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은 공녀님만 찾는다-116화 (116/163)

116화

밤늦게까지 루만은 돌아오지 않았고 메이아는 방으로 돌아와 마법 이공간을 열어 테오도르가 준 선물 상자를 꺼내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테오도르의 초상화가 그려진, 작고 큰 액자 세 개 정도가 들어 있었다.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메이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분명 좋아할 만한 선물일 것입니다.>

귀족에게 있어 초상화를 선물로 준다는 건 그만큼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주는 선물이다.

“퀴니가 그렸구나…….”

그와 함께 정원에 앉아 있는 모습의 그림도 액자에 끼워져 있었다.

“그가 날 바라볼 때 이런 눈빛이구나…….”

자신에게 보내는 말할 수 없는 애틋함이 테오도르의 눈빛에 표현되어 있었다.

“선물 너무 마음에 드네.”

노크하고 들어온 유디는 메이아가 받은 선물을 보며 미소 지었다.

“대공 각하께서 주신 겁니까?”

“응……. 퀴니가 그려 줬어.”

“예쁘네요.”

유디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슬쩍 돌리며 눈가를 눌렀다. 메이아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 든든한 약혼자와 함께 있는 모습에 벅차올랐다.

“두 분 잘 어울리십니다.”

“그가 보고 싶어, 유디.”

테오도르를 그리워하는 메이아의 눈빛에 유디는 확실히 느꼈다.

“아가씨, 그분을 사랑하시는군요!”

“이 감정이 만약에 사랑이라면 그럴 거야…….”

말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거대한 감정 속에.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곳까지 잠겨 들어도 좋은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당신에게 담은 이 감정을 표현할 말이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테오도르의 그 말뜻을 이해 못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을 이해했다.

“맞아. 난 그를 사랑해.”

떨어져 있는 이 시간 속에서 그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움을 외면하기 위해 메이아는 자리에 일어서서 창문 앞에 섰다.

하얀 달빛과 반짝이는 별을 보면 볼수록 그와 함께 있었던 밤이 생각난다.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한참을 어루만지고 바라보며 잠들었던 그 밤이…….

메이아는 답답한 마음에 순간 창문을 어루만지며 유리창에 집게손가락 끝으로 그의 이름을 썼다.

유디는 그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며 조용히 입술을 호선을 그렸다.

늦은 밤까지 그를 생각하다 잠든 메이아는 보기 드물게 늦잠을 잤다.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은 그녀가 걱정된 유디는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유디의 목소리에 메이아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잠들기 전까지 창가에 걸터앉아 그가 그려진 초상화와 선물 상자 안에 있던 편지를 읽다 보니 늦게 잠들었던 게 생각이 났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제외하곤 이렇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건 처음이다.

할 일이 많은데 온통 머릿속에는 테오도르만이 꽉 차 있다.

메이아는 웃으면서 침대맡에 있던 테오도르의 초상화를 쳐다봤다.

메릴과 루만 때문에 짜증스러운 마음이 입 안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일어났어, 유모.”

눈을 돌려 옆을 보니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아가씨.”

“그런가 봐. 저 아이는…….”

메릴에게 매질을 당했던 하녀였다.

“불쌍한 아이라 제가 거둘까 합니다.”

“그래?”

하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메이아는 훑어보았다. 메릴에게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아직도 왼쪽 뺨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몸은 괜찮은 거니? 이름이 뭐니?”

하녀는 잔뜩 긴장한 채 머리를 조아렸다.

“데이지입니다, 공녀님!”

데이지는 메릴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메이아에게 구해졌다.

메이아를 만나러 가자는 유디의 말에 경험상 메릴이 그랬듯 같은 취급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높은 가문에 속해 있는 고귀한 혈통들은 항상 벌레 보듯 자신을 쳐다본다.

평생을 그런 취급을 받아 왔다.

하지만 메이아의 눈빛에서는 자신을 걱정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벌레처럼 더럽다는 듯 쳐다보지 않았다. 뒷골목 고아 출신 하녀에게 웃어 주는 고귀한 혈통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뺨이 많이 부었구나.”

“저는 괜찮습니다.”

“공작저에 있는 동안 데이지가 유디와 함께 내 시중을 들어 주면 되겠구나.”

“제가 공녀님 시중을요?!”

메이아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은 데이지는 당황했다.

“저 같은 하녀가…… 어찌.”

“너 같은 하녀가 어떤 건데?”

“전 고아에다가 더러운 출신입니다.”

더러운 출신이라면 사생아나 뒷골목 길거리 아이라는 뜻이다.

“나를 시중드는 사람의 출신은 중요하지 않아.”

“그, 그래도 저 같은 게 감히.”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진 채 우왕좌왕하는 데이지의 모습에 메이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보통 이런 제의를 하면 좋아할 테지만 데이지는 자신의 분수와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니 시중들라는 말에 어쩔 줄 모르며 거절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자존감 또한 낮다는 뜻이다.

“좋은 아이구나.”

“아가씨, 꼭 아그니타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아.”

“저는, 저는.”

말을 더듬는 데이지에게 유디는 말했다.

“데이지, 자꾸 아가씨의 권유를 거절하는 건 좋지 않단다.”

데이지는 자신의 더러운 출신만 생각해서 거절했기에 그게 실례가 된다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시중들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기대할게.”

데이지는 살면서 누군가의 기대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유디.”

“예.”

“의원에게 데이지를 보여 주고 하루 푹 쉬게 해. 먹을 것도 잘 먹이고.”

“알겠습니다.”

공작저에 들어와 이런 꿈 같은 일을 겪게 된 데이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제부터 먹을 것도 충분히 먹었고, 연고라는 것도 발라 봤다.

“데이지.”

“예, 유디 님.”

“네가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맞더라도, 이유가 있어 맞더라도 결과는 똑같단다. 이유가 없든 있든 맞는 건 누구나 억울한 일이지.”

“예.”

“그렇지만 메이아 아가씨 때문에 맞는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그걸 억울하게 생각하면 안 된단다.”

“네!”

유디는 무심하게 데이지에게 물었다.

“왜 억울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지 아느냐?”

데이지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가족 같은 사이라 그렇단다.”

“가족이요?”

“메이아 아가씨를 모시는 아그니타라는 아이가 있단다. 너처럼 고아지만 아가씨가 거뒀다. 여동생처럼 곁을 주고 아끼셨지……. 비록 메릴 공녀 때문에 가출했지만…….”

“여동생이요……?”

시녀를 여동생이라고 생각하는 귀족이라니!

데이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이아 아가씨는 항상 곁에 있는 사용인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우리 또한 그분을 가족같이 생각한단다.”

“가족…… 이요?”

데이지에게는 너무 갖고 싶은 단어.

“너 또한 아가씨에게 가족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어.”

“정말요……?”

“가족은 억울한 일이 생겨도 나쁜 일을 겪더라도 서로 원망을 해선 안 된다. 서로를 지켜 줘야 하는 존재란다. 억울하게 맞더라도 가족을 지키는 마음을 가진다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미소 짓는 그녀를 유디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겪어 보면 알게 될 될 게다, 데이지.”

“네.”

의원을 만나고 온 데이지는 하녀들이 지내는 방으로 돌아갔다.

유디는 다시 메이아 방으로 들어갔다. 유디는 아침에 시리우스 제국이 성국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선언문을 황제가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소식은 귀족들에게도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모를 수 없었다. 시리우스 제국의 소드 마스터인 록벨리온 공작이 전쟁 지휘관으로 앞장섰으며 마탑의 마법사들 또한 마정석이라는 보상을 받고 고용되었다. 더군다나 시리우스 제국의 군대는 플로렌스 대공령에 있는 텔레포트를 이용하여 빠르게 성국을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물약과 아티팩트를 제값에 팔지 못했을 거 아닙니까.”

아침 식사를 방에서 한 메이아는 기지개를 피며 하품했다.

“유디, 삼촌은?”

“소식 듣자마자 거품 물고 쓰러지셨습니다.”

메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조카로서 병문안을 한번 가야 하겠네.”

“에구! 맞다. 아가씨 앞으로 편지들이 엄청나게 왔습니다.”

“내가 왔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겠지. 편지들은 모두 내 책상에 올려놔.”

메이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침대에서 일어섰다. 쓰러진 루만에게 가기 위해서.

루만은 수도 내 신성력이 담긴 물약과 아티팩트를 모두 구매했다.

구매한 이유는 하나다. 바로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항상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가격이 올라가는 건 신성력이 담긴 아티팩트와 물약이다.

또한 혹시 모를 상비약과 더불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구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물약과 아티팩트가 비싼 값이라 구매 비용이 약간 부족해 은행에 대출을 받아 구매했다. 조금은 높은 금리이지만 산 물건들을 금방 되팔아 갚으면 된다.

메이아와 저녁 약속을 했지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확천금이 눈앞에 있는데 약속이 중요할까?

루만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혼자 그 많은 물약과 아티팩트를 구매했다.

이젠 전쟁이 언제 터지더라도 돈방석에 앉을 생각에 루만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기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국에서 흑마법이라니, 대량 학살 실험이라니!>

<증거가 너무 뚜렷합니다.>

<마탑에서조차 성국에게 등을 돌렸다 합니다.>

<시리우스 제국의 황족을 몰살시키려 하다니.>

<미쳤군.>

<나 같아도 전쟁 선포하겠어!>

<요번 전쟁 소드 마스터인 록벨리온 공작이 나섰다는군.>

<전쟁광이 나섰으니 금방 정리가 되겠지만 신벌은?>

<그런 잔인한 성국이 신의 보호를 받을 리가.>

<으으, 나는 성국에서 파는 물약을 버렸네. 흑마법으로 만든 약일지도 모르잖아.>

사람들은 그동안 성국이 몰래 했던 잔인한 일들에 말하며 성국에서 판매한 물약과 아티팩트를 버렸다.

버리는 게 당연했다. 흑마법과 사람을 죽여 만든 물약, 그리고 아티팩트를 그 누가 쓰고 싶어 하겠는가!

루만이 대출까지 받아 구매했던 물약과 아티팩트는 순식간에 헐값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망했다는 세 글자만 떠다녔다.

“흑마법이라니! 성국에서 흑마법이라니!”

“진정하십시오! 주인님.”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루만이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더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루만을 집사는 걱정스레 쳐다봤다.

루만은 갚아야 할 대출금 생각이 나자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해 쓰러져 버렸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끙끙거릴 뿐이었다.

그런 루만을 찾아간 사람은 메이아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