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68/106)
  • #68

    열띤 환호와 즐거운 아우성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자는 점점 뒤로 물러서더니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카일의 몸도 나란히 움직였다. 그가 빠르게 행렬을 이탈해 달려 나가는 순간, 퍼레이드가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카일렉? 어디 가는 거예요! 제, 제롬, 어딨어? 어서 공작님을 붙잡아!”

    별안간 홀로 남겨진 레티샤가 패닉 상태에 빠져 허둥거렸다. 남편을 따라가려 마차에서 내리려다 행렬이 다시 움직이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다들 공작 부인을 호위하고 퍼레이드가 끝나기 전까지는 내색하지 마.”

    트리에스테 쪽 근위대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제롬이 재빨리 지시를 내리고는 말을 탄 채 군중 사이를 헤쳐 나갔다. 마차 문이 닫혔다. 다시 혼자 남은 레티샤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을 깜빡였다. 유리창에 달라붙다시피 군중을 이리저리 살피는 두 눈에 극심한 동요가 일어나 있었다.

    “분명히 앤지라고 했어. 앤지…… 이름을 불렀어!”

    앤지를 닮았거나 진짜 앤지든가. 어느 쪽이든 남편은 군중 속에서 앤지로 추정되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앞뒤 가리지 않고 여자를 찾으러 인파 한가운데 뛰어들었다. 국빈으로 방문한 왕실 퍼레이드가 한창일 때, 트리에스테도 아닌 타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아내인 그녀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서!

    “미친……. 미쳤어……. 어떻게 그럴 수가?”

    레티샤의 두 손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분노는 얼마 가지 않았다. 거대한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앤지일 리가 없어. 닮은 사람일 거야. 반드시 그래야만 해. 반드시. 하지만…….

    “설마 진짜 앤지라면? 그 계집애가 풍랑에서 살아남아 이 빈터가르에 살고 있었던 것이라면……?”

    불안과 초조는 이내 살의로 변했다. 그것은 상처받은 자존심, 모멸감, 수치심, 지독한 불안감, 그 모두를 한 번에 집어삼킬 만큼 극렬한 감정이었다.

    * * *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헐떡이는 숨결 사이로 생기가 죄다 빠져나갈 듯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앤지는 멈추지 않았다. 집 안에 들어서기 전까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와 가족들, 사용인 몇 명만 아는 지름길을 통해 간신히 브린의 저택에 도착했다. 앤지는 잔뜩 혹사시킨 심장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저택 후미, 지하 세탁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마지막 걸음을 이어갔다. 브린이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벌떡 일어났다.

    “앤지! 그렇지 않아도 늦어져서 사람을 부르려고 했었는데……. 괜찮아?”

    “응……. 한참 달렸더니 숨이…… 숨이 좀 찬 것뿐이야. 괜찮아.”

    마침 경시청에서 와 있었는지 마르틴도 아기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둘 다 바람에 흐트러져 비뚤어진 모자에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앤지를 보고 혼비백산했다.

    “앤지! 무슨 일이야?”

    부부가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앤지는 브린이 가져다준 물을 들이켠 뒤 모자 끈을 풀었다. 가발을 벗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댔다. 커다란 두 눈동자 역시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쯤 퍼레이드가 끝나가고 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블랙웰 공작과 관련된 건 아니지?”

    마르틴의 말에 앤지는 두 손을 꼭 말아 쥐었다. 집까지 오는 동안은 죽을 것처럼 무섭고 불안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염려스러운 얼굴을 보자 신기하게도 용기가 솟았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과 노아를 지켜 줄 사람들이 이렇게 곁에 있었다.

    “그 사람을 봤어. 카일……. 행렬에 참여하고 있었어.”

    “뭐? 어떻게 그런! 막바지에 계획을 변경한 건가? 경시청 협조 공문에는 아무런 변동 사항이 없었는데…….”

    “세상에!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지금 이 순간부터 2주간은 집 안에만 있자. 처음부터 그러기로 했으니까.”

    애써 앤지를 위로하려는 브린의 말에 앤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입술에 핏기가 조금도 없었다.

    “카일도 날 봤어.”

    마르틴과 브린이 숨을 헉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놀라 반문조차 나오지 않는 듯했다. 앤지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재 쪽을 가리켜 보였다. 거실과 홀에는 언제든 메이드가 올 수 있었다.

    “우리끼리 조용히 얘기해야 할 것 같아.”

    그 때 문이 열리며 현관 쪽에서 경쾌한 발소리가 울렸다. 앤지가 지레 놀라 흠칫 돌아섰다. 브린의 부친인 빌렘 반 아미티지가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평소처럼 완벽한 신사의 모습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시가지 퍼레이드가 막 끝난 참이야. 다들 집에만 있었을 테니 내가 대신 소식을 전해 주려고 왔지.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렇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빌렘은 톱 해트를 벗어 들며 의아한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외동딸과 사위, 그의 친척 아가씨까지 다들 망연자실한 낯을 하고 있었다.

    30분 뒤 앤지는 양손에 허브차가 담긴 잔을 들고 서재 소파에 앉아 있었다. 패트리샤와 노아가 자고 있는 이동식 침대는 서재 내 사이드 룸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만이라도 손 닿을 곳에 아기가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친 네 사람은 저마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묵직한 붉은색 커튼은 바깥에서 안쪽이 일절 보이지 않게끔 단단히 내려져 있다.

    하지만 구석의 벽마다 초들이 황금 촛대 위에서 불을 밝혀 주어 실내는 어둡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긴 했으나 아직 거리의 가스등이 켜질 시간은 아니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빌렘이었다.

    “퍼레이드 중 돌발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네. 하지만 놀랄 일도 아니지. 생겼대도 모른 척 수습해 별 탈 없이 끝내야 했을 테니까.”

    “내일 로르샤 마을로 떠날게요. 트리에스테 사절단이 빈터가르를 완전히 떠나기 전, 2주 동안 거기서 숨어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캐서린 할머니가 계신 레반에 가면 좋겠지만……. 컬리넌 섬에서 고아원과 보호 시설의 아이들을 데려갔을 때는 진짜 신원을 몰랐던 상태라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상황을 봐서 레반으로 옮기는 것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예전에는 로르샤와 레반이 몇 시간 거리였지만 이제 도로가 정비돼서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으니까…….”

    “음……. 난 찬성이야. 정말 시선이 마주쳤다면 그편이 안전할 수도 있어. 앤지를 못 알아봤을 수도 있고, 앤지를 잊은 지 오래라면 다행이지만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으니까.”

    마르틴의 동조에 브린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럼 노아까지 데려가려고? 레반이라면 노아가 캐서린 할머니가 계시니 괜찮겠지만 로르샤는 완전히 낯선 환경인데.”

    “그래서 말인데, 브린.”

    앤지가 결심한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보름 동안만 노아를 부탁해도 될까? 정말 미안해. 어떤 상황에서도 나랑 노아가 짐이 돼선 안 되는데. 패트리샤를 위해서라도.”

    “무슨 소리야, 짐이라니!”

    브린이 앤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도 노아는 여기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시터와 내가 잘 보살펴 줄 거고 패티도 같이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하지만 앤지, 네가 괜찮겠어? 나도 엄마니까 알잖아, 하루만 아기를 못 봐도 불안한데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떨어져 있기까지 하면…….”

    “난 괜찮아. 보름만 참을게. 딱 보름만.”

    앤지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브린의 말대로 벌써부터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단 하루도 아기와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공작가에서는 노아에 대해 모르고 있어. 섬을 떠날 때까지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엄마가 유일하게 내 임신을 짐작하셨지만 엄마는 그때…….”

    앤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격앙된 감정을 다시 억누르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내 옆에 노아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만에 하나 그녀가 노아를 데리고 있다가 레반 마을에서 잡히게 된다면. 그럼 노아의 존재를 스스로 알린 꼴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앤지의 심정을 이해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앤지가 숙연한 분위기를 깨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모두 죄송해요. 폐만 끼쳐서……. 빌렘 아저씨가 계시니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믿지만, 혹시라도 나와 노아 때문에 마르틴과 브린에게까지 피해가 가면…….”

    “무슨 말이야, 폐라니! 여긴 빈터가르고 아빠는 빈터가르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에 명예시민이야. 단언컨대 우린 안전해.”

    브린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앤지의 말을 반박했다. 그리고는 역시 걱정이 되는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앤지도 레반까지 가지 말고 여기 있으면 안 될까? 집 안에만 있으면…….”

    “아냐, 브린. 일꾼들이 늘 수시로 왕래하니까 아무래도…… 이 집 자체를 완전히 폐쇄하지 않는 한 앤지의 마음이 놓이지 않을 거야.”

    “마르틴의 말대로야. 그럼 내일 새벽에 바로 떠날게. 그리고 한 가지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앤지는 수 초간 뜸을 들이다 침착하게 말했다.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노아를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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