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 (67/106)
  • #67

    며칠 전 레티샤는 퍼레이드의 비공식적 참여에 따라가게 해 달라 애걸복걸했었다. 지금까지 얌전하게 있었으니 딱 한 번만 들어달라는 통에, 마차 안에 석상처럼 입 다물고 앉아만 있겠다는 맹세를 조건으로 수락했다. 시타델 시가지가 그리 크지 않아 퍼레이드는 길어야 30분 정도일 터였다.

    카일은 레티샤를 기다리지도 않고 호위대를 이끈 채 별궁의 중정으로 향했다. 후문 앞에 화려한 4인용 마차가 대기 중에 있었다. 유리창이 양쪽에 하나씩 달려 있고 마부대와 시종석이 딸린, 왕실 전용 카레타였다. 그의 직속 호위대와 제롬은 마차를 엄호하듯 바로 뒤에서 말을 타고 따라올 예정이었다.

    그가 착석하고 한참 후에야 화려한 복장의 레티샤가 마차에 당도했다. 어차피 군중에 보이지도 않을 텐데 멋이란 멋은 다 부리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카일은 부인 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서, 한 손에 턱을 짚고 제 쪽의 창에만 시선을 주었다.

    * * *

    자수는 금세 완성되었다. 매들린은 앤지가 새로 놓은 머리글자를 만족스럽게 확인한 뒤 잘 포장해 사환에게 건네주었다. 다행히 일거리는 제때 마무리되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이쿠, 이런. 바퀴가 빠져 버려 어쩌나. 곧 퍼레이드가 시작될 거라 마차 통행이 막힐 텐데. 다른 하나도 헐거워서 이대로는 안 되겠는걸?”

    마부 안톤이 혀를 차며 난색을 표했다. 마차가 의상실 앞을 떠나기 무섭게 바퀴에 문제가 생겨 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른 쪽 바퀴도 빠져 버릴 터였다.

    “아저씨, 괜찮아요. 거리가 먼 것도 아니니 걸어갈게요.”

    “잠깐만, 같이 가십시다! 아가씨 혼자 보낼 순 없죠!”

    앤지가 마차에서 내려서자 문 앞에서 배웅하던 매들린이 광장 쪽을 가리켜 보였다. 벌써부터 웅성거림이 일면서 사람들이 바삐 몰려가고 있었다.

    “어머나, 행렬이 벌써 시작했나 봐! 그럼 안톤 씨는 가게 앞에서 느긋하게 마차를 손보세요. 앰버는 저기 강변 쪽까지 바래다줄 테니까 겸사겸사 퍼레이드 구경하면서 가자고. 응?”

    “아…….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교차로 쪽으로 갈게요. 수리까진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릴 테니 그냥 걸어가도 돼요.”

    트리에스테 황실 사절단은 퍼레이드에 참여하지 않는다. 보안상 그들 모두 황궁 밖으로는 일절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경시청 소속인 마르틴의 정보인 만큼, 그 부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안한 마음에 그쪽으론 아예 가고 싶지 않았다.

    “교차로? 빵집 골목 쪽 말이지? 거기 공사 중이라 길이 온통 진흙 웅덩이야! 그러지 말고 멀리서라도 퍼레이드 보면서 가자. 사람들 많은 데 싫어하는 건 알지만 어차피 다들 앞줄에 몰려 있을 테니 뒤쪽은 텅텅 비어 있을 거야. 자자, 그러지 말고!”

    매들린이 잔뜩 들뜬 얼굴로, 우물쭈물하는 앤지를 광장으로 이끌었다. 앤지는 얼떨결에 손목이 잡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강변까지만 동행했다가 그 앞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았다.

    “알겠어요. 같이 갈 테니까 조금만 천천히…….”

    “시가지 퍼레이드는 3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그냥 행렬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멈춰서 선물과 보석도 뿌려 주고, 미리 대기 중인 화동들이 왕자와 왕녀에게 꽃도 걸어 주는 진풍경도 볼 수 있는데 이 재밌는 걸 왜 지금까지 안 본 거야.”

    “아…… 안전 때문에 행렬과 군중 사이가 철저히 차단될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군요.”

    “이제 전쟁도 끝났고 평화로운 시기니까 왕실도 긴장을 좀 늦추는 거지. 앰버도 이제 수도 사람 다 됐으니 제대로 즐겨 보기도 해야지.”

    저만치서 화려한 퍼레이드 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픈 캐리지에 탄 왕실 일가와 기사처럼 말에 탄 방계 남자들이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왕실 근위대가 마차와 말마다 바짝 붙어 경호하긴 했지만 맨 앞줄에 선 사람들과의 간격이 아주 멀진 않았다.

    “어머, 어린 황자님 자라신 것 봐. 폐하 만세!”

    매들린이 줄 뒤에 서서 까치발을 들며 왕실 만세, 빈터가르 만세를 연신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녀처럼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입헌 군주제로 전환한 뒤로도 왕가의 인망은 그대로인 듯했다.

    앤지도 매들린 옆에 서서 홀린 듯 행렬을 바라보았다. 지체 높고 고고할 거라 생각했던 왕실의 이미지와는 달리 국왕 부부는 무척 친근해 보였다. 앤지는 집으로 바삐 돌아서려던 것도 잊고 잠시 퍼레이드에만 몰입했다.

    천천히 나아가던 행렬이 광장 분수대 앞에서 뚝 멈췄다. 매들린의 말대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화동 무리가 오픈 캐리지로 다가가 시종들에게 꽃다발과 화환을 건네주었다. 왕녀는 근위대에 둘러싸인 채 가장 작은 아이를 안아 주고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시종들이 선물이 든 조그만 주머니를 군중에게 던질 때 환호성은 극에 달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펄쩍 뛰며 서로 주머니를 받으려고 두 팔을 활짝 펼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서로 밀치거나 싸우는 일은 전혀 없었다. 누군가 아이가 잘 받을 수 있게끔 번쩍 들어 올리면 옆 사람이 도와주는 등, 화기애애한 장면도 간간이 보였다.

    밝고 따스한 분위기에 앤지의 입술이 저절로 호를 그렸다. 노아도 저만큼 자라면 퍼레이드에 데리고 와야겠어. 얼마나 좋아할까. 부디 그때는 마음 편히 다닐 수 있게 되면 좋을 텐데. 불안해할 필요 없이, 어디든 자유롭게…….

    행렬은 선물 주머니가 바닥날 때까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되었다. 앤지가 미소 띤 채 행렬의 끝자락에 눈길을 줄 때였다. 드문드문 가려져 있던 시야가 갑자기 확 트였다. 앞줄을 차지했던 사람들이 뭘 떨어뜨렸는지 바닥에 웅크리고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앤지의 두 눈이 화려한 카레타 마차를 담았을 때였다. 조그만 사각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로열패밀리 모두가 군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니다. 일가 중 누군가는 비개방형 마차에서 모습을 숨기고 행렬에 참여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마차 문이 열리며 안쪽에 자리했던 남자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앤지의 심장은 경악에 휩싸였다.

    잠시 귀가 멀어 버린 것 같았다. 더 이상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일시에 멈춰 버린 듯했다. 앤지의 얼굴에 잔잔히 퍼져 있던 미소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카일.

    앤지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왕족의 하나로 보일 만큼 고귀한 차림새, 멀리서도 눈에 확 띌 만큼 미형인 얼굴이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마차 아래로 한 발 내려서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카일이 왜 지금 여기에……. 퍼레이드엔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왜.

    하지만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분명 카일이 틀림없었다. 카일렉 로던 블랙웰. 트리에스테 황실의 방계이자 실질적인 지배 세력인 가문의 공작.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카이. 그녀를 친딸처럼 키워 준 양부모를 눈앞에서 잔혹하게 살해한 남자. 그리고 노아의 친부.

    두 쌍의 눈이 허공에서 다시 맞부딪혔다. 앤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다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앤지는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듯 달렸다. 선물을 받으려고 애쓰는 매들린 부인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사람들의 즐거운 환호성과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앤지는 광장의 인파를 뚫고 정신없이 뛰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하나님. 제발…… 제발 아니게 해 주세요. 제발요!

    앤지는 저택이 있는 골목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숨을 고를 틈도 없었다. 턱 아래로 끈을 단단히 묶지 않았다면 모자는 오래전에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날 알아보지 못했을 거야. 가발에다 모자까지 쓰고 있었잖아. 그 많은 사람들 중 나를 어떻게…… 그저 내 쪽을 보고 있었던 게 다일 거야.

    달리는 중에도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심장은 자꾸만 진실을 일깨워 주려 했다. 그녀가 끝내 부인하고 싶은 진실이 기어이 밭은 호흡을 뚫고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은 정면으로 충돌했다. 카일은 그녀를 확실히 알아보았다.

    노아, 제발……!

    어릴 적 제 아빠를 쏙 빼닮은 작고 동그란 얼굴, 천사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의 미소가 앤지의 뇌리를 빠르게 잠식해 왔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노아는 그를 멸하려는 아버지의 마수로부터 반드시 지켜야 할 존재이자, 그녀의 목숨과도 같은 생명이었다.

    * * *

    앤지……?

    쿵, 쿵, 심장이 고장 난 것 같았다. 고동이 뇌우처럼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어느새 마차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카일은 홀린 듯이 마차 아래 내려섰다. 그동안에도 시선은 군중 속 한 여자에게 붙박여 있었다. 등 뒤 레티샤의 목소리는 단 한 음절도 귀에 와 닿지 않았다.

    아이보리 색 모자 아래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가 나풀거렸다.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금발이 아니었다. 하지만 뒤로 젖힌 챙 아래, 보석처럼 반짝이는 녹색 빛깔은 그가 아는 눈동자였다. 눈뿐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린 듯 고아한 인영을 이룬 선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제 심장의 심연까지 아로새겨진 그 윤곽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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