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테오, 오랜만이야. 안 본 사이에 더 늠름해졌네. 친한 형으로서 매우 기분 좋네. 그리고 약혼했던데 축하해. 못 와서 미안하고. 내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거든.>
<영지전 하랴, 약혼식 하랴, 이젠 하다 하다 성국과 전쟁까지?>
<테오, 내 여자가 아이를 가졌어.>
<축하합니다. 그런데 그거와 성국과의 전쟁이 무슨 상관인 겁니까?>
<교황의 자기 반려라며 내 귀여운 리아를 납치했어.>
<납치라니…….>
교황의 반려라면, 그녀에게 신성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너는 약혼녀를 사랑해?>
<예.>
<그 약혼녀가 임신을 했는데 납치를 당했어. 넌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겠어?>
테오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교황이 납치한 게 확실합니까?>
<응……, 리아가 사라지자마자 교황 또한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내 앞에서 리아를 반려로 맞이하겠다고 큰소리쳤고……. 뭐 그거 말고도 전쟁해야 할 이유는 많아.>
록벨리온 공작은 품에 품었던 서류를 넘겨주었다.
테오도르가 건네받은 자료에는 성국이 그동안 신성력이 있는 사람을 데려가 모두 ‘실종’이 되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교황이 있는 곳에는 항상 마물이 나왔어. 요번 황태자 전하의 탄생일 날에 열렸던 사냥 대회에서 많은 마물들이 나타나기까지 했지.>
테오도르는 열심히 설명하는 록벨리온 공작을 쳐다봤다. 그는 언제나 뻔뻔하고, 능글맞으며 자기중심적이다.
시리우스 3세 황제가 불쌍해 보일 정도로 그를 구석까지 몰아붙이는 인성은 유명하다.
자신이 대공이라 하더라도 꿀리지 않는다. 당연했다. 그는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이다.
테오도르 역시 기사로서 그를 경외하기에 반말하든, 능글거리든 신경 쓰지 않는다.
<테오, 난 말이야.>
하지만 그런 그의 눈에 슬픔이 보였다. 괴로워 보이고, 분노가 엿보였다.
<전쟁이 시작되면 나의 리아를 제일 먼저 되찾고, 다 죽일 거야. 남김없이.>
그에게서는 형용할 수 없는 흉흉한 기운이 풍겼다.
끝을 알 수 없는 살의가, 숨길 수 없는 살기가 그의 몸을 지배했다.
<걱정하지 마, 테오. 약해빠진 성기사들이나 성국 병사들한테 칼질 몇 번 하면 전쟁은 금방 끝나. 한 달도 안 걸릴 거야. 이틀이면 돼.>
그의 심정이 훤히 보였다.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 비치는 처참함이 이해된다.
그가 준 성국의 자료들이 어쩌면 허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에게 대항할 만큼 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사랑하는 이를 구하려는 록벨리온 공작을 욕하고 싶지 않다.
만약 반대로 메이아가 납치된다면 저 또한 록벨리온 공작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원하는 도움 드리겠습니다. 대신에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들어주지.>
<이야기도 듣지 않고 들어준다는 겁니까?>
<테오라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걸 말할 거잖아.>
록벨리온이 겪은 일을 비록 겪어 보지 않았지만 무척 공감되었다. 그의 살기와 분노 안에서 느껴지는 걱정과 슬픔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
루만은 요즘 머리가 아팠다.
드디어 메릴이 황태자 파츠래리와 국혼을 올리게 되어 몹시 기분이 좋았다.
메릴의 국혼 소식 덕분에 하고 있던 사업들도 더 잘돼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축하해 주며 미래의 국구라 추켜세워 줬다.
그리고 생각보다 메릴이 얌전하게 있어 하루하루가 나쁘지 않았다.
태풍이 오기 전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메릴은 크게 사고를 쳤다.
메이아의 물건을 자선 경매가 아닌 익명으로 운영되는 비밀 경매장에 내놓은 일 때문에 각종 항의 편지부터 시작해 사람들의 조롱까지 받게 되었다.
“아빠, 어차피 같은 경매장인데 다를 거 있어요? 어차피 받은 돈으로 자선 단체를 후원해 줄 생각인데.”
루만은 정말 경매장의 차이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메릴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메릴,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한다.”
루만의 지적에 메릴은 씩씩거리며 제 할 말만 했다.
“메이아가 저한테 부탁해서 한 것뿐이잖아요.”
루만은 책상을 손으로 쾅 내려치며 메릴에게 소리쳤다.
“그러면 일반 경매라도 내보내지! 익명 경매가 뭐냐!”
“무슨 차이가 있다고 그러세요!”
메릴의 입술을 깨물며 굳게 닫았다. 당연히 토마스의 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익명 운영의 경매장을 이용했다. 하지만 여기서 루만에게 토마스에 대해 말해 버린다면 관계 또한 드러날지도 모른다.
메이아만 돌아오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파츠래리와 파혼이 될 때까지는 입을 꾹 닫고 있어야 한다. 파혼만 된다면 시간이 조금 지나고 토마스를 루만에게 소개해 주면 될 일이다.
그러니 아직은 밝히면 안 된다. 또한, 밝혀져서도 안 된다.
메릴은 코웃음을 치며 오히려 목소리를 돋웠다.
“익명이나 일반이나 뭐가 다르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루만은 정말 황당한 대답만 하는 메릴을 황망히 쳐다봤다.
“메릴!”
메릴은 경매장에 메이아 물건을 조금 판 거로 쥐 잡듯이 자신을 잡는 아빠가 미울 뿐이다.
“몰라요!”
메릴은 루만의 말을 마저 듣지 않았다.
“메이아가 부탁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 생기지도 않았어요! 다 메이아 잘못이에요! 와서 알아서 하라고 해요! 짜증 나!”
루만이 목소리가 커질수록 메릴의 목소리를 더 크게 냈다.
잘못한 사람은 메릴이지만 오히려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 듯 행동했다.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루만은 자신의 가슴을 팍팍 내려치며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메이아 때문이라고요. 난 시골 살다 와서 공녀가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걸 부탁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요!”
“메이아는 거절해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넌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될 거다. 당연히 자선 경매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짜증이 솟구쳐 오른 메릴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쓸어 넘겼다.
“메이아 때문이니깐! 메이아 불려서 일 해결해요! 난 모르는 일이에요! 그리고 경매로 들어온 돈은 이미 보육원이나 미혼모 시설에 기부했으니깐 그리 아세요!”
루만은 이를 악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시설 이름은 무엇이냐?”
“알아서 했어요. 전 할 말 다 했으니 나가 볼게요.”
메릴은 거칠게 문을 열고, 있는 힘껏 문을 쾅 소리 내며 닫았다.
씩씩거리며.
사람들도 정말 웃긴다. 왜 선물 줬던 물건을 다시 사들여서, 마음대로 파네 마네 참견하는 것인가!
좋은 물건 구매했으면 된 거지!
그리고 자신은 메이아의 물건을 건드릴 만한 자격이 되는데 그런 자신을 도둑 취급하다니.
메릴의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있는 힘껏 문을 닫고 나간 메릴의 모습을 보며 루만은 힘들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휴…….”
이를 어쩌면 좋지? 그냥 놔두기엔 공작가 소문이 안 좋아진다.
특히 메이아의 물건을 손댈 만큼 간 큰 사용인들은 없을뿐더러, 항의하는 자들 대부분 메릴이 손대는 거 아니냐며 의심한다.
국혼을 앞두고 괜히 구설에 오르락내리락한다면 사업도 오르락내리락할 게 분명했다.
“뭐, 메이아가 와서 사람들을 진정시켜 준다면 해결되겠지.”
설마 사촌 언니가 실수한 거로 화낼까? 살면서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루만은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메이아가 오면 알아서 정리될 거란 생각했다.
“토마스, 너 요즘 돈 많다?”
토마스는 이마에 핏대가 돋을 정도로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좋은 건 함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콜.”
토마스에게 말을 건넨 사내는 금화 여러 개를 테이블 가운데로 던졌다.
“좋은 건 혼자 해야지, 윈들렌.”
토마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과 즐거움을 억지로 잡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질리면 줄게.”
토마스는 요즘처럼만 살면 소원이 없었다. 메이아의 물건을 처분하며 받은 많은 돈은 기부하겠다는 말과 함께 유흥 자금으로 착실하게 쓰이고 있다.
그것도 모르는 메릴은 그냥 다 퍼 주었다.
<그러면 기부는 문제없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기부 증서 가지고 왔습니다.>
어차피 보육원에 몇 푼의 돈만 주고 받아 온 증서는 위조 또한 쉬웠다.
기부 증서를 받고 메릴은 감격하며 고마워했다.
<메릴, 황태자비가 되어도 전 당신의 정부로 지낼 수 있습니다.>
<토마스…….>
<하지만 걱정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말해 봐요, 토마스.>
<만에 하나 아버지가 억지로 절 정략혼 시키려고 한다면 정략혼 시킬 수 없도록 막아만 주십시오. 전 메릴 이외 다른 여자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토마스! 걱정하지 마요. 저도 토마스 이외 어떤 남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사랑합니다, 메릴.>
토마스는 메릴에게 달콤한 말을 쏟아 내며 온갖 감언이설로 무조건 자신을 믿게 하였다.
윈들렌은 음흉하게 웃고 있는 토마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냐?”
“괜찮아. 계획은 다 세워 놓았으니깐.”
메릴이 멍청하게 굴수록, 사교계에서 고립될수록 오로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토마스 자신밖에 없다.
알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계약서도 이미 있다. 그리고 쿠룬달스 백작저에 와서 메릴이 난리 치는 걸 많은 사용인이 봤다.
“더블.”
여자들은 왜 그렇게 사랑에 목매는지 모르겠다.
사랑에 목맨다. 스스로 목에 밧줄 매이는 걸 모른다.
여자란 그렇게 바보다.
제 목에 밧줄 감기는 것도 모르고 그걸 사랑이라고 믿는 그런 바보.
“원래라면 메이아 공녀님이랑 놀아나야 하는데 영 찔러도 반응 한번 없으니, 원.”
“아서라. 메이아 공녀는 공략하기 어려워.”
“그래도 아깝단 말이지. 성인식 때 오시면 한번 다가가 볼까는 생각해.”
토마스의 말을 들은 윈들렌은 배꼽 빠진다는 듯 크게 웃었다.
“야야, 너만 하겠냐? 나도 할 건데.”
“약혼녀가 알면 퍽 좋아하겠다?”
“약혼녀가 별거냐? 메이아 공녀랑 급이 다른데. 그 하얀 피부, 가느다란 허리에 손 한 번 올리면 좋겠다. 잠자리는 얼마나 황홀할까?”
토마스는 메이아에 대한 미련이 컸다. 먹기 좋은 케이크를 눈앞에서 보기만 할 뿐.
먹지도 못한다면 그 미련이 오죽할까.
드래곤 대신 와이번이라고.
토마스는 메릴을 가졌지만 그녀를 가질수록 생각나는 건 메이아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메릴이 챙겨 준 메이아 물건 중에 드레스 한 벌을 몰래 빼돌렸다.
그 옷은 예전에 황태자의 탄생일 때 입고 파츠래리와 춤을 췄던 드레스다.
그때 얼마나 나비 같았는지 모른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적인 여자다.
그래서 코르티잔에게 그 드레스를 입혔다.
<넌 이제부터 메이아 공녀야!>
<어머, 제가 공녀예요?>
<메이아는 너처럼 천박하게 말하지 않아! 입 다물고 새침한 표정으로 누워 있어.>
<예.>
<아니야! 아니야! 메이아 공녀는 너처럼 대답하지 않아. 좋아요, 싫어요, 부끄러워요, 이런 말을 한다고! 알아들었어?>
<알아들었어요.>
<요조숙녀처럼 굴란 말이야.>
은빛으로 머리를 염색시킨 코르티잔에게 드레스를 입혀 재미있게 놀았던 밤이 생각나 몸이 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하아, 메릴보다는 메이아인데.”
대리 만족이라 하더라도 만족이니 참으려고 했지만, 토마스는 도저히 메이아가 포기가 안 되었다.
“요번에 최선을 다해 유혹해 봐야지.”
아랫입술을 핥는 토마스의 눈빛은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