
“내가 치즈 케이크를 싫어한다는 헛소문 때문에 내게 맞추는 거라면 그만둬. 네 식성도 몰라볼 정도로 눈썰미가 없진 않으니까.”
“어, 그게…….”
클로이는 울상이 되어서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댔다. 레이몬드가 종을 울리자 시종이 다가와 새 디저트를 내왔다.
레이몬드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치즈 케이크를 쪼아 먹는 클로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그녀가 쭈뼛거리며 건네는 포크를 한 입 베어 먹으며 작게 웃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정말로 치즈 케이크를 싫어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함께 먹어 줄 의향이 있었다.
어디 디저트 한 입뿐이겠는가.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클로이 가넷슈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남자였다.
“네가 좋아.”
뜬금없이 튀어나온 고백에 클로이가 포크를 입에 문 채로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레이몬드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클로이.”
“…….”
클로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레이몬드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 * *
클로이 가넷슈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레이몬드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직접 루드비히 대공성까지 방문해 클로이를 황궁까지 데려왔다.
“다리아, 너와 이혼을 할 거다.”
자신의 아이까지 배게 된 그녀를 아무런 이름도 없이 황궁에 둘 수 없었다. 그는 제일 먼저 황후 다리아를 찾아가 선언했다.
“클로이 가넷슈, 그 예쁘장한 아가씨 때문이야?”
다리아는 그런 레이몬드의 반응을 짐작이라도 한 듯 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정말 예쁘더라, 여자인 나조차도 반할 만큼. 하마터면 레이몬드 따위는 버리고 내 정부가 되라고 말할 뻔했어.”
“클로이를 만났나?”
레이몬드의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지? 너, 설마 그 아이를 위협이라도 한 건……!”
“내가 미쳤니, 레이? 내가 너를 두고 네 여자와 치정 싸움이라도 벌일까 봐?”
다리아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끔찍해하는 그 표정에 레이몬드는 안도했다.
잠시나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고통을 받지는 않았을까, 하는 그런 두려운 생각이.
“아이를 달라고 했지. 아이를 빼앗지도 않을 거고 그저 잠시 맡아 너의 후계로 잘 키워주겠다고. 아이 또한 그녀를 어머니로 알고 자라게 할 거라고.”
어쩌면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을 것이다.
레이몬드가 다리아와 이혼을 강행한다 하여도 클로이 가넷슈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굉장히 험난한 과정이 펼쳐질 테니까.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상처를 받게 될 이는 누구보다도 그녀일 테니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부귀를 주겠다고 약속했지, 아스타 제국 황후의 이름을 걸고서. 그런데 거절을 하더라고.”
“……클로이가 거절을 하였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저 대외적으로 내 아이라 알려질 뿐이지 아이를 생각해서도, 그녀를 생각해서도 가장 좋은 제안이었을 텐데.”
“…….”
레이몬드는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거렸다.
비록 제게 완전히 마음을 열어 주지는 않은 그녀이지만, 저와의 아이만큼은 소중히 여겨 주는 걸까. 어쩌면, 그녀가 제게 마음을 온전히 여는 것 또한 얼마 남지 않은 일인 게 아닐까.
“어머, 레이. 너 그 표정은 뭐니? 기분 나빠!”
다리아가 미묘하게 붉어진 레이몬드의 얼굴을 보며 인상을 썼다.
“큼, 흠. 아무튼 나는 이혼을 강행할 거야. 미리 알아 둬.”
“잘나신 캐롤라인 공작 각하께서 가만있지는 않으실 텐데.”
“그래도, 할 것이다. 나는 클로이를 황궁의 이름 없는 여자로 남기고 싶지 않아.”
“사랑에 빠진 레이몬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그걸 보게 됐네.”
다리아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부채질을 했다.
“그 작던 레이몬드가 자라서 제 여자를 책임지려 하고. 참 대견한걸.”
“작았다니, 누가.”
레이몬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정색했다.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다리아는 피식 웃으며 흔들던 부채를 접었다.
“레이, 네가 이혼을 요청하면 나는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라는 건 잘 알아. 귀족들이 제아무리 반박을 한들 이혼서류에 서명을 하는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이 나라의 황후가 아니게 되겠지. 하지만 이왕 네 책임감을 이용했던 뻔뻔한 여자였던 김에 조금 더 뻔뻔한 부탁을 해 보려고 해.”
“클로이에게 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든.”
거침없이 흘러나온 그의 답변에 다리아는 다시 한번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려야 했다.
“레이몬드,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나와 이혼을 한다는 게 곧 그 아가씨와 결혼을 하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니니까.”
“나도 알아.”
레이몬드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제 부인으로 인정받기까지 굉장히 고되고 험난한 길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가 날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내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슬픔을 안겨 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 말에 놀란 다리아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레이? 그 아가씨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
“설마 짝사랑? 제국의 황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가 외사랑을 앓는 중이라고?”
“입 닥쳐, 다리아.”
결국 레이몬드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고 나서야 다리아는 추궁을 그만뒀지만, 그녀의 두 눈엔 여전히 흥미와 궁금증이 가득 남아 있었다.
“네가 이혼의 대가로 원하는 게 뭔지 제대로 정리해서 문서화시켜 보내도록 해.”
레이몬드는 그런 다리아의 호기심을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정말, 마지막까지 짜증나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 * *
레이몬드는 끝내 다리아와의 이혼을 강행했다.
그 대가로 상당한 크기의 땅을 위자료 명목으로 내어 주었으니 그녀가 그곳을 잘 경영하여 세를 키우는 데 성공한다면 숙부의 견제로부터 자유로워지리라.
‘아니, 그 여자라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제 숙부를 잡아먹을 지도 모르지.’
다리아는 자신이 목적을 이루는 날에 제게서 받아간 땅을 돌려주겠노라 말하였지만, 레이몬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라면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 땅을 어지간한 이들보다 더 훌륭하게 일굴 것이다. 문제는 교단과 귀족 의회의 반발이었다.
‘어쩌면 캐롤라인 공작의 목적은 황실과 연을 맺으려는 게 아니라 그 여자를 황궁 속에 가둬 두고자 함이었는지도.’
레이몬드는 귀족들의 가장 앞줄에서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던 캐롤라인 공작을 떠올렸다.
캐롤라인 공작령을 훨씬 웃도는 크기의 땅을 위자료로 내어 주었음에도 여전히 저토록 강경하게 나오는 것에는 필히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민이 있으신가요, 폐하?”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있던 클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레이몬드는 뒤늦게 자신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음을 깨닫고 황급히 얼굴을 폈다.
평범한 남자와 비교해서 제 얼굴이 굉장히 험악한 편이란 걸 알았기에 그는 그녀의 앞에서 되도록 상냥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나 그녀의 뱃속에 있을 아이가 제 표정을 보고 저와 같이 험악한 얼굴로 태어나면 큰일이지 않은가.
“물론 아주 많지, 고민.”
레이몬드는 빙긋 웃으며 봉긋해진 그녀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우리의 아이가 제발 나를 닮지 않길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나른하게 흩어지는 게 보였다.
최근 들어 그녀는 종종 졸음이 밀려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주위를 응시할 때가 많았다. 그것이 레이몬드를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도 모르고서.
“이상한 말씀이에요. 폐하의 아이인데 폐하를 닮지 않을 순 없잖아요.”
“그럼 눈동자 색깔만 나를 닮고 나머지는 너를 닮았으면 좋겠군.”
그 말이 우스웠는지, 클로이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와 제 사이에서 나온 아이가 다른 눈동자 색을 가질 리 없잖아요.”
두 사람의 붉은 눈동자가 서로를 담은 채 가느다랗게 휘었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아랫배에 조심스레 귀를 가져다대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저 행복했다.
비록 이 바깥에서는 어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작은 공간 안에서만큼은 눈물겹도록 행복한 나날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아이가 태어났다. 빨갛고 쭈글쭈글한 아이는 그녀를 닮았다. 그녀를 닮아 작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
“…….”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와 클로이 가넷슈는 한참 동안이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황궁에서도, 대공성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린 적이 없었기에 두 사람은 강보에 싸인 작은 아이가 굉장히 어색했다.
“폐하, 클로이 님. 그러지 말고 아기님께 인사를 해 주세요. 이렇게 두 분만 쳐다보고 있잖아요.”
“어…….”
“크흠…….”
애석하게도 아이에겐 유모가 없었다. 명망 높은 귀족가의 여인들은 클로이의 출신을 문제 삼아 그녀의 아이를 맡기 꺼려했고, 황제의 핏줄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아무에게나 맡길 수도 없던 탓이다.
그 덕에 굉장히 이례적이게도, 레이몬드와 클로이의 아이는 생모의 품에서 키워지게 되었다. 문제는 그 생모가 아이를 어색해한다는 점이었다.
“……너무 작은데.”
시녀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의 모습에 레이몬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는 작았다. 지나치게 작았다.
그래서 걱정이 됐다. 혹시나 제 손이 잘못 닿아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
붉은 눈동자가 레이몬드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레이몬드는 클로이의 것을 닮았다 주장하고, 클로이는 레이몬드의 것을 닮았다 주장하는 그 보석처럼 빨갛고 사랑스러운 눈동자였다.
그 순간, 레이몬드는 홀린 듯이 아이의 통통한 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이의 보드라운 살갗과 손끝이 맞닿은 순간, 흠칫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
시녀들은 차마 웃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안면 근육을 씰룩거렸다. 상대는 그 무자비하다고 소문난 황제 폐하이다. 감히 웃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시녀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레이몬드는 그저 생각보다 너무 연약한 갓난아이의 피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경직된 손끝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아이의 얼굴을 쓸었다.
그 순간, 아이의 입가로 자그마한 볼우물이 피어났다.
“방금 보았느냐!”
레이몬드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기님도 폐하를 알아보나 봅니다.”
가슴 위로 뜨겁고 뭉클한 감정이 쏟아졌다. 손끝에 닿는 자그마한 온기가 그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자신을 향해 방싯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묘한 전율마저 일었다.
시녀들은 모두 고개를 내리깔고 있었고, 클로이만이 두 눈을 깜빡이며 그 모습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폐하.”
클로이가 자신을 보는 시선에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저도 한번 해 봐도 되나요?”
“해 보다니. 무엇을 말이냐?”
“그…… 손…….”
그녀의 두 눈은 아이의 뺨 위로 어색하게 맞닿아 있는 그의 손을 보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아주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어쩐지 부끄러웠으나 짐짓 부끄럽지 않은 척 황제의 위엄을 살린 얼굴로 대답했다.
“네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고 싶다만, 아이가 이렇게 좋아하니…….”
그러나 그가 말을 이어갈수록 점점 풀이 죽어 가는 클로이의 얼굴에 그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야 했다.
“아니다, 클로이! 아이도 분명 나보다는 너를 더 좋아할 것이다!”
“정말이요?”
클로이가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쉽게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레이몬드는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어 조심스럽게 아이의 얼굴 위로 가져다댔다. 그녀의 연약한 손끝이 보다 더 연약한 아이의 뺨 위로 닿았다.
두 눈을 깜빡이던 아이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방싯방싯 웃기 시작했다.
“……폐하.”
클로이가 아이의 옴폭 팬 보조개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기분이 이상해요.”
“…….”
“심장이 콩콩 뛰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간질간질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그래, 클로이.”
레이몬드도 그녀를 따라 아이를 쳐다보며 답했다.
“그리고 그건 ‘좋아한다’는 감정이다.”
그의 입매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내가 널 볼 때 항상 느끼는 것과 닮은 감정이거든.”
“…….”
클로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아이를 쳐다볼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아이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앉아 있어야 했다. 아이가 잠들 때까지.
* * *
“아이의 이름을 정했어요.”
클로이는 익숙하게 아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
“에스델.”
그녀는 출산 직후에도 꽤 오랫동안 아이의 이름을 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레이몬드는 그런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려 주었다. 아이를 어색해하고 어려워하던 그녀가 스스로 아이를 받아들일 때까지.
“예쁜 이름이구나.”
레이몬드는 기뻐하며 그녀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어린 에스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에스델.”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손짓으로 아이의 뺨을 쿡쿡 찔러 댔다. 그때마다 자신을 향해 방싯방싯 웃는 어린 에스델이 사랑스러웠다.
에스델, 에스델. 어쩌면 이렇게 이름마저 사랑스러울까.
아, 그래. 그녀가 지어 준 이름이니까. 그러니까 이토록 사랑스러운 게지.
레이몬드는 어린 에스델을 안고 있는 클로이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아이의 이름을 무어라 지을까 고민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어여뻐서 꼬옥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에스델이 있으니 참아야지.’
잔잔한 미소가 절로 입가에 걸렸다. 다른 이들이 보았더라면 굉장히 놀랐을, 오직 클로이 가넷슈의 앞에서만 보이던 그 미소가 이제는 그녀와 어린 에스델에게 향했다.
아이는 그의 바람대로 클로이를 닮았다. 그러나 클로이는 자꾸만 아이가 레이몬드를 닮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성격만큼은 꼭 폐하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어림도 없는 소리, 라고 레이몬드는 생각했다. 저 작고 연약한 생명체가 자신의 성격을 닮아 버린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제국의 재앙이 아닐까.
“오늘 형님께서 방문할 예정이야.”
툭 내뱉은 말에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이요?”
“비록 지금은 이름뿐이라지만 그는 너의 후견인이지. 본래라면 진작 찾아왔어야 했어.”
그녀의 얼굴 위로 감도는 빛깔에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였다.
‘아직은, 인가.’
레이몬드는 가슴이 허해지는 것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아직은 그녀의 마음이 온전히 제게 열리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카일로스 루드비히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쩌면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짧은 사이에 기다림에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모른다.
* * *
“대공성에 방문하고 싶어요.”
클로이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레이몬드는 표정을 굳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인자하게 웃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아니요, 저 혼자가 아니라…….”
쭈삣거리며 눈치를 보는 모양에 레이몬드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번졌다.
“혼자가 아니라면?”
“제겐 친정과도 같은 곳이니까요. 폐하와 함께 가고 싶어요.”
당연히 어린 에스델과 함께 가고 싶어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언급한 것은 어린 에스델이 아니라 놀랍게도 레이몬드였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부탁에 기쁘면서도 조금 난처했다. 기실, 그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에스델을 낳았으나 여전히 클로이는 아스타 제국의 황후가 아닌 ‘레이디 가넷슈’였다. 아직도 그녀의 거취 문제로 갑론을박이 이는 상황에서 황궁을 비워야 하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클로이가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조금 욕심을 부린 걸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을 차지했던 이복형제의 앞에서, 이제 그녀는 당신이 아닌 내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잠시 내어 본 욕심이 화근이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치졸한 함정이군요, 형님.”
발을 내딛자마자 대공성의 병사들에게 우르르 에워싸인 레이몬드는 형형한 눈으로 이복형제를 노려보았다.
이복형제의 병사들이 창검을 들이밀며 레이몬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너무나 얄팍한 그 수법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그가 누구던가. 전쟁의 신이라고도 불리었던 남자가 아닌가.
“수백 명의 병사를 데려온들.”
레이몬드는 스산하게 웃으며 칼을 뽑았다.
“이 내가 고작 형님의 병사들에게 당할 위인으로 보입니까?”
“그럼요.”
카일로스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아우님께도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니까요.”
유려한 목소리로 뱉어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일로스는 한 발짝 떨어져 있던 클로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클로이!”
레이몬드는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는 본디 대공성의 식구였으니까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안일함이 문제였다.
카일로스의 칼이 그녀의 목에 드리웠다. 그러니까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지 모르는 그 남자의 칼이 말이다.
“젠장, 클로이는 관계없잖아!”
“검을 내리세요, 아우님. 그럼 이 아이는 살려 줄게요.”
설마, 정말 죽이려는 걸까? 그래도 몰락한 가넷슈 가에서 그녀를 구원해 준 남자였는데. 오랜 기간 그녀를 대공성에서 키워 주고 후원해 준 남자였는데.
‘가진 것 없는 어린 여자의 마음처럼 장난치기 좋은 것도 없지요.’
문득 오래 전, 이복형제가 그녀를 두고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그 아이와 버논 백작가와의 결합으로 인해 루드비히 대공가가 얻어 낼 것들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조건이고요.’
그녀를 그저 사용하기 좋은 체스 말처럼 말하던 그가, 정말로 그녀를 죽이지 못할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도?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깊은 절망과 함께 탄식이 터져 나왔다. 레이몬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검 끝을 바르르 떨었다.
그런 레이몬드의 반응을 즐기듯 관망하던 카일로스가 여유로이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검을 바짝 들이댔다.
주르륵.
검날에 스친 살갗 위로 빨간 핏물이 흘러나왔다.
“……!”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피가 흐르고 있다. 그녀의, 그녀의 몸에서…….
“저런, 망설이고 있네요. 그럴수록 위험해지는 것은 이 아이일 텐데.”
키득키득 웃는 소리에 귓가가 멍해졌다. 확실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클로이는, 작고 연약한 나의 클로이는,
다가올 죽음을 예감한 듯,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고통에 헐떡이고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한 줄기 눈물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그만 둬, 카일로스 루드비히!”
카일로스는 더욱 소리 높여 웃으며 보란 듯이 검날을 세워 그녀의 살갗을 헤집었다. 잔인하게도, 한 번 벌어진 곳을 연이어, 느리게, 아프게.
흐르던 눈물이 핏물에 섞여 그녀의 하이얀 드레스를 적셨다.
‘폐하? 왜 그렇게 쳐다만 보셔요?’
‘아, 미안, 클로이. 오늘따라 유독 예뻐서.’
마차에 오르기 전, 넋을 잃고 쳐다보다 멋쩍게 흘러나온 말에 그녀는 반 박자 느리게 반응을 보였다.
‘흰색 드레스를 입어 보는 건 처음이라 어색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어째서 고민을 했지? 정말 예뻐, 클로이. 그러니까 이상한 걱정은 하지 마.’
그녀는 마차에 오르고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까요?’
그것은 결코 레이몬드의 눈에 그녀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임을 의식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레이몬드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다른 사람’이란 틀림없이 ‘카일로스 루드비히’일 것이라고.
하이얀 드레스 앞섶이 서러운 눈물과 붉은 핏물로 적셔졌다.
대체 왜, 왜 그러는 거야, 카일로스 루드비히. 너도 알잖아, 그녀가 너를 사랑한단 걸. 알면서도 오랫동안 농락해 온 거잖아. 그런데 하필이면 네가, 네 손으로 그녀를…….
“흣…….”
내내 신음을 삼키던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물을 쏟아 내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레이몬드는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검을 집어 던졌다.
“클로이!”
그 순간 대공성의 병사들이 그를 붙잡았다. 이복형제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떨구는 것이 보였다.
아스타 제국의 황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오직 그녀만을 두 눈으로 쫓았다.
카일로스가 근처에 있던 기사에게 그녀를 짐짝처럼 내맡기는 게 보였다. 둔탁한 것이 그의 온몸을 두들겨 팼다.
그 와중에도 그녀가 걱정되는 것을 보면 자신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라고. 레이몬드는 스스로를 자조하다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귓전을 울리는 발소리에 레이몬드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도 예민한 그의 귓가로 사람들의 발소리와 희미하지만 무척 그리운 발소리 하나가 섞여 있었다.
‘클로이……!’
레이몬드는 곧바로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아기 새의 깃털이 내려앉듯 사뿐사뿐한 그 걸음걸이는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끼이익.
거친 쇳소리와 함께 컴컴한 감옥 안이 환하게 밝혀졌다. 레이몬드는 잠시 눈가를 찌푸렸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
그의 잇새로 신음과도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클로이…….”
그녀였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 있던 모양이다. 저 연약한 목덜미에 하이얀 붕대를 잔뜩 감고서.
“……!”
눈이 마주쳤다고 느껴진 순간,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흔들린다. 차마 제게 다가오지 못하고 방황하던 눈동자가 결국 발끝으로 떨어져 내린다.
레이몬드가 그녀를 향해 무어라 입을 달싹이려 할 적에, 내내 무시하고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비웃듯 내리꽂혔다.
“몰골이 참 말이 아니네요, 폐하. 아니, 이젠 그냥 아우님인가.”
카일로스 루드비히, 자신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이복형제의 목소리였다.
아무런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던 남자였다. 그랬기에 견제할 필요성도, 가치도 느끼지 못하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이토록 철저하고 교묘하게 자신의 뒤통수를 칠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 그는 제 앞에서 야욕을 숨기고 미소를 꾸며 내었단 말인가.
“클로이는 당신을 낚기 위한 미끼였지요.”
미끼, 라니. 레이몬드는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바로 부르튼 살갗 위로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것도 모르고 빠져드는 꼴이란.”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메마른 감옥 안을 울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당신이 원하던 취향에 너무나도 부합하는 여자였잖아.”
레이몬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복형제의 말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클로이 가넷슈는 그가 자신을 낚기 위해서 처음부터 공들여 빚어 낸 존재라고. 그 사랑스러운 얼굴, 말씨, 몸짓 모두 자신을 낚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긴, 이 정도 미색이라면 이상함을 알면서도 빠져들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몸이지요.”
카일로스는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몬드는 자신을 마음껏 비웃는 이복형제를 무시한 채 그 뒤편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클로이 가넷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음이 여린 그녀는 자신의 이복형제처럼 거머쥔 승리를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설핏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저러고 있을까. 멍청한 내 여자. 사랑하는 남자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으면서 왜 기뻐하지도 못하고. 즐거워하지도 못해.
“다행이군.”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이 너만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슬픔에 젖은 붉은 눈동자가 잔뜩 망가진 모습의 자신을 담고 눈물을 흩뿌렸다.
오래 전, 루드비히 대공성에 방문했을 때 이복형제 때문에 울었던 그녀를 기억한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자신 때문에 울고 있었다.
“제게 화가 나진 않으세요?”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이지. 하지만 이제와 그걸 따져 무슨 소용일까.”
끝없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보며 레이몬드는 생각했다. 어쩌면 아주 조금은, 그녀도 제게 마음을 연 게 아닐까.
“그래도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네가 있어.”
레이몬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담겼다. 마치 괜찮다고 달래고 어르는 듯한 그 표정에 클로이는 휘청거리는 두 다리를 붙들려고 발끝에 힘을 꽈악 주어야 했다.
“그만.”
딱딱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어냈다. 카일로스가 걸음을 옮겨 클로이를 향한 레이몬드의 시선을 차단했다. 레이몬드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조악한 자기 위로는 그만 둬요, 아우님. 처음부터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그저 값싼 동정일 뿐.”
무엇이 그의 심기를 사납게 만들었는지, 카일로스는 듣기 불편한 말들만 골라 했다. 레이몬드는 가만히 이를 악물었다.
아니, 아니야. 클로이는 인형이 아니야. 비록 당신 때문에 오랫동안 억눌려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의지가 있어.
“돌아가자, 클로이.”
몸을 돌린 카일로스가 클로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레이몬드는 차츰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클로이, 내가 죽은 뒤의 너는 행복할까?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어.
비록 너의 감정을 가두고 짓밟은 남자지만, 그래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너를 지키기 위해 선택했던 내 죽음이 부디 헛되지 않도록.
* * *
이복형제는 레이몬드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의 몰락을 준비해 왔다.
이미 레이몬드에게서 등을 돌린 귀족들과 교단은 그의 몰락을 모른 체했고,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자신이 짓지 않은 죄목들을 이유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죽음의 순간, 그 자리에 클로이 가넷슈는 보이지 않았다.
그 또한 다행이라 생각했다. 마음 여린 그녀가 또다시 슬피 우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목이 떨어지기 직전, 레이몬드는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를 닮은 아이를 생각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 그래도 평생을 걸쳐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두 사람만은 무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두 눈을 내리 감았다.
곧이어 날아오는 쇠붙이가 그의 살갗을 갈랐다.
불과 몇 개월 지나지 않은 날의 일인데, 아득히 먼 옛 일처럼 느껴지는 장면 하나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포근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는 황궁의 온실.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그 가운데 홀로 눈부시게 빛이 나던 클로이가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요람가를 부르고 있었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천사들의 성이 있어요.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나를 향해 웃어 줘요. 꽃과 나비와 함께 춤을 추고, 행복의 노래 부르며 잠에서 깨어나면 어머니가 나를 안아 주지요.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여요, 나를 사랑한다고…….’
은은하게 흐르는 노랫소리에 맞추어 새근새근 잠이 드는 에스델의 얼굴은 그토록 평온하였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던 클로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레이몬드는 홀린 듯이 그녀를, 그녀의 웃는 얼굴을, 그녀에게 안겨 고이 잠든 에스델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죽는 순간까지 잊히지 않을 장면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 * *
“레이몬드! 그날 네 침실에 여자가 머물렀다는데, 정말이야?”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다지 그립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도 레이몬드의 눈썹이 불쾌감에 찌푸려졌다.
“일어난 거 알고 있어! 방금 눈썹 꿈틀거렸다니까? 자는 척 그만 하고 일어나, 레이몬드!”
방금 전까지 그럼에도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던 레이몬드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죽는 순간까지 이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려야 하다니, 정말 끔찍한 인생이 아닌가.
“클로이 가넷슈, 루드비히 대공의 후원을 받는 여자라지? 그저께 있었던 신년 무도회 때 처음으로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고.”
조금 이상했다. 이건 그의 기억에 없는 대화였다.
“그 여자가 네 침실에 하룻밤을 머물렀다고 벌써 황궁 내에 소문이 자자하단 말이야!”
레이몬드는 점점 몸집을 불리는 의문에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영원히 감겨야 할 그것이 조금씩 뜨이며 환한 빛을 받아들였다.
깜빡, 깜빡.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자 그 안으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헉……!”
레이몬드는 태어나 처음으로 소리 내어 놀란 탄식을 터뜨렸다. 악몽…… 인가?
“왜 그래, 레이몬드?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악몽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이마 위로 느껴지는 촉감은 꼭 현실처럼 생생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황궁의를 불러 줄까?”
“캐롤라인 가의 마녀…….”
느릿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자신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동시에 악몽이라 여겼던 여자가 두 눈을 뾰족하게 뜨며 자신을 노려보았다.
“아니, 갑자기 왜 시비를 거는 거야. 레이, 내가 그 여자에 대해 조금 알아본 게 그렇게까지 불쾌한 일이야?”
“…….”
레이몬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험한 고문으로 으스러지고 망가진 손이 아닌, 깨끗하게 관리 받은 손이었다. 조심스럽게 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살아…… 있어?”
“레이몬드?”
“……!”
다리아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레이몬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궁의 침실이었다. 그녀와 에스델의 흔적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삭막한 침실…….
멍하니 서 있던 레이몬드는 돌연 다리아의 손목을 억세게 잡아당겼다.
“아파, 레이!”
“내가, 신년 무도회 때 무슨 짓을 했다고?”
“레이……?”
다리아는 잠시 눈가를 찡그리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그의 물음에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저께 있었던 신년 무도회 때, 네가 웬 여자를 이곳에 들였지. 여자는 하룻밤을 꼬박 보낸 뒤에 돌아갔고.”
“그 여자의 이름이…….”
“클로이 가넷슈. 루드비히 대공가의 몰락한 방계 출신 아가씨야. 사생아라는 소문도 있고.”
“…….”
레이몬드는 느리게 다리아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창가로 걸어갔다. 굵은 손바닥으로 창틀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믿을 수 없게도, 창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야, 분명 여름이었는데…….’
손끝을 파르르 떨던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계절 말고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그는 지금…… 시간을 거슬렀거나, 혹은 아주 길고 생생한 꿈을 꾸었거나.
‘아니, 이건 절대 꿈이 아니야.’
레이몬드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시간을 거슬렀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녀와 밤을 보낸 이후로.
“젠장.”
기뻐해야 하는 걸까, 슬퍼해야 하는 걸까.
자신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클로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녀와 밤을 보낸 이후란 말인가.
“엮이지 않는 게, 좋은 일이겠지.”
레이몬드는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애써 외면하고자 했다.
클로이 가넷슈,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를 죽음으로 인도할 여자.
그가 아무리 사랑에 미친 남자였다 하더라도, 또다시 허무한 죽음을 맛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녀의 잔영을, 레이몬드는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마차를 보내.”
이것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보았던 그녀가 이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지, 제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는 저와 엮이지 않음으로써 더 행복할 수 있을지.
그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루드비히 대공성으로.”
거슬러 온 시간에서보다 훌쩍 이른 시기였다. 그리고 그때와 달리, 그가 보낸 마차는 그녀를 태우지 못한 채 다시 돌아왔다.
“루드비히 대공가에서 마차를 돌려보냈습니다.”
“뭐라고?”
레이몬드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서슬 퍼런 황제의 음성에 시종장은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게…… 레이디 가넷슈의 몸이 좋지 않아 외출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몸이 좋지 않다니!”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다리아와 시종장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불과 이틀 전 아침까지 이곳에 머물다 돌아갔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생생했던 그 오래전, 처음 밤을 보내던 날 그녀는 단 한 번도 몸이 좋지 않다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작고 가녀린 몸뚱이가 유난히 뜨겁다고는 생각했지만, 그저 맞닿은 열기 때문이라 치부했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과 몸을 섞던 순간에도 아팠던 게 아닐까. 카일로스 루드비히, 그 빌어먹을 이복형제가 아픈 그녀를 억지로 신년 무도회에 내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리석고 무도한 제가 그녀를 더 아프게…….
“안 돼, 안 돼…….”
머릿속에서 점차 극단적으로 치닫는 생각에 레이몬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몇 가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인데,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직접 루드비히 대공성으로 갈 것이다. 채비하라.”
“폐하,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옷깃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정말 이 늦은 시각에 대공성으로 찾아갈 뻔했다.
되돌아 온 시간 속에서는 더 이상 그녀와 엮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건 여전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곧바로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하도록.”
“네, 폐하.”
레이몬드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밤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날이 밝음과 동시에 번쩍 눈을 뜬 그는 곧바로 루드비히 대공성을 향해 내달렸다.
느리게 가는 마차가 답답해 마부를 밀어내고 손수 마차를 몰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가라앉혀야 했다.
또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랑의 끝에 남은 것은 결국 파멸과 종말뿐이었으니까. 레이몬드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러니 레이몬드는 굳게 다짐했다. 다시 마주치게 될 그녀의 앞에서도 절대 자신의 마음을 보이지 않겠다고,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은 손톱의 때만큼도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그러나 도착한 대공성에서 정말로 아픈 사람처럼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와 다시 마주쳤을 때, 마지막 기억보다 조금 더 앳된 느낌의 그녀가 자신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저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와 마주치기 전까지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던 그 무수한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클로이가 울고 있었다. 왜 또 울고 있는 걸까.
발갛게 물든 그녀의 눈가를 어서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움츠러든 저 작고 사랑스러운 어깨를 다독여 주어야 한다.
그의 몸은 머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의 어깨를 그러안고 다독이는 제가 있었다. 옷의 앞섶이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네 울음은 이토록 뜨겁구나, 클로이.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우는 그녀를 보면서 레이몬드는 작게 신음했다.
사실 그는 그녀와 다시 만나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다. 사라진 시간 속 그녀와의 기억은 이토록 아름다운 잔해로 남아 있는데, 다시 만나게 되면 그녀를 미워하게 될까 봐. 가엾은 순정을 모두 잃게 될까 봐.
그러나 한차례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를 향한 마음만큼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과 이복형제의 황위 다툼에 끼어 버렸던 그녀가 안쓰러웠다. 티끌만큼도 행복하지 않은 얼굴로 울고 있는 그녀를 여전히 위로해 주고 싶었다.
클로이 가넷슈는 여전히 레이몬드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미친 놈.’
레이몬드는 스스로를 사랑에 미친 남자라고 욕했다.
클로이 가넷슈. 애초에 그녀는 제 이복형제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게 키워 낸 여자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그런 그녀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고, 결국 사랑으로 이어졌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미워함이 마땅하였음에도, 그는 그녀를 미워하는 대신 우는 그녀를 달래 주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안다.
클로이는 살을 찌우기 위해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다 새벽에 모두 게워내는 안쓰러운 여자였으며, 알레르기가 있으면서도 흰살 생선을 먹고 하루 종일 앓아누웠던 바보 같은 여자였다.
또한 레이몬드는 안다.
치즈 케이크를 싫어하는 척했던 그녀는 사실 치즈 케이크를 먹을 때 오물거리는 입술이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여자였고, 피아노를 즐겨 연주했던 그녀는 이따금씩 현악기를 연주할 때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더욱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그러니까 사실 레이몬드에게 클로이 가넷슈는, 그러한 짓을 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취향 따위에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레이몬드는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로 우는 그녀를 달래었다.
험악한 자신의 얼굴에 아픈 그녀가 놀라지 않게. 사나운 자신의 목소리에 아픈 그녀가 울지 않게.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마저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너는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내가 마음 놓고 네게서 멀어지지 못하게.
레이몬드는 쓰라리게 웃으며 생각했다.
멀어져야 하는데, 더 이상 엮이면 안 되는데. 고작 그녀가 아프다는 말에, 그녀가 흘리는 눈물에 이토록 쉽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보처럼.
* * *
이튿날 아침, 클로이는 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최대한 감정을 죽인 채 유난히도 낯빛이 창백한 이복형제를 응시했다.
황제가 되기 위해 그녀를 이용해 먹은 남자. 그녀의 몸과 마음을 모두 짓밟았던 남자…….
“먼저 들지요. 아무래도 클로이는 오지 않을 듯하니.”
레이몬드는 여상한 목소리로 말하며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카일로스 또한 그런 레이몬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레이몬드의 시선이 숟가락을 쥔 이복형제의 손 위로 닿았다. 여상하게 수프를 떠올리는 손은, 그녀의 살갗을 가르고 헤집었던 손과 같은 손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나 보군요.”
무심하게 흘러나온 말에 카일로스가 숟가락질을 우뚝 멈춘 채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몬드는 여유롭게 숟가락질을 이어 갔다.
“형님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서려 있어서요.”
“……오해입니다. 근심이라니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진 않을 텐데.”
레이몬드는 상대의 말을 가뿐히 잘라내며 숟가락을 놓았다.
“나를 유혹해야 할 미끼가 앓아누웠으니…….”
화염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이복형제를 노려보며 형형하게 타올랐다.
“상당히 큰일 아닙니까, 형님?”
예고 없이 던져진 뾰족한 한마디에 사늘한 적막이 흘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말끝을 흐리며 숟가락을 내려놓은 이복형제가 양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추었다.
“도통 모르겠군요.”
입가 위로 난감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이복형제의 얼굴은 모르는 이가 보았더라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정도로 뻔뻔했다.
“그럼 계속 모른 채로 계세요.”
레이몬드는 삐뚜름히 웃으며 빵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더 이상 입맛이 없는지 식사를 그만 둔 카일로스를 앞에 두고 빵까지 우물우물 씹어 넘긴 그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상대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제가 궁금한 건 이거예요.”
마치, 오늘 아침 식사에 나온 수프의 맛에 대해 논하는 것처럼 평이한 어조였다.
“그녀가 아프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을 사람이 어째서 마차를 돌려보냈느냐는 거지요.”
잠자코 경청하던 이복형제의 미간 위로 미미한 주름이 잡혔다.
“폐하? 클로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시다시피 클로이는 정말 많이 아팠어요. 지금도 회복이 필요하고요. 아픈 아이를 어떻게…….”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카일로스의 변명을, 레이몬드는 단호하게 잘라 냈다.
“내가 아는 카일로스 루드비히라면 아픈 아이를 마차에 태워 황제의 침실에 밀어 넣고도 남을 사람이지.”
“……언사가 지나치시군요.”
말씨에서 언뜻 묻어나는 노기를, 레이몬드는 기민하게 알아챘다. 이제까지 저 속내를 감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딱한 이복형제를 위해 레이몬드는 이제 그만 속내를 드러낼 수 있도록 그를 도와 줄 생각이었다.
“클로이는 제게도 굉장히 소중한 아이입니다. 비록 폐하께서 그 아이와…… 정을 나누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가족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아이에요. 그런 아이가 앓았으니 당연히 걱정되는 마음에 보내지 않은 거지요.”
레이몬드는 느른하게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복형제를 쳐다보았다. 고작 한 살 차이, 그러나 항상 어른스럽다고 여겼던 형제였건만.
‘그토록 비열한 면모를 숨기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었지.’
진실을 알고 나니 뒤늦게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가령, 여유를 가장하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는 눈가의 주름이라던가.
잠시 동안 말없이 이복형제를 관찰하던 레이몬드는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네가 그녀의 아픔을 걱정했더라면, 그때 그렇게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밀지도 않았겠지.”
웃고 있는 입매와 달리 흘러나온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런가, 루드비히 대공?”
“…….”
카일로스는 대답 대신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얼굴 위에 남아 있던 한 줌의 여유가 그대로 흩어졌다.
언제나 부드럽던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모했다. 상냥함을 가장했던 가면이 부서지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남자의 못난 몰골만이 남아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돌아왔군.”
한참 뒤에 입을 연 카일로스는 사납게 중얼거렸다.
“네 목은 고이 잘라 까마귀밥으로 넘겨주었지.”
올라간 입꼬리가 조롱하듯 이죽거렸다.
“이미 한 번 죽었던 패배자가 살아 시간을 거슬러 오다니, 이것 참 통탄할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번에는 네 놈이 까마귀의 식사가 될 것이고.”
레이몬드는 상대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맞받아쳤다.
이미 한 번 죽음이라는 것으로 엮인 탓에, 더 이상 예의를 차리는 것마저 우스운 관계였다.
막연히 기억하는 것과 달라진 이복형제의 태도를 보며, 그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돌아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레이몬드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럼 클로이는?’
자신을 쳐다보며 눈물만 흘리던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이 생각났다. 비록 그녀는 아파서 그런 것이라 했지만…….
“클로이도, 돌아왔나?”
레이몬드의 물음에 카일로스가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몬드는 확신했다.
“그녀도 돌아왔나 보군.”
“클로이를 입에 담지 마!”
카일로스가 이를 바드득 갈며 외쳤다.
“클로이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나를 위해 사랑하는 척을 했던 거지, 단 한 번도 클로이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녀가 사랑하는 건 바로 나야, 네가 아니라.”
“나도 알고 있다, 루드비히 대공.”
레이몬드는 굳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이복형제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사랑해.”
“사랑한다고? 멍청한 소리 지껄이지 마! 클로이는 날 위해 네 목숨을 갖다 바친 여자야! 그런데도, 클로이를 사랑한다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카일로스가 핏대 선 두 눈을 부릅떴다.
“물론, 그럼에도 사랑하고 있지.”
지난 밤, 레이몬드는 대공성의 손님방에 머무르며 날이 새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클로이 가넷슈, 그 가냘프고 사랑스러운 손으로 종래엔 자신의 숨통을 옭죌 여자. 그녀를 선택한다면 또다시 펼쳐질 파멸을 그토록 잘 알고 있는데도 끝내 저버릴 수 없는 여자.
무작정 그녀를 보겠다고 대공성까지 찾아 왔는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는 밤이 깊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밤공기라도 쐬면 머리가 맑아질까 싶어 막 방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문가에서 들린 기척에 멈추어 선 레이몬드는 홀린 듯이 손바닥을 들어 방문 위로 짚었다.
‘레이몬드…….’
레이몬드, 라니. 적어도 이 대공성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만큼 겁 없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제 이름을 읊는 목소리가 그녀의 것과 닮아 있단 말인가. 정작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는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흐느낌에 가까운 사과가 문틈을 타고 희미하게 흘러들어왔다. 그 순간 레이몬드는 느리게 신음하며 두 눈을 감았다.
그래, 클로이. 너는, 너는 미안해하고 있구나. 차마 그 죄악감을 내 앞에서 전하지 못하고, 이렇게 홀로 숨죽여 흘려보내고 있구나.
“클로이는 절대 네 옆에서 행복할 수 없어.”
확신을 넘어 신념에 가까운 말이었다. 클로이 가넷슈는 카일로스 루드비히의 곁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그녀를, 반드시 네게서 떨어뜨릴 거야, 카일로스 루드비히.”
단정적인 어투에 카일로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적의가 찌를 듯이 날카로웠으나, 레이몬드는 이를 가볍게 비웃었다.
“그게, 네 뜻대로, 될 것 같은가?”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가 그다지 듣기 좋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레이몬드는 가볍게 손을 털며 일어났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다이닝 룸을 나서려는 그를, 카일로스가 붙잡았다. 레이몬드는 무심한 얼굴로 뒤를 힐끗 돌아봤다.
“클로이에게……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
짤막한 대꾸와 함께 선명한 비소를 머금고 돌아선 레이몬드는 곧바로 그녀를 찾아갔다. 결심을 굳힌 이상,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제와 달리 예법을 갖추어 인사하는 그녀의 고개를 부드럽게 붙잡아 들어올렸다. 눈가가 아직도 붉었다. 레이몬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폐하께 그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예요.”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하는 그녀의 말에 레이몬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어쩌면 마찬가지로 시간을 거슬러왔을 그녀가 자신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안다.
‘……죄의식.’
그 음습하고 울적한 감정 때문에 밀어내는 거겠지. 그렇기에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차마 ‘사랑’을 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시종일관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작은 머리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훤히 보여서 거친 한숨만 쏟아져 나왔다.
‘내가 또다시 네게 반했을까 봐 걱정이 되는 거겠지. 하지만 어떡할까, 클로이. 나는 이미 한 번 시간을 거슬러 왔고,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레이몬드는 자신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녀의 죄의식이 스스로를 망가뜨릴 것을 알았다.
클로이 가넷슈는 루드비히 대공의 사람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고 여린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레이몬드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했다. 적어도 그녀의 앞에서는 절대 내비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녀의 앞에서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클로이 가넷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남자였으니까.
“클로이, 네가 행복해지기 위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말해.”
나지막한 속삭임에 대답한 그녀는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제가 원하는 건 한 가지예요.”
그 예쁜 눈동자에 독기를 담으며, 그녀가 말했다.
“다정한 척하는 그의 목을 비틀고 싶어요.”
행복을 찾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상당히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레이몬드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그녀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요. 저를 이용하시면 폐하께서도 그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예요. 카일로스가 폐하께 하려 했던 것처럼, 폐하께서는 저를 미끼로 사용하세요. 제가 폐하의 미끼가 되어 드릴게요.”
복수, 라는 대목에서 레이몬드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아니, 클로이. 너의 행복은 그게 아니야.”
“하지만, 저는…….”
단호한 반박에 그녀의 눈동자가 방황하며 눈물을 흩뿌렸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그녀의 눈물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무를 생각이 없었다. 물론, 루드비히 대공에게는 그에게 어울리는 징벌이 필요했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사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와 루드비히 대공의 반응으로 보아 자신의 바람과 달리 그녀가 행복하지 못하였음을, 그녀가 불행하였음을 짐작할 뿐이다.
그 작은 손으로 대공의 목을 비틀고 싶다 말하는 그녀의 마음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랜 불행에 지친 얼굴을 하는 그녀에게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따로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형님의 곁이 싫다면 이곳에서 널 빼내 줄 수는 있어.”
클로이 가넷슈는 행복해져야 한다. 이전의 삶에서 그는 그녀의 행복을 위해 목숨마저 내어주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가 불행했다면, 이제는 레이몬드가 직접 움직여 그녀에게 행복을 안겨 줄 참이었다. 그래야, 지난 삶의 죽음이 조금이라도 헛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니 저 어여쁜 얼굴에 눈물을 지우고, 다시 웃음을.
“자, 그럼 클로이. 이제 다시 한 번 말해 보자. 네가 원하는 게 뭐지?”
“카일로스의 곁을 떠나고 싶어요.”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녀가 답했다.
“그럼 이제 다시 말해 봐. 거래가 아니라, 도와 달라고.”
“……도와주세요, 폐하.”
원했던 내용의 답변이 들리자 레이몬드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렸다.
“어떻게 도와줄까?”
“…….”
클로이는 아주 잠시 동안 말없이 레이몬드를 쳐다보았다.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레이몬드는 몇 번씩이나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의구심을 억눌러야 했다.
‘대체 내가 죽은 이후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너는 사랑했던 남자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걸까. 네가 사랑했던 널 망가뜨린 그 남자는 무슨 죄를 더 지었기에 네게 그토록 절절매는 걸까.’
궁금했으나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묻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을 알게 될 테니까.
“거짓말을 조금 하려고 해요. 한 번만 어울려 주세요. 저는 대공성을 떠나고 싶지만 카일로스가 그걸 원치 않아요. 아무리 폐하라 하여도 합당한 이유 없이 저를 빼내주실 수는 없으셔요.”
“그렇지.”
“그래서 저는 그 합당한 이유를 거짓으로 만들어 낼 생각이에요. 그 거짓에 폐하의 도움이 필요해요.”
레이몬드는 그녀가 말하는 거짓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그러나 설마 그녀가 그 방법을 먼저 제안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열흘쯤 뒤에 폐하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할 거예요.”
클로이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녀는 이 거짓을 생각하며 무엇을 떠올렸을까. 레이몬드는 아마도 그녀가 자신과 같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에스델은…… 그 후로 어떻게 되었니, 클로이?’
줄곧 외면해 왔던 물음이 가슴 속에서 구슬피 메아리쳤다.
“제국 서쪽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세이제 꽃의 뿌리는 월경의 주기를 늦춰주고 임신한 것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게 해 줘요. 힘들겠지만 그걸 구해서 복용하면 대공성의 의사도 의심을 갖지 못할 거예요.”
“구해 놓도록 하지.”
재고할 필요 없이 나온 명쾌한 답변이었으나 그녀는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레이몬드가 의아해할 무렵, 그녀가 소심하게 말했다.
“물론 대공성을 탈출한 뒤에는 폐하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곧바로 제 길을 찾아 떠날게요. 그저 열흘 정도…… 아이가 생겼다 해도 그가 믿을 수 있게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그녀의 고민이 귀여워서 레이몬드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지?”
“네……?”
당황해하는 두 눈을 깜빡거리는 그녀는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고작 너 하나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거나 곤란해질 일은 없어. 그러니 너는 네 행복만 생각해.”
“아…….”
슬며시 붉어지는 두 뺨이 사랑스러워서 레이몬드는 자신도 모르게 풀어진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끝을 매만졌다. 한참 동안이나.
레이몬드는 대공성에 조금 더 머무르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이복형제는 당연하게도 굉장히 불쾌해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격하게 반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아주 우스웠다.
그 사이, 황궁의 다리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후…….”
레이몬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다리아의 편지를 내려놓았다. 다리아라면 클로이의 거취를 맡겨도 큰 문제는 없겠으나, 그 괴팍한 성격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클로이의 안전이니까.”
그러나 다리아만큼 클로이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이 또한 없었기에 레이몬드는 몇 번의 고민 끝에 다리아에게 답장을 썼다.
비록 클로이는 대공성을 탈출한 뒤 제 갈 길을 찾아 가겠다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거짓은 곧 들통이 날 테고, 루드비히 대공은 절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카일로스 루드비히, 결국은 그 자가 문제였다.
“그 자가 클로이를…… 정말로 좋아하는 걸까.”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이복형제의 속내가 궁금했다. 자신이 클로이와 닿을 때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은 명백한 남자의 강샘이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일까.”
그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남자였다.
다리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클로이는 열두 살에 루드비히 대공을 만나 거두어졌다.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그의 입맛에 맞게 길러진 여자였다. 언제든 필요할 때가 오면 사용할 수 있도록. 루드비히 대공을 사랑했던 클로이에게 그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두 번 다시, 그녀를 쥐고 흔드는 일은 없게 할 거야.”
사늘하게 내려앉은 시선이 창밖 너머로 저 멀리 지나가는 루드비히 대공에게 닿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적의가 차올랐다. 레이몬드는 터질 것만 같은 감정을 차갑게 갈무리하며 몸을 돌렸다.
* * *
대공성에서 클로이를 데리고 돌아온 이후로 레이몬드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다리아의 시녀가 된 클로이의 일상을 보고 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날이 저문 뒤엔 황후궁에 배정된 그녀의 방에 불이 꺼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끝이 났다.
“아침 식사 직후에 황후 폐하와 함께 황궁 후원을 산책하였고…….”
“잠깐.”
시종장의 보고를 경청하던 레이몬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잘라냈다.
“이렇게 날이 추운데 산책을 했다고? 설마 다리아가 클로이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
“이번 주는 예년에 비해 놀랄 만큼 따뜻하고 평온한 기후를 보일 것이라고 황궁 기상학자들이 입을 모아 예보한 바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오늘 아침에도 예보와 같이 따뜻한 날씨였고요.”
“그래도 불안하군. 클로이는 정말 아기 새처럼 작단 말이다.”
심각해진 황제의 표정에 시종장의 얼굴 또한 덩달아 어두워졌다.
레이디 가넷슈가 황제에 비해 체구가 작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또래 귀족 여성들의 신장과 비교하자면 충분히 평균을 웃도는 키였다. 또한 체구가 작은 것과 몸이 약한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한다 하여 황제의 근심이 덜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시종장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신년제 때 에브란국에서 진상한 호랑이 모피가 있었지?”
“네, 폐하.”
“그것을 클로이에게 가져다 줘.”
“네? 하지만 그건…… 알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은 가느다란 한숨을 몰래 삼키며 대답했다. 황제가 여자에게 선물하라고 이른 에브란국의 모피는 금화로는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물건이었다.
“클로이의 이후 일정은 어떻게 되지?”
“오후에는 황후 폐하를 모시고 도서관에 방문할 예정이라 합니다.”
“도서관? 다리아가 도서관엘 간다고?”
레이몬드는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번엔 또 도서관에서 클로이를 괴롭히려는 건가…….”
그도 그럴 것이, 다리아는 도서관이라면 질색을 하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레이디 가넷슈가 먼저 황후 폐하께 도서관을 가 보고 싶다고 청한 것으로 압니다.”
“클로이가……?”
잔뜩 찌푸려져 있던 그의 미간이 곧바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봄볕처럼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레이몬드는 아주 잠시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클로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도서관이라…….”
책장을 넘기는 그녀도 퍽 사랑스러울 것이라 생각하며 레이몬드는 피식 웃었다.
“나도 업무를 서둘러야겠군.”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클로이는 단 한 번도 먼저 원하는 것을 말한 적이 없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테다. 루드비히 대공성에 함께 방문하자는 그녀의 말에 기꺼이 무리해서 시간을 내었던 것은.
‘나와는 일 년이 훌쩍 넘게 함께 보냈으면서도 도서관에 가고 싶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다리아와는 아직 한 달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벌써 마음을 열다니.’
무리해서 업무를 일찍 끝마친 레이몬드는 피곤한 이마를 두드리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것 참, 조금 질투 나는데.’
불쑥 심술이 치밀려는 것을 억누르며 레이몬드는 걸음을 서둘렀다.
허락받은 이들만 출입할 수 있는 황실 도서관은 인적이 드물고 한산했다. 레이몬드 또한 즉위 이후 처음으로 찾는 장소였다.
“아니, 폐하! 이곳엔 어쩐 일로…….”
“쉿.”
사서는 레이몬드를 발견하고는 놀라 허겁지겁 달려왔다.
황제인 그는 필요한 책이 있으면 언제든 사람을 시켜 빌려 가면 된다. 그런 황제가 직접 도서관에 방문한 것은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서에게 조용히 하라 경고를 준 레이몬드가 느릿하게 시선을 돌리며 도서관 안을 훑었다.
“찾으시는 서책이 있으십니까?”
“음. 그냥 혼자 둘러보고 싶은데…… 혹시 다른 이들이 방문해 있는가?”
“네, 황후 폐하께서 삼십 분 전에 방문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베인 자작님과 헉슬리 경이…….”
“아아, 됐네.”
필요한 정보를 얻어낸 레이몬드는 빙그레 웃으며 사서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러니까, 클로이가 지금 이곳에 있단 말이지.’
그 사실만으로도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기척을 찾아 걸었다. 그러다 빼곡한 책장과 책장 사이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천천히 걸음을 멈추어 선 그는, 책장과 책장 사이에 서서 갈색 가죽 표지의 책을 조용히 읽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한쪽 벽면을 모조리 차지한 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색 머리칼이 흘러내리자, 가느다란 손끝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꽂아 넘겼다.
그 일련의 무심한 동작들이 숨이 멎을 듯 황홀하여서 레이몬드는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이 되고 싶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머리카락이 되고 싶었다. 하다못해 그녀의 눈앞을 떠다니는 먼지 한 톨이라도 좋았다.
“클로이가 그렇게 좋아?”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순간 놀란 레이몬드가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곳에서 짓궂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다리아가 있었다. 곧바로 험악한 표정이 된 레이몬드는 다리아를 두고서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어디 가, 레이. 클로이를 보러 온 거 아니었어?”
그러나 다리아는 심술궂게도 그런 레이몬드를 내버려두지 않고 쫓아와 괴롭혀 댔다.
“조용히 해.”
레이몬드는 혹시나 클로이에게 자신의 방문이 알려졌을까 걱정되는 마음을 억누르며 다리아를 노려보았다.
“정말 너를 어떡하면 좋니, 레이몬드. 어쩜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그 아이의 주변만 맴도는 걸까?”
“…….”
“그러지 말고 그냥 확 덮쳐 버리는 건 어때?”
장난기 가득 섞인 다리아의 말에 레이몬드가 경멸의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쳐다 봐? 차라리 고백을 하라는 뜻이었어.”
“…….”
“클로이는 자꾸만 부정하던데. 네가 자길 좋아할 리 없다고.”
“…….”
레이몬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렸다. 바깥으로 나가려는 레이몬드의 옷깃을 붙잡고, 다리아가 물었다.
“억울하지 않아? 너는 이렇게 매일 클로이의 근처만 맴도는데, 클로이는 네 마음을 전혀 모르잖아.”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거짓은 더 이상 다리아에게 통하지 않음을 알았기에, 레이몬드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차라리 더 나아.”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게 모두에게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몬드는 가볍게 고개를 털며 다리아를 향해 말했다.
“네게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 다리아.”
다리아는 황후가 되기 이전, 공녀였던 시절부터 사교 활동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런 그녀가 굳이 자신의 생일 축하 무도회를 준비하는 이유를 레이몬드는 알고 있었다.
모두 클로이를 위해서였다.
“클로이가 진심으로 웃는 건 처음이었어.”
한 번도 다리아에게 상냥하게 말해 본 적이 없었던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이 굉장히 쑥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클로이를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말하네?”
다리아는 예리하게 물었으나 레이몬드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아무튼, 고맙다는 건 진심이야.”
“너를 위한 건 아니니까 고마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레이. 나는 클로이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거든. 이대로 계속 옆에 두고 싶을 정도로.”
“……!”
이어진 다리아의 말에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다리아, 너 설마…… 정말로 클로이를……?”
“무슨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는 거야!”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에 다리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와 연적이 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어. 게다가 난 이래봬도 이성애자라고.”
“…….”
레이몬드는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불편해진 심기에 손끝으로 테이블 위만 툭툭 두드려 댔다.
클로이는 정말로 예쁘니까, 어쩌면 여자인 다리아마저도 이미 반해 버렸을 지도 모른다. 다리아뿐만이 아니다. 베스티라고 했나, 다리아의 시녀인 캐롤라인 공작의 고명딸도 매번 볼 때마다 클로이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당연한 건가……. 내가 그들이라 해도 같은 성별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그녀를…….’
점점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레이몬드를 다리아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찌 됐건, 이번 무도회 때는 너도 참석해야 해. 알지? 루드비히 대공이 반드시 이번에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거.”
“아, 물론.”
카일로스의 이름이 나오자 레이몬드의 눈빛이 곧바로 돌변했다. 마치 사냥감을 목전에 둔 맹수의 것과 흡사했다.
“알고 있지, 당연하게도.”
이복형제가 한동안 대공성에 칩거하며 모든 사교 활동을 중단했다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퍼지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대공성을 떠나던 날 아침, 광기로 번득이던 이복형제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클로이를 대신해 인사를 하러 왔지, 루드비히 대공. 심약한 그 아이가 그대의 얼굴을 마주보고 혼절이라도 하면 큰일이니 말이야.’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 클로이를, 이번에도 내게서 빼앗아가려 하는군.’
며칠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살이 빠져 날카로워진 얼굴로 카일로스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황제의 이름을 거침없이 부르며 분노를 표출하는 이복형제는 언제나 여유롭고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그 루드비히 대공과 동일인물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카일로스 루드비히. 내게 그 아일 보냈다가 다시 앗아간 건 너였잖아.’
‘…….’
사나운 눈동자로 레이몬드를 노려보던 카일로스는 돌연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 같은 게, 꼴에 황제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란!’
레이몬드는 방자한 이복형제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급기야 눈물까지 찔끔대며 웃어 재끼는 그는 더 이상 ‘형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널 그때 그렇게 곱게 죽이지 말았어야 했어. 이번 삶에서 내가 또다시 너를 죽이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레이몬드, 네 놈의 사지 중 어느 것도 멀쩡하지 못할 거야.’
‘얼마든지.’
정체를 드러내고 다가오는 적은 그다지 두렵지 않다.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레이몬드는 그대로 뒤돌아 나섰다.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 방 안에서 와장창, 집기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레이몬드는 무심하게 돌아섰다.
그렇게 이대로 영영 그녀가 루드비히 대공과 상관없는 사이가 되길 바랐다. 이미 한 번 그의 야욕으로 인해 그들 형제와 엮여 버린 클로이 가넷슈의 삶은 충분히 상처투성이였으니까.
루드비히 대공이 그녀를 이용하려 들지 않았더라면, 내가 생각 없이 말한 어쭙잖은 이상형이 그녀와 닮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녀는 그녀가 나고 자란 곳에서 이름 없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녀의 불행이 그들 형제 때문이라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자신 때문에 레이몬드가 불행해졌다고 여기는 착한 여자였다.
‘저는 폐하께서 저와 엮이지 않기를 바라요.’
마차에서 그녀와 주고받은 대화가 줄곧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았다.
가엾은 클로이. 착한 클로이. 그녀는 오로지 레이몬드가 자신 때문에 다칠 것을 걱정하였다.
‘네 인생이 뒤틀린 건 나와 형님 때문인데…….’
황위 같은 것과는 평생 가까워질 일이 없던 그녀였는데, 오직 자신과 루드비히 대공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걸까.
‘나하고도, 형님하고도. 더 이상 네가 우리 형제와 엮이는 일은 없어야 해.’
그러니, 다가올 무도회에서 카일로스가 그녀에게 접근해 괴롭히지 못하도록 지켜 주어야 한다.
그렇게 레이몬드가 결심을 굳힐 적에 다리아의 목소리가 사념에 빠져 있던 그를 깨웠다.
“이미 루드비히 대공이 후원하던 아가씨가 황후의 시녀가 되었다고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나갔어. 아무리 루드비히 대공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클로이를 함부로 대할 순 없을 거야.”
“흐음…….”
레이몬드는 반쯤 미친 사람의 눈을 하고 있던 카일로스를 떠올리며 부디 그가 그곳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해 주길 바랐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은 말고 나중에 약속이나 잘 지켜 주라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리는 다리아를 향해 레이몬드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클로이의 안전이 확보되는 동시에 네가 바라는 게 이루어질 거야.”
* * *
클로이가 다른 남자의 파트너가 되어 에스코트를 받는 건 레이몬드에게 썩 기분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파트너가 될 수 없었기에 조용히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다리아……. 아니지, 다리아가 아니더라도 난 그녀에게 다가가면 안 돼.’
멀리 창밖으로 다른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어가는 그녀가 보였다. 남자의 말에 작은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표정은 한결 평온해 보였다.
“폐하, 이제는 정말 출발하셔야 합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시종장의 재촉에 레이몬드는 한숨을 내쉬며 커튼을 쳤다.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비로소 몸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가지.”
무덤덤하게 다리아와 함께 입장한 그는 곧바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초대받은 귀족들이 하나씩 둘씩 다가와 다리아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레이, 그래도 명색이 부인의 생일인데 조금 더 다정한 얼굴을 할 수 없어?”
다리아가 내내 사람들이 입장하는 문 쪽만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레이몬드에게 한마디 했다.
“조금 더 생산성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클로이가 언제 오나 눈이 빠져라 기다리는 게 생산성 있는 일이라고?”
“네 옆에서 다정한 남편 흉내를 내는 것보다야 훨씬 생산성 있지.”
발끈한 다리아가 한마디 더 하려고 할 적에 문이 열리고 클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평소보다 훨씬 아름답게 치장한 그녀의 모습에 레이몬드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옆에서 다리아가 혀를 쯧쯧 차는 게 느껴졌으나 레이몬드의 시선은 오직 클로이에게만 향해 있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옆에서 함께 인사하는 남자의 얼굴은 본 체 만 체하며 레이몬드는 클로이를 내려다봤다. 아침에 보낸 아스타로트 꽃잎이 담긴 유리알 목걸이가 그녀의 쇄골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그 꽃과 함께 건네었던 자신의 고백을.
“잘 어울리는군.”
그 한마디에 곧바로 얼굴을 붉히는 클로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그녀와 더 마주보고 싶었지만 다리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이 많아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레이몬드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그녀를 보냈다.
클로이에게는 이 무도회가 인생에서 두 번째 무도회일 것이다.
레이몬드는 아주 오래 전, 자신이 그녀에게 흠뻑 빠져 버렸던 신년 무도회를 떠올렸다.
가만히 비교해 보니 그때의 그녀는 온통 자신의 대외적인 취향에 맞추어 꾸미고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슴과 허리를 강조했던 실루엣이 드러나던 차림의 그때보다 조금은 수수하지만 지금의 그녀가 훨씬 더 편해 보였다.
루드비히 대공과 마주칠 것이 두려울 텐데도 저렇게 파트너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었다.
“다들 클로이만 쳐다보고 있어…….”
“아니야, 레이. 너만 클로이를 쳐다보고 있어.”
속으로 생각한 것이 입 밖으로 나왔던지, 다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다리아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클로이는 이 넓은 무도회장 가장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빛이 났다. 제대로 된 시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절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카일로스 루드비히 대공과 로잘라인 후작 영애가 도착했습니다!”
우렁찬 시종의 외침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를 멀리서 훔쳐보는 이 평화가 계속되었을 텐데.
레이몬드는 눈에 띄게 동요하는 클로이를 보며 의자의 팔걸이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쉽게 그 그늘에서 벗어나진 못하겠지.’
카일로스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방금 전까지 흔들리던 그녀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상대를 마주보았다. 갈급해하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는 카일로스와 담담한 얼굴로 맞서는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난처해하고 있어.’
레이몬드는 지금 당장 일어나 그녀를 도와주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자신이 끼어드는 순간 시선이 집중될 것이 뻔히 보였다. 아마 그것은 결코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여차하면 다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으로 이를 갈던 때였다.
유난히 화사한 백금발의 기사가 나타나 카일로스에게 무어라 속닥였다. 기사의 전언을 들은 카일로스는 곧바로 표정을 굳히며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도 클로이를 한번 돌아보며 무어라 말하는 모양이 아주 같잖았다.
‘한시름, 덜었나…….’
레이몬드는 느리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젖혔다.
클로이와 마주 선 채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대공의 기사가 조금 낯이 익었다. 그러고 보니, 거슬러 온 시간 속에서 매번 그녀를 에스코트하던 남자였다.
‘항상 그녀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는데, 어째서 이 시간 속에서는 달라진 거지.’
작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이것도 다 카일로스의 변화 때문이겠거니 생각하며 가볍게 의문을 지워 냈다.
기사가 그녀를 달래며 무어라 속삭였다. 그를 바라보는 클로이의 낯빛 또한 한결 평온해 보였다. 괜히 질투가 났다.
“큰일이네, 레이몬드. 클로이의 옆에 있는 남자, 외모가 엄청난데.”
다리아의 짓궂은 농담에 레이몬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다지. 별로 잘생긴 것 같지도 않고.”
“저런, 레이몬드…….”
레이몬드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다리아는 측은하다는 듯 눈썹을 휘며 말끝을 흐렸다.
“질투에 눈이 멀어 시력을 잃었나 보구나…….”
“입 닥쳐, 다리아.”
작게 욕설을 내뱉자 다리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명색이 부인인데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그녀는 꽤나 즐거워 보였다. 다른 이들이 보았더라면 사이좋은 황제 부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런, 클로이가 잘생긴 남자를 따라 나가 버렸네.”
전혀 아쉽지 않은 말투로 다리아가 레이몬드를 자극했다.
“우리 레이는 이제 어떡하지?”
“딱히. 클로이는 이성의 얼굴에 혹하는 여자가 아니니까 괜찮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클로이가 그런 것에 혹하는 여자였다면 진작 나를 사랑했겠지.”
레이몬드는 금발의 기사를 따라 밖으로 나가는 클로이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방금 그 말, 굉장히 이상하게 들린다. 레이몬드?”
“뭐가.”
“뭐, 물론 네 외모가 못났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의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 너무 자신하는 거 아니야?”
떨떠름하게 되묻는 다리아를 향해 레이몬드는 코웃음을 쳤다.
“돌아가신 모후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셨지. 부황 폐하를 제외하고 제국에서 나보다 잘생긴 남자는 없다고.”
“…….”
“모든 이들이 그 말에 동의했어. 물론, 그런 것에 자만을 갖기엔 황제의 자리가 지닌 무게가 크기 때문에 딱히 자랑삼은 적은 없다만.”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의 표정은 살짝 우쭐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다리아는 경악한 얼굴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야? 누가 감히 선황후 폐하와 네게 그 말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었겠어?”
“불쾌한 소리를 하는군, 다리아.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다들 입을 모아 내 외양을 칭송…….”
담담하게 대꾸하던 레이몬드는 불현듯 말을 멈추었다.
십수 년 전, 그가 황태자였던 시절에도 아무도 그 말을 반박하지 못했는데 황제가 된 지금 누가 감히 자신의 외모에 대해 못났다고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아스타의 전쟁광’이라 불리는 황제에게.
“…….”
레이몬드는 뒤늦게 제 말의 모순을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방금 전 클로이가 대공가의 기사와 나간 쪽을 힐긋 바라봤지만, 이미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리아.”
낮고 엄숙한 목소리가 쯧쯧 혀를 차고 있던 다리아를 불렀다.
“정말로…… 아까 그 남자가 나보다 더 잘생겼나?”
“글쎄. 그건 취향의 문제니까. 너무 우울해 하지 마, 레이. 너도 잘생겼어.”
다리아가 애써 달래 주었지만, 한 번 뿌리박힌 불신 때문에 레이몬드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클로이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나?”
“으음……. 클로이와 딱히 이성의 외모에 관해 논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
“미치겠군.”
레이몬드는 뒤늦게 밀려오는 조바심에 갈증이 일었다. 벌컥벌컥 냉수를 마시며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테라스로 나가는 문 쪽을 노려보는 레이몬드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무도회를 즐기던 이들이 움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조금만 더 심해지면 무도회를 망치겠다 싶었는지 다리아가 말리려 할 때, 마침 클로이가 다시 무도회장 내로 돌아왔다. 혼자 들어온 클로이의 모습에 레이몬드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너 정말 웃긴 거 아니, 레이? 클로이에게 마음을 고백할 의사는 없으면서 그 애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될까 봐 걱정인 거야?”
“……그녀가 누굴 좋아하든 내가 간섭할 권리는 없어. 다만, 그녀가 나보다 다른 남자를 더 잘났다고 기억하는 건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니까.”
다리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랑에 빠진 남자와 입씨름을 하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다리아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클로이는 베스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캐롤라인 소공작이 눈에 들어왔다. 끔찍해 마지않는 사촌 형제의 모습에 다리아의 표정이 급격히 사늘해졌다.
외면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옆에서 작게 움찔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레이?”
“…….”
레이몬드가 상당히 심각해진 얼굴로 클로이가 있는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무섭게 그녀를 응시하는데, 어느 순간 클로이가 무도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모습에서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레이몬드만이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무서운 얼굴로 어디를 가려는 거야?”
“…….”
다리아가 물었으나 레이몬드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멀리서 본 클로이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사람들 틈에서 부드럽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레이몬드는 그것이 그녀의 거짓된 웃음임을 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그녀가 줄곧 지었던 것과 닮은 미소였다.
‘어딜 간 거지?’
재빠르게 그녀를 따라 나왔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람만이 찼다.
가만히 멈추어선 레이몬드는 불어오는 바람 속에 깃들어 있는 그녀의 기척을 찾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고요한 밤공기 사이로 언뜻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레이몬드는 숨죽여 걸었다. 그때, 희미한 울음소리가 그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으읍, 읍…….”
소리를 삼키듯이 억눌린 울음소리였다. 그가 익히 아는 클로이 가넷슈의 울음소리였다.
“클로이…….”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으나, 울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보다 더 소리의 근원을 향해 마른 나무기둥이 우거진 수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던 레이몬드는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는 클로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몬드가 바로 앞까지 다가갈 때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이래서 내가 널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그제야 그녀가 손에서 얼굴을 떼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클로이, 왜 넌 항상…… 피가 나잖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몬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바람에 날려 헝클어진 머리칼, 더럽혀진 드레스에 상처투성이가 된 하얀 손까지……. 흙과 피가 엉겨 붙은 손의 상처가 제법 쓰라려 보여서, 레이몬드의 가슴도 함께 쓰려 왔다.
“어째서 넌……! 이 상태가 될 때까지……!”
손바닥에 박힌 나무껍질까지 발견한 레이몬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또 울고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상처 입은 채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서.
“그러지 마세요.”
“뭐……?”
“제게 잘해 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더 이상 저를 책임지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고작 하룻밤을 보낸 여자에게 지나치게 과한 책임이에요.”
그 간절한 목소리에서 그녀가 자신의 친절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럴 만도 했다. 레이몬드가 그녀에게 베푸는 것은 ‘친절’이 아닌 ‘사랑’이었으니까.
“그걸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야.”
“제가 원하지 않아요!”
클로이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냈다. 그 모습에 레이몬드는 기이하게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라고……!”
그렇지 않아, 클로이. 너는 충분히 가치 있는 여자야. 적어도 내 세계에서의 너는, 누구보다 가치 있는 여자야.
“아무것도…… 폐하께선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당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폐하는 모르잖아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모르지 않아.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나와 나의 형제로 인해 네가 어떻게 희생되었어야 했는지.
“폐하는, 제게 마음을 열면 안 돼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저를 미워하고 증오해야 해요. 혐오해야 마땅한 여자예요. 제게 면죄부를 주지 마세요.”
시간을 거슬러 온 직후, 레이몬드는 꼬박 이틀에 걸쳐 제대로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은 채 고민했다.
나를 죽인 여자를 과연 용서할 수 있는가,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의 인생에 있어 가장 깊은 고민이었다. 정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미, 용서한 지 오래였다.
‘형님이 너만은 죽이지 않을 테니까.’
죽음 직전, 그 잠깐 동안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배신에 치솟던 화는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안전하다면. 그래, 그걸로 모두 족하였다.
혐오해야 마땅한 여자라고? 아니, 그렇지 않았다. 클로이는, 클로이 가넷슈는…….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는데, 대체 왜 당신이 나를 용서하려는 거예요. 나는, 나는…….”
구슬피 흘러내리는 섧은 눈물을 보며, 레이몬드의 가슴도 서럽게 울어 댔다. 스스로를 혐오 받아야 마땅한 여자라 말하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이다지도 가슴이 시렸다.
앞니를 따닥따닥 부딪치며 울분을 토하면서도, 악을 쓸 힘조차 남지 않아 휘청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다.
“폐하는 몰라요. 제가 어떤 여자인지, 얼마나 무서운 짓을 했는지, 제가, 당신을…….”
“클로이, 진정해.”
“죽였어요, 죽였다고요.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요!”
눈물 뒤에 감추어진 눈동자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는 그녀를 레이몬드는 와락 끌어안으며 외쳤다.
“진정해, 클로이! 제발! 제발!”
아기 새처럼 작은 몸뚱이가 그의 너른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새끼 짐승처럼 낑낑거리는 소리가 멎을 때까지 기다리며 레이몬드는 그녀의 어깨 위로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제발, 클로이…… 널 망가뜨리지 마.”
이 말을 함으로써 그녀가 묵은 죄악감을 떨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레이몬드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다 괜찮다고, 나는 다 괜찮다고. 나를 위해 울어 주는 네가 있어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클로이 가넷슈가 제게 가진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죽음 직전, 자신을 보며 눈물만 뚝뚝 흘리던 그녀의 모습과 늦은 밤 자신의 방문 앞에 서서 속삭이듯 읊조리던 고해성사가 그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레이몬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허공에서 흩어지던 사과는 너무나 간절하고, 애타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더더욱 그녀와 자신이 엮이지 않기를 바랐다. 이복형제로부터 그녀를 떨어뜨리고, 보호하며 그 마지막엔 본디 그녀가 가져야 했을 평온한 필부의 인생으로 돌려보내 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레이몬드는 자신의 회귀 사실을 그녀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으면서도 레이몬드는 과거를 묻어 두려 했다. 그녀를 사랑했던 자신과 함께.
스스로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더라면 영영 묻어 두는 데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묻으려 한다고 묻을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는데.’
묵은 상처 위에 딱지가 덮이고 새살이 돋아나길 기대했다. 그러나 제때 치료받지 못한 상처는 안쪽에서부터 곪아 썩어가고 있었다.
“그럼 행복해야지. 보란 듯이 행복해야지.”
결국 레이몬드는 상처를 끄집어내 터뜨리는 쪽을 선택했다.
“……폐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그녀의 젖은 눈가를 어루만지며 레이몬드는 잔잔하게 말했다.
“너조차도 너를 용서할 수 없다며. 그럼 나라도 너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거잖아.”
그녀가 안타까웠다. 스스로에게마저 용서받지 못하는 그녀가 눈물겨웠다.
“지금, 무슨 말씀을…….”
“네게 잘해 주면 안 된다고 했나? 더 이상 나와 엮이지 않기를 바란다고?”
우스운 소리.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하게 될까 봐, 그게 그렇게 두려워서 너는 계속 내 시선을 피했지.”
모두 부질없는 몸부림이었다.
“이미 틀렸어.”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의 몸부림은 처음부터 잘못된 명제였다. 그녀를 용서하지 않는 것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그녀와 엮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 클로이. 널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불가능해.”
클로이 가넷슈의 바람 또한 처음부터 잘못된 명제였다.
그녀를 미워하는 것도, 그녀를 혐오하고 경멸하는 것도, 그녀의 배신에 치를 떨며 복수하는 것도.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불가했다. 두 사람은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었다.
“내가 나를 아주 잘 아는데,”
그 모든 불변의 명제를 지닌 클로이 가넷슈를 향해 레이몬드는 희게 웃었다. 서러운 울음이 그의 눈꼬리에 매달렸다.
“널 사랑하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야.”
클로이 가넷슈를 사랑하지 않는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만고의 진리이자 세상의 유일한 이치였다.
조심스럽게 이마 위로 입을 맞추자,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레이몬드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그녀의 정수리 위로 토옥 떨어졌다.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클로이 가넷슈를 사랑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 * *
찬 공기 속에서 오랜 시간 버틴 클로이의 몸은 끝내 허물어지고 말았다. 레이몬드는 자그마한 몸을 안아 들고 천천히 걸었다.
희미한 달빛에 드러난 얼굴이 너무나 새하얘서 이대로 희미하게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그는 괜히 클로이를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더욱 단단히 주었다.
참 예쁘기도 하지.
오늘도 모든 이들이 그녀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다리아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레이몬드는 분명 보았다.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해 안달을 내던 남자들의 눈빛을.
그녀를 한 번도 보지 않은 남자는 있어도, 한 번만 본 남자는 없을 것이다.
한 번 마주치면 두 번 시선이 가고, 세 번 돌아보게 되는 여자였다. 눈물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마저 지저분하기는커녕 청초한 느낌을 풍기는 여자였다.
“이번엔 또 무엇 때문에 운걸까.”
제 품 속에서 깊이 잠든 그녀가 들을 리 만무하건만, 레이몬드는 그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보나마나 카일로스 루드비히, 수백 번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이복형제 때문이겠지. 아직도 그녀가 그 남자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단 사실이 레이몬드를 가슴 아프게 했다.
레이몬드는 무도회장이 아닌 황후궁에 배정된 그녀의 방을 향해 걸었다. 그는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길을 찾아 가며 그녀의 방까지 도착했다.
길을 잘못 들 리 없었다. 매일 밤, 그녀가 잠들 때까지 그녀의 창밖 아래를 서성거렸으니까.
몇몇 이들은 황제의 난데없는 기행에 놀라 했으나 황궁의 경비를 살핀다는 그 말에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단지 다리아만이 코웃음을 몇 번 쳤을 뿐이다.
“클로이.”
“…….”
방 안에 도착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잠든 채였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몬드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그녀의 머리맡까지 끌어다 앉았다.
클로이의 얼굴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흰 자국만 남아 있었다. 레이몬드는 시녀를 불러 따뜻한 물수건을 건네받아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얼마나 아팠느냐, 클로이.”
얼굴을 닦아낸 물수건이 이제는 그녀의 손을 닦아 냈다. 손바닥에 박힌 작은 나뭇조각을 뽑아 낸 뒤, 손톱에 박힌 흙을 닦아 내고, 상처 사이로 새어나오는 피를 닦아 냈다.
그 남자가 남긴 설움을 하나씩 지워 내듯이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모두 닦아 내고 나자, 그녀의 잠든 얼굴이 조금은 더 평온해 보였다.
“줏대가 없다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를 사랑해.”
어떻게 이 마음을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그녀와 엮이지 않는 게 가능하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레이몬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손끝에 닿는 이 여자를 그토록 사랑했으나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레이몬드에게 굉장히 익숙한 일이었기에 새삼스럽지 않았다. 다만 조금 쓰라릴 뿐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그러니 너를 지켜 줄 것이다. 너는 아무런 걱정도, 부담을 갖지도 말아.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언제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너를 돌려보내 줄 거니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자신 또한 시간을 거슬러 왔음을, 이미 오래전 그녀를 용서하였음을 전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더 이상 스스로를 낮추지 않게. 스스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다 견디지 못해 쓰러지지 않도록.
레이몬드는 애틋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잠든 그녀가 듣지 못하는 사이, 아주 조금 욕심을 내어 그녀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클로이.”
그녀가 자신과 엮여 불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한 아주 작은 욕망이 새어 나왔다.
“네가 루드비히 대공 때문에 힘들어 한다면, 이제는 내가 그 자를 밀어내고 네 마음을 차지하고 싶어.”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이전부터, 아주 긴 시간 동안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가 바라 왔던 일이다.
“안 되겠지. 이미 충분히 힘들었을 네게 더 짐을 안겨 주는 것밖에 되지 않겠지.”
그러나 레이몬드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한차례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지난 시간 속에서도 그는 끝내 그녀를 자신의 정식 부인으로 둘 수 없었다.
귀족들도, 교단도, 모두 죄 없는 그녀를 공격했다. 다행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쩌면 그녀가 카일로스를 좋아했을 때만큼이나 큰 상처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사랑하지 말거라. 나를 사랑하면 안 돼. 더 이상 나와 엮이지 말아.”
다짐하듯 같은 말을 되뇌던 레이몬드는 헛웃음을 피시식 터뜨리며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걸 알면서도 너를 여전히 좋아하는 나는, 대체…….”
스스로가 어리석고 바보 같으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그녀의 앞에서는 한없이 내어 주는 천치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클로이 가넷슈를 담은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의 붉은 눈동자가 진한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었다.
“평생 천치로 살아도 좋아.”
* * *
늦은 밤, 닫혀 있던 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아이가 창을 타고 넘어 왔다. 사뿐한 걸음으로 바닥에 착지한 아이는 어둠 속에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두 사람의 인영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클로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과 닮은 여자를 향해 아이가 외쳤다. 오도도, 달려간 아이는 침대 위로 폴짝 올라 여자의 위에 올라탔다. 앙증맞은 두 손이 여자의 두 뺨을 붙잡았다.
“클로이, 클로이구나! 정말 클로이야…….”
여자의 얼굴을 이모조모 뜯어보며 중얼거리는 아이의 말씨에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내가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야. 아니, 훨씬 더 예뻐. 에녹이 말한 ‘아름답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그런데 클로이의 얼굴엔 슬픔이 너무 많아. 그래서 나도 마음이 아파.”
서글피 휘는 눈 꼬리는 아까 전 이 방에서 레이몬드 델 아스타로트가 지었던 표정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난 클로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아, 에녹이 그랬거든! 클로이는 웃는 게 가장 예쁘다고!”
한참 동안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이가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팔랑거리는 속눈썹이 힘없이 늘어졌다.
“아까는 왜 나를 보고 도망쳤어?”
아이는 여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나는 이렇게 한눈에 클로이를 알아봤는데, 왜 클로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거야?”
옅은 원망마저 묻어나는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클로이랑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몰라. 그래서 나는 아까 되게 반가웠는데, 그렇게 도망가 버려서 너무 속상했어.”
칭얼거리는 목소리는 분명 어린 아이의 것이었는데, 그 안에 담긴 내용과 말투는 성인의 것과 진배없었다.
“카일로스.”
원수의 이름을 입에 담는 아이의 눈빛이 순간 섬뜩하게 빛났다.
“그 개자식 때문에 그랬던 거지? 그치, 클로이?”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좋을 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미안해, 클로이. 카일로스가 너를 괴롭힌다는 말을 듣고 하마터면 이 손으로 목을 졸라 개자식을 죽일 뻔했어. 카일로스는 그렇게 쉽게 죽으면 안 되는데 말이야.”
여자의 가슴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아이는 날이 새도록 그녀의 가슴팍에 안겨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도 밖에서 에녹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떠나기 싫어. 클로이의 품이 좋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 했다. 아이는 울음을 꾹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 밑으로 깡총 뛰어내리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침대 옆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 사람은…….”
마주 보는 순간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에녹은 참 나쁘네.”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도 남자는 어린 아이의 몸을 한 레테가 한참이나 목을 뒤로 꺾으며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컸다.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레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레이몬드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고는 안 알려 줬잖아.”
푸스스 웃으며 손을 뻗어 보지만 도무지 남자의 얼굴에까지 닿질 않았다. 그녀가 눈을 한번 깜빡이자 아이의 작은 몸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미안해, 레이몬드. 에녹이 맨날 클로이 얘기만 해서 너를 잘 몰랐어.”
허공에 떠오른 채로 남자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어린 아이의 몸을 한 레테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이상하네. 너도, 클로이도, 왜 둘 다 이렇게 슬프기만 한 거야?”
그들의 감정에 공명하는 듯, 레테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그래도, 레이몬드. 네게는 절망이 없구나. 내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건강한 정신이야.”
손등으로 씩씩하게 눈물을 닦아 낸 레테가 싱긋 웃으며 허공으로 좀 더 날아오르더니 레이몬드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 너를 만날 수 있는 뜻밖의 행운을 내게 주어서.”
꺼질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레테의 작은 몸이 두 사람에게서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곧 다시 만나, 클로이. 레이몬드.”
두 사람에게 닿지 못할 인사를 건네며, 레테는 몸을 돌렸다.
이튿날 아침이 될 때까지 두 사람은 누군가 이 방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혹시 잠결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더라도 곧바로 잊어버릴 것이다.
레테는 ‘망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