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애쉬 영식도 잘 지내셨죠?”
“예, 잘 지냈습니다. 공녀님도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저야 항상 테오도르 대공님이 잘 챙겨 주시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말에 애쉬는 어색하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다이애나 영애는 오늘도 드레스가 참 예쁘네요.”
다이애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만남을 위해 일주일을 굶다시피 물과 묽은 수프만 마시면서 가느다란 허리를 유지했다. 이렇게까지 굶은 이유가 무엇인가! 오로지 테오도르와 달콤한 첫인사와 애틋한 만남을 위한 것인데 그 사이를 방해는 메이아 때문에 그와 인사도 하지도 못했다.
어떻게서든 당장 메이아를 저 멀리 쫓아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메이아는 시시각각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가 얼른 미소 짓는 다이애나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정해진 드레스 차림이 달라야 한다. 연회장 그리고 식사자리, 가벼운 산책이나 어디로 외출하는지에 따라서 맞춰 입어야 한다. 어떻게 입고 나가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메이아는 노르딕 영애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번에 입었던 차림과 비슷하게 코르셋으로 허리는 가늘게 하고, 엉덩이 부분은 아주 풍성하게 만든 드레스 디자인이었다. 드레스에는 레이스와 비싼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가신으로서 대공가에 인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연회장에 온 것처럼 꾸미고 왔다.
다이애나는 가신 가문으로서 인사하는 것보다는 아름답게 꾸미고 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다. 테오도르 눈에 들기 위해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에게 집중하는 노르딕 부인과 다이애나의 마음이 뻔히 보였다.
“대공 각하?”
“…….”
“대공 각하!”
테오도르는 메이아를 바라보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부르는 노르딕 부인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지며 시선을 돌려 노르딕 부인을 쳐다봤다.
“테오도르 대공 각하, 여기 옆엔 제 아들 애쉬입니다. 그 옆의 아이는 제 딸인 다이애나입니다.”
“안녕하세요. 노르딕가의 다이애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노르딕가의 애쉬입니다, 대공 각하.”
인사를 하고 난 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애쉬는 힐끔힐끔 메이아를 황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테오도르는 짜증 나는 마음을 꾹 누르며 애쉬를 노려보고 말했다.
“애쉬 영식.”
“예, 대공 각하.”
“레이디를 자꾸 그렇게 훔쳐보는 건 실례지.”
몰래 힐끔거리다 걸린 애쉬는 뺨을 붉히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께서 매우 아름다워 자꾸 눈이 갔습니다.”
“죄송한 일을 한 걸 알고 있다면 더는 힐끔거리지 않으면 되지.”
“……알겠습니다.”
테오도르는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가라앉히며 노르딕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몸은 괜찮은 건가? 노르딕 부인.”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말끔히 나았답니다. 저는 대공가의 안살림이 너무 걱정돼서 올라왔답니다. 다시 맡겨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하는 노르딕 부인의 말에 답변하지 않은 테오도르는 다이애나를 쳐다보았다.
“영애는 드레스가 화려해서 눈이 가는군.”
결코, 칭찬의 말로 한 것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테오도르 대공 각하!”
하지만 다이애나는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메이아를 쳐다보았다.
메이아는 굉장히 심플한 남색계열의 색상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약간의 펄 무늬가 들어갔지만, 자신에 비하면 수수했다. 메이아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노르딕 영애의 드레스 혹시 디자이너 클레리라 작품 아닌가요?”
메이아의 말에 다이애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입은 것은 디자이너 클레리라의 신상 드레스다. 아직 시중에 나오지 않은 걸 많은 웃돈을 주고 산 것이다.
“어떻게 아셨죠?”
“당연히 알죠. 허리선을 지그재그로 꿰매는 솜씨는 디자이너 클레리라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드레스 패턴 중 하나죠. 저도 한 번씩 그녀가 드레스를 보내 줘서 입긴 하지만 제 스타일은 아니라 경매에 내놓는답니다.”
클레리라의 신상품을 입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줘야 한다. 새로 나온 그녀의 드레스를 입기만 해도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다. 그런 그녀의 고가의 드레스를 많이 입지도 않고 경매에 내놓다니.
“타국의 공녀님이시지만 디자이너 클레리라의 드레스를 제대로 입지도 않고 경매에 넘기시다니. 사치가 심하시네요.”
메이아는 웃으며 말했다.
“사치의 뜻을 모르시고 하는 말씀인가요?”
“네?”
“누군가의 1년 치 연봉으로 겨우 한 벌 살 수 있는 드레스를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열 벌이고 백 벌을 넘게 구매하더라도 그 누구도 저에게 ‘사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이애나 영애가 저처럼 드레스를 구매한다면 그걸 보고 ‘사치’라고 하는 거죠.”
노르딕 부인은 다이애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제가 딸내미 성인식 때 사 준 드레스랍니다. 모아 두었던 돈을 다 사용했지만, 기분이 좋았답니다.”
“정말 멋진 어머니시군요. 한 푼도 안 쓰고 모은 1년 치 봉급보다 더 비싼 드레스를 사 주시다니.”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해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죠.”
“성인식 때 구매했던 드레스를 다시 입히고 인사 올 정도면 노르딕 영애를 테오도르 대공님에게 잘 보이고 싶었나 보군요.”
메이아의 말에 노르딕 부인은 흠칫했다. 속내를 꿰뚫어 보는 차가운 푸른 눈동자에는 그 어떠한 분위기나 생각을 읽어 볼 수가 없다. 무슨 말을 내뱉을지 몰라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 드레스를 입고 성인식 연회장을 돌아다녔겠네요.”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성인식 드레스를 구매한 이유는 연회 참석이니 말이다.
“아, 네. 뭐, 그렇죠. 호호.”
“테오도르 대공님에게 잘 보이고 싶었으니, 이렇게 인사하는 자리에 성인식 연회 때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오게 하신 거겠죠?”
손님이 방문했을 때에 그를 부담스럽게 하거나 너무 화려한 차림은 오히려 예의에 어긋난다. 그래서 집주인은 방문 오는 손님들이 부담 갖지 않게 하기 위해 심플하게 옷을 차려입는다.
메이아가 입은 옷도, 테오도르가 입은 옷도 고가의 옷이지만 디자인만은 심플한 이유다.
노르딕 부인은 그저 다이애나를 아름답게 꾸미고 인사하는 것만 생각했지, 예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애쉬 영식의 얼굴은 당황함이 보였다. 어느 정도 눈치 있는 남자라 그런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지은 표정일 것이다.
노르딕 부인은 안살림을 다시 못 맡을까 초조해 보이는 표정이고, 그리고 다이애나 영애의 눈에 짜증스러움이 한가득 보였다.
다이애나는 딱 보더라도 사교계 잎사귀 수준이다.
사교계에서도 꽃은 말 그대로 ‘대표’적인 인물을 뜻한다. 그리고 줄기는 사교계의 꽃과 이어지는 ‘인맥’이다. 꽃과 줄기를 꺾으면 꽃 자체가 시들어 죽지만, 잎사귀 한두 장 떼어 낸다고 꽃과 줄기가 시들진 않는다.
얼굴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보일 정도로 감정 제어가 전혀 안 되는 다이애나 얼굴에 공포나 두려움을 심어 주면 지금보다는 무척 좋은 표정을 지을 것 같다.
물론 메이아 하츠벨루아에 한해서 보기 좋은 표정이다.
메이아의 한마디로 다이애나의 비싼 새 드레스는 순식간에 한 번 입었던 중고 드레스가 되어 버렸다.
다이애나는 엄청난 짜증이 솟구쳐 올라왔지만 잘 보여야 하는 테오도르 앞에서 소리 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 같아선 메이아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채서 저택 밖으로 바깥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지금은 꾹 참아야 한다.
“공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다이애나는 새침하고 귀여운 표정을 보이며 메이아에게 말했다.
“대공 각하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이 맞습니다, 하츠벨루아 공녀님.”
다이애나는 살짝 붉어진 뺨과 촉촉해진 큰 눈동자로 테오도르만을 응시하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오도르 대공 각하, 플로렌스 대공가 좀 구경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미혼의 남성 귀족이 혼자 사는 집을 구경시켜 달라는 것은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미혼의 남성 귀족이 자신의 집에 손님으로 온 미혼의 영애에게 ‘집 안내’를 해 준다는 뜻은 ‘앞으로 당신과 살 곳이다’라는 의미다. 즉, 나 역시 호감이 간다는 뜻이다.
사용인들도 모시던 주인이 이성을 데리고 집 구경을 시켜 준다면 호감이 있는 상대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현재 다이애나는 가신 가문의 영애지만 용기 있게 집 구경을 제안했다. 간접적으로 본인의 마음을 드러냈던 것이다.
테오도르가 허락한다면 ‘당신의 호감을 허락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이애나의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메이아는 급격히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무언가를 느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기분 나쁘고 불쾌한 감정이었다.
사촌인 메릴과 대화할 때 느꼈던 짜증이나 분노와 비슷한 감정이지만, 약간 그 종류가 달랐다.
비가 오는 날 마차에서 내릴 때 물웅덩이를 살짝 밟아 구두만 더러워진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구두 안까지 진흙탕물이 스며든 더러운 그런 기분 아니, 그거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심장이 지끈거렸다.
다이애나의 말에 테오도르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돌하군, 노르딕 영애. 못 들은 거로 하겠다.”
다이애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창피함이 온몸을 두들겨 때리는 것 같았다.
“공녀님, 오늘 손님 오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곧 도착할 거예요.”
“어떤 손님일지 기대가 됩니다.”
“전에 보았던 마리엔느 부인 기억나시나요?”
“네.”
“그분하고 비슷해요.”
메이아는 익숙하게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다이애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붉어진 얼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
다이애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모로 테오도르를 유혹할 수 있다고 플로렌스 대공가의 재산을 갉아먹는 쥐들에게 아주 당당하게 말했을 거다. 쥐들은 기뻐하며 다이애나를 플로렌스 대공비로 올리기 위해 노력하겠지.
테오도르에게 인사를 한 뒤에 ‘대공님 마음에 들고 싶어요. 저택을 안내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건 웬만한 당당함으로는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만큼 거절 받아 본 적이 없으며 언제나 자신만만한 콧대 높은 영애로 살아왔겠지만 그녀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다.
테오도르는 메이아에게 사랑한다 말했다. 메이아는 그 생각만으로 그나마 나빠진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쾌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이애나는 노골적으로 몸을 비틀면서 가슴골을 보이고, 촉촉한 눈동자와 함께 애교 섞인 말로 테오도르에게 ‘집 안을 안내해 주세요’라고 부탁해서 ‘안내해 주겠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겠지만.
그에게 차갑게 거절당했으니 지금 꽤 자존심이 상했을 거다. 속상하고 울고 싶겠지.
‘그렇지만 어쩌지…….’
있다가 더 울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로 분해하면 안 되는데…….
메이아는 속에서 끓는 불쾌한 감정을 한숨에 담아 흘려보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읜 테오도르가 믿고 안살림을 맡긴 사람들이 앞에서는 충성한다고 말하고 뒤에서는 뒤통수에 칼을 꽂아 넣었다. 이런 가신들을 믿고 안살림을 맡겼던 테오도르가 너무 불쌍해졌다.